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그림자 도장 (5)
넓은 분지를 따라, 보이지 않는 벽 너머로 아지랑이가 피어났다. 아지랑이는 한데 뭉치면서 서서히 사람의 형상을 갖췄다.
그리고 드러나는 모습에, 연우는 입을 꾹 다물었다.
사진으로만 봤던 동생의 모습이 그곳에 있었다. 밝은 표정을 짓고 있어 누구나 호감을 가질 인상이었고, 몸에 두른 푸른 갑주에서는 영험한 기운이 풍겼다.
비록 사고를 지니지는 않지만, 금방이라도 ‘형’이라고 부를 것 같았다.
『……주인.』
“알아. 걱정 마.”
그리고 그런 연우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네메시스가 가만히 그를 불렀다.
너무 감정적으로 동요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연우는 마른침을 삼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든 머리를 비우고자 했다.
하지만 쉽지는 않았다.
[‘냉혈’ 특성이 알 수 없는 이유로 불발됩니다.]
[‘냉혈’ 특성이 알 수 없는 이유로 불발됩니다.]
몇 년 만에 본 얼굴이었다.
그토록 찾고자 애썼지만 결코 찾을 수 없었던 얼굴. 자신과 똑같은 얼굴이지만, 다른 인상을 주는 저 얼굴이 무척이나 보고 싶었다. 어머니도, 자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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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7:59_82]
그리고 저 얼굴이 단순한 모방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만 눈길이 가는 이유는. 아마도 애틋함과 미안함 때문일 것이다.
그동안 자신은 동생이 어디론가 도망쳤다고만 생각했었고, 그 사실을 원망하기만 했다.
한국을 등질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더 이상 한국에 남은 미련이 없었다. 아버지는 기억도 남지 않은 아주 어린 시절에 돌아가셨다. 친척들은 가난한 그들 가족과 연을 끊은 지 오래였다.
그런 모든 것들이 싫었다.
그런 흔적들이 싫어서. 그런 기억들이 자꾸만 발을 붙잡는 것 같아서. 그래서 잊고자 했고, 버리자는 생각에 한국을 떠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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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거기서 미친 듯이 살았다.
사실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연우가 한국을 떠난 이유는 단순히 한국을 버리고 싶어서가 아닐지도 몰랐다.
어쩌면 아무것도 남지 않은 자신의 처지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서, 죽을 자리를 찾아 떠난 건지도 몰랐다.
그래서 미친 듯이 뛰어다녔다. 살겠다는 의지는 없었다. 그저 임무가 있으면 제 목숨이 없는 것처럼 미쳐 날뛰었고,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가장 먼저 적진에 뛰어들었다. 위험한 일이 있으면 늘 혼자서 자처했다.
그러다 보니 정신을 차렸을 때쯤에는 ‘미친개’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한 번 물면 절대 놓치지 않는다고 해서 붙은 별명이었다. 그리고 자조적인 표현이어도 아군에게는 큰 힘이었고, 적군에게는 학을 떼게 만드는 이름이었다.
그리고 더 시간이 지났을 때에는 카인이라는 코드 네임이 더 유명해져, 다른 여기저기서 찾기도 했다.
그럴 때면 상부에서는 좋아하고, 유일하게 그를 지켜 줬던 부대장만이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봤지만.
그런 건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렇게라도 움직여야 자신이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포상이랍시고 휴가를 줘 봤자, 방 안에 틀어박혀 혼자만의 세상에 갇힐 뿐이었다.
죽기 위해서 간 곳에서 죽기는 커녕 괴물 소리나 듣고. 참 어이가 없는 짓이긴 했다.
하지만 어디선가 총구가 자신을 겨눌 때면, 늘 어머니께서 눈을 감으시기 전에 남기셨던 마지막 목소리가 떠올라, 차마 그대로 죽을 수가 없었다. 결국 유언이 부적처럼 따라다니며 그를 지켰다.
-네 동생이 돌아올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켜 주렴.
