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189화 (189/862)

14화. 악마의 숲 (4)

연우는 드 로이 호수에서 한참이나 벗어난 곳에 이르러서야 블링크를 중단시켰다.

너무 거칠게 마력회로를 돌렸기 때문일까. 코어와 함께 육체도 덩달아 뜨겁게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이곳이라면 저들도 더 이상 쫓지는 못할 겁니다.”

“그렇겠군.”

갈리어드는 연우의 품에서 떨어져 가볍게 지면에 착지했다.

그는 묘한 눈길로 연우를 바라봤다.

방금 전에 봤던 여러 폭발이며 검술 실력까지. 과연 자신이 알고 있는 아이가 맞나, 혹시 착각을 했나 잠시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곧 연우가 한 말에, 자신이 사람을 똑바로 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갈리어드.”

“역시 자네였군. 카인.”

“예.”

“그동안 꽤 맹활약을 벌였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그래도 생각보다 많이 변했어. 순보도 제법 잘 익은 것 같고.”

갈리어드는 연우가 블링크를 잇달아 전개할 때에 밟던 발재간을 놓치지 않았다.

제법 능숙한 발놀림. 여기에 마법까지 적절하게 곁들이는 실력이 꽤 괜찮았다. 자신이 준 스킬을 잘 다루고 있는 것 같아 조금 뿌듯했다.

다만, 의문도 몇 가지 들었지만.

갈리어드는 여차하면 바로 순보를 밟을 수 있도록 마력을 조금씩 유동하면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내가 여기에 있는 건 어떻게 안 건가?”

“우연이었습니다.”

“우연.”

“예. 브라함을 찾아 뭔가를 부탁드리려 하던 참이었는데. 거처에 브라함 대신에 엘로힘 쪽 사람들과 갈리어드가 충돌하고 있더군요.”

갈리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자신이 있던 곳은 브라함이 지난 반년이 넘도록 머물던 거처였으니까. 지금은 폭발로 완전히 사라져 버렸지만.

“확실히. 그래서 인연이 있던 날 도와준 건가?”

“브라함이 엘로힘에서 추방된 것은 유명한 이야기니까요. 그리고 갈리어드는 브라함의 친구분이기도 하시니, 무슨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럴듯한 추리야. 하지만 아직까지 자네가 말하지 않는 부분이 있어.”

갈리어드는 두 눈을 가늘게 좁혔다.

“자네, 튜토리얼에서 했던 말과 다르게 브라함과 전혀 모르던 사이이던데. 이건 어떻게 대답할 생각인가?”

연우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사실 이건 전혀 생각지 못한 질문이었다.

처음 갈리어드와 만났을 때. 갈리어드는 연우에게 누구의 소개를 받고 왔냐고 물었고, 연우는 여기에 브라함의 소개를 받았다고 대답했다.

물론, 아무렇게나 둘러댄 거짓말이었다.

애당초 계획에는 탑에 들어와서 브라함을 만날 생각이 전혀 없었으므로 일기장의 내용을 바탕으로 둘러댔던 것인데.

아니, 설사 브라함을 만나더라도 갈리어드와는 상관이 없을 줄 알았다.

애초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두 사람이니, 자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이유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갈리어드가 탑에 오르고, 브라함과 함께 있는 한 이야기는 달랐다.

저들은 상당히 예민해 보였다. 조금이라도 수상쩍은 모습이 보인다면 브라함의 근처에는 얼씬도 못할 것 같았다.

“너무 추궁한다고 생각지 말게. 이쪽은 지금 잔뜩 예민한 문제가 있어서 말이지.”

갈리어드는 허리춤에 매단 단검에다가 손을 갖다 댔다. 자신을 구해 줬어도 너 역시 쉽게 못 믿는다는 제스처였다. 여차하면 칼을 빼 들 게 분명했다.

결국 연우는 머리를 빠르게 굴리면서 적당한 변명거리를 내놔야만 했다.

