4화. 그림자 도장 (4)
처음 튜토리얼에 입장했을 때. 난 그저 눈앞이 캄캄하기만 했다. 분명 저 앞에 엘릭서를 구할 수 있는 탑으로 가는 길이 있다고 하는데, 도저히 어떻게 통과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으니까.
그냥 이대로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야 하나 싶었을 때. 녀석을 만났다.
발데비히. 미우면서도 고마웠던, 나의 첫 번째 친구.
동생이 발데비히를 보고 처음 느꼈던 인상은 ‘무섭다’였다.
그도 그럴 것이 지성체라고는 인간밖에 없는 지구에서 태어난 녀석에게, 5미터나 되는 반거인은 괴물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첫인상과 다르게, 발데비히는 A구획 앞에서 쩔쩔매는 동생에게 다가가 이것저것을 가르쳐 줬다.
동생은 발데비히와의 대화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시스템 창을 켜는 법, 그것을 다루는 법, 특성을 확인하고 적응하는 법까지.
덕분에 고유 특성이었던 만통을 재빨리 깨닫고, 발데비히와 함께 A구획을 통과하면서 마나를 터득했다.
반거인과 어수룩한 인간 콤비는 튜토리얼 내에서도 제법 유명했고, 이런 모습에 호기심을 갖고 접근한 사람이 비에라 듄이었다. 별의 마녀이자 나중에 동생의 연인이 되었던.
그렇게 3명이서 시작한 팀은 각 구획을 통과하면서 여러 우여곡절을 겪었고, 그때마다 다른 팀이나 플레이어들과 손을 잡으면서 겨우겨우 튜토리얼을 마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생긴 여러 인연은 결국 팀 아르티야가 만들어지는 기반이 되었다.
9명 인원의 소수 정예 팀.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을 팀이었지만, 후에 그들이 8대 클랜의 아성까지 위협할 거대 클랜으로 거듭날 것이라 생각한 사람은 당시만 해도 아무도 없었다.
오로지 솔로 플레이로 7개 구획을 모두 통과했던 연우와는 많이 달랐던 셈이다.
그렇듯.
발데비히는 비에라 듄과 함께 동생에게 여러모로 애틋할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거기다 더 이상한 점은 등을 지고 난 뒤, 발데비히는 완전히 종적을 감췄다는 점이었다.
다른 멤버들은 저마다 각자 살 길을 찾아 떠나거나, 아니면 다른 거대 클랜에 큰 자리를 꿰차고 앉았었다. 하지만 발데비히는 오로지 홀로 지내면서 우연히 목격 되기만 할 뿐, 그 외에 대외적인 활동은 전혀 하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녀석이 아르티야가 무너지는 데 가장 먼저 방아쇠를 당긴 놈이라는 것.
그러니 자세한 사정은 알지 못하더라도, 직접 동생의 등에다 칼을 꽂았던 바할이나 리언트까지는 아니더라도, 연우에게는 이 녀석도 별 다를 게 없는 녀석이었다.
[00:00:00_02]
[00:00:00_01]
[대기 시간이 종료되었습니다. 1번 관문, 첫 번째 구획의 시련이 시작됩니다.]
보이지 않던 장벽이 사라졌다.
발데비히의 환영이 바스타드 소드를 들면서 우렁찬 포효를 내질렀다.
쿠와아아!
「나왔네. 저 미친 함성. 저거 들을 때마다 짜증 나 죽겠더라니까.」
샤논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워 크라이〉. 발데비히가 가진 고유 스킬로,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터뜨리는 함성인데, 적의 기세를 죽이는 데 효과가 좋았다. 원래는 거인족의 종족 스킬인 ‘요툰하임의 함성’에서 기인한 힘.
하지만 냉혈 특성을 갖고 있는 연우에게는 별 효과가 없었다.
녀석도 그 점을 느꼈는지, 곧바로 붉은 투기를 줄줄 흘리면서 지면을 박찼다. 〈광폭화〉. ‘버서커’라는 단어로도 유명한 스킬이었다. 스스로 혼란과 착란 상태에 빠지는 대신에, 민첩과 공격력을 300%-500% 이상으로 끌어올리는 효과가 있었다.