한국을 떠나면서 가족들이 살던 집을 계속 놔뒀던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바람과 달리 못난 녀석은 저곳에만 저렇게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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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우는 손으로 천천히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리고 길게 숨을 고르면서 천천히 가면을 벗었다. 환영과 똑같되, 다른 인상을 주는 얼굴이 나타났다.
마치 거울을 보듯이. 두 개의 같은 얼굴이 서로를 마주 봤다.
“…….”
“…….”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환영은 원래 말을 할 줄 몰랐고, 연우는 가만히 환영을 지켜봤다. 조금이라도 더 세세하게 녀석을 머릿속에 담고 싶어서. 이럴 때는 기억력이 뛰어나다는 사실이 너무나 감사했다.
[00:05:55 10]
지금 이 순간에는 다른 사람들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늘 시끄럽게 떠들던 샤논도, 이따금 조언을 던져 주던 한령도, 연우를 관찰하던 레베카도, 네메시스도, 니케도, 부, 괴이 집단 모두가 연우의 마음을 읽고, 그가 마음 정리를 끝낼 수 있도록 도왔다.
그러면서도 새롭게 안 사실에 샤논, 한령, 레베카는 속으로 적잖게 놀라는 중이기도 했다.
그동안 연우는 샤논과 한령에게도 자신의 사연에 대해서 설명해 주지 않았었다.
그래도 간간이 연우가 가면을 벗은 모습을 봤기에, 그리고 연우의 표층 의식을 공유하고 있기에, 대강이나마 사연을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차정우와 직접 비교하게 되니 다시 한 번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헤븐윙. 한때 탑을 떠들썩하게 만들었고, 돌풍을 일으켰던 남자가 다시 되돌아온 것으로만 보였으니까. 어떻게 형제가 이렇게 나란히 서로 다른 길을 걸으면서, 뛰어난 성장을 이룰 수 있는 건지 놀랍기만 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가슴이 미어지기도 했다.
동생의 발자취를 따라 탑에 오르는 형의 모습은. 그들에게도 안타깝게 다가왔다.
레베카는 입을 꾹 다물면서 애틋한 시선으로 연우를 바라봤다.
[00:02:47_35]
연우는 대기 시간으로 주어진 30분이 너무 짧다고 생각했다.
그저 여기에 앉아, 이렇게 가만히 녀석을 지켜보고 싶은데. 단순한 환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연우는 동생의 모습에 자꾸 눈길이 갔다.
사고 가속을 돕는 시차 괴리는 일부러 쓰지 않았다. 지금은 세상을 유리시키기보다는, 그저 주어진 대로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시선을 거둬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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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자꾸 흘러가고, 자신을 따르는 녀석들도 그가 다시 상념에서 깨어나기만을 바라고 있었으니까.
그러다 연우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엉덩이에 묻은 먼지를 가볍게 털고 인트레니안에서 비그리드를 뽑았다.
『생각은? 좀 정리되었나?』
그때, 다른 이들과는 다른 이유로 침묵을 지키던 네메시스가 말을 걸어왔다.
“어. 조금은.”
[‘냉혈’특성으로 이성을 유지하는데 성공했습니다.]
[‘혼란’ 상태에서 벗어납니다.]
특성이 적용되면서 복잡했던 머릿속이 맑아졌다. 피로도 같이 날아간 것처럼 개운했다.
“너도 마음이 심란할 텐데. 미안하다.”
『그래도 주인만 할까.』
네메시스는 괜찮다는 식으로 둘러댔지만, 그래도 연결 고리를 통해 전해지는 사념은 그렇지 못했다. 녀석도 감정적 동요가 심했다. 다만, 겉으로 표현만 하지 않을 뿐.
『그나저나 정말이지 똑같군. 하! 21층을 설계한 신이 누군지는 몰라도 참 악취미야. 아무리 봐도.』
“동감이야.”
『거기다 당시에 갖고 있던 데이터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 같고. 말하는 것까지 적용했으면…….』
“짜증 났겠지.”
