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그림자 도장 (8)
띠링.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다는 신호음.
연우는 천천히 눈을 떴다. 온통 시커멓게 변했던 세상은 다시 녹음이 푸르게 우거진 분지로 돌아와 있었다.
[서른한 번째 구획의 시련이 시작됩니다.]
[곧 3위 ‘휼’과의 싸움이 시작됩니다. 대기 시간 동안 전투를 준비하세요.]
[도전자의 상태를 고려하여 조금 더 긴 대기 시간이 주어집니다.]
[03:00:00]
……
보통 대기 시간은 이전 구획에서의 소요 시간을 토대로 산정된다. 3시간이나 주어진 것은 그만큼 동생의 환영과의 싸움이 길었었다는 뜻이었다.
확실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연우는 자신이 가진 기량을 전부 내던졌고, 겨우겨우 고생한 뒤에야 승기를 잡을 수 있었다. 최후의 보루였던 칠흑왕의 절망은 쓰지 않았다지만, 그래도 겨우 이뤄 낸 승리였다.
여름여왕의 환영과 싸웠을 때에도 이렇게 힘들지는 않았었는데. 내심 동생이 어떻게 단 5년 만에 아홉 왕을 위협하는 경지까지 오를 수 있었는지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들었다.
4위였던 동생도 이렇게 힘들 정도라면, 앞으로 남은 세 명은 대체 어느 수준인가 하는.
저들이 정말 21층을 통과할 때에 이만한 실력이었다면, 대체 지금은 어느 수준인 건지 도무지 짐작하기도 힘들었다.
‘하긴. 지금의 스승님만 봐도 대단하긴 하시지.’
연우는 잠깐 2위에 올라가 있는 무왕을 떠올리고 쓴웃음을 지었다.
분명 서른 번째 구획에서 펼친 승부는 자신이 봐도 놀라울 정도로 대단했다. 하지만 11층 도시 쿠람에서 ‘가볍게’ 도시의 절반을 날려 버리던 모습은 아직도 머릿속에서 잊히질 않았다.
그런 파괴적인 힘을 아주 잘 다루고 있었지. 불의 파도를 제어하는 것도 권능을 빌려야 하는 연우로서는 아직도 먼 이야기였다.
하여간 그런 사람이니, 젊은 시절에도 괴물이었을 건 분명했다.
그래서 아주 잠깐 인스턴트 던전을 나가서 충분히 휴식을 취한 다음에 돌아올까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해 보자.’
연우는 마력회로를 돌리면서 부족한 마력을 외부로부터 채우고, 용의 피와 인자를 깨워서 빠른 회복을 시도했다.
‘한 번 감을 잡았을 때에 계속 다듬어 나가야 해.’
동생의 환영과 겨루면서 얻었던 스킬, 불의 파도.
비록 빛의 파도에게서 강한 모티브를 얻었지만, 그래도 이건 연우가 처음으로 스스로 창안한 스킬이었다.
[불의 파도]
넘버링 ???(측정 중)
숙련도: 3.2%
설명: 플레이어 ###가 넘버링 스킬 ‘불벼락’을 중심으로 갖가지 기운을 복잡하게 뒤섞어 극한대로 압축시킨 형태. 때문에 압축이 해방되었을 때에 일어나는 폭발력과 미치는 범위는 실린 마력의 크기에 따라서 비례한다.
스킬 ‘빛의 파도’와 여러모로 흡사한 모습을 지녔지만, 그보다 복잡한 패턴을 띠고 있어 훨씬 위력적이며, 반대로 제어도 그만큼 힘들다.
* 화뢰(火雷)
소비된 마력에 비례해서 강렬한 폭발을 일으킨다. 때에 따라서는 높은 확률로 방어 결계도 부수며, 사방을 망가뜨려 상대를 혼란으로 몰아넣는다.
* 지글거리는 불씨
압축된 힘 속에 전격을 가득 실어, 폭발과 함께 사방으로 벼락을 퍼뜨린다. 그렇게 퍼져 나간 벼락은 화력을 더 먼 장소로 이동시키고, 덩달아 연쇄 폭발을 일으켜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든다. 이후에도 쉽게 꺼지지 않는 불씨를 남겨 계속된 피해를 입힌다.
**이 스킬은 ‘유니크’입니다. 탑에서도 오로지 단 한 개밖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만약 타인에게 전수하는 데 성공할 시에 유니크 항목은 사라지고, 대신에 창조자에게 주어진 부가 혜택 옵션이 제공됩니다.
**아직 미완성인 스킬입니다. 하지만 잠재 가치가 높으니 ‘완성’을 이루어 높은 등급 혹은 넘버링을 획득하세요.
하나의 기술이 시스템으로부터 스킬로서 정식 인정이 되려면, 그만큼 정형화된 특정 패턴과 스킬로서 가지는 특별한 정의를 가져야만 했다.
불의 파도는 이제야 겨우 그런 패턴이 만들어진 상태였다.
하지만 아직까지 정의는 만들지 못해 언제 스킬로서 사라질지 모르는 일이었다.
연우는 이 정의를 서둘러 확립하고 싶었다.
