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그림자 도장 (6)
네메시스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었던지, 잠시 말이 없다가 곧 크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푸핫! 그것도 맞는 말이긴 하겠군! 비록 형제가 없는 나로서는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츠츠츠.
연우의 뒤편으로 공간이 일렁이면서 네메시스가 거대한 몸집을 드러냈다.
『그래도 어느 정도 짐작이 가. 저놈에게 지고 싶지 않는 내 마음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은데?』
네메시스는 어느새 동생의 환영 위로 떠오른 환수를 노려보고 있었다.
황금색에 가까운 주황색 몸집과 길쭉한 몸. 네메시스의 전생, 환룡 미리내가 이쪽을 노려보는 중이었다.
환영이 가진 모든 비밀이 드러나는 스테이지이다 보니, 동생이 거닐고 있던 환수까지 나타난 것이다.
눈이 마주친 네메시스와 미리내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눈길을 살짝 찌푸리더니, 곧 허공으로 녹아들며 하늘에서 강하게 충돌했다.
그리고 그 아래.
연우와 동생의 환영도 충돌했다.
쾅!
그것은 용종의 권역과 권역이 부딪치는 것과 같았다. 일정한 영역에 걸쳐 막대한 권능을 발휘하는 종족이 용종이었고, 그런 용종들이 부딪치는 건 자신의 영역이 상대의 영역을 침범하고 찬탈하는 과정이었다.
마치 일정한 영역을 두고 맹수들끼리 서열 싸움을 하는 것처럼. 현인의 종족이라는 용종도 그런 면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용종에게 ‘영역’이라는 것은 아주 중요한 개념이었다.
법칙을 제 입맛대로 바꿀 수 있는 권한 범위. 이치를 탐구하는 용종에게 있어 그런 범위는 소중할 수밖에 없었고, 영역을 지키고 확장시키려 하는 욕망은 아예 종족의 본능으로 남아 있을 정도였다.
다만, 그렇기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용종의 영역 싸움은 더 큰 물리적인 충돌로 빚어졌다.
영역은 절대 겹쳐지지 않는다. 권능과 권능도 겹치지 않는다. 그렇다 보니 결국 서열을 가릴 수 있는 방법은 육체적인 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연우와 동생의 환영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이미 용종의 후예라 할 수 있는 몸이었고, 당연히 서로가 선포한 영역이 충돌하면서 물리적인 충돌로 번져 나갔다.
하지만 환영이 가진 권능의 단계가 훨씬 높기 때문에, 연우는 움직이는 데 있어 알게 모르게 큰 제약을 받고 있었다.
드래고닉 프레셔는 드래곤 피어와 비슷하면서도, 개념이 조금 달랐다.
두 개 전부, 용종이 가진 기운으로 주변에 있는 존재들을 압도적으로 찍어 누른다는 점에서는 같았다.
하지만 드래곤 피어는 단순히 영혼이 가진 존재감을 은연중에 발산하는 행동에 불과했다.
초월종이 가진 영압을 이용해, 상대와의 격차를 확인시키고, 서열을 각인시키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반면에 드래고닉 프레셔는 주변 영역을 용종의 색으로 물들이는 과정이었다.
맹수가 영역 다툼으로 빼앗은 영역을 자신의 분비물로 채워 선임자의 흔적을 지우듯이, 드래고닉 프레셔는 권역을 더 공고히 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의념이 투영되고, 권능이 강화된다. 법칙이 용종을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연우가 20층에서 깨달았던 의념이 구체화되는 단계라고도 할 수 있었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용종이 가진 의념이니 만큼 일반 플레이어들이 보일 수 있는 힘과는 엄청난 격차가 있다는 것이지만.
애초 가진 영혼의 격이 달라, 영압에서 큰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연우는 환영과 검을 부딪치는 순간, 거센 압박감을 느껴야만 했다.
마치 바늘로 피부를 쿡쿡 쑤셔 대는 듯한 통증. 서열이 더 높은 용이 위압감만으로 서열 낮은 용을 주눅 들게 만들 듯, 드래고닉 프레셔는 아직까지 자기 영역밖에 구축하지 못한 어린 용체를 짓누르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잠시간 스턴 상태에 빠집니다.]
[‘냉혈’ 특성으로 이성을 유지합니다.]
[스턴 상태가 해지되었습니다. ‘용의 영압’에 대한 내성이 생겼습니다.]
[‘용체’ 특성도 함께 작용되어, ‘용의 영압’에 대한 면역력이 생성되었습니다.]
동생에게 만통이라는 사기적인 특성이 있었듯이, 연우에게도 정신적 면역력에 있어서는 최강이라고 해도 될 냉혈이 있었다.
