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199화 (199/862)

24화. 악마의 숲 (14)

“컥, 커컥……!”

런트는 도저히 자신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 당최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분명히 다 끝났다고 생각했었다. 자신에게 수치를 주었던 그놈의 머리통을 드디어 자를 수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것 하나만 보고 여기까지 달려온 셈이었는데.

하지만 각룡에서 갑자기 시작된 폭발은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말았다.

그렇게 깊고 넓던 호수는 통째로 증발해서 바닥을 보였고, 일대는 이전의 폭발로 망가졌던 것이 한 번 더 망가져 온통 폐허가 되어 버렸다.

같이 달리던 수하들은 통째로 불길에 녹아 버린 듯 시체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그건 혈국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숨을 헐떡이는 런트 위에는 연우가 무심한 눈길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쪽 발로 그의 어깨를 찍어 누르면서. 악마처럼 새카만 가면 너머로, 두 눈은 도깨비불처럼 빛나고 있었다.

런트는 어떻게든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었다.

자신은 위대한 신 프레이의 후예. 저런 보잘것없는 인간 따위에게 이렇듯 허망하게 스러져서는 안 되었다. 혈통도 족보도 없는 천한 것들은 언제나 자신을 올려다보고 공경하는 태도를 보여야지, 저딴 눈빛을 갖고 있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연우는 그딴 바람 따위는 녀석의 어깨와 함께 짓밟았다. 발에다 잔뜩 힘을 줬다. 우드득. 런트의 몸이 더 깊숙하게 땅에 박혔다.

“크아아악!”

런트는 끔찍한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불길을 겨우 버텨 내긴 했지만 잔뜩 화상을 입은 상태였는데. 거기다 강제로 피부를 짓이기까지 하니 사지를 통째로 찢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연우는 그러거나 말거나, 더 강하게 발에다 힘을 주었다. 어깨뼈가 수수깡처럼 부러지면서 몸이 기이한 각도로 틀어졌다.

“그러게 누가 날 따라오랬나? 다쳤으면 그냥 조용히 처박혀 있을 것이지. 왜 괜히 쫓아와서 고생을 하지?”

“죽인다, 죽인다아!”

“너희들은 멍청해도 너무 멍청해. 그 오만함이 언젠가 너희들을 전부 파멸시킬 거야.”

런트는 연우의 말 따위는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끔찍한 고통에서 빠져나오고 싶다는 생각과 이딴 치욕을 끝내고 싶다는 생각으로만 가득했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자존심은 런트에게 악바리 정신만 가져다 줬다.

“흐흐! 으흐흐흐! 그래, 죽여라! 죽여! 하지만! 날! 날 여기서 잡았다고 다 끝났다고 생각지 마라! 난 여기서 죽어도, 네놈의 동료들은 지금쯤 아이테르 님에게 무……!”

“알고 있어.”

하지만 연우는 싸늘하게 조소를 던지면서 런트의 마지막 남은 희망을 싹둑 잘라 버렸다.

별안간 런트의 눈이 부릅떠졌다. 눈가로 불안감이 스쳤다.

“그런 생각 안 해 봤나?”

그런 녀석을 보면서. 연우는 한 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이게 전부 함정일지도 모른다고.”

“무슨……!”

런트는 연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더 자세히 알기 위해 소리를 질렀지만, 연우는 더 이상 대답하기 귀찮다는 듯 비그리드를 가볍게 휘둘렀다.

스걱!

런트의 머리통이 분리되어 바닥을 굴렀다. 경악에 찬 표정 그대로. 피가 잔뜩 쏟아지면서 검은 땅을 붉게 물들였다.

그때, 그 위로 연우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나면서 시체와 영혼을 모두 집어삼켰다.

「으흐흐. 오늘 완전 노다지 캐는 기분인데? 꽤 짭짤해?」

「간만에 배 좀 채울 수 있겠군.」

하이 엘프의 영혼에 이어 그에 부족해도 역시나 지고종인 다수의 영혼, 여기에 혈국의 플레이어들까지.

하나같이 뛰어난 실력을 지닌 놈들이었기 때문에, 샤논과 한령은 희희낙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전부 별다른 힘을 들이지 않고 어부지리로 얻은 놈들이었다.

엘로힘을 잡기 위한 덫.

사실 연우가 갈리어드와 브라함에게 제안했던 계획은 아주 간단했다.

연우가 미끼가 되어 움직이면 엘로힘도 당연히 병력을 분산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때 각개격파를 노리자는 것이었다.

물론, 말처럼 쉬운 건 아니었다. 연우와 판트, 에도라 단 세 명이서 몇이나 될지 모르는 추격대를 상대하기란 버거울 수도 있을 테니까.

하지만 연우는 엘로힘과 마찬가지로 브라함과 세샤에게 관심을 두고 있는 다른 클랜이 분명히 있을 거라고 예측하고 있었다.