시간이 30초가량 남았을 무렵. 연우는 시차 괴리를 사용해 사고 가속을 일으켰다. 각 구획을 통과하면서 잦은 사용으로 숙련도가 대폭 올라 이제 시간 배율은 자신도 감이 잡히질 않을 정도였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남은 시간 동안 전략을 짜기엔 충분하다는 것.
네메시스도 그런 시간 배율로 들어와 의견을 내놓았다.
『우선 말해 주자면. 전 주인…… 정우의 특기는 항마력에 있다.』
연우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동생은 11층에서 환룡을 통해 고룡 칼라투스와 계약을 맺은 뒤, 언제나 용의 가호를 받으면서 성장을 해 왔다.
이리저리 굴러다니면서 용체 각성을 겨우겨우 마쳤던 연우와 다르게, 체계적인 발전 방향을 잡은 칼라투스의 인도에 따라 수련을 거듭하면서 빠른 성장이 가능했다.
튜토리얼에서 이미 마나를 자유롭게 다루는 뛰어난 재능과 만통이라는 사기적인 특성이 있어서이기도 했다.
그 덕분에, 동생은 마력을 다루는 데에 있어서는 남들과 비교도 할 수 없는 수준까지 이르게 되었다.
마나를 인위적으로 비틀어서 몸 주변에다 두르고, 여기다 용의 가호를 덧대며, 나아가서는 만통을 역으로 작용시켜 모든 마력을 일절 차단시키는 ‘불통(不通)’이라는 스킬까지 만들어서 사용했다.
이렇다 보니, 마력이 중점을 이루는 마법 및 주술 계통의 스킬들은 죄다 동생에게 다가오기도 전에 위력이 현저히 약화되는 참사를 일으키고 말았다.
여기다 환룡의 힘까지 더해졌을 때에는…… 적으로 만나는 마법사 및 주술사들은 모두 그를 피해 다녀야 할 지경이었다. 심지어 신관들까지도. 마법 학살자라는 칭호가 괜히 붙은 게 아니었다.
‘웃긴 건, 그런 주제에 본인은 그런 제약을 전혀 받지 않았다는 점이었지.’
외부에서의 유입만 불통으로 차단시킬 뿐, 내부에서의 방출은 만통을 적용시켰던 것이다.
동생은 21층에 들어섰을 때에 이미 다양한 분야에 걸쳐 두루두루 재능을 꽃피운 상태였다.
마법은 하이 랭커부터 가능하다던 트리플 캐스팅이 가능했고, 주술에 대한 이해도도 깊었다. 정령술, 강령, 흑마, 소환, 연금, 원소, 신성…… 이 외에 자체적인 마법 무장을 통한 육체적인 능력도 뛰어난 편이었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마나의 축복을 받은 용의 가호가 더해지니 마력의 효율과 능률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광역, 불특정 다수, 일대일 교전 등등, 다양한 전술과 전략도 가능했다.
동생이 가깝게 다가가지 못한 건, 오러뿐.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술에서 완전히 동떨어진 것도 아니었다. 타고난 전사였던 발데비히가 제 몸을 지키는 정도는 되어야 한다면서 이리저리 굴린 덕분에, 간단한 체술 정도는 익힐 수 있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간단한 체술이란 건, 타고난 전사 종족인 거인족의 체술이었다. 외뿔부족의 무공에는 미치지 못하더라도, 웬만한 무도가들을 찜 쪄 먹을 정도는 되었다.
결국 마법이면 마법, 가호면 가호, 체술이면 체술. 재능이면 재 능까지. 다양한 분야에 능통하니, 비슷한 층계에 있는 누구도 그를 넘볼 수가 없었다. 심지어 랭커들 조차 그를 피해 다닐 정도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골치 아픈 점은.
‘하늘 날개. 저게 문제지.’
헤븐윙이라는 별칭을 얻게 했던 유니크 스킬이 골칫거리였다.
동생이 용종의 권능과 가호를 바탕으로, 그리고 자신이 터득한 갖가지 지식과 특성을 복잡하게 버무리면서 직접 ‘창안’한 스킬은 대표적인 사기 스킬이라고 불릴 만한 것이었다.