드래고닉 프레셔의 압박을 견뎌 낸 연우의 기세가 사방으로 뻗쳐 나갔다.
이때를 기회라 여긴 갖가지 옵션이 중첩되었다.
[검의 정화]
[여신의 창칼]
비그리드의 옵션으로 환영을 적수로 지정, 녀석이 가진 힘에 비례해 막대한 투기가 발생했다. 여기에 아이기스의 옵션까지 더해져 투기는 몇 배로 불어났다.
드래고닉 프레셔와 비교해도 절대 뒤지지 않을 힘이, 환영의 힘을 단번에 튕겨 냈다.
뒤처지는 권능의 단계를, 아티팩트의 옵션으로 메운 것이다.
콰앙-
환영이 큰 충격파에 뒤로 크게 주르륵 밀려났다. 인스턴트 던전을 이루던 드넓은 분지를 절반 이상이나 가로지를 만큼.
연우는 지면을 박차며 녀석을 뒤쫓았다. 오러와 성화, 흑기를 뒤섞은 검붉은 기운이 비그리드를 따라 길쭉하게 솟았다가, 환영의 가슴팍으로 날아들었다.
환영은 재빨리 하늘 날개를 퍼 덕이면서 가까스로 균형을 바로 잡았다. 그리고 자세를 낮춰 한 손으로 지면을 찍고, 하늘 날개는 높게 쫙 펼쳤다. 크기가 2미터는 되는 것 같았다.
마치 적을 만난 고양잇과 짐승이 최대한 몸을 부풀리듯, 환영의 투기도 좀 더 날카로워졌다.
녀석 앞으로 서너 개의 마법진이 동시에 떠오르고, 화려한 이펙트와 함께 갖가지 마법이 난사되었다.
〈무차별 난사〉. 동생이 생전에 자랑하던 스킬이었다. 용의 지식에 기대어, 미리 메모라이즈해 둔 마법들을 연달아 발동시킨다.
여기서 생기는 계산 착오나 상성 충돌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용의 권능이 닿는 권역 내에서는 대부분의 법칙이 용종을 중심으로, 그에게 유리하게 작동하도록 되어 있었으니까.
그리고 저기에 노출되면, 갑작스러운 갖가지 마법 때문에 미처 제대로 응대하지 못하고 큰 부상을 입는 경우가 많았다. 서로 다른 마법 하나하나에 대처하기엔, 동생의 캐스팅 속도가 훨씬 빨랐으니까.
다행히 연우에게는 헤노바가 준 마장이 있었고, 아이기스도 있었다. 응집된 힘을 폭사시켜 마법을 전부 정면에서 부수는 방법도 있었다.
하지만 연우는 방어를 시도하지 않았다. 대신에 뼈에 새겨 놨던 블링크를 발동시켰다.
스륵-
연우가 사라진 자리로 무차별 난사가 허망하게 스쳐 지나갔다. 콰콰쾅. 귀가 멀 것 같은 갖가지 폭음과 함께 뒤쪽으로 깊은 크레이터가 파이고, 모래 기둥이 치솟았다.
환영은 몸을 재빨리 뒤쪽으로 돌려야만 했다. 어느새 연우가 등 뒤에서 나타나며 비그리드로 그의 목을 찌르고 있었다.
쾅!
환영은 가까스로 기습을 막아 내고 뒷걸음질을 쳤다. 녀석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하늘 날개를 둘러서 겨우 막아 내고, 검으로 쳐 내긴 했지만. 팔이 떨어질 것처럼 아팠다.
새하얗던 하늘 날개도 절반가량이 부서지고 까맣게 그을렸다. 마력이 흘러 들어가면서 다시 수복 되긴 했지만, 그래도 이런 말도 안 되는 위력일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연우는 헤이스트를 중첩시켜 밀려나는 환영에게 끝까지 따라붙었다.
절대 자세를 바로잡을 시간을 줘서는 안 된다. 캐스팅을 할 겨를도 내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채채챙-
달인 급에 이른 팔극검이 잇달아 풀려 나오면서 환영을 정신없이 휘몰아쳤다. 간간이 선술도 적용되어 환영의 목숨을 위협했다.
하지만 환영은 크게 당황하는 것 없이, 침착하게 비그리드를 거둬 냈다.
녀석은 어차피 검술 실력으로는 연우를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다.
반거인 발데비히로부터 배운 체술을 사용해서 방어에만 신경 쓰고, 미처 읽어 내지 못한 투로는 하늘 날개를 적절하게 방어구처럼 사용해서 막아 내거나, 결계 마법을 발동시켜 빗겨 냈다.
