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악마의 숲 (13)
사념 공간을 찬탈하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이미 연우는 바토리의 흡혈검을 통해 녀석의 사념을 일부 빨아들이면서 정보를 어느 정도 해석해 둔 상태였고, 초감각의 새로운 옵션인 ‘동기화’를 사용해서 기질을 해석한 정보대로 흉내 낼 수 있었다.
그리고 검의 정화와 여신의 창칼을 이용해 투기를 단번에 증폭시키면서 사념 공간을 빼앗을 수 있었던 것이다.
연우는 불의 날개를 한껏 크게 펼쳤다. 그리고 거세게 아래쪽으로 몸을 날렸다.
쾅-
불길이 사방으로 번져 나갔다.
녀석들도 잠깐 흠칫거리는가 싶더니 곧 칼을 강하게 움켜쥐면서 몸을 날렸다.
사념 공간의 주인이 바뀌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충격에 젖은 모습이었지만, 이렇게 된 이상 조금이라도 빨리 연우를 집어삼키고 공간을 되찾아야겠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하지만 녀석들이 착각한 점이 있었다. 공간의 주인이 바뀌었다는 건, 곧 그들 모두가 연우의 손바닥 위에 올라와 있다는 뜻이었다.
순간 녀석들에게 상당한 디버프가 걸렸다.
마치 엄청난 중력을 만난 것처럼 행동이 굼떠지고, 정신이 저주에 걸려 혼란 상태에 잠기기 시작했다.
연우는 그런 녀석들을 단번에 베어 넘겼다.
베어진 존재들은 흐릿해지더니 작은 입자로 잘게 쪼개져서 연우에게로 스며들었다.
[마의 인자를 터득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용의 인자가 마의 인자를 흡수하여 작은 영향을 받습니다. 세포가 특이 변화를 일으킵니다.]
[마의 인자를 터득했습니다.]
[마의 인자를 터득했습니다.]
……
녀석들은 하나하나가 정신체이니 만큼 부서지는 족족 사념 공간으로 스며들었고, 그럴 때마다 연우는 체내에서부터 아주 조금씩이지만 어떤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용의 인자가 처음 깨어났을 때에 육체가 용혈과 용문을 얻어 용골과 용맥을 개화했듯이, 새롭게 새겨진 마의 인자는 용의 인자를 자극하면서 형질을 조금씩 바꿔 나갔다.
원래대로라면 보라색 마귀꽃과 각룡의 심장, 그리고 크라켄의 심장을 적절히 섞어서 흡수를 해야 했겠지만.
그 전에 마의 인자에 대한 내성이 생기도록 해 둘 필요가 있었다.
콰콰쾅!
그리고 연우를 따라 샤논과 한령, 괴이 군단도 더 크게 날뛰기 시작했다.
연우가 마의 인자를 터득하면 터득할수록, 그들에게는 더 큰 힘이 들어왔기 때문에 즐겁게 날뛸 수밖에 없었다.
각룡의 심장은 처음으로 위험하다는 느낌을 받고 말았다. 불과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자신의 단잠을 방해한 녀석들을 집어삼키려는 탐욕으로 가득했지만, 지금은 되레 자신이 먹히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러다 녀석은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정이 무엇인지 깨닫고 말았다.
공포.
악마가 되어야 하는 자신이 공포를 느낀다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악마는 생명체가 발산하는 공포와 혼란을 먹고 사는 존재. 그런 이가 공포를 느낀다는 건, 존재를 부정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녀석은 도저히 연우를 이길 자신이 없었다. 아니, 싸울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분신들이 어떻게든 악착같이 달려들고 있었지만, 연우는 맹렬한 속도로 쫓아오면서 자신을 잡아먹으려 하고 있었다.
그래서 녀석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더 멀리. 연우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으로 도망칠 생각이었다.
과연 역전된 사념 공간 안에서 연우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이 있을까 싶었지만, 일단은 이곳을 무사히 빠져나가는 게 급선무였다.
