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악마의 숲 (11)
“온다.”
연우의 말에 가장 먼저 반응한 건, 판트와 에도라였다.
각자 가져온 장비를 점검하던 중, 연우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즉각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것이다.
파지직, 판트를 따라 뇌기가 감돌았고, 에도라는 조용히 신마도를 뽑았다.
라오는 그런 두 남매의 태도가 이해가 가질 않았다. 분명히 자신은 아무것도 느끼질 못했으니까. 그가 자랑하는 스킬, 아홉 뱀의 눈은 위기도 빠르게 감지한다. 그런데도 여태 자신이 알지 못했다는 것은 아무 이상도 없을 거란 뜻이었다.
라오는 연우가 착각을 했겠거니 하고 여겼다. 각룡은 크라켄에 못지않은, 아니, 그보다 더한 체급과 힘을 자랑한다고 알려져 있다.
당연히 아무리 독식자라고 해도, 긴장할 수밖에 없는 몬스터였다. 비록 그가 솔로 플레이로 이미 22층에서 크라켄을 잡았다는 소문은 있었지만, 혈국에서는 다른 도움이 있었겠거니 하고 여기는 중이었다.
‘만약 그 소문이 사실이라면, 이 참에 독식자의 실력을 확인할 수도 있을 테고.’
연우가 가진 특성, 스킬, 속성…… 심지어 사용할 아티팩트의 특징들까지. 전부 포착할 셈이었다. 칼리번 후작이 그를 여기에다 괜히 투입시킨 게 아니었다.
그래서 각룡이 나타날 때까지 다시 주변 경계를 하라고 명을 내리려는데.
‘음?’
라오는 갑자기 호수의 수면 위로 기포가 올라오기 시작하자 눈을 크게 떴다. 기포는 점차 커져 가면서 드넓은 호수 전체를 뒤덮었다.
그리고 수면 아래에서 거대한 뭔가가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정말이었다고?’
라오는 자신의 스킬도 감지하지 못한 각룡의 등장을 눈치챈 연우의 실력이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지만, 즉각적으로 대처했다.
“모두 제자리에서 대기! 외부의 기습으로부터 유의하라!”
연우가 브라함과 손을 잡으면서부터 엘로힘이 그를 노린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각룡이 나타날 무렵, 한창 정신이 없을 때를 노릴 가능성이 컸다.
혈국의 플레이어들도 라오로부터 몇 번씩이나 신신당부를 들었기 때문에, 하나같이 병기를 쥐면서 공통된 스킬을 발동시켰다.
“함성이 멈추고, 붉은 깃발이 타 올랐네. 전장의 화신처럼……!”
〈승리의 군가〉
혈국에 소속되는 플레이어라면 누구나 익히는 클랜 스킬로, 군가를 부르는 동안 공격력과 방어력에 버프 효과를 주고, 저주 공격에 높은 면역을 지니게 되는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외부에 알려진 특징일 뿐.
이 스킬에는 더 큰 장점이 있었다.
바로 군가를 같이 부르는 플레이어의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버프 효과도 크게 늘어나, 집단 최면 상태에 빠진다는 점이었다.
마치 서로 간의 정신과 정신이 이어지는 듯한 기묘한 감각. 집단 최면에 빠진 동안, 플레이어들은 모두 통솔자의 충실한 칼이 되어 날을 벼린다.
전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맹한 전사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혈국과 부딪치는 클랜들은 절대 이 스킬이 발동하지 못하게 애를 쓰는 편이었다. 뜻대로 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지만.
화아아-
그들 주변으로 마법진이 짙게 깔리면서 화려한 이펙트가 터지는 가운데.
라오는 삼십여 명이나 되는 수하들의 생사권이 손에 쥐여진 묘한 느낌을 받으면서. 스킬을 쉴 새 없이 발동시키며 언제 있을지 모를 적의 기습에 대비했다.
그 순간, 갑자기 거칠게 수면을 뚫고 위로 치솟는 녀석이 있었다.
콰앙!
장장 80미터는 될 것 같은 거대한 형체가 호수 위로 우뚝 서서 지상을 내려다보았다.
너무 가까운 나머지 길쭉한 그림자만 관찰할 수 있을 뿐. 라오는 정확한 녀석의 생김새를 확인 하기 위해 고개를 높이 들었다.