그리고 용마안을 통해 간간이 빈틈이 보일 때마다 무차별 난사를 사용하면서 최대한 거리를 벌리고자 했다.
쾅! 쾅!
콰아앙-
검과 검이 부딪칠 때마다, 화려한 이펙트가 터지고 폭발로 지반이 내려앉았다.
연우는 서서히 자세를 갖춰 가는 환영을 보면서 살짝 이맛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봐도 미친 스펙이야.’
연우는 사실 자신이 가진 무구가 저층 구간 플레이어에게는 말도 안 되는 수준이라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동생이 착용하고 있는 장비도 그에 못지 않은 수준이었다.
하나하나가 전부 고룡 칼라투스가 오랜 세월 동안 수집했던 보물이거나, 헤노바가 전력을 다해 만들었던 ‘명작’이었으니까.
특히 환영이 들고 있는 투박하게 생긴 검은 칼라투스와 헤노바의 합작품이라고 해도 될 정도였다.
드래곤 슬레이어.
고룡 칼라투스가 자신의 늑골을 직접 뽑아 갖가지 마법 효과를 부여해서 제공했고, 헤노바는 이것을 석 달 내내 쉬지 않고 두들겨서 자신의 최고 작품을 만들어 냈다.
드래곤 본으로 만든 주제에 ‘용 살해자’라는 이상한 이름이 붙은 검은 사실상 비그리드와 동급이거나, 그보다 위였다.
그래서 드래곤 슬레이어와 하늘 날개만 가지고도 환영은 연우의 거센 공세에서도 버틸 수 있었고, 이제는 반격까지 시도하는 여유까지 가지게 되었다.
연우는 녀석이 학습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는 자신의 투로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패턴을 읽어 가고 있었으니까. 이따금 터지는 반격은 간담이 서늘할 때도 있었다.
어느새 둘의 충돌은 팽팽한 접전으로 치달았다.
한편으로, 어이가 없기도 했다.
분명 자신이 알기로 동생에게는 시차 괴리처럼, 사고 가속이나 병렬 연산이 가능한 스킬이 없었다. 용의 지식으로 사고 속도가 빠르긴 하다지만, 그래도 자신에 비하면 훨씬 낮을 수밖에 없을 텐데.
이렇게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공격을 방어하던 와중에 패턴을 읽고, 약점을 파악해 반격기까지 마련하는 과정들이 빨라도 너무 빨랐다.
게다가 간간이 녀석은 연우의 팔극검과 비슷한 제스처를 취하기도 했다. 상대의 기술을 일부 훔쳐서 적용까지 시킨다는 뜻이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얼마 있지 않아 기세를 역전시킬 테지.
‘이래서 재능충이란.’
연우는 어째 어린 시절이 떠오르는 것 같아 조금 짜증이 났다. 동생은 원래 머리가 명석한 편이었다. 한번 본 걸 잘 잊지 않고, 이해도가 높아 공부도 꽤 잘했다.
비록 몸이 약해 방에 있는 시간이 훨씬 많았다지만. 그래도 체육에만 특화되었던 연우가 이따금 동생에게 부러움과 열등감을 가지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게다가 이따금 성적표를 가져와서 실실 웃으며 자신의 속을 박박 긁을 때는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물론, 그 뒤에는 게임 같은 걸로 실컷 괴롭혔지만.
지금도 딱 그랬다.
자신과 똑같은 얼굴로, 무표정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왠지 모르게 실실 웃던 그때의 모습이 살짝 겹쳐지는 것 같았다.
‘틈을 내줘서는 안 돼.’
그래서 연우는 더 가차 없이 환영을 몰아붙였다.
360개의 코어가 과열될 때까지 마구 회전시켜 마력회로가 뜨겁게 타올랐다. 불의 날개가 2배 이상 커지면서 더 큰 화력이 실리고, 마법 무장이 중첩되면서 속도가 훨씬 빨라졌다.
콰콰콰-
비교적 팽팽했던 기세가 다시 연우 쪽으로 기울었다.
환영의 손발이 어지러워지면서 자꾸 뒤로 밀려났다. 하지만 녀석은 여전히 침착하게 용마안으로 연우의 흐름을 좇았다. 속도만 빨라졌을 뿐, 패턴은 그대로다. 그렇다면 얼마든지 기회를 엿볼 수 있었다.
그때, 연우가 크게 몸을 돌리면서 비그리드로 환영의 복부를 갈라 나갔고, 환영은 그때가 기회라고 판단했다.
활짝 펼쳤던 하늘 날개를 접어 몸에다 둘렀다. 누에고치처럼 둘둘 말린 하늘 날개 위로 공간에 녹아든 비그리드가 선술 절을 풀어냈다.