이럴 때는 진실을 90퍼센트 정도 섞은 그럴듯한 변명이 가장 잘 먹혔다.

“사실대로 말씀드리자면. 튜토리얼에서는 순보와 운디네의 잔이 필요해 거짓말을 했었습니다. 그런 말을 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다는 말을 들어서요.”

“누구한테서 브라함에 대해 들었지?”

“제가 사는 행성에, 귀환자로부터 들었습니다.”

“귀환자?”

갈리어드는 미간을 확 찌푸렸다.

귀환자. 탑을 오르는 것을 포기하고 결국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간 자들을 말한다.

탑 외 지역에 사는 이들이 여전히 탑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낙오자의 신분으로 살아간다면, 귀환자들은 아예 그런 미련조차 잃어버린 채 떠난 자들이었다.

그리고 그런 이들은 플레이어로서의 자격도 같이 박탈되기 때문에, 절대 탑으로 되돌아올 수가 없었다.

그렇다 보니 귀환자를 들먹인다면 진실인지 아닌지 분간하기가 힘들었다.

“누구지? 그자는?”

“알려 드릴 수 없습니다. 이제 이곳에 이름조차 언급되기를 싫어하는 사람이니까요.”

“…….”

갈리어드는 잠시 아무 말 없이 고요한 눈빛으로 연우를 노려봤다. 눈가로 광망이 언뜻 맺혔다가 사라졌다.

종족 스킬, 〈요정안〉. 참과 거짓을 가리는 엘프 특유의 눈.

비록 다크 엘프가 기존 엘프 계통에서 아주 오래전부터 갈라져 왔다지만, 그래도 기초적인 종족 특성까지 잃은 것은 아니었다.

“……참이군.”

그리고 갈리어드는 요정안을 통해 연우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거짓이 어느 정도 섞여 있다는 것은 간파했다. 참을 뜻하는 흰색 바탕에 거짓을 말하는 검은색이 조금씩 어우러져 있었으니까.

사실 연우가 했던 말이 완전한 거짓말은 아니었다. 귀환자가 탑에서 지구로 온 자들을 통칭하는 것이라면, 동생은 그런 귀환자에도 해당했으니까. 언급되기를 싫어한다는 것도 당연했다.

갈리어드는 연우에게 몇 가지를 더 집요하게 질문했고, 연우는 요정안에 걸리지 않는 선 안에서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결국 나온 대답은 전부 참.

“그러니까 쉽게 말해, 너는 브라함의 도움을 빌릴 일이 있어서 왔고, 그러다 싸움에 참여를 한 것이라는 거군.”

“예. 그렇습니다.”

“그게 말이 되나? 너는 방금 전에 그 싸움으로 엘로힘과 척을 지게 된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싸움에서 연우는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말았다. 그에 대해서 잘 모르더라도, 복장과 특징만 찾아 봐도 금방 정체를 밝혀낼 수 있을 게 분명했다.

거대 클랜을 적으로 돌렸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연우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문이 나지는 않을 겁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연우는 여기에 대해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아이테르의 성격을 안다고 말할 수 없는 데다가, 사실 여기에 대해서 대답할 필요도 없었다.

아이테르는 자존심이 아주 강한 녀석이었다. 늘 자신이 주도적이어야 하고, 중심에 있어야만 했다. 아마 탑에서도 오랫동안 귀족으로서 살아왔던 버릇이 남아 있어서일 것이다.

그래서 늘 주변 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드는 스타일이었지만.

사실 그걸 뒤집어서 생각해 보면, 다른 사람들에게 깐깐한 것처럼 스스로에게도 아주 깐깐해서 늘 자기 제어를 할 줄 알았다.

그리고 어디 가서 타인의 험담을 하지 않으며, 자신이 겪고 있는 생각이나 속내도 쉽게 털어놓지 않았다.

어쩌면 녀석과 관계가 틀어진 것도. 거기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몰랐다.

