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악마의 숲 (5)
성육신.
이것은 분신이나 화신과는 그 개념이 아주 많이 달랐다.
분신은 언젠가 사라지게 될 복제된 허상에 불과하고, 화신은 수많은 인격 중 하나가 독립성을 부여받아 잠시 외출한 형태였다.
흔히 사도가 신의 집행자이자 화신이라고 불리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신의 직접적인 가호와 간섭을 받는 그들은, 신의 권능을 행사하는 대신에 신과 일부 섞여 드는 황홀경을 자주 겪어야만 한다. 어떨 때에는 자아와 신의 경계선을 잃을 때도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주체성이 결여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성육신은 이런 분신이나 화신보다 개념이 훨씬 높았다.
신이 ‘직접’ 육체라는 감옥에 갇혀 이 세상에 강림한 형태였으니까.
16층의 앉은뱅이 세 여신과도 개념이 조금 달랐다. 그들은 성역을 벗어나 권능을 행사할 수 없다.
하지만 성육신은 자유롭게 층계를 오고 가는 것이 가능했다.
다만, 육체라는 감옥에 갇혀 있기 때문에 발휘할 수 있는 권능에 한계가 있고, 이곳에서 죽는다는 건 영혼에도 상당한 타격이 가 자칫 신격을 박탈당할 가능성이 컸다. 어쩌면 정말 소멸을 맞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신과 악마들은 사도를 두는 것을 선호하지, 절대 성육신을 만들지 않았다.
자칫 죽을 수도 있는 일. 그리고 권능도 행사하지 못하는 숨 막히는 감옥에 자처해서 들어갈 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브라흐마 신은 달랐다.
그는 98층 신과 악마들과 엮이는 것을 아주 증오했고, 그래서 하층으로 내려왔다.
엘로힘에서 스스로 걸어 나온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가 봤을 때에는 그들의 특권 의식은 98층의 신, 악마들과 다를 게 없었다.
다만, 엘로힘의 입장에서는 신의 현신(現身)을 무시할 수 없으니, 그와 대립하지도 못하고 멀리서 지켜보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리고 그사이, 브라함은 층계를 자유롭게 오고 가면서, 자신이 추구하는 신위와 신화를 풀어 나갔다.
브라흐마 신의 신위는 창조. 그리고 지식이다.
대가 끊긴 연단술에 손을 대고, 갖가지 실험을 해 가면서 알지 못하는 지식을 알아나가는 것. 그것만으로도 브라함은 충분했다.
물론, 브라함이 브라흐마 신의 성육신이라는 사실은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져 있었다.
널리 알려져 봤자 자신에게 도움이 될 일이 하나도 없으니까.
브라함의 철칙은 아주 간단했다. 자신과 관련된 일이 아니면 절대 간섭을 하지도, 받지도 않는다는 것.
엘로힘도 자신들의 수치라 할 수 있는 사건이 퍼지지 않게 하기 위해 그를 철저히 숨기고자 했다.
사실 동생이 브라함의 정체를 알고 있는 것도, 오래전에 겪었던 어떤 사건을 통해서일 뿐.
어디 가서도 발설하지 않도록 약속했기 때문에 어디에서도 발설치 않았다.
있다면 일기장뿐.
물론, 연우도 여기에 대해서 아무런 발설도 하지 않았다.
현자의 돌을 만드는 데, 브라흐마 신의 성육신이라는 사실은 아무런 관련도 없었으니. 그도 브라함과 마찬가지로, 자신과 연관 없는 일에는 굳이 개입할 필요를 못 느꼈다.
하지만.
상대가 자신의 숨겨진 능력을 알아본다는 사실은 조금 짜증이 났다.
* * *
연우는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브라함과 여자아이를 번갈아 봤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여기서는 뭐라고 대답하는 게 좋을까. 끝까지 잡아떼는 게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용마안 때문입니까?”
연우는 결국 일부 비밀을 털어 놓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상대가 확신을 가지고 있는 이상, 계속 잡아떼는 것도 무리가 있다. 게다가 한동안 옆에서 기술을 전수받으려면, 우선 신뢰를 쌓아야만 했다.