콰아앙!
하늘 날개가 처음으로 부서졌다. 날개 조각들은 보석처럼 반짝이면서 산산이 흩어졌고, 그사이 환영은 준비해 뒀던 스킬을 터뜨렸다.
〈빛의 파도〉
연우가 불 속성에 특화되었다면, 동생은 빛 속성에 올인한 스타일이었다. 빛은 어둠과 악 속성을 물리치고, 벼락은 여러 속성 중에서 가장 큰 파괴력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빛의 파도는 수십 개의 벼락과 막대한 마력을 한데 응축시켰다가 무차별적으로 터뜨리는 기술.
파괴력이 너무 대단해서 일대를 모조리 ‘갈아 버리는’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문제는 정도가 너무 심한 나머지, 정작 시전자도 피해를 입을 만큼 감당할 수준을 훨씬 넘었다는 점이었다.
물론, 더 크게 성장한 뒤에는 그런 힘도 전부 제어할 수 있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그러지 못해서 제대로 쓰질 못했다. 자신이 직접 만들어 놓고도.
그랬다. 이것도 하늘 날개와 함께, 동생이 직접 여러 마법과 권능을 조합해서 만든 유니크 스킬이었다.
20층대 구간의 플레이어 주제에 벌써 이딴 것을 만들었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미친 재능이었다.
콰아아아-
샛노랗고 새하얀 번개가 넓은 영역에 걸쳐 사방으로 뻗쳐 나갔다.
분지를 태울 정도로 강렬한 번개들은 다시 서로 저들끼리 전하(電荷)가 연결되어 마치 그물망처럼 아주 촘촘해졌고, 그사이사이에 있던 것들은 모조리 갈려 나가고 말았다.
만약 이처럼 공간이 따로 설정 된 것이 아니었다면 얼마나 더 멀리 퍼져 나갔을지는 상상도 가질 않는 범위.
이대로 귀가 찢어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엄청난 폭음도 바로 그 뒤를 따랐다. 소리는 절대 빛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법이었다.
연우는 재빨리 청각을 차단시키고, 헤이스트와 블링크를 잇달아 전개해서 지면에서 최대한 멀리 벗어났다. 불의 날개도 크게 키우고, 아이기스도 넓게 펼쳤다.
하지만 그러고도 연우도 완전히 피해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떠밀리는 대기에 크게 튕겨 나고, 고열로 장비가 일부 손상되었다. 몸에도 막대한 피해가 가해졌다.
그래도 다행히 중심부에서 멀찍 이 떨어질 수 있어 비교적 피해는 덜했다.
상공에서 가까스로 균형을 되찾고, 냉혈로 흔들리는 이성을 바로 잡았다. 그리고 시차 괴리를 발동시켜 자신의 피해와 주변 상황을 빠르게 판단했다.
다행히 용의 피가 재빨리 돌면서 상처를 회복시켰다. 하지만 단단했던 용의 비늘이 잔뜩 벗겨지고, 뼈가 훤히 드러날 정도로 큰 중상이라 빠른 회복은 힘들 것 같았다.
다행히 마력회로나 코어는 크게 망가진 곳이 없었다. 고열로 인한 내상은 있었지만, 금세 아물었다.
연우는 몸을 움직일 정도는 된다고 생각하고, 이번에는 주변을 체크했다.
상공에서 내려다보는 스테이지는 이미 처참하게 망가진 상태였다. 엄청난 고열로 대기가 이리저리 휘고, 곳곳에 남은 불씨들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연우는 ‘미친놈’이라는 말을 저절로 입에 담을 뻔했다.
일기장을 통해 녀석이 가진 기술과 효과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눈으로 직접 보게 되니 제대로 말이 나오질 않았다.
다시 한 번 더 동생이 가졌던 재능에 욕이 나오면서도, 제대로 제어하지도 못할 이딴 기술을 사용한 전술에 혀를 찼다.
환영은 원 주인의 성격도 같이 카피한다. 원래 침착한 동생의 성격대로라면, 자신도 피해를 면치 못할 이딴 도박을 절대 하지 않을 텐데.
뭔가를 떠올리고, 따라한 것일까?
‘혹시 날……?’
순간, 연우는 환영이 자신을 따라 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정확하게는 어린 시절에 남아 있는 연우에 대한 기억을 떠올린 것 같았다.
아프리카로 넘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연우는 이성적이기보다는 감성적인 편이었다.
꽂히는 게 있으면 어떻게든 해 봐야 직성이 풀렸고, 고민을 하기보다는 먼저 행동으로 나서는 편이었다.