아이테르는 사실 가문이 저지른 죄로 동족에게서 추방되었다가, 공을 세우면서 되돌아가게 된 케이스였다.

당연히 그 공이란 건, 아르티야에 대한 배신이었지만.

어쨌든 그만큼 녀석은 자존심이 아주 대단했다. 모든 것을 버린 녀석이기에, 자신의 위신에 상처가 가는 행동은 절대 하지 않으려고 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세미 랭커도 되지 못한 저층 구간의 플레이어에게 멍청하게 당했다는 소문이 나면, 가장 체면에 손상이 갈 사람이 아이테르였다.

녀석은 어떻게든 이 사실을 숨기고, 연우에게 복수를 하려 할 게 틀림없었다.

갈리어드는 ‘쯧’하고 가볍게 혀를 차면서 마지막으로 질문을 던졌다.

“하면 필요하다는 그 도움이란 게 뭐지?”

물론, 현자의 돌에 대해서 말해 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적당히 생각해 둔 변명을 둘러대려는데.

갑자기 갈리어드가 손을 들어 잠시 말을 중단시키더니 고개를 살짝 숙였다.

뭔가와 의사 교환을 하는 듯한 몸짓. 아무래도 멀리서 이곳을 지켜보고 있을 브라함과 통신을 나누고 있는 듯했다.

그러다 갈리어드가 통신을 끝내고 연우를 묘한 눈길로 바라봤다. 뭔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집주인이 묻는군. 어째서 너에게서 용의 냄새가 나느냐고.”

“……!”

이번에는 연우가 놀라고 말았다. 용의 인자는 각성을 이루기 전까지는 절대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텐데?

여름여왕도 읽어 내지 못한 것을 어떻게 브라함이 읽어 낸 거지?

연우는 최대한 내색하지 않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가면을 쓰고 있는 건, 이럴 땐 참 편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만.”

“그건 집주인에게 가서 묻고. 녀석이 널 데려오라고 한다. 따라와라.”

갈리어드는 뒤로 돌아서면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연우는 그런 갈리어드의 뒷모습을 보다가, 짧게 한숨을 내쉬면서 따라갔다.

판을 내주는 건 영 탐탁지 않은데. 부탁을 하러 온 이상, 아무래도 주도권은 저쪽으로 넘어간 것 같았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들었다.

정말 브라함은 어떻게 용의 인자를 읽은 걸까?

* * *

갈리어드가 이동한 곳은 악마의 숲에서 동남쪽에 위치한 어느 언덕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단순히 유령들이 돌아다니는 숲의 일부로만 보였지만. 어느 지점을 통과한 순간, 공간을 따라 작은 파문이 그려지더니 주변 광경이 확 달라졌다.

우중충하던 붉은 하늘 대신에 맑은 푸른 하늘이 열렸고, 을씨년스럽던 숲은 상쾌한 바람을 한껏 가져다주는 곳이 되었다.

한쪽에서는 시냇물이 졸졸 흐르고 있었다.

‘심상 결계.’

연우는 자신이 통과한 곳이 무엇인지 눈치채고 조금 묘한 눈빛을 뗬다.

심상 결계. 심상 세계를 구축하는 결계를 의미한다. 단순히 결계가 외부와 내부를 구분 짓는 경계선이라면, 심상 결계는 구분된 내부를 시전자의 색으로 물들일 수 있게 만드는 고차원적 마법이었다.

이를테면, 연우가 구축할 수 있는 영역이 보다 더 구체화된 형태라 할 수 있는 바.

이곳은 브라함이 구축한 그만의 성(城)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당연히 이것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상당한 수고와 노력, 그리고 물자와 시간을 필요로 했다.

그런데도 이렇게 설치해 뒀다는 뜻은 딱 하나.

브라함이 알려진 것보다 더 오랫동안 23층에 본거지를 마련하고 살았다는 뜻이었다.