사족 보행에 목과 꼬리가 제 몸뚱이보다도 훨씬 긴 아룡 형태를 가진 녀석이었다. 탄탄한 비늘이나 가죽은 칼이 조금도 들어가지 않을 것처럼 단단해 보였다.
크오오!
마치 자신의 등장을 알리려는 듯, 거친 포효를 내질렀다.
그 순간, 연우가 불의 날개를 활짝 펼치면서 녀석의 머리가 있는 쪽으로 세차게 몸을 날렸다. 판트와 에도라도 재빨리 녀석의 몸뚱이를 타면서 머리 쪽으로 달려 올라갔다.
라오는 주변 경계를 수하들에게 모두 맡기고, 마력을 있는 대로 눈가에 담았다.
독식자와 차기 외뿔부족 왕으로 거론되는 왕자, 왕녀의 실력을 직접 확인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런데.
쩌억-
각룡이 커다란 아가리를 크게 벌리면서 연우 등을 단번에 집어 삼켰다.
‘뭐지, 이건?’
라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직접 자신의 눈으로 봐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벌어졌다. 입을 찢고 튀어나올 줄 알았던 연우 등이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먹혔다고?’
뭔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간다.
라오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 * *
“으윽. 이거 진짜 기분 더러워 죽겠네.”
판트는 몸에 잔뜩 묻은 침이 기분 나쁜 듯 인상을 와락 찡그렸다. 이리저리 털어 봐도 여전히 퀴퀴한 냄새가 났다.
연우가 하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더라면 절대 시도하지 않았을 방법이었다.
“그래도…… 뭔가 좀 신기하긴 하네. 악마는 악마란 건가.”
그러다 판트는 주변을 둘러보면서 작게 중얼거렸다.
붉은 하늘. 넓은 평야. 누렇게 메마른 풀잎들이 보였다. 각룡의 뱃속이라고는 절대 생각하기 힘든 장소였다.
처음 연우가 각룡에게 잡아먹히라고 했을 때. 판트는 그가 장난을 치는 줄로만 알았다.
세상에 레이드를 하는데 일부러 먹히는 경우가 어디 있단 말인가. 우스갯소리로 몬스터가 너무 크면 위장 속으로 들어가서 안에서부터 휘저으면 되지 않겠냐는 말이 있긴 하지만, 보통 그런 무식한 짓을 저지르는 경우는 없었다.
대개 위장으로 넘어가기도 전에 단단한 이빨에 으스러지거나, 어떻게 삼켜졌다고 해도 소화액에 단숨에 녹아 버릴 테니까.
하지만.
연우는 진지하게 먹히라고 당부했다.
알려진 대로 밖에서 잡아도 되지만, 그래서는 정작 가장 중요한 부위를 놓친다고.
그래서 판트는 물었었다.
그 중요한 부위가 무엇이냐고.
그러자 연우는 이렇게 대답했다.
-녀석의 마핵(魔核).
마핵이라면 보통 심장이나 내단을 의미했다.
하지만 판트가 알기로 각룡의 심장은 분명 목의 아래쪽을 가르면 나온다.
연우는 판트의 말에 아니라고 말했다.
-각룡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부분은 총 다섯 개야. 하지만 체외에서 구할 수 있는 건 하나. 남은 네 개를 구하기 위해서는 녀석의 정신체에 접촉해야 해.
히든 피스 속의 히든 피스.
연우는 그렇게 표현했다.
그래서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에 들어와 본 건데. 아무래도 연우의 말이 맞았던 것 같았다.
‘다섯 개라.’
각룡은 마족이 악마로 진화하기 위해 겪는 과정 중 하나라고 했다.
그렇다면 단단한 외피와 다르게 내부는 갖가지 마족들이 복잡하게 뒤엉킨 정신체라고 해도 무방했다.
이를테면.
‘심상 세계 같은 건가?’
판트는 브라함이 구축했던 심상 세계를 떠올리다가 바짝 긴장했다. 심상 세계는 원주인이 왕이 되는 세상. 침입자는 그만큼 커다란 페널티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층계의 난이도가 있으니 진짜 심상 세계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사념 공간’ 정도는 된다고 봐도 무방했다.
사실 단 세 명이서 깰 수 있는 저층 구간의 난이도는 아니었다.
판트는 정신 똑바로 차려야겠다는 생각에, 두 손으로 양 뺨을 가볍게 두들기면서 주변을 훑었다.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아직 자신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이 양반은 어디로 간 거지? 혹시 에도라랑 잘못 들어와서 위장으로 향한 건 아닐…….”
