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194화 (194/862)

19화. 악마의 숲 (9)

“으으, 불편해 죽겠네, 정말.”

“입 다물고 그냥 해.”

에도라는 투덜대는 판트의 등짝을 세게 두들겼다.

이미 외뿔부족 청람가의 남매가 연우와 함께한다는 소문은 널리 퍼져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그들도 똑같이 다른 복장으로 정체를 숨긴 상태였다.

에도라는 로브를 푹 뒤집어써서 마법사처럼 꾸민 상태였고, 판트는 뿔을 훤히 드러냈지만 얼굴 생김새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원래 선이 굵은 남자다운 인상이었다면, 지금은 중후한 느낌이 물씬 풍기는 중년인의 얼굴이었다.

연우는 감쪽같은 변장에 놀란 눈빛으로 판트에게 물었다.

판트는 간지럽기만 한 얼굴을 벅벅 문지르다가 가볍게 투덜거렸다.

“인피면구란 것이우.”

“인피면구?”

“우리 부족에서만 나는 특산물. 아마 밖에는 잘 안 알려졌을 겁니다. 보통 우리 측에서 정체를 숨길 필요가 있거나, 비밀리에 움직일 때 쓰는 거라.”

착용하는 것도 꽤 많은 수고를 필요로 하는 것 같았다. 여러 약품을 얼굴에 고루 바르고, 면구를 써서 한 시간 동안 가만히 서서 말려야 했으니까.

게다가 많이 간지러운지, 판트는 수시로 얼굴을 긁어 댔다.

그래도 다른 얼굴로 꾸민 티가 전혀 나지 않을 만큼 자연스러운 데다가, 흡착력도 좋은지 마구 긁어도 벗겨지지 않았다.

‘저거라면 나중에 필요할 때 가면 대용으로 쓸 수도 있겠는데.’

연우로서는 구미가 당길 만했다. 애당초 얼굴을 숨기기 위해 가면을 썼지만, 이제는 가면도 유명해져 버렸으니까.

‘검은 가면 = 독식자 카인’이라는 공식도 성립해 버린 것 같았다.

그래서 필요할 때에는 하얀 귀신의 얼굴로 갈아 끼우긴 하지만. 그래도 인피면구를 한두 개쯤 갖고 있으면 필요할 때 요긴하게 쓰일 것 같았다.

“혹시 나도 몇 개 구할 수 있을까?”

“사실 외인에게는 절대 안 내주는 비급품이긴 하지만. 뭐, 형님이 내어 달라고 하면 아버지도 주지 않겠수?”

연우는 나중에 무왕에게 부탁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판트는 사람들로 북적대는 호숫가를 보면서 인상을 잔뜩 구겼다.

“대체 여기는 왜 이렇게 사람이 많은 거유? 좀 짜증 나네. 이렇게 폐허가 된 곳에서 볼 게 뭐가 있다고.”

원래 수많은 악마수로 빼곡하게 둘러싸여 있던 드 로이 호수 일대는 연우와 아이테르 등의 싸움으로 폐허가 되어 있었다.

생존력이 뛰어난 악마수이니 만큼, 곳곳에 벌써 싹을 틔우는 녀석들도 있긴 했지만.

그래도 이제 마족들도 쉽사리 접근하기를 꺼려 할 정도로 시커먼 황무지였다.

하지만 플레이어들은 그런 것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호숫가에 모여 저마다 팀을 이룬 채로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곳곳에 묘한 신경전을 벌이는 녀석들도 더러 있었다.

“각룡의 출몰 시기라서 그럴 거다.”

드 로이 호수에 출몰하는 각룡은 일정 기간 동안 여러 번의 포식으로 강해질 대로 강해진 마족이, 상위 계급으로 변태(變態)하기 위해서 호숫가를 찾으면서 출몰한다.

이를테면, 각룡은 성충으로 거듭 나려는 번데기와 같은 신세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각룡의 시기를 제대로 버텨 내기란 쉬운 게 아니어서, 보통 이때 갑갑한 육체를 참지 못하고 제 성격대로 굴다가 죽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리고 버틴다고 해도 더 높은 마족으로 거듭날 뿐이지, 바로 악마가 되는 건 아니었다. 악마까지 성장하기 위해서는 각룡 때와 비슷한 여러 번의 고된 과정을 견뎌야 했다.

