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188화 (188/862)

13화. 악마의 숲 (3)

갈리어드는 튜토리얼에서 만났던 다크 엘프였다. 수십 번에 걸쳐 아카샤의 뱀을 쫓았고, 여러 퀘스트를 통해 연우에게 순보를 전수해 주기도 했던 사람.

그리고 동생의 첫 스승이었다.

그토록 바라던 가족들의 사진을 되찾은 뒤, 더 이상 무슨 목적으로 살아야할지 몰라 조금 고민해 보겠다더니. 그새 탑을 올랐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친구였던 브라함과 함께 머무는 모양인 것 같은데.

다만, 갈리어드와 아이테르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조합이었기에, 연우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돌아갔다.

‘아이테르 등이 브라함의 행방을 쫓고 있는 거고, 갈리어드가 그것을 막고 있는 중인 거라면.’

연우는 빠르게 갈리어드의 움직임을 쫓았다.

갈리어드는 이미 탑을 오르기 전부터 튜토리얼의 명물로 유명했었다. 랭커와 비교해도 절대 실력이 뒤지지 않을 거란 평가를 받았었는데.

그런데 거기에 탑을 오르면서 얻은 보상까지 더해지면서, 예전에 봤을 때보다 훨씬 실력이 대단해진 것 같았다.

순보를 전개할 때마다 곳곳에 잔영이 남을 정도였고, 활시위에다가 화살을 먹이고 당기는 속도는 육안으로 좇기 힘들 정도였다.

더구나 화살은 흔히 구할 수 있는 나무 화살이 아니었다. 통짜로 단단한 무쇠를 두들겨 만든 철시(鐵矢, 쇠 화살)였다.

브라함이 따로 만들어 준 것일까?

콰콰쾅!

따로 마법 주문도 새겨 뒀던지, 철시가 박힌 자리로 거친 폭발도 일어났다.

아이테르를 비롯한 엘로힘의 아홉 플레이어들은 재빨리 사방으로 흩어졌다.

궁수를 상대할 때에는 뭉쳐 있으면 피해가 커지기 마련이다. 되도록 흩어져서 공격 범위를 좁히는 방식으로 가야만 했다.

녀석들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화살을 피한 다음에는 크게 원호를 그리면서 갈리어드를 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런 작전은 어디까지나 궁수를 따라잡을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한 일이었다.

이미 순보라는 스킬을 마스터까지 한 갈리어드는 그들이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빨랐다.

더구나 이곳은 악마의 숲. 엘로힘의 플레이어들이 활동하기 버거운 스테이지인 데다가, 곳곳에 엄폐물이 넘쳐 나는 이상, 갈리어드는 물 만난 고기나 다름없었다.

파바밧-

갈리어드는 뒤로 멀찍이 빠지면서 잇달아 화살을 쏘아 댔다. 아주 빠르게, 그것도 은밀하게 파고 드는 화살은 랭커인 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 정도였다.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한 녀석들은 튕겨 낼 생각으로 거세게 칼을 휘둘렀다. 콰콰쾅. 충돌이 벌어진 순간, 막대한 충격파와 함께 불꽃이 그들을 덮쳤다.

“크아악!”

“젠장!”

그렇게 갈리어드를 잡으려던 두 명이 욕지거리를 내뱉으면서 뒤로 멀찍이 떨어졌다. 한 명은 전신에 화상을 입었고, 다른 한 명은 검이 부서지면서 파편으로 피투성이가 된 상태였다.

갈리어드가 그들의 움직임을 살피면서 다시 시위에 화살을 걸려던 그때.

갑자기 갈리어드 뒤편으로 숨어 있던 다른 플레이어가 나타났다. 금발을 가진 하이 엘프. 그나마 유일하게 갈리어드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있는 녀석이었다.

“이놈, 잡았……!”

하이 엘프는 자신만만하게 웃으면서 갈리어드가 있던 자리로 창을 깊게 찔렀지만, 곧 인상이 딱딱하게 굳었다.