“비 맞은 중처럼 뭘 그렇게 중얼거리지?”
그때, 판트 옆으로 연우가 가볍게 착지했다. 어딜 돌아다니다 왔는지 불의 날개가 후끈한 열기를 내면서 사라졌다. 에도라는 연우 바로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즐거워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왔수? 넌 또 왜 그러고 있냐?”
에도라는 피식 웃는 판트를 보면서 살짝 미간을 좁혔다.
“뭐야, 그 아니꼬운 얼굴은?”
“아니. 너는 이참에 위장에 가지, 뭣하러 왔나 싶어서.”
에도라는 연우 몰래 주먹 감자를 날리면서 입 모양을 벙긋거렸다. ‘죽을래?’ 물론, 판트는 못 본 척 무시하고 다시 연우를 돌아봤다.
연우는 한 손에 사람 머리통만 한 크기의 이상한 구체(球體)를 들고 있었다. 어디서 뜯어왔는지, 세포 같은 게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그런데 손에 들고 있는 건 뭐유?”
“심장.”
“응? 아니, 뭐, 여기 들어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판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말이지 보면 볼수록 대단한 인간이었다.
자신은 처음 여기 들어왔을 때 정신 차린다고 경황이 없었는데. 그사이에 벌써 하나를 해결하고 온 것이다. 연우는 마핵을 바닥에다 아무렇게나 툭 던졌다.
그러자 시야 아래쪽으로 메시지가 떠올랐다.
[‘심장(핵)’을 발견했습니다.]
[히든 퀘스트 / 각룡 섬멸]
내용: 탐험가 ‘드 로이’는 오랜 관찰 끝에, 악마의 숲에 거주하는 마족들이 아주 오래전부터 본능적으로 일정한 주기마다 호숫가에 모여 서로의 우열을 가리는 관습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때 모인 마족들은 모두 숲에서 열 손가락에 꼽히는 포식자들이며, 그들은 호숫가에서 일정한 의식을 치른 뒤, 호수 속으로 뛰어들어 한 마리가 남을 때까지 서로를 잡아먹습니다.
그리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마족은 이성이 조금씩 뜨이면서 상위 개체로 거듭나기 위한 기나긴 시간 동안 영면에 들어갑니다.
하지만 영면 동안 외부의 다른 천적들로부터 공격받을 수도 있는 일. 그렇기 때문에 마족들은 몸을 보호하기 위해 호수의 에너지를 빨아들여 잠시 동안 ‘각룡’이라는 존재로 변태하게 됩니다.
각룡은 단단한 외피를 두르고, 성정이 포악하여 근처에 다가오는 생명체는 모두 죽이는 습성이 있습니다. 또한, 생명력이 질겨 체외의 심장을 잃어도 다시 금세 재생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완전히 퇴치하기 위해서는 많은 수고를 필요로 합니다.
하지만 당신은 각룡을 잡기 위해 대단한 용기를 가지고 홀로 각룡의 사념 공간으로 뛰어 들었습니다.
지금부터 제한 시간 동안 정신체의 계속된 공격을 피해 심장을 모두 찾아 제거하세요. 다섯 개의 심장을 모두 찾아야만 사념 공간을 무사히 탈출할 수 있습니다.
실패 시, 탐험가 ‘드 로이’와 마찬가지로 사념 공간에 영영 갇혀 각룡의 영양분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참가 자격: 드 로이 호수자의 방문객, 각룡 레이드 참가자.
제한 시간: 5시간
보상:
1. 각룡의 심장 ×5
2. 각룡의 외피, 뿔
3. 탐험가 ‘드 로이’의 일지 + ???
[현재까지 발견한 심장 수: 1/5]
탐험가 드 로이는 탑이 열렸을 무렵의 초창기 플레이어로, 23층 스테이지의 비밀을 대거 풀어낸 사람으로 유명했다. 특히 마족과 악마 간의 관계를 밝혀내서, 마법학 내 ‘악마학’이라는 소수 분류를 만들어 낸 장본인이기도 했다.
다만, 퀘스트에서 거창하게 뜬 것과 다르게 드 로이의 일지는 사실상 별 내용이 없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냥 날짜마다 어떤 탐험을 했는지가 적혀 있는 게 전부였으니까.