설사 각룡의 형태를 버린다고 하더라도. 여태껏 쌓은 것들이 아까웠지만, 그깟 마족들이야 언제든지 다시 먹어 치우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어딜 가려고?”
녀석이 어떻게 발을 떼기도 전에, 어느새 연우가 그의 눈앞에 서서 차갑게 웃고 있었다.
새카만 가면이 마치 악마의 탈처럼 기괴하게 보였다.
그 속에 있는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연우가 손을 뻗어 재빨리 녀석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마력회로를 크게 돌리면서 불의 파도를 한껏 전개했다.
* * *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라오는 딱딱해진 표정으로 각룡을 올려다봤다.
처음 연우와 판트, 에도라가 잡아먹혔을 때까지만 해도, 그는 뭔가 일이 복잡하게 꼬였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수하들과 함께 레이드를 개시하려고 했다.
단순히 연우를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가 브라함이 있는 곳의 위치를 알고 있으니 아직 죽도록 놔둬선 안 되기 때문이었다.
탑에 유일하게 남은 용인의 존재. 엘로힘과 마찬가지로 혈국도 탐낼 수밖에 없었고, 특히 식탐황제의 관심이 너무 컸다. 충성스러운 신하로서 주군의 기대를 저버릴 수는 없었다.
하지만 라오는 명령을 내리려다 말고 다시 수하들을 정지시켜야만 했다.
각룡이 갑자기 이상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제멋대로 이리저리 몸을 비틀더니, 주변 땅에다가 대가리를 처박아 댔다. 뭔가를 억지로 게워 내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 순간, 깨달았다.
연우 일행이 각룡의 체내에서 뭔가를 저지르고 있단 사실을.
뭘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각룡은 아주 고통스러워 보였다. 이따금 목이 빳빳하게 굳을 때에는 금방이라도 머리가 부서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라오는 애당초 목표로 했던 연우의 실력을 확인할 수 없어서 입맛을 다셨다. 한편으로는 대체 저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아주 궁금했다.
지금의 레이드는 그로서도 전혀 들어 보지 못했던 방식이었으니까. 그만큼 위험할 텐데도 거리낌 없이 도전한 게 대단해 보일 정도였다.
그래서 라오는 조금 더 상황을 지켜보고자 했다. 뭔가 일이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 것 같다면 그때 나서도 부족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타악-
라오는 더 이상 맘 편하게 각룡을 지켜볼 수가 없었다.
갑자기 주변으로 낯선 기척들이 몰려왔다. 이질적이면서도 신성한 기운. 엘로힘이었다.
곧 나뭇가지가 바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녀석들이 나타났다.
“혈국이 외뿔부족과 손을 잡았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하이 엘프, 런트는 인상을 팍 찡그리면서 라오와 혈국의 플레이어들을 노려봤다. 어느새 엘로힘의 플레이어들은 일대를 빼곡하게 채우면서 그들을 에워싸고 있는 중이었다.
이곳은 이전에 갈리어드를 잡으려다 연우에게 치욕을 당한 장소이기도 했다. 그 때문에 연우를 잡으러 먼 길을 온 런트의 두 눈은 불을 뿜고 있었다.
라오는 가볍게 혀를 찼다. 하필이면 이럴 때 등장할 줄은. 게다가 하나같이 내뿜는 살의도 만만치 않았다. 라오는 재빨리 수하들에게 턱짓을 했다. 혈국은 전부 검을 뽑으면서 엘로힘의 앞을 가로막았다.
양쪽 진영이 내뿜는 살기로 호숫가 일대의 공기가 들끓었다.
“외뿔부족과 손을 잡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긴 하지. 하지만 아직 그건 못 했고, 대신에 독식자와는 거의 손을 잡긴 했다만.”
“뭐?”
전혀 생각지 못한 말에, 런트의 인상이 딱딱하게 굳었다. 고귀하다는 하이 엘프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독식자. 그 이름을 들으면 아직도 얼굴에 나 있는 상처가 화끈거리는 것 같았다. 녀석의 습격으로 입었던 상처였다.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건가?”