사실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할 때에는 현자의 돌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비밀을 털어 놓을 생각이기도 했다.
다만, 비밀이 새어 나갈 걱정은 전혀 하지 않았다.
‘정우가 죽어 가는 상황에서도 결국 끝까지 도움을 주지 않을 정도로, 자신의 신념에 철저한 자이니까.’
원망이 없다면 거짓말이었다.
동생은 그래도 친한 지인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결국 끝까지 도와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상대편에 서지도 않았지만. 철저한 방관만 고수했다.
하지만 거래 상대로는 충분히 믿을 만했다.
“맞다. 정확하게는 이 아이의 눈과 내 스킬이 같이 작용했기 때문이지만.”
브라함은 여자아이의 머리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옷깃을 붙잡고 있는 여자아이의 손길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연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여름여왕도 전장에만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용마안으로 자신을 살폈더라면 들켰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니, 어쩌면 드래곤 하트가 망가져서 더 몰랐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여자아이의 용마안에 브라함의 권능이 더해진다면. 아마도 더 큰 효력을 띨 것이다. 정확하게는 브라함의 권능 9할에 용마안이 1할만 작용한 것일 테지만.
물론, 연우는 이번에도 모른 척 넘어갔다.
대신에 여자아이를 살피면서 물었다. 여자아이가 더 뒤로 바짝 숨었다.
“아난타의 자식입니까?”
브라함은 눈을 빛냈다.
“그녀를 아나?”
“이름만 들었습니다. 여름여왕은 자신의 종족을 증오해 후세를 남기길 거부하고 있고, 칼라투스의 의지를 이었던 헤븐윙은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아난타밖에는 남지 않죠. 저 아이는…… 쿼터쯤 되겠군요.”
하프였던 아난타와 짝을 맺을 용종은 남아 있지 않으니. 그리고 초감각으로 슬쩍 살펴봐도, 아난타보다 훨씬 잠재력이 약했다.
“엘로힘에게 쫓기는 이때, 저를 들이신 것은 아무래도 저 아이 때문인 것 같고. 그것을 두고 거래를 하시려는 겁니까?”
브라함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어떻게 보면 만족에 찬 미소로도 보였지만, 또 어떻게 보면 냉소에 가깝다 싶을 정도로 시니컬한 미소이기도 했다.
대화가 잘 통하는 상대를 만났을 때에는 무엇이든 만족스러운 법이다.
“왜? 나쁜가?”
“설마요. 오히려 저로서는 더 다행이다 싶습니다. 사실 당신과 어떤 거래를 해야 할지 고민하던 차였으니까요.”
물론, 생각을 안 해 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거래 내용을 브라함이 제시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만큼 협상이 부드럽게 진행 될 테니까.
브라함이 내걸려는 조건은 아주 간단했다.
‘저 아이가 아직 깨우치지 못한 용의 권능이나 습성을 유도케 하려는 거겠지.’
여자아이는 용인이면서도 아직 용종의 힘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어미인 아난타는 대체 어디로 간 걸까?
“좋아. 그럼 우선 그대가 거래 대상이 될 자격이 있는지부터 확인해 봐야겠지. 넌, 누구지?”
이름을 묻는 게 아니다. 용의 후계가 모두 사라졌다고 알려진 지금, 어떻게 새로운 후계가 나타날 수 있는지를 묻는 것이다.
“굳이 거기에 대해 대답할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만. 대신에 자격만 보이면 되는 거 아닙니까?”
연우는 확실하게 선을 그어 두고, 용체 각성을 시도했다.
화아악-
피부 위로 용의 비늘이 잔뜩 올라왔다. 푸른색보다는 남색에 가까운 색깔. 눈동자에도 용마안이 열리면서 세로 동공이 맺혔다.
“……아!”
힐끔 이쪽을 쳐다보던 여자아이는 입을 쩍 벌리며 처음으로 소리를 냈다. 다시 얼굴이 빨개져 브라함의 뒤로 숨었지만, 곧 빼꼼 머리를 내밀어 연우를 훔쳐봤다.
동족을 찾은 것에 대한 안도감이 보였다.
연우는 다시 브라함을 보면서 물었다.
“이 정도면 되겠습니까?”
“충분하군.”