그러다 보니 이런저런 사고도 많이 쳐서, 언제나 뒷수습은 동생의 몫이었다. 허구한 날, 철없는 형을 두고 잔소리를 해 대기도 했다. 제발 뭔가를 하기 전에 한 번 생각을 정리하라고.
어쩌면 아프리카에서도, 탑에서도, 어떤 계획을 실행하기에 앞서 여러 번 생각을 정리하고, 실행하는 와중에도 거듭 의심을 반복하는 습관은 그때 받았던 잔소리의 영향인지도 몰랐다.
그런데 그랬던 녀석이 여기서는 싸울 때에 이성적인 모습보다는 감성적인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일단 저질러 버리고, 그 뒤에 수습하는 과정을 보이는 것이다.
그 모습에서.
연우는 어쩐지 어린 시절의 자신이 오버랩되는 것 같아, 묘한 기시감을 받아야만 했다.
서로가 서로를 닮아 갔던 걸까.
연우는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가, 어느새 자신의 머리 위로 느껴지는 인기척에 재빨리 자세를 바로 갖췄다.
어느새 하늘 날개까지 수복한 환영이 나타나 다시 한 번 더 빛의 파도를 터뜨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전개하는 빛의 파도는 이전에 사용하던 것보다 훨씬 세기가 대단한 것 같았다.
트리플 캐스팅. 스킬을 마법처럼 다뤄, 빛의 파도를 몇 개씩이나 한 번에 압축시켜 버린 것이다. 이대로 눈이 멀어 버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밝은 빛이 하늘을 물들였다.
연우는 그런 녀석의 시도에 어이가 없었다. 자신도 하늘 날개 외에는 전부 피해가 큰 상태이면서, 또 무작정 돌진만 해 대는 것이다.
[시차 괴리]
한없이 느려진 현실 시간 속에서, 연우는 여기에 맞설 준비를 했다.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조금 전과 다르게 이미 피하기는 그른 데다가, 피하더라도 또 뒤쫓아 와서 빛의 파도를 터뜨릴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거기에 대응해, 빛의 파도에 걸맞은 공격을 보여야만 했다.
연우에게는 빛의 파도에 대항할 만한 광역 스킬은 없었지만, 때마침 머릿속으로 거기에 버금가는 파괴력을 낼 만한 기술이 한 가지 떠올랐다.
탑 외 지역에서 니케의 고유 스킬을 확인할 당시.
화령을 사용해서 몸을 극한의 속도로 몰아넣고, 검을 휘둘렀을 때에 일어났던 충격파. 몇 겹으로 둘렀던 결계가 부서질 정도로 위력이 대단했다.
그때 했던 생각이 있었다.
여기다 오러와 흑기를 실을 수 있다면. 용혈 각성으로 힘을 부가시키고, 불벼락을 압축시켜 터뜨린다면. 어떻게 될까?
한령은 전성기 시절의 자신이 돌아와도 위험할 거라고 단언했다.
하지만 제어할 수 없는 힘은 없는 것만 못하다고 피할 것을 조언했다.
그래서 연우는 그 모든 힘을 선술 절에다 압축시키는 방법을 고려했다. 다만, 그 뒤로 몇 번 시도해 본 연습에서 그런 막대한 에너지를 단번에 압축시키는 과정이 너무 힘들어 잠시 미뤄 두고 있었는데.
이것을 다른 방법으로 풀어낸다면.
때마침 좋은 방법도 있었다.
선술, 혼과 쇄.
혼으로 그런 잡다한 힘들을 뒤섞고, 거친 폭발을 일으키는 쇄로 풀어낸다면. 빛의 파도에 버금가는, 아니, 어쩌면 그것을 뛰어넘는 위력을 만들어 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물론, 그만큼 자신의 안전 따위는 발로 걷어차야겠지만.
어쩌면 갑작스레 기술을 만들어 내야 해서 불발로 그칠지도 몰랐다.
하지만 연우에게는 다른 것을 떠올릴 여유 따윈 없었다. 빛의 파도에 맞서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느려졌던 현실 시간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연우는 단숨에 헤이스트와 블링크, 순보를 잇달아 한계까지 쥐어짜 가속도를 검 끝으로 싣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불벼락과 오러, 흑기 따위를 전부 뒤섞어 그대로 날렸다.
‘쇄.’
콰아아앙!
콰콰콰-
세상이 눈부신 빛으로 뒤덮였다.
그리고 그 순간.
연우는 생각했다. 너무 지치고 피곤했지만. 자칫 이대로 여기서 폭발에 휘말려 죽을지도 몰랐지만.
동생과 한데 어울리는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 재미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