설명에 나와 있듯이 불의 파도가 가지는 잠재 가치는 이미 넘버링을 넘볼 만큼 뛰어난 데다가, 한 번 잡은 감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제대로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불의 파도를 계속 다듬다 보면 여태 보지 못했던 새로운 뭔가를 깨우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만 강하게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연우는 앞으로 남은 세 명이 대단하고, 처음 21층에 도착했을 때 생각한 것보다 훨씬 실력이 뛰어날 거란 것을 이제 알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지금의 자신이 질 거란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2단계 각성을 이뤘고, 불의 파도까지 얻었다.
게다가 연우는 동생의 환영과의 싸움에서 많은 것들을 배울 수가 있었다.
용체라는 육체를 어떻게 해야 더 효율적으로 다룰 수 있는지. 권능을 어떻게 활용해야 더 큰 힘을 낼 수 있는지. 자신이 미처 파악하지 못했던 부분들을 많이 캐치할 수 있었다. 용체와 권능의 사용은 확실히 동생이 자신보다 훨씬 위였다.
그동안 연우는 용체의 여러 특성을 무공에 맞게 뜯어고치고, 마법을 사용할 때에도 뼈에다 직접 새겨 넣는 미친 짓이 전부였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눈이 뜨인 상태였다.
결국 휴식 시간만 충분히 주어진다면 얼마든지 남은 세 환영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회복에만 전념했다.
그사이, 보이지 않는 벽 너머로 새로운 환영이 나타나고 있었다.
깡마른 체구. 2미터가 조금 안 될 것 같은 키. 눈처럼 새하얀 피부에 눈 밑이 까맣게 내려앉아 병약한 인상을 자랑했다. 그러면서도 살짝 치켜 올라간 눈매는 날카로운 인상도 같이 풍겼다.
2위, 휼.
‘저 사람이 바로…… 마군의 대주교.’
거대 클랜, 마군은 아홉 명의 주교가 이끄는 체재로 이뤄져 있다. 그중 서열 1위인 대주교는 마군이 모시는 마신의 사도이면서도, 군주의 특성도 같이 갖고 있는 것으로 유명했다.
한 가지만 갖기도 힘들다는 업(業)을 두 개나 얻은 만큼, 대주교는 공식 석상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부터 큰 파란을 일으켰었다.
당시 대주교였던 ‘검은 새벽’을 비롯해, 4명이나 되는 주교들을 한 자리에서 모두 치워 버리고, 자신이 그 자리에 대신 앉았기 때문이었다.
비록 21층을 통과하기 전에는 아직 마군에 입교하기 전이었다지만, 그래도 그런 그가 남긴 환영인 만큼 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킨드레드가 정식으로 두 번째 주교가 된 것도, 저 자가 대주교 자리에 앉으면서부터라고 들었었는데.’
연우는 고요한 눈으로 대주교의 환영을 바라봤다. ‘휼’이라는 이름 외에는 아무런 신상도 밝혀지지 않은 자.
하지만 군주의 특성을 지니고 있는 만큼, 거기에 맞춰서 대응 방안을 모색해 보면 될 것 같았다.
일기장 속에 동생이 녀석과 부딪쳤던 기록도 있었고.
‘덤으로 확인해 보고 싶은 것도 있고.’
연우는 눈을 가느다랗게 좁혔다.
의식은 여전히 회복에 집중했지만, 두 눈은 대주교의 환영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 * *
[서른한 번째 구획의 시련을 무사히 통과했습니다.]
화아아-
연우가 비그리드를 세게 내리친 자리 위로, 불의 파도가 그대로 작렬하면서 환영의 남아 있던 몸뚱이를 그대로 밀어 버렸다.
여전히 불의 파도를 완전히 제어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계속된 연습으로 방향을 정하는 정도는 이제 가능했다. 환영이 지정 범위에 노출된 순간, 단번에 스킬을 전개하면서 다시 한 번 더 무시무시한 폭발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게다가 소요되는 마력도 최소한으로 줄여서, 이전 구획에서보다 위력은 많이 줄어든 상태였다.
거대한 크레이터가 형성되고, 고온으로 모든 습기가 메말라 주변 일대가 온통 균열로 가득한 죽음의 땅으로 변한 건 똑같았지만.
마치 거대한 뱀이 지면 위를 훑고 지나간 것처럼 길쭉한 고랑도 깊게 남았다.
2단계 권능을 빌어, 권역에 대한 통제권으로 불의 바다를 조절한 것의 효과였다.
그리고.
환영이 사라진 자리 위로, 노란 무언가가 위로 높이 둥실 떠올라 연우에게로 다가왔다.
동시에 연우가 따로 조작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인트레니안이 활짝 열리면서 여의봉의 조각이 올라와 같이 합쳐졌다.
찰칵.
찰칵.
뭔가 맞물리는 소리와 함께, 여의봉의 조각은 사람 손가락만 한 크기가 되어 다시 연우의 손바닥으로 떨어졌다.
갑작스레 벌어진 일이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던 연우는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용마안을 열어 조각을 확인했다.