가뜩이나 반거인이 가진 무지막지한 용력에 광폭화의 효과까지 더해지니. 전쟁터에서 녀석과 직접 칼을 맞댈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시피 했었다.
검야차라는 별칭이 붙은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야차는 지옥에서 산다는 괴물. 그런 녀석이 검을 들었다는 뜻이었다. 워 크라이와 광폭화를 이용한 전투는 발데비히를 상징하는 트레이드 마크이자, 적들에게는 피해를 양산하는 상당한 골칫거리였다.
샤논과 한령이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쉰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아르티야와 부딪친 적이 있던 한령으로서는 발데비히와의 격전에서 피해를 입기도 했었고, 샤논은 녀석에게 수하들을 여럿 잃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마법 무장.’
화아아-
하지만 연우는 그런 녀석을 앞에 두고도 긴장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여태 크라슈나의 단검만 들었던 것과 다르게 다른 손에 마장대검도 같이 빼 들었다는 것.
쾅!
연우는 불의 날개를 한껏 펼치면서 녀석에게 쇄도했다. 그리고 거칠게 날린 일격은 지반이 내려 앉는 충격파와 함께, 발데비히를 반대편으로 날려 버렸다.
* * *
연우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여태껏 되도록 마법 무장은 쓰지 않았지만, 한 번 개방한 뒤부터는 줄곧 마력회로를 돌리면서 각 구획을 격파해 나갔다.
두 번째 구획에는 블랙 스컬이라는 충술사(蟲術士)가 나타났지만, 성화를 크게 태워 쉽게 격퇴할 수 있었다. 세 번째 구획에는 8대 클랜, ‘나인 테일’의 첫 번째 꼬리가 나타났고, 네 번째 구획에는 마군의 두 번째 주교인 킨드레드가 가면 쓴 모습으로 나타났었다.
하나같이 현재 이름을 날리고 있고, 한때 탑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자들이 거기에 다 모여 있었다.
1번 관문은 시간을 빨리 끊는 게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한 번을 싸우더라도 전력을 다해서. 그리고 되도록 환영이 가진 모든 것을 엿보고자 했다.
그리고 스물한 번째 구획에 도착했을 때, 검무신의 환영을 만났다.
아직 이기어검을 부리기 전이었던 그는 매서운 검술을 가지고 있었다. 연우의 눈에도 낯이 익은 검술. 팔극권이었다.
다만, 기초 뼈대만 같을 뿐. 연우가 다루는 팔극권과는 여러모로 모양새가 많이 달랐다.
조금 더 정형화되고, 깊이가 있었다. 연우가 모르는 변칙 초식도 섞여 있어 상대하기가 아주 까다로웠다.
「비록 같은 스승으로부터 파생 되었다고는 하지만, 주인님의 검술과 검무신의 검술을 동등선상에 봐서는 안 될 것입니다. 냉정하게 말씀드려서, 검술 면에서는 저때의 검무신은 이미 달인을 넘어 명인 급에 다다라 있었습니다.」
도무신은 냉정하게 연우와 검무신의 차이를 설명했다.
여러 기예를 한꺼번에 다루는 연우와 다르게, 검무신에게는 아주 오래전부터 오로지 검 한 자루밖에 없었다.
당연히 검에 투자한 시간이 다를 수밖에 없었고, 이해도도 검무신이 훨씬 깊었다. 그리고 이미 저때 검무신은 팔극권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삼아, 입맛대로 뜯어고치기까지 했다.
연우도 ‘팔극검’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지만, 그래도 여전히 팔극권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검무신은 그것을 넘어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던 것이다.
「어쩌면 무도에서도, ‘검’이라는 아주 협소한 부분에만 국한시킨다면, 무왕도 검무신을 이기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도무신은 검무신을 가리켜 이렇게 말했다.
불세출의 기재.
무왕이 그를 제자로 받아들인 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라고.
그리고 나아가 검무신이 사라진 통천교주의 비전을 전부 습득할 수 있었던 것도, 사선검을 멋대로 다룰 수 있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렇기에 주인께서 배울 점도 많을 거라 생각합니다.」
도무신의 말대로 검무신이 개척한 길은 연우에게도 많은 영감을 가져다줬다.