갈리어드의 형체가 호수 위에 비친 허상처럼 잘게 흐려져 사라 지고 있었다.

〈순보 - 이형환위〉

속도를 극한까지 쥐어갔을 때, 공간에는 얕은 잔상이 남기 마련이다. 갈리어드는 순보를 마스터하면서 새롭게 여러 상위 스킬을 열었다. 이형환위는 그중 한 가지였다.

곳곳에 여러 개의 잔상을 남기면서 이동해 상대의 눈을 현혹시키고, 은밀하게 치명타를 입힐 수 있는 스킬.

그리고 덫에 걸린 뒤에는 항상 트랩이 작동하기 마련이었다. 뒤쪽의 나무에서 그림자가 불쑥 튀어나왔다. 화살이 방황하는 하이 엘프의 등에 작렬했다.

콰앙!

“크으윽!”

녀석은 바람의 정령을 돌려 가까스로 배리어를 만들어 화살을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폭발의 위력이 너무 커서 몸이 뒤로 크게 밀려나고 말았고, 검은 매연 때문에 시야까지 가려져 아주 잠깐 갈리어드의 행적을 놓치고 말았다.

〈순보 - 궁신탄영〉

그때, 갈리어드가 갑자기 활처럼 몸을 뒤로 크게 젖히다가 크게 튕기면서 앞으로 튀어나갔다.

여태껏 최대한 간격을 벌리면서 히트 앤 런 작전을 벌이던 것과 다르게, 이번에는 근접전을 노리려 한 것이다.

“감히! 어둠의 아이 따위가!”

하이 엘프는 매연을 뚫고 갈리어드가 나타나자 얼굴을 와락 구겼다.

고귀한 미의 신, 프레이의 피를 타고난 하이 엘프에게 있어, 어둠에 녹아든 다크 엘프는 절대 가까이할 수 없는 천박한 족속들이었다.

그런 입장에서 다크 엘프 따위가 정면에서 공격해 오니 분노를 표출할 수밖에.

더구나 그가 봤을 때, 갈리어드는 단순히 발만 빠른 사냥꾼에 지나지 않았다. 이렇게 덤빈다는 것 자체가 자신을 만만하게 본다는 뜻이니 본때를 보여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하이 엘프가 한 가지 착각한 점이 있었으니. 갈리어드가 주로 쓰는 장기가 활과 발일 뿐. 다른 체술과 무술에도 아주 능통하다는 것이었다.

거기다 빠른 속도까지 더해지니, 하이 엘프의 창술이 따라갈 새가 없었다.

갈리어드는 화살 하나를 뽑아 역수로 쥐고, 빠르게 휘몰아치면서 하이 엘프의 손목 근맥과 다리의 아킬레스건 등을 끊어 버렸다.

촤촤촤-

“런트!”

뒤늦게 다른 자들이 달려와 갈리어드를 제지하려 했지만, 갈리어드는 이미 뒤로 빠지면서 재차 그쪽으로 화살을 쏴 댔다.

한 명을 중상으로 만들어 다른 자들이 구하러 오면, 그것을 역으로 이용해서 공격하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상황이 이런 식으로 돌아가다 보니, 엘로힘은 철저하게 갈리어드의 손에 놀아나는 셈이 되었다.

지리, 환경, 빠른 기동력을 이용한 공격 앞에서, 엘로힘은 속수무책으로 당해야만 했다.

결국 이를 보다 못한 아이테르가 앞으로 나섰다.

“쥐새끼 같군.”

아이테르는 미려한 미간을 살짝 찡그리면서, 타고난 신력을 이용해 허공에다 빛의 화살을 숱하게 만들었다.

하나하나가 막대한 신성을 품고 있는 것들. 손을 아래로 내정자, 소낙비처럼 갈리어드에게로 쏟아졌다.

〈순보 - 금리도천파〉

갈리어드는 순보를 극성으로 전개하면서 잇달아 피했지만, 빛의 화살은 끝까지 갈리어드를 쫓아갔다.