10월 2일 맑음. 오늘은 17층의 땅을 캤다. 아무것도 없었다. 10월 5일 흐림. 오늘은 지하 7미터까지 깊게 파고들어갔다. 맥을 잘못 짚은 것 같다…….
전부 이런 내용이 전부였던 일지였지만, 비에라는 드 로이의 탐험 일지는 반드시 모아야 한다고 몇 번이나 신신당부했었다.
악마학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필수라면서.
각룡도 히든 피스, 각룡을 제대로 잡는 법도 히든 피스, 그리고 그 속에서 탐험 일지의 비밀을 푸는 것도 히든 피스. 총 3단계로 장치된 것이니 만큼, 모든 트랩을 해제했을 때의 효과는 아주 대단했다.
동생은 비에라 듄의 도움을 받아 ‘진짜’ 악마학에 접촉할 수 있었다. 악마와 교류를 가지며, 그들의 새로운 마법을 배울 수 있었던 기회.
평소 드 로이는 마법학을 좋아했지만 마법사들과는 문제가 있었고, 그래서 마탑에 빼앗기다시피 하면서 헌정했던 악마학도 짜깁기에 불과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의 일지가 가지는 의미는 더 컸다.
‘용과 악마한테서 동시에 마법을 배울 생각을 하다니. 아무리 내 동생이라지만…… 미친놈이지.’
게다가 동생이 만났던 악마도 대단한 자였다.
‘동부의 대공, 아가레스.’
악마의 사회를 구성하는 커다란 4개 주축 중 하나인, ‘르 인페르날’. 솔로몬의 72악마로 더 유명한 그들 중 서열 2위에 해당하는 마왕 아가레스.
고룡 칼라투스와 대공 아가레스의 사랑을 받았던 만큼, 동생이 그렇게 빠른 성장을 이뤘던 것도 이해는 갔다.
물론, 연우는 드 로이의 악마학을 손에 넣는다고 해서 악마와 직접 계약을 맺을 생각은 없었다.
악마학이라고 해서 전부 악마에게 영혼을 저당 잡히거나 하는 내용만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그 속에도 수많은 여러 갈래와 사용법이 있었다.
동생도 그중 하나였다. 녀석은 아가레스의 힘을 빌리는 정도였지 진짜 계약을 맺은 건 아니었고, 연우도 그와 마찬가지로 악마학을 다른 방식으로 사용할 생각이었다.
‘세샤가 건강을 되찾은 뒤, 새로운 악마를 잡아 현자의 돌을 완성시킬 수 있다면. 그때부터 쓴다.’
브라함의 연성진이 있는 이상, 이미 연우는 현자의 돌을 완성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것을 더 잘 활용할 방법도 있어야 했고, 그래서 찾은 것이 악마학이었다.
물론, 모든 게 연우의 뜻대로 돌아가지 않을지도 몰랐다.
악마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브라함이 자신들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모를 리 없을 테니. 하지만 브라함은 그런 것까지 염두에 두며 계획을 짰고, 연우는 연성진 구축을 도와주며 옆에서 계획을 보완하는 데 힘썼다. 숟가락 하나 정도 얹을 자격은 있었다.
무엇보다.
연우는 브라함과 함께, 악마들을 오롯한 형태로 이 층계에 소환할 자신이 있었다.
그렇다면 마의 인자를 습득하는 것은 물론, 드 로이의 탐험 일지도 반드시 필요했다.
[새로운 마족들이 나타납니다.]
[주의! 몬스터 러쉬에서 살아남으십시오.]
그때, 새로운 메시지와 함께, 저 멀리 능선 너머로 새카만 물결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키에에엑!
수백 혹은 수천 마리는 훌쩍 넘을 것 같은 마족 군단. 하나같이 기괴한 모습을 한 녀석들은 연우 일행을 잡아먹기 위해 맹렬한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숫자에, 판트와 에도라도 바짝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연우에게는 그들을 당해 낼 손쉬운 방법이 있었다.
왼손을 활짝 펼쳤다. 간만에 모습을 드러낸 바토리의 흡혈검이 배고프다는 듯이 톱니 이빨을 훤히 드러냈다.
찰칵, 찰칵-
“삼켜라.”
연우는 왼손을 지면에다 갖다 댔다. 그 순간, 톱니 이빨이 땅바닥에 박히면서 에너지 드레인을 시도했다.
꾸우우웅!
세상이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