“그럼 더 자세한 이야기를 나눠 보도록 하죠.”
* * *
연우는 브라함을 따라 모옥으로 들어갔다.
모옥은 연단술사의 거처답게, 곳곳에 갖가지 시약과 시료들이 분류별로 나눠져 있었고, 해괴한 재료들을 따로 보관한 보관함도 많았다.
갈리어드는 혹시 아이테르 등이 뒤를 밟았을 수 있으니 잠시 주변을 살펴보고 오겠다면서 자리를 비웠다.
덕분에 연우는 브라함과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사실 갈리어드가 그대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더라면, 용의 기운이 느껴졌어도 절대 초빙을 하지 않았을 거야. 저 까만 놈이 그렇게 자주 거론하는 놈은 네가 처음이었으니까. 물론, 내 이름을 팔았던 건 좀 불쾌했지만.”
“그건 사과드리겠습니다.”
브라함이 유일하게 마음을 연 사람이 있다면 딱 한 사람을 꼽을 수 있었다. 갈리어드.
처음에는 운디네의 잔을 구하기 위해 시작되었던 관계가, 이제는 각별한 친구 사이로 발전했다.
연우는 속으로 갈리어드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본격적으로 이야기에 들어갔다.
“당신은 타인의 일에 철저하게 무관심하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아난타의 아이를 돌보게 된 것입니까?”
“네가 용인인 이유를 말해 주지 않듯, 나 역시 거기에 대해서 말해 줄 필요는 없을 텐데. 다만, 아난타와의 거래였다는 정도만 말해 두지.”
브라함이 눈을 가늘게 좁혔다.
“어차피 우리에게 중요한 건 서로 간에 필요한 걸 채우면 되는 것 아닌가?”
브라함은 철저하게 선을 그으면서 거래 조건에 대해 말했다.
“내가 요구할 건 하나. 당분간 이곳에 머물면서 저 아이에게 용과 관련된 지식을 전수해 줬으면 좋겠어.”
연우는 여자아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기둥 뒤에 숨어서 빼꼼 고개를 내밀고 이쪽을 살피다가, 연우와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기둥 뒤로 모습을 감췄다.
“이야기해 줘야 할 선이 있습니까?”
“아니. 네가 아는 것이라면 전부 말해 줘. 권능, 지식, 족보. 그들의 위치. 필요하다면 역사까지도.”
역사를 말해 주라는 건 조상의 멸종에 대해서도 거리낌 없이 이야기하라는 뜻이었다. 처음 봤을 때에는 그래도 친딸처럼 아껴 주는 것 같더니. 이런 면에서는 철저한 것 같았다.
“아이 이름은 무엇입니까?”
“세샤.”
세샤. 용종의 언어로 ‘잔여’라는 뜻이었다.
어쩌면 여자아이에게 잘 어울리는 이름일지도 몰랐다. 조금은 슬프지만.
“그리고 때에 따라서는 보호자 역할도 해 줬으면 해. 되도록 외부로부터 방비는 우리가 신경 쓸 테지만. 그래도 모르는 일이라. 너도 아이를 지킬 실력은 되는 것 같고.”
“알겠습니다. 하죠.”
브라함은 연우가 너무 순순히 조건을 받아들이자 살짝 놀란 눈이 되었다. 어떻게 보면 자신들이 겪고 있는 일에 같이 휘말리라는 말이 될 수도 있는 것인데. 너무 쉽게 받아들인 것이다.
하지만 연우로서도 그 정도는 각오해야만 했다. 사실 그 역시 조금 무리한 부탁을 할 생각이었으니.
“그럼 제 조건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말해.”
“당신이 집필했다는 ‘수성의 서’를 배우고 싶습니다.”
“……!”
브라함의 눈빛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를 따라 불길한 기운이 감돌면서 연우의 주변을 뱅글뱅글 맴돌았다.
언제나 밝았던 심상 세계의 분위기도 유독 무겁고 우울해졌다.
사실 이건 위험한 발언이었다. 수성의 서는 브라함이 신이었을 시절의 기억과 하층으로 내려와 추가로 쌓은 지식을 합쳐 만든 연단술서였다.