몇 가지는 좌우로 방향을 분리해 크게 돌아서 갈리어드의 후방과 측방을 공략했고, 갈리어드가 상황을 파악했을 때에는 이미 함정까지 내몰린 상황이었다.

앞, 뒤, 좌, 우. 모두가 빛의 화 살에 가로막힌 상황 속에서. 빛의 화살들이 일제히 더 시린 빛을 토해 냈다.

“터져라.”

신성을 품은 자들만이 부릴 수 있다는 언령과 함께, 수십 개나 되는 빛의 화살들이 일제히 폭발했다.

콰아앙-

새하얀 빛은 반구 모양을 그리면서 삽시간에 호숫가 주변의 숲을 깡그리 밀기 시작했다.

폭발 소리도 그리 크지 않았다. 하지만 마치 태양이 반짝이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새하얀 섬광은 붉은 하늘과 검은 연기를 깡그리 밀어내면서 사방으로 뻗쳐 나갔다.

악마수도, 갖가지 마족들도, 유령들마저도 소리 없이 사라졌다.

갈리어드도 거기에 휘말리는 게 아닐까 싶은 순간.

〈순보 - 어기충소〉

그는 양발에다가 마력을 잔뜩 응집시키면서 발을 굴려 상공으로 아주 높게 솟구쳤다.

그리고 그것을 노리고, 엘로힘의 다른 플레이어들도 한꺼번에 움직였다.

아래는 빛의 화살이 일으킨 폭발로 대기가 어지러워지는 중이었다. 사방이 뻥 뚫린 허공에서는 몸을 숨기기도 쉽지 않을 테니, 충분히 잡을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콰콰콰!

갖가지 이펙트들이 화려하게 터지면서 돌풍이 휘몰아쳤다.

아이테르도 지상에서 자신의 시그니처 스킬, 〈광명의 신벌(神罰)〉을 전개했다. 오로지 빛으로만 만들어진 창날이 매섭게 쏘아지면서 갈리어드를 노렸다.

퇴로는 없다. 갈리어드도 그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허공에서 몸을 비틀면서 허리띠에 감아 뒀던 원반을 꺼내 앞으로 던졌다.

이곳으로 오기 전. 친구인 브라함이 위기 시에 쓰라고 전해 준 방패였다.

원반은 순식간에 여러 개로 늘어나면서 벌집 모양의 단단한 방어막을 형성했다.

그리고 여러 공격들과 충돌한 순간, 팔각 방패가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이 우르르 떨렸다.

플레이어들도 그걸 보고 재차 스킬 발동을 준비했다.

바로 그 순간.

우르르, 콰쾅!

별안간 하늘에서부터 벼락이 떨어졌다.

오로지 붉은 불길로만 이뤄진 불벼락. 상황을 지켜보면서 기회만 엿보던 연우가 발동시킨 스킬이었다.

불벼락이 불의 파도에 흡수되었다지만, 스킬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오히려 연우는 21층과 22층을 통과하며 스킬의 세기를 조절할 수 있게 되면서, 위력이 더 커진 면이 있었다.

본인들의 공격에만 집중한 나머지, 외부에서 다른 공격이 올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던 플레이어들로서는 정말 날벼락 같은 상황.

여러 개의 불벼락은 순식간에 플레이어들을 마구잡이로 유린했다. 특히 갈리어드와 직접 충돌하면서 부상을 입었던 자들은 온몸이 송두리째 타 버리는 끔찍한 고통을 맛봐야만 했다.

세 명이 까맣게 익은 채, 탄내를 토해 내다가 아래로 추락했다. 남은 자들은 가까스로 스킬과 아티팩트를 발동시켜 목숨을 구할 수 있었지만, 중상을 면치 못했다.

그나마 괜찮은 자가 상체에 심각한 화상을 입었을 뿐. 나머지는 숨을 헐떡일 정도로 큰 부상이었다.