[여의봉의 조각(5/???)]
[새로운 여의봉의 조각을 4개 발견했습니다. 더 많은 조각을 찾아 여의봉을 완성하세요.]
‘역시 조각은 조각을 부르는 특징이 있어. 이거라면 앞으로 탐색하는 데 크게 힘들지는 않을 것 같고.’
연우는 여의봉의 조각을 꽉 쥐며 헛웃음을 흘렸다.
‘그보다 여기도 함정이었단 말이지?’
마군은 여의봉의 조각들을 모으고 있다. 그렇다면 쉽게 모을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뭐가 있을까?
연우는 자신이 마군이라고 가정했을 때 방법을 떠올려 봤다. 답은 금세 나왔다.
‘환영의 도전자들에게서 빼앗으면 되겠지.’
여의봉은 조각이 조각을 부른다. 그리고 1번 관문에서는 생사 대결 외에 나올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도전자가 가진 조각을 빼앗기도 좋을 것이다.
설마 대주교의 환영이 패배할 거라고 생각지 못할 테니까. 광신도만 가득한 녀석들은 절대 마신의 집행관인 사도가 질 거란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는 자들이었다.
게다가 보통 우연이든 아니든, 조각을 갖고 있는 자는 여기까지 올 만한 강자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환영에다 조각을 심어 놓고, 여태껏 꾸준히 4개를 모은 모양인데.
하지만 이제 조각은 연우의 손으로 들어왔다.
여전히 어떤 기능을 보이기엔 숫자가 턱없이 부족한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하지만 연우는 가볍게 웃으면서 조각을 인트레니안으로 넘겨 놓고, 곧장 다음 구획으로 이동했다.
서른두 번째 구획이 열렸다.
그곳에는 젊은 얼굴의 무왕이 가부좌를 튼 채로 이쪽을 보며 씩 웃고 있었다.
대부분의 환영들은 무표정을 고수하는데, 저 환영만은 유독 무왕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았다. 딱 보기에도 익살맞은 분위기를 마구 풍겨 댔다.
하지만 연우는 그 속에서 날카로운 맹수를 볼 수 있었다.
아직은 새끼의 때를 벗지 못한 맹수. 그러면서도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을 갖고 있는 녀석이었다. 젊은 시절에 꽤 많이 사고를 치고 다녔다더니. 왜 그런 말들을 하는지 딱 알 수 있었다.
연우는 비그리드를 똑바로 세웠다.
외뿔부족의 마을을 떠나기 전에, 무왕이 물었었다. 과거의 자신을 이길 수 있겠냐고.
여기에 연우는 이렇게 대답했다. 여태 자신을 괴롭혔던 스승을 처음으로 괴롭혀 보겠다고.
스승을 꺾는다는 것. 청출어람을 이뤄 본다는 것. 어쩌면 위대한 스승을 둔 제자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해 본 것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건 연우도 마찬가지였다.
외뿔부족에서도 천재라고 불렸다던 무왕이 자신과 비슷한 나이 대에는 어떤 모습이었을지가 너무 궁금했다.
그리고.
한편으로 승부욕도 끓었다. 동생을 꺾고, 마군의 대주교까지 이겼다. 여기까지 온 이상 어떻게든 끝을 봐야만 했다. 무왕도 그 끝자락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장애물 중 하나에 불과했다.
[서른한 번째 구획의 시련이 시작됩니다.]
그렇게 장벽이 거둬진 순간.
곧바로 움직여야 할 무왕이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갑자기 양팔을 들었다. 그리고 말하듯이 가볍게 입술을 벙긋거렸다.
‘항. 복.’
스테이지의 시련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기만 해야 할 환영이 자유 의지를 갖고 있다고?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일기장에서도 여태 그런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는 내용은 전혀 없었다.
연우는 섣불리 앞으로 튀어 나가지 못했다. 21층에 들어오고 나서 처음으로, 뭔가 말할 수 없는 불안감이 심장을 간지럽혔다.
* * *
“여긴가?”
장웨이는 모루와 망치가 교차된 문장을 확인하고, 대장간의 문을 열었다.
끼이익.
“실례합니다.”
“영업 끝났으니 돌아가.”
아직 밝은 대낮이건만. 안쪽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응대하기 귀찮다는 투가 잔뜩 묻어났다. 자기 꼴릴 때에만 멋대로 장사를 하고 접는다더니. 조사했던 그대로였다.
장웨이는 목소리를 무시하고 대장간 안쪽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갔다. 안쪽에서는 뜨거운 증기와 함께 쇠를 세게 부딪치는 소리가 같이 울리고 있었다.
“제기랄! 영업 안 한다니까, 너 뭐야?”
헤노바는 뒤에서 불쑥 느껴지는 인기척에 인상을 와락 찌푸리면서 뒤로 돌아봤다. 장웨이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드워프의 얼굴을 보면서 물었다.
“헤노바, 맞습니까?”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그는 허리띠 뒤쪽에 매달아 뒀던 단검 쪽으로 손을 가져갔다. 검집에서 뽑혀 나오는 단검이 날카롭게 번들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