그게 혈국이라고까지 생각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연우의 생각은 정확하게 들어맞았고, 이렇듯 공멸을 유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사실 설사 혈국 같은 클랜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도, 각룡에 내재된 마기를 폭발시켜 주변을 초토화시키는 것을 염두에 뒀기 때문에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연우는 천천히 다른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아직까지 숨이 붙어 있는 녀석이 있었다. 라오였다.

“어…… 째서…… 우리까지……!”

라오는 겨우겨우 숨을 헐떡이면서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연우를 봤다. 절명하기 일보 직전이었지만, 마지막 남은 궁금증은 풀고 싶었다.

분명히 이 전까지만 해도 분위기가 아주 좋았다고 생각했으니까. 또한, 그들은 연우를 도와주기까지 했다. 도무지 그가 왜 이러는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여기에 대한 질문에.

“이거면 대답이 되나?”

연우는 천천히 가면을 벗었다.

“……!”

연우의 얼굴을 알아본 라오의 눈가에 경악이 잔뜩 퍼졌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얼굴이 거기에 있었다.

그러다 딱딱하게 굳어 버린 얼굴은 뭔가를 깨닫고 깊은 탄식을 늘어놓았다.

“그…… 런가. 우리는…… 이제 너에게 철저하게 이용만 당하다…… 엘로힘과 상잔을 겪겠……!”

라오는 미간을 관통한 비그리드에 머리를 뒤로 꺾으면서 절명했다.

마지막까지 남았던 의식이 염려하는 바는 단 하나였다.

이제부터 연우로 인해 혈국과 엘로힘의 사이는 파국으로 치달을 거란 것. 부디 주군께서 그런 파국을 슬기롭게 잘 빠져나오셨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

하지만 연우는 그런 라오의 바람 따위는 코웃음으로 가볍게 무시하고, 준비했던 스킬을 발동했다.

[초감각 - 동기화]

그러자 거짓말처럼 그의 기질이 라오처럼 변했다. 그 상태에서 연우는 빠르게 움직이면서 곳곳에다 흔적을 남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런트와 다른 플레이어들을 차례대로 흉내 냈다.

마치 격렬하게 전투를 치른 듯한 흔적처럼 보였다.

아마 잘 모르는 사람이 뒤늦게 도착해서 본다면 두 세력 간의 충돌로, 각룡이 폭발해 공멸하고 만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런다면 가뜩이나 신경전 가득하던 엘로힘과 혈국의 갈등도 더 깊어지겠지.

‘이왕에 만들 판이라면 더 크게 키워야지. 아주 크게.’

정우의 얼굴을 한 연우의 눈동자는, 어느 때보다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 * *

“기어코 와 버렸군.”

브라함은 수정 구슬을 통해 비치는 광경을 보고 혀를 가볍게 찼다. 아이테르와 엘로힘이 결계를 통과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녀석들이 지나는 곳은 심상 세계의 뒤쪽에 설치된 양식장이었다.

애당초 그곳은 보라색 마귀꽃을 재배하고 악마를 소환하기 위해 만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언제 침입할지 모르는 엘로힘을 상대하기 위해 만든 곳이기도 했다.

어떻게 생각한 것을 크게 벗어나질 못하는지. 이곳이 그의 심상 세계라는 것을 알면서도 걸어 들어온다는 건, 그만큼 오만한 걸까, 아니면 멍청하단 걸까.

어쩌면 오만함과 멍청함에는 큰 차이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갈리어드도 슬쩍 수정 구슬을 보고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새 전력을 보충한 모양인데? 그런데 헤메라도 같이 왔나? 서로 죽이네 마네 하더니. 그래도 쌍둥이라는 건가?”

하긴 아무리 치고받고 싸워도 세상에 서로 믿고 의지할 곳은 피를 나눈 형제밖에는 없는 법이지. 갈리어드는 그렇게 납득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브라함은 가당치도 않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형제애? 웃기는 소리. 오만함을 넘다 못해 자기애밖에 남지 않은 저놈들에게 그런 감정이 남아 있을까 봐?”

“그럼?”

“자기 이익에 필요하다면 부모 자식도 잡아먹는 게 저놈들이다. 보나 마나 아이테르가 궁지에 몰린 걸 알고 헤메라가 접근한 걸 거다. 때에 따라서는…….”

브라함의 한쪽 입술이 크게 비틀렸다. 비웃음이었다.

“일을 전부 끝내고 나서 아이테르를 죽이려 들지도 모르겠는데.”

갈리어드의 눈이 살짝 커졌다.

“설마? 그렇게까지…….”

“아니. 너는 아직 신의 사회라는 것을 몰라.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거다. 저놈들은 절대 결과물을 나눠 먹지 않아.”

브라함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의 눈에는 벌써부터 아이테르와 헤메라의 미래가 보이는 것 같았다. 이미 서로 간에 눈치를 살피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더구나 전력적으로도 헤메라 쪽이 훨씬 우위로 보였다. 여차하면 바로 아이테르를 칠 것 같았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아이테르도 그때를 방비해 뭔가 한 수를 준비 중일 것이다.