‘대체 여기에 뭐가 있기에?’

갈리어드가 말했다.

“앞으로 보게 될 건 다른 곳에 절대 발설하면 안 될 거다. 아니, 어쩌면 당분간 일이 해결될 때까지 강제로 억류될 수도 있으니, 내키지 않으면 지금이라도 되돌아가라.”

어차피 연우도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연우는 그래도 괜찮다고 대답한 뒤, 물었다.

“여기서 보호하고 있는 것. 엘로힘이 쫓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겁니까?”

“맞다.”

갈리어드는 고개를 끄덕이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 그의 눈가로 살짝 안타까운 빛이 스쳐 지나갔다. 연우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곧 두 사람은 심상 세계의 가장 중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유일하게 나무가 자라지 않는 넓은 공터. 원래 브라함이 머물렀던 모옥과 똑같이 생긴 모옥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마당에는 학자처럼 안경을 쓴 한 남자가 여자아이와 놀고 있었다.

숨바꼭질이라도 하던 중이었는지, 여자아이는 꺄르르 웃으면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다가, 갑자기 인기척이 느껴지자 우뚝 멈췄다.

그리고 갈리어드 외에 다른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황급히 남자의 뒤편으로 숨었다.

‘용인(龍人)?’

더불어 연우의 눈도 덩달아 같이 커졌다.

여자아이는 각성을 이뤘을 때의 연우와 생김새가 많이 비슷했다.

전체적으로 인간의 형태를 폈지만 상체 일부가 비늘로 덮여 있었고, 치마 아래로는 도마뱀 꼬리가 기다랗게 나 있었다. 뾰족한 송곳니와 세로 동공, 등에는 아주 작은 날개도 달려 있었다.

용인이었다. 수백, 혹은 수천 년에 한 번씩 용종과 인간 사이에서, 종족의 한계를 뛰어넘어 태어난다는 이질적인 존재.

달리 반인반룡이라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분명 용인은 아난타를 끝으로 더 이상 없을 텐데?’

고룡 칼라투스를 마지막으로 용종이 멸종한 후, 용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플레이어는 탑 내에 단 셋밖에 되지 않았다.

최후의 용, 여름여왕.

반인반룡, 아난타.

고룡의 후계자, 차정우.

하지만 여기서 차정우는 죽었으니 단둘만 남은 상태.

여기서 여름여왕은 레드 드래곤의 수장으로 있었고, 아난타는 갑자기 알 수 없는 이유로 종적을 감췄다.

그리고 연우는 아난타가 사라진 이유를, 일기장을 통해 알고 있었다. 아난타가 마지막으로 만났던 사람이 동생이었던 탓이었다.

그런데 새로운 용인이 나타났다고?

물론, 용인의 몇 안 되는 후손들 중에 간혹 용의 인자가 깨어나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잠재 능력이 개화되는 정도일 뿐. 저렇게 또렷한 용의 특징을 지니지는 않았다.

그래서 연우는 자기도 모르게 시선이 그쪽으로 가고 말았다.

엘로힘이 관심을 두는 것도 이해는 되었다. 용종의 포섭은, 원래 엘로힘의 오랜 숙원 사업 중 하나였으니까.

여자아이도 그런 시선을 느끼고 부담스러웠던지, 더 깊숙이 남자의 뒤편으로 몸을 숨겼다. 옷자락을 쥐고 있는 고사리 같은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남자는 괜찮다면서 여자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안경을 고쳐 쓰면서 연우를 봤다. 여자아이를 대할 때와 다르게 싸늘해진 눈빛이었다.

그가 바로 브라함.

엘로힘에서 쫓겨났지만 그 사실을 자랑스러워하고, 언제나 자유를 추구하며 한없이 냉소적인 남자.

그리고 주신 브라흐마가 98층을 떠나 세상에 내려앉기 위해 육체를 입고 강림한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

“네가 용의 힘을 품고 있던 바로 그 녀석이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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