특히 8대 비기를 5개까지만 익히고, 나머지 3개는 아직 가닥도 잡을 수 없는 지금. 그 3개도 함께 열 수 있는 단초가 조금씩 보이는 것 같았다.
그래서 검무신과의 대결에서는 조금 시간을 길게 잡았다. 그가 개척한 길을 조금이라도 더 엿보기 위해서.
하지만 그래도.
당연히 승리는 연우의 것이었다.
콰직!
마장대검의 칼날이 검무신의 목덜미에 틀어박혔다. 그대로 검을 돌리자 환영의 머리통이 허공으로 튀었다.
[스물한 번째 구획의 시련이 종료되었습니다.]
[다음 구획으로 이동합니다.]
* * *
연우가 달리는 만큼, 외부에서는 한창 난리가 난 상태였다.
“미, 미쳤어.”
[21층 랭킹]
1위. 비바스바트
2위. 나유
……
8위. 비공개
“부, 분명히 아까 전에 15위 아녔어?”
“그런데 벌써 8위라고? 미친……!”
‘비공개’가 연우를 뜻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의 관심사는 100위권에서 갑자기 나타났던 연우의 순위가 어디까지 올라가느냐는 것이었다.
그런데 오늘 하루. 연우의 순위는 미친 듯이 계속 위로 올라가는 중이었다.
불과 하루였다. 하루. 아니, 정확하게 따진다면 한 나절을 조금 넘을 뿐인 시간.
남들은 며칠, 혹은 몇 달, 길게는 몇 년까지 투자해서 관문을 공략하는 데 비해, 연우는 5번 관문에서부터 시작해서 쉬지 않고 1번 관문까지 쭉 일로직진을 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이러한 업적은 시스템이 그만큼 높은 공적치로 평가하기 때문에, 연우에게 매겨진 공적치도 계속 가산점이 붙는 중이었다.
“이러다 정말 21층의 랭킹까지 1위하는 거 아냐?”
“그럴 리가…….”
누군가가 던진 질문에, 플레이어들은 ‘그래도 설마?’하는 표정을 지었다.
다른 층계의 명예의 전당과 다르게 21층의 명예의 전당은 조금 의미가 남달랐다.
1위에 기록된 비바스바트. 그 이름은 모든 하이 랭커와 거대 클랜의 영원한 장벽으로 군림하고 있는 올포원의 이름이었으니까.
2위에 기록된 무왕조차도 결국 1위의 벽을 넘지 못한 상황에서. 만약 연우가 그것을 넘어 버린다면? 여태껏 저층 구간이라며 애써 무시했던 다른 랭커들이며 클랜들도 다시 연우를 집중해 볼 수밖에 없었다.
올포원이라는 장벽을 넘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인물이 생긴다는 뜻이었으니.
그래서 플레이어들은 아무리 독식자라고 해도 거기까지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안한 눈빛을 뗬다. 여태껏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질렀던 독식자니, 이번에도 뭔가 일을 저지르는 게 아닐까 하고.
“하이디. 너는 어떻게 생각해?”
델란도 같은 생각이었기에, 하이디를 돌아보았다.
“글쎄.”
하이디는 입술을 삐죽 내밀면서 투덜거렸다.
“그걸 알면 내가 점집 차렸지, 이런 거 하고 있겠냐?”
하지만 요정안을 열고 있는 하이디의 두 눈은 깊게 가라앉아 긴장을 놓지 않았다.
* * *
스물네 번째 구획에서 만난 환영은 연우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일기장에서도 볼 수 없었던 얼굴.
과거 인물은 확실히 아니었다.
‘그새 새로운 실력자가 나타났었나?’
비교적 최근에 명예의 전당을 갈아 치울 정도의 실력자라면, 연우로서도 외워 둘 필요가 있었다. 언제 어떻게 만나게 될지 몰랐다.
호리호리한 체구에 얼굴을 긴 머리로 가리고 있어 전체적으로 유약한 인상이 강했다. 얼굴선도 고와서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 짓기 어려울 정도였다.
하지만 녀석이 검을 쥐었을 때. 연우는 보이지 않는 압박감을 느꼈다. 부드러운 칼집 속에 숨겨진 칼날처럼, 예리한 기세가 느껴졌던 것이다.