그런데다 최근에는 각룡의 존재가 널리 퍼지면서 나타나는 대로 주살되는 터라, 찾기가 더더욱 힘들었다.

그리고 지금이 딱 각룡이 등장할 시기였다. 몇 달마다 한 번씩 찾아오는.

“각룡? 그거 히든 피스라 하지 않았수?”

“이제는 히든 피스라고 하기에 부끄러울 정도로 많이 퍼져 있다고 말하지 않았었나?”

“으으. 그건 좀 마음에 안 드는데.”

판트는 꼭 좋아하는 음식을 빼앗긴 사람처럼 발을 동동 굴렸다. 그러다 고개를 모로 꺾었다.

“그냥 확 다 쫓아내 버리면 안 되나?”

“그만둬.”

연우는 혹시 판트가 사고를 칠까 확실하게 못을 박았다. 말을 듣지 않으면 그냥 마을로 쫓아내 버릴 거라고. 아니면 따로 움직이던가.

사실 연우라고 그러고 싶은 마음이 왜 없을까.

하지만 아이테르와 엘로힘이 23층에서 떠났다는 게 확실해지지 않은 이상, 최대한 자중해야만 했다.

연우가 아무리 강해졌다고 해도 아직 아이테르 등을 정면에서 싸워서 이길 정도는 아니었다.

사실 첫 충돌에서 갈리어드를 도울 수 있었던 것도, 기습의 이점을 최대한으로 살리면서 불의 파도를 사용했기 때문이었지, 그런 행운이 또다시 주어지지는 않을 것 같았다.

‘현자의 돌을 완성시킬 수 있다면. 그런다면 하이 랭커와의 싸움에서도 더 이상 밀리지 않을 수 있어.’

그래서 조금 더 신중에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었다.

‘이곳에 엘로힘 녀석들이 섞여 있을지도 모르고.’

연우는 호숫가에 온 뒤로 초감각을 항시 날카롭게 벼르고 있었다. 엘로힘은 오만한 그들의 성격 때문에, 그들만이 가진 특유의 기질 같은 게 있었다. 찾아낸다면 즉각 움직일 생각이었다.

“아마 각룡을 사냥하기 위해서 플레이어들 간에 꽤 복잡한 거래가 오고 가고 있을 거야. 우리는 일단 거기에 편승할 생각이다.”

“음? 형님의 인성으로 설마 이것들이랑 같이, 사이좋게, 손에 손잡고 평화롭게 사냥할 생각은 아닐 테고?”

연우는 판트의 말에서 ‘인성’이라는 단어가 유독 거슬렸지만, 못 들은 척 넘어갔다.

“당연히 스틸해야겠지.”

“크! 역시 우리 형님의 불어 터진 인성! 역시 아버지의 제자답수!”

“그 전에 네가 저 호수에 처박혀서 불어 터질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해 봤나?”

“헤헤. 형님, 내가 예전부터 형님을 많이 따르고 있다는 것, 잘 알고 있잖수?”

연우는 두 손을 살짝 비비면서 비굴하게 웃는 판트를 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갈수록 능글맞아져 가는 것 같았다.

“그러니 일단 당분간은 되도록 시비 다툼은 하지 마. 걸리면 네가 죽는다.”

연우가 주먹을 들며 으르렁거렸다.

판트가 능글맞게 웃었다.

“으핫. 형님도 참. 누가 들으면 내가 매번 사고나 치는 놈인 줄 알겠수다. 그런 건 걱정 마쇼. 참을성하면, 또 이 판트 아니우?”

판트는 주먹으로 가슴을 두들기면서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런 모습이, 연우는 왠지 모르게 더 불안했다.

* * *

그런 불안이 현실이 되는 건, 불과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쾅!

“뭐? 그래서 너네들끼리 다 해처먹겠다, 이 말이잖아?”

판트는 거들먹거리던 플레이어의 면상을 주먹으로 세게 후려쳤다. 투구가 그대로 박살 날 정도로 강한 충격이었다.

우당탕탕-

“씨발! 저 새끼 쳐!”

“으하하! 그래. 덤벼라, 새끼들아!”

판트는 마구잡이로 달려드는 놈들을 그대로 박살 내기 시작했다.

연우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짜증을 삭여야만 했다. 투구만 아니었다면 관자놀이라도 꾹꾹 눌러 댔을 것이다.