어쩌면 그의 모든 것을 담은 총아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을 내어 달라고 했으니.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것도 당연했다.
특히 이곳은 브라함의 영역 속. 자칫 연우가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연우는 태연했다.
“세샤가 겁을 내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괜찮습니까?”
브라함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기운을 거둬들였다. 처음으로 보인 감정의 동요. 연우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아무래도 브라함은 생각했던 것보다 세샤를 훨씬 더 아끼는 것 같았다. 어쩌면 정말 친딸처럼 여기는지도 몰랐다.
“수성의 서는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갈리어드와 이야기를 나눌 때 듣지 않으셨습니까? 귀환자에게서 들었습니다.”
“그것을 아는 자는 없다.”
“전무한 것은 아니죠. 몇 명은 직접 봤었으니까요.”
브라함은 예리하게 눈을 뜨면서 연우를 노려봤다. 자신의 총아이자 약점을 내어 달라는 것만큼 무례한 것은 없다. 아마 이 순간에도 그는 계속 계산하고 있을 것이다. 연우를 이대로 둘지. 아니면 처치를 할지.
연우는 여기서 한 발 물러서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물론, 전부 배우겠다는 건 아닙니다.”
“그럼?”
“연금술과 관련된 항목이면 됩니다.”
“연금술?”
“예.”
브라함의 눈빛이 살짝 가라앉았다.
“수준은?”
“가능한 것까지라면, 전부.”
“나머지는 용의 지식으로 응용해서 채울 셈이겠군.”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브라함은 잠깐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리저리 계산을 해 보는 것이다. 자신에게 불리한지, 아니면 유리한지.
“연금술에 대한 지식은?”
“기초 수준 정도는 된다고 생각합니다. 기본기이긴 해도 헤노바에게서 야금술을, 빅토리아에게는 룬 마법을 배운 적이 있습니다.”
브라함은 뜻밖이라는 표정이 되었다. 그도 사실 5대 명장에 드는 실력자. 다른 두 실력자에게서 ‘기초’를 배웠다면, 보통 사람들의 기준으로는 상급에 해당했다.
“그건 다행이군. 기초 지식부터 가르치는 건 성에 차지 않아서. 그리고 나도 따로 해야 하는 일이 있어, 많이 가르쳐 주지는 못해.”
“그래도 괜찮습니다.”
“좋아. 그럼 이걸로 계약 조건을 마무리하지.”
두 사람은 마나의 언약을 걸어 맹약서까지 기술한 뒤에야, 손을 맞잡을 수 있었다.
「이것 참. 엄청 살 떨리는 아저씨네, 저거. 왜 저렇게 말투가 딱딱해? 한 대 쥐어박을 뻔.」
「그래도 합리적인 성격이라고 들었는데. 저 아이 때문인가?」
브라함을 둔 샤논과 한령의 평가였다.
* * *
그 뒤부터 연우는 매일 밤마다 2시간씩 브라함으로부터 연금술에 대한 강론을 듣기 시작했다.
다행히 헤노바에게서 배운 지식은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 헤노바는 자신이 가르쳐 준 것들이 별것 아니라는 식으로 둘러댔지만, 사실은 오랜 대장장이 생활로 습득한 노하우였기 때문에 깊이가 남달랐던 것이다.
오히려 몇몇은 브라함이 배워 갈 정도였다.
그리고 낮에는 주로 연우가 세샤를 돌봐 줘야 했다. 원래는 브라함이 했던 일이었지만, 자신은 따로 또 해야 할 일이 있다며 자리를 비우는 터라 어쩔 수가 없었다.
「예정에도 없는 보모 역할이로구만. 꽤 고생하겠는데? 으흐흐!」
샤논은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 계속 키득거렸다. 아무래도 무뚝뚝한 성격인 연우가 아이를 잘 돌볼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울리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세샤도 동족이라 할 수 있는 연우에게 조금 관심을 보이긴 했지만, 섣불리 다가가지는 않았다. 먼발치에서 기둥 뒤에 숨어 힐끔 힐끔 훔쳐보는 게 전부였다. 말도 없었다.