그리고 그런 녀석들 위로 날카로운 칼바람이 불면서, 연우가 공간을 열고 나타났다. 블링크와 함께, 비그리드를 거칠게 내리쳤다.

‘절.’

촤촤촤!

무왕의 환영을 상대하면서 부쩍 늘어난 검술 실력에, 선술까지 더해지면서 삽시간에 세 플레이어의 머리통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정말이지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 남은 자들은 경악에 찬 표정으로 연우를 바라봤다.

검은 가면과 검은 옷. 그리고 붉은 날개와 새하얀 검. 얼핏 소문으로만 듣던 독식자와 똑같은 복장이었다.

연우의 달라진 복장을 모르던 갈리어드도, 그의 체형을 보고 단번에 누군지 알아차렸다.

“너……?”

『자세한 건, 여길 나가고 말씀 드리겠습니다.』

갈리어드는 연우의 어기전성을 듣고 살짝 놀란 표정이 되었다. 의념을 깨달았다는 건, 랭커 급의 실력자가 되었다는 뜻이었으니까. 튜토리얼 때의 기억밖에 없는 갈리어드로서는 놀랄 수밖에 없는 성장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갈리어드는 알겠다면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연우는 갈리어드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그를 붙잡고 불의 날개를 더 크게 활짝 펼쳤다.

“네 이 노오오옴!”

그때, 저 아래에서 아이테르가 흉측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노호를 터뜨렸다.

생각지도 못하게 수하들을 다섯이나 잃고 말았다. 남은 셋도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런데 목표까지 탈취하려고 하니 눈이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체면을 중시한다던 녀석이 저딴 표정을 짓는 걸 보니. 연우는 십 년 묵은 체증이 확 내려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여유를 부릴 순 없었다. 곧 녀석이 광명의 신벌을 다시 날렸고, 연우는 비그리드를 꽉 쥐었다.

광명의 신벌은 창이 투척된 자리에 수십 개의 벼락을 잇달아 내리꽂는 스킬이었다. ‘신벌’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만큼 위력이 대단할 수밖에 없는 데다가, 아이테르가 자랑하는 빛 속성의 버프 효과까지 더해져 엘로힘 내에서도 대부분 정면으로 부딪치기를 꺼려 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연우는 비그리드를 우측으로 돌리면서 아무런 위력 조절도 없이 스킬을 터뜨렸다.

[72선술 - 폭(爆), 열(裂)]

[불의 파도]

새롭게 터득한 선술이 더해진 불의 파도는 빛의 화살이 만들어 냈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화마를 일으켰다.

여기에 광명의 신벌이 더해지면서, 붉고 새하얀 기운들이 서로 뒤엉켜 버섯구름 모양으로 아주 하늘 높게 솟구쳤다.

사방으로 뜨거운 열폭풍이 파문을 그리며 잇달아 잔뜩 퍼져 나갔다. 인근 숲 지대가 깡그리 밀리고, 흉측한 땅거죽 아래가 드러날 정도로 강한 위력이었다.

연우는 모두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동안, 갈리어드와 함께 블링크를 잇달아 전개하면서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아이테르가 노발대발 소리를 지르는 모습이 얼핏 보였지만, 녀석도 곧 엄습하는 화마를 막아 내느라 정신이 없어졌다. 남은 생존자들이라도 어떻게든 살리려면 상당히 고생해야겠지.

「정말이지, 이건 볼 때마다 미친 것 같아. 어디 폭죽놀이라도 하는 거냐.」

「더 큰 문제는 저 불씨들이 악마의 숲에 넓게 퍼질 것 같은데…… 어떻게 될 줄 모르겠군.」

샤논과 한령의 감탄 아닌 감탄을 귓등으로 흘려들으면서. 그들이 죽은 다섯 랭커들의 영혼을 앗은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연우는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그러다 슬쩍 아이테르가 고생하고 있을 쪽을 돌아봤다.

조만간 어떻게든 만나게 될 테니. 녀석은 그때 잡으면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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