판트가 싸우기 시작한 이유는 간단했다.

갑자기 일련의 무리들이 잔뜩 나타나더니, 앞으로 나타날 각룡은 자신들이 접수했으니 나머지는 전부 물러나라는 명령을 했기 때문이었다.

수백 미터 밖에서 구경하는 건 봐주겠다는 말도 안 되는 말을 섞어 가면서.

당연히 반발이 따를 수밖에 없었지만, 그렇다고 섣불리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호숫가를 점거한 무리 중에 랭커가 한 명 끼어 있었다.

얼음 독사, 라오.

뱀처럼 은밀하게 다니면서 적들을 빙독(氷毒)에 중독시킨다고 해서 붙은 별칭이었다.

거기다 배후에 8대 클랜 중 하나인 ‘혈국’을 두고 있다는 소문까지 있을 정도라, 섣불리 충돌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여태 모습을 드러낸 후로 한 번도 입을 뗀 적이 없었지만. 이미 라오가 모습을 비친 것만으로도 이곳은 혈국이 접수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아마 각룡이 출몰할 시간에 맞춰서 혈국의 플레이어들이나, 산하 조직들이 나타날 게 분명했다.

결국 여러 플레이어들과 클랜들은 다음 출몰 시기를 기약하면서 발걸음을 돌려야만 했다.

하지만.

거기에 가만히 있을 판트가 아니었다.

누군가가 앞을 가로막는다면 우선 부숴 놓고 봐야 속이 풀리는 성격답게, 혈국만 믿고 자신의 눈을 똑바로 보면서 도발하는 놈의 면상을 후려친 것이다.

선수필승. 판트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었다.

당연히 난리가 날 수밖에 없었다.

플레이어들은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판트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판트는 오히려 잘됐다는 듯, 주먹을 불끈 쥐면서 덤비는 놈들을 모조리 두들겨 팼다.

11층에서부터 쭉 올라오면서 받은 보상으로 제법 능력치도 올랐던 건지,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강렬한 뇌기가 터져 나갔다.

콰르릉-

에도라는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었다.

층계를 오르는 내내 하루가 멀다 하고 똑같이 보던 모습이라, 이제는 신물이 날 지경이었다. 저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은 시비를 걸지 않으면 어디 좀이 쑤시는 병이라도 있는 걸까.

사실 판트가 무왕이나 연우에게 인성을 운운하는 것 자체가 잘못 된 거였다. 그러고 보니 장로들이 무왕의 많은 자식들 중에서 젊은 시절의 무왕과 가장 가까운 성격을 가진 게 판트라는 말을 하긴 했었다.

그러다 에도라는 슬쩍 연우를 돌아봤다. 조금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섞였다.

“오라버니, 저거…….”

“아니. 기다려.”

연우는 손을 뻗어서 말려야 하지 않을까 하는 에도라의 말을 막았다.

그도 판트가 말을 듣지 않고 깽판을 치기 시작할 때부터 말릴까 하는 생각을 잠깐 하긴 했지만. 이렇게 보니 차라리 잘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혈국이라. 저것들이 갑자기 여기서 튀어나올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

혈국(血國)은 스스로를 ‘나라’라고 지칭하는 자들이었다. 어느 멸망한 세계의 후예라고 자처하는 그들은 이렇다 할 영토도, 주권도, 영토도 없지만. 언젠가 새롭게 잊어버린 땅을 되찾겠다면서, 언제나 불타는 사명감을 가슴에 품고 살았다.

혈국이 추구하는 바는 아주 간단했다.

약속 받은 땅의 도래(到來).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세계를, 언젠가 탑에서 되살리겠다고 선언하는 자들이었다.

어떻게 보면 사라져 버린 옛 허상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유랑민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언제나 사명감에 불타 살았고, 나라를 복원시키기 위해서는 강한 무력을 필요로 한다는 생각에 자기 단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게다가 집단적인 성격도 아주 강해서, 모두가 그들과 부딪치기를 꺼려 하는 편이었다.

그런 자들이 갑작스레 나타났다.

23층에서 엘로힘과 혈국이 같이 나타났다?

‘그것도 하필 이런 시기에? 우연히? 말도 안 되는 소리.’

아무리 드 로이 호수의 각룡이 유명하다고 해도, 혈국의 산하 조직을 시키면 시켰지 그들의 랭커가 직접 움직일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나타난 이유가 있다면.