“왜 모른다고 생각하지?”
라오가 차갑게 웃었다.
“당연히, 여차하면 그대들과 전면전도 불사할 거란 뜻이지.”
순간, 라오를 따라 매서운 한파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얼음 입자들이 서로 응결되고, 바닥에 서서히 빙판이 깔렸다. 살이 에일 것 같은 칼바람은 당장에라도 예리한 날을 드러내 그들을 난도질할 것 같았다.
런트는 들고 있던 창을 바닥에다 세게 내리쳤다. 그러자 맹렬한 투기가 뻗쳐 나가면서 한파를 옆으로 비껴가게 만들었다.
“다시 한 번 더 경고한다. 그 자리에서 비키지 않는다면, 엘로힘은 이번 건에 대해 혈국에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다.”
런트는 당장이라도 창을 쥐고 공격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거대 클랜과 거대 클랜 간의 대립은 자칫 큰 전쟁으로 치달을 수 있기 때문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특히 엘로힘처럼 원로원과 민회, 집정관이라는 독특한 3각 권력 기구 체재를 갖고 있는 곳은 각 소속원들의 재량권이 큰 편이었지만, 그만큼 책임 권한도 크기 때문에 함부로 행동할 수 없었다.
그래서 몇 번이고 되묻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 아나?”
혈국처럼 수장에게 모든 권한이 집중되는 중앙 집권 체재인 곳에서는 엘로힘의 능률이 바닥을 기는 것으로밖에 비치지 않았다.
“너희 엘로힘이란 것들은 하나부터 열까지, 쫑알쫑알 따지는 게 너무 많아서 짜증 난다는 거?”
쾅!
라오는 거세게 지면을 내리찍었다. 그러자 거대한 빙판이 갈라지면서 뾰족한 얼음 가시 수백 개가 덤불밭처럼 일어났다. 얼음 가루가 사방으로 튀고, 칼바람이 더 매섭게 휘몰아쳤다.
〈얼음 가시밭〉. 라오가 자랑하는 시그니처 스킬이었다.
그것을 전면전의 개시로 받아들인 런트와 엘로힘은 일제히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그 뒤를 혈국의 플레이어들이 바짝 쫓았다. 승리의 군가를 부르기 시작한 그들의 발밑으로 마법진이 짙게 깔리면서 막대한 버프 효과가 실렸다. 그들의 눈가에 시커먼 그늘이 졌다. 행동에 가속도가 붙었다.
콰콰쾅-
혈국의 플레이어들은 어째서 자신들이 사나운 맹수라 불리는지 보여 주겠다는 듯, 난폭한 플레이 스타일을 보였다.
칼을 휘두를 때마다 매서운 광풍이 휘몰아치고, 악마수와 얼음 가시가 죄다 터져 나갔다.
사방으로 비산한 얼음 조각들은 뒤에서 날아온 칼바람에 실려 다시 그들을 엄호하기까지 하니. 엘로힘의 플레이어들은 사각지대를 교묘하게 노리는 칼바람까지 일일이 응대해야만 했다.
라오도 움직였다. 얼음 가시밭 사이를 표홀하게 돌아다니면서 런트를 쫓는 모습은 독사처럼은 밀하고 날카로웠다.
손을 휘두를 때마다 튀어 오르는 얼음은 닿는 모든 것들을 얼려서 터뜨렸다. 저기에 노출되는 순간 팔다리 한두 개쯤은 금세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콰콰콰-
그래서 런트는 뒤로 물러나면서 창을 거칠게 휘둘렀다. 아르드바르. 어느 영웅으로부터 전해졌다는 창이 시린 빛을 뿌리면서 다 가오던 얼음 가시와 화살을 모조리 분쇄했다.
그리고 런트는 오른손으로 창의 가장 끝을 잡으면서 비틀어 커다란 원을 그렸다. 창날에서 발산된 빛이 그린 원륜(圓輪)은 눈부신 폭발을 일으키면서 그대로 라오에게 작렬했다.