「저 봐. 되게 경계하는데? 주인, 어쩔래? 저러다가 뭘 가르쳐 주기는커녕 울기라도 하면 말짱 도루묵이잖아. 엣헴. 그래도 걱정 말라고.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사실 여러 미망인들을…….」
‘누가 못 돌본다고 했지?’
「엥? 그거야……!」
샤논은 자신만만한 연우의 대답에 ‘이게 아닌데?’라는 생각을 했다.
연우는 샤논을 무시하고 갑자기 부엌으로 가더니 조리 기구를 이것저것 살피기 시작했다. 다행히 남자 어른들만 있는 것과 다르게 취사에 필요한 것들은 다 있었다.
그중에서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고, 인트레니안에서 밀가루를 비롯해 계란, 백설탕, 우유, 식용유, 딸기, 바나나, 초코 시럽 따위를 꺼내 올려 뒀다.
그리고 머릿속 한편에 묻어 뒀던 기억을 되짚으면서, 레시피를 따라 조리를 시작했다.
「으잉? 이게 뭐야?」
「요리를 하시려는 것 같은데. 꽤 익숙해 보이시는군.」
「뭐? 이 벽창호가, 요리를?」
연우는 샤논이 놀라거나 말거나, 밀가루와 베이킹파우더, 버터, 백설탕 등을 적절히 배합해 반죽을 만들고, 꺼낸 계란 두 개를 깨서 흰자와 노른자로 나누어 머랭을 치기 시작했다.
뒤에서 가만히 연우가 하는 일을 지켜보던 세샤는 궁금증이 생겨 계속 시선을 이쪽에다 고정시켰다.
연우는 세샤의 시선을 느꼈지만 못 본 척했다. 이럴 때는 모른 척하면서 저쪽에서 다가오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쪽에서 억지로 나가 봤자 오히려 더 멀리 도망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프라이팬에 계란을 섞은 반죽을 두르고, 불에다 노릇하게 가열시켰다.
고소한 냄새가 풍기자, 세샤는 뭔가에 홀린 표정으로 조금씩 이쪽으로 다가왔다. 입가에 침이 살짝 고였다. 때마침 식사 시간도 꽤 지나 출출하던 참이었다.
“이거…… 뭐예요?”
결국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세샤가 조용히 연우의 옷깃을 잡아당기면서 물었다.
“간식.”
“간식이요?”
세샤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연우는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꼭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모습. 숨겨 뒀던 추억 하나가 떠올랐다.
조리가 끝난 팬케이크를 접시에다 담고, 그 위에 얇게 썬 딸기와 바나나 조각을 보기 좋게 올렸다. 그리고 초코 시럽을 살짝 위에다 뿌려 주면서 식탁에다 올렸다.
“먹어라.”
세샤는 짧은 다리로 낑낑대면서 의자에 올라가 허겁지겁 팬케이크를 먹기 시작했다. 맛있던지 입가에 시럽을 잔뜩 묻혔다.
연우는 옆에서 손수건으로 조용히 세샤의 입가를 훔쳤다. 별말은 없지만, 더할 나위 없이 자상한 모습이었다.
「세상에……! 이건 내일 세상이 무너질 징조야! 탑이 무너질 거라고오!」
「저런 면도 있으셨군.」
샤논은 유달리 호들갑을 떨었고, 자식을 키운 경험이 있는 한령은 옛 기억이 떠올라 흐뭇하게 웃었다. 레베카도 연우의 머리 위로 슬쩍 나타나 웃음을 흘렸다.
연우는 귀엽게 냠냠 먹는 세샤를 보는 내내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보는 내내. 여태 잊고 있었던 추억이 조금씩 떠올랐다.
아프리카에 있을 시절. 아주 짧았지만, 잠시나마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게 했던 연애 생활이 있었다. 그때 사귀었던 여자 친구에게 이만한 딸이 있어서, 자주 팬케이크를 해줬었다.
결국에는 헤어지게 되었지만. 그래도 연우에게는 몇 안 되는 추억 중 하나였다.
“맛있니?”
“네!”
세샤는 접시 바닥에 있던 초코 시럽까지 전부 혀로 핥고, 깨끗해진 접시를 앞으로 내밀었다.
“더 주세요!”
연우는 활짝 웃는 세샤를 보면서 미소를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