하늘 날개는 발동되는 동안 고룡 칼라투스와의 링크를 강화시켜 그의 능력을 일부 갖고 올 수 있었다.
마력 강화를 비롯해 신체적 능력도 대폭 향상되어서 갖가지 마법적 효과를 누릴 수가 있었다.
또한, 물리적인 행동도 가능해서 자유로운 비행이 가능했고, 내구도도 뛰어나서 여차하면 몸에다 둘러 방패 대용으로 쓰는 등, 다양한 용도로의 사용이 가능했다.
연우가 천익기공을 사용해서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는 불의 날개도, 사실 하늘 날개에서 모티브를 따왔던 것이었다.
하지만 불의 날개는 한계가 명확한 데 비해, 하늘 날개는 동생이 가진 특성과 권능, 스킬들을 모두 하나로 엮는 완전한 스킬로 자리 잡으면서 시스템으로부터 인정을 받기까지 했다.
부여된 넘버링도 002.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다.
이러니 동생을 두고 모두가 천재라고 할 수밖에.
어쩌면 남들은 수십 년을 들여서도 오르지 못한 경지를 단 몇 년 만에 올라, 아홉 왕의 아성을 위협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재능 때문인지 몰랐다.
그리고 21층은 그런 재능이 제대로 꽃을 피우기 시작한 시기였다.
최후의 용, 여름여왕마저도 순위가 한 단계 밀려날 정도였으니.
『그리고. 용체 각성은…….』
“2단계까지 가능하지.”
『맞다.』
연우는 아직 1단계 드래고닉 블러드를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지만, 동생은 이미 2단계인 프레셔를 넘어 3단계를 바라보던 중이었다.
3단계를 완전히 이룬 건 22층이었으니, 아마 여기서 적용된 건 2단계까지일 것이다.
하지만 다행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것도 완숙한 경지일 테니까.
『자신, 있나?』
네메시스는 걱정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만약 힘들다면 자신들의 도움을 받아도 된다는 뉘앙스가 담겨 있었다.
어쨌건 신수와 괴이, 정령까지 전부 따지고 보면 연우가 가진 전력.
당연히 동원을 해도 전혀 문제가 없었다.
게다가 연우는 큰 휴식 없이 계속 전투만 연속적으로 벌여 정신적으로 상당히 피곤한 상태였다.
하지만.
“한 가지 가르쳐 줄까?”
피식 웃으면서 연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가면은 쓰지 않았다. 어차피 보는 눈도 없으니, 이번만큼은 자신의 얼굴 그대로 동생과 겨뤄 보고 싶었다.
『뭔가?』
“난 말이야.”
인트레니안이 열리면서 7개의 아이기스가 올라와 주변을 맴돌고, 가슴팍에서부터 용의 비늘이 잔뜩 올라와 상반신을 뒤덮었다.
영역 선포.
1단계 권능이 열리면서 몸에 막대한 힘이 실렸다.
“동생한테 진 적이 없어.”
그리고 그 말을 끝으로, 시차 괴리를 거뒀다. 카운터가 빠르게 하락했다.
[00:00:00_01]
[00:00:00]
[대기 시간이 종료되었습니다. 서른 번째 구획의 시련을 시작합니다.]
그때, 보이지 않는 장벽이 사라졌다.
콰아아-
그 순간, 동생의 환영이 용체 각성을 시도하면서 하늘 날개를 활짝 펼쳤다. 마치 천사가 강림한 듯, 새하얀 날개가 달리면서 엄청난 마력 폭풍이 사방으로 뻗쳐 나갔다.
그리고 그것은 엄청난 해일이 되어 스테이지의 하늘을 가득 물들였다.
드래고닉 프레셔.
달리, 용살기(龍殺氣)라고도 불리는 힘이 연우를 속박하기 위해서 공간을 차츰 메우면서 다가왔다. 20층의 오행산이 주는 제약과도 비슷해 보였다.
연우는 그런 마력 폭풍을 보면서 시니컬하게 중얼거렸다.
“그런데 이번에 지면 쪽팔리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