‘엘로힘과 관련이 있거나. 아니면 브라함 때문일지도. 그것도 아니면 나를 스카웃하러 왔던지.’

엘로힘의 눈길도 피해야 하는 이때. 혈국까지 나타났다면 저들의 정확한 속내가 뭔지를 확실히 알아야만 했다.

그래서 판트가 사고를 좀 치더라도, 저들이 어떻게 나오는지를 보고 판단을 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재미난 그림을 그릴 수 있을지도 모르고.’

이런 저층 구간에서 만난 엘로힘과 혈국. 자존심이 강하기로는 8대 클랜에서도 손꼽힌다는 놈들이 마주치도록 유도한다면. 어쩌면 재미난 장면을 볼 수 있을지도 몰랐다.

‘문제는 라오라는 저 랭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건데.’

라오는 수하들이 계속 나가떨어지는데도 불구하고, 가만히 앉은 채 꿈쩍도 않았다.

판트의 기세에 눌려 덤빌 엄두도 내지 못한 자들은 그런 라오를 힐끔힐끔 돌아봤다.

차마 말은 하지 못해도 도와 달라는 눈빛.

하지만 라오는 무신경한 눈빛만 하고 있을 뿐. 전혀 개입할 의사를 내비치지 않았다.

그냥 무심하게 상황을 지켜볼 뿐이었다.

쾅!

결국 마지막까지 달려들던 녀석이 판트의 주먹 한 방에 양팔이 부러진 채 나가떨어진 뒤, 더는 누구도 달려들지 못했다.

우드득. 우득.

“뭐야, 이거? 설마 끝이야? 아까 전에 자신만만하게 큰소리칠 때는 언제고, 지금은 꽁무니를 말아?”

판트는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면서 차갑게 말했다. 앞으로 성큼 한 발자국 나서자, 일정 간격을 두고 그를 견제하던 플레이어들도 본능적으로 뒤로 주춤 물러섰다.

수십 명이나 되는 플레이어들이 단 한 명의 기세도 견디지 못하고 겁을 먹다니. 전부 얼굴이 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러다 비교적 용감한 녀석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물론, 다리는 후들후들 떨리는 중이었다.

“너, 이 새끼……! 우리를 건드리고도 무, 무사할 거 가, 같아?”

판트의 비웃음이 더 커졌다.

“무사하지 않으면?”

“우, 우리 뒤엔 혀, 혈국이 있다고!”

“그래? 아이고. 그거참 무섭네. 그런데 어쩌나? 내 뒤엔 보다시피 외뿔부족이 있는데. 너희는 그런 나를 건드렸으니, 이제 외뿔부족과 혈국의 전쟁만 남은 셈인가?”

인피면구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도, 뿔까지 숨긴 건 아니었다.

“히이익!”

소리를 치던 녀석의 안색이 시퍼렇게 질렸다.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은 녀석에게서는 진한 노린내까지 났다.

판트는 ‘쯧’하고 혀를 찼다. 고작 이런 되도 않는 협박에 질려 무너지는 꼴이라니. 저래서 대체 뭘 하려는 건지.

“뭐. 안 오겠다면.”

파직, 파지직-

꽉 쥔 판트의 주먹을 따라 샛노란 뇌전이 튀어 오르기 시작했다.

“이쪽이 다시 가든가 하지.”

판트는 무지막지한 패기를 잔뜩 흘리면서 다시 한 걸음을 내디뎠다.

다른 플레이어들의 안색이 시퍼렇게 질릴 때.

여태 가만히 있던 라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판트는 양 주먹을 맞부딪치면서 크게 웃었다.

“오! 드디어 대가리가 등장하시나? 안 그래도 랭커와 싸우면 재밌겠……! 엥?”

하지만 라오는 판트가 뭐라고 떠들건 말건 간에, 그를 휙 하고 지나치더니 갑자기 연우 앞에 뚝 섰다.

투구 아래의 눈과 시선을 마주쳤다. 연우의 눈이 묘한 빛을 발했다.

“이 이상 기 싸움을 할 필요는 없는 것 같은데. 이만하면 어떨까?”

동시에 연우만 들을 수 있도록 내보낸 어기전성이 연우의 의념 속으로 스며들었다.

『우리의 황제께서 너와 브라함을 초빙하고자 하신다. 어떤가, 독식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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