부서진 얼음 조각들이 아무렇게나 튀어 오르고, 칼바람이 방향을 잃고 곳곳에서 헝클어졌다.
여기에 라오는 합장하듯이 양손을 맞부딪치는 것으로 응수했다. 갈 길을 잃었던 칼바람이 얼음 조각들을 한 지점으로 모으면서 거대한 소용돌이를 그렸다.
〈얼음 폭풍〉. 강렬한 회오리바람 속에 적을 가두고, 날카로운 얼음 조각으로 분쇄까지 시켜 버리는 스킬이었다.
콰아앙!
라오는 이것으로 런트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얼음 폭풍 속에 갇힌 자치고 무사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그래서 강렬했던 얼음 폭풍이 끝나고 공기가 가라앉은 공간에서 시체를 확인하려 할 때, 라오는 두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
당연히 그 속에 피투성이가 된 채로 있을 거라 생각했던 런트가 없었다.
순간, 등골을 타고 흐르는 섬뜩한 느낌에, 라오는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물렸다. 하지만 늦어 버렸다. 왼쪽 어깨가 화끈거리는 고통과 함께 왼팔이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푸우우!
피 분수가 뿜어지는 자리 아래로, 런트가 공간을 가르면서 나타나고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굴절된 빛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 순간, 라오는 자신이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빛의 착란을 이용한 환영술. 애초 자신이 런트라고 생각했던 건 가짜였던 것이다.
‘대체 언제?’
아홉 뱀의 눈을 속인 것이기 때문에, 라오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혈국의 플레이어들 대부분이 방금 라오의 상황과 비슷한 일을 겪었던지, 곳곳에서 비명 소리가 퍼졌다. 승리의 군가로 이어져 있던 연결 고리도 절반 가까이가 통째로 끊어졌다.
런트는 일그러진 얼굴을 한 라오에게 비웃음을 던지고, 그를 비껴 나 단숨에 호숫가 쪽으로 달렸다.
그리고 뒤따라서 얼음 가시 사이사이로 엘로힘의 플레이어들이 나타났다.
애당초 이들의 목표는 연우. 이미 전력이 절반 이상이나 망가진 혈국에 더 이상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전원, 호숫가로 이동해!”
라오는 재빨리 상처를 지혈하면서 수하들을 움직였다. 연우가 죽는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하지만 혈국의 이름을 걸고 나선 임무를 망친다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수하들이 엘로힘을 바짝 뒤쫓았다. 노랫소리에 광기가 실리면서 마력을 있는 대로 쥐어짜 달렸다.
하지만 런트와 엘로힘은 어느새 각룡이 있는 곳에 다다르고 있었고, 그들은 일제히 파괴력 짙은 최고 스킬을 가동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일점사(一點射). 모든 공격을 한 지점에 쏟아 부어 각룡을 통째로 부숴 버릴 참이었다. 그런다면 그 속에 있을 연우 등도 한꺼번에 쏟아질 테니까.
그 순간.
꾸우웅!
미친놈처럼 이리저리 몸을 마구 비틀어 대던 각룡이 목을 빳빳하게 세우더니, 갑자기 괴상한 비명을 질렀다.
무시무시한 음파는 호수에 격랑을 일으키고, 이쪽으로 달려오던 엘로힘의 모든 마력을 강제로 헝클어뜨렸다.
공격 스킬을 준비하고 있던 플레이어들은 반발력 때문에 큰 내상을 입으며 피를 잔뜩 쏟고 말았다.
몇몇은 제자리에 고꾸라지면서 경악에 찬 눈빛으로 각룡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그들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80미터도 넘는 각룡의 거체 표피 위로 큰 균열이 일어나더니, 그 속에서 용암처럼 시뻘건 불길이 이글거리며 나타나는 것을.
드 로이 호수를 단숨에 끓게 만들 정도로 강렬한 열기. 그리고 곧 폭발이 일어나면서 각룡을 터뜨리고,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통째로 집어삼키고 말았다.
근처에 있던 엘로힘은 물론, 뒤늦게 달려오던 라오와 혈국까지, 깡그리. 전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