더구나 풍기는 기세는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었다.
‘스승님?’
아니, 정확하게는 무왕과 검무신의 중간이었다. 팔극권의 냄새가 진하게 풍겼지만, 그것을 조금씩 벗어나고 있는 걸로 보였다.
그 순간, 연우는 예전에 무왕이 흘러가듯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네가 세 번째 제자라고 했던 말. 첫 번째는 검무신이었고, 두 번째는 너무 짧은 인연이라 이름을 말해 줘도 모를 거라고 했었다.
그때 말했던 두 번째 제자가 이 사람이 아닐까?
연우는 상대의 이름을 다시 확인했다.
11위. 녹턴
‘녹턴이라.’
원래 10위였지만, 자신이 8위가 되면서 순위가 밀린 것 같았다. 그런데 검무신보다도 더 위에 있는 걸 보면, 기재라던 그보다도 훨씬 재능이 깊은 걸까.
연우는 난생처음 본 사형제에게 8대 비기, 파공을 뿌리는 것으로 싸움을 시작했다.
* * *
스물여덟 번째 구획은 오래전에 죽었다고 알려진, 엘로힘의 옛 수장 하야테였다.
토르라는 신의 사도로서, 갖가지 벼락을 뿌려 대는 것을 장기로 삼아 당시에 최강자로 군림했었다고 들었다.
불벼락이라는 비슷한 스킬을 가진 연우로서는 여러모로 배울 점이 많은 자였다.
수십 개의 벼락이 응집되어 떨어지는 장관 아래에서, 연우는 이대로는 위험하겠다는 생각에 처음으로 용혈 각성을 시도했다.
촤륵, 촤르륵-
용의 비늘이 잔뜩 피부 위로 솟아오르면서 불벼락이 위로 튀어 올랐다.
* * *
콰아앙-
“하아, 하아…… 아무리 용종이라지만, 이건 좀 너무한데.”
연우는 용마안을 연 두 눈을 가늘게 좁혔다. 남색 비늘이 크게 부풀었다가 가라앉길 반복했다.
촤륵, 촤르륵.
그리고 거기에 반응하듯, 저 먼 곳에 앉은 존재는 자신의 비늘과 살갗을 함께 가르고 간 상처를 보고 인상을 크게 찌푸렸다.
10미터에 달하는 크기. 포악한 눈매와 날개, 그리고 꼬리가 위압적으로 흔들렸다.
여름여왕의 환영은 감히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 적에게 잔뜩 분노를 토했다.
크와앙!
비록 청화도와의 전쟁에서 봤던 여름여왕에 비교하면 크기도 작고, 품고 있는 힘은 훨씬 적었지만. 그래도 녀석이 내뿜는 드래곤 피어는 냉혈 특성을 갖고 있는 연우의 살갖도 오소소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아무리 환영에 불과하다고 해도, 당시의 여름여왕이 가진 데이터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보니 성격은 그대로일 수밖에 없었다.
만물을 아래로 내려다보는 오만한 눈빛. 용종만이 가질 수 있는 눈이었다.
여름여왕은 입에 불길을 잔뜩 머금으면서 브레스를 내뿜었다.
화아악-
연우는 크라슈나의 단검과 마장대검을 인트레니안에 밀어 넣고, 비그리드와 아이기스를 뽑았다.
이젠 정말로 가진 능력이며 장비를 총동원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 자신의 목숨이 위험했다.
무엇보다.
‘이 뒤에…… 녀석이 있어.’
5위인 여름여왕의 다음 차례는 4위의 차정우.
당연히 더 악착같이 힘을 낼 수밖에 없었다. 비록 단순한 환영이라고 해도, 동생이 탑을 한창 오를 때의 모습이다.
일기장이 아닌, 직접 자신의 눈으로 그 모습을 보고 싶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하지만 한편으로는 최대한 늦게 보고 싶다는 모순된 마음도 함께 부딪쳤다.
촤아악-
* * *
[서른 번째 구획의 시련이 시작됩니다.]
[곧 4위 ‘차정우’와의 싸움이 시작됩니다. 대기 시간 동안 전투를 준비하세요.]
[도전자의 상태를 고려하여 조금 더 긴 대기 시간이 주어집니다.]
[00:30:0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