신의 사회가 딱 저랬다. 올림포스, 천교, 데바, 아스가르드…… 다양한 명칭을 가진 여러 개의 만신전이 있었지만, 결국 그들은 모두 똑같았다.

아마 신이란 존재의 근본이 그러할 것이다. 신위, 신격, 신성, 신화. 그것들만이 98층에 억류된 그들을 증명해 줄 테니.

그리고 그런 신으로부터 갈라져 나온 엘로힘도 다를 수가 없었다. 필요하다면서로가 서로를 잡아먹는 마굴. 차라리 동족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바칠 수 있는 마군이 나을지도 몰랐다.

갈리어드는 그런 친구를 보면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는 친구가 가진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브라함은 팔짱을 낀 채로 마저 말을 이어 나갔다.

“더 웃긴 건, 저놈들은 콩가루처럼 보이긴 해도, 일단 한 가지 공통된 목표가 생기면, 우선 그것부터 쟁취하고 난 뒤에 싸울 생각을 한다는 거지. 넌 우선 세샤나 잘 챙기고 있어라.”

“그러지.”

갈리어드는 고개를 끄덕이고 잠시 자리를 비웠다. 저들이 노리는 건 세샤였다. 되도록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보호해 둘 참이었다.

브라함은 갈리어드와 세샤의 기척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뒤에야 천천히 수성의 서를 펼쳤다.

오늘로서 저들을 제물 삼아 세샤의 모든 병을 치료할 것이다. 그것이 녀석의 어미인 아난타에게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일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죽고 없는 그 녀석에 대한 속죄이기도 했다.

화아악!

수성의 서가 시린 빛을 발했다.

브라함의 의식이 천천히 아래로 가라앉으면서, 결계 내부에 걸쳐져 있던 모든 심상 세계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끼릭, 끼릭-

마치 기름칠을 하지 않은 톱니바퀴가 억지로 굴러가는 듯한 소리와 함께.

* * *

화아아-

“모두 긴장하라.”

아이테르의 지시에 따라 뒤따라 걷던 헤메라와 수하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들도 전부 느낄 수 있었다. 방금 전 숲의 공기가 확 변한 것을. 심상 세계에 걸쳐져 있던 마법이 일제히 가동되었단 뜻이었다.

아마 지금부터 본격적인 공격이 시작될 게 분명했다.

브라함의 영토로 들어온 이상, 어차피 각오는 해 뒀었다.

하지만 각오만 하던 것과 직접 들어온 것은 큰 차이가 있었다.

공기는 폐부를 쥐어짤 것처럼 텁텁했고, 이따금 뇌리를 쿡쿡 쑤셔 대는 저주는 마력의 소모를 너무 낭비시켰다.

특히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빽빽하게 들어선 나무와 검은 하늘, 그리고 짙은 안개는 방향 감각까지 흐리게 만들었다.

처음 연우가 왔을 때와는 전혀 달라진 환경. 〈안개 속의 미로〉. 침입자를 상대할 때를 대비해 만든 대규모 마법진이었다.

“정말 짜증 나 죽겠네. 여기.”

헤메라는 인상을 구기면서 대수롭지 않은 듯 투덜거렸지만, 눈빛은 예리하게 빛나는 중이었다.

안개를 물리치기 위해 빛의 정령인 ‘윌 오 위스프’를 계속 불러 냈지만, 그럴 때마다 정령은 눈앞의 안개에 고스란히 녹아내리고 말았다.

윌 오 위스프는 단순히 어둠만 물리치는 게 아니라, 항마와 축귀에도 탁월한 효과가 있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쉽게 사라진다는 것이 의미하는 건 단 하나.

‘신성을 드러내고 있다는 뜻.’

브라흐마 신의 신성이 갖춰질 정도로 심상 세계가 만들어진 상태라면. 이 자리에 있는 그들 모두가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그때.

“하빌? 얘가 어디 갔지? 하빌!”

갑자기 수하 중 한 명이 멈춰서 어수선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아이테르와 헤메라는 발걸음을 멈추고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무슨 일이냐?”

“그, 그것이 하빌이 갑자기 아까 전부터 보이질 않습니다!”

“뭐?”

헤메라의 고운 미간이 좁혀지는 가운데, 다른 데에서도 수하들이 놀라 소리쳤다.

“눔판도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분명 아까 전까지만 해도 바로 옆에서 같이 걷고 있었는데……!”

“란도 마찬가지입니다!”

갑작스러운 수하들의 실종.

헤메라는 3인 1조로 절대 떨어지지 말라고 명령을 내리려 했다.

하지만.

“무, 뭐야, 이거?”

갑자기 누스라는 플레이어가 기겁을 하면서 칼을 뽑았다.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누스가 안색이 시퍼렇게 질린 채로 소리쳤다.

“탄한이! 탄한이 갑자기 뭔가에 가로채였습니다!”

“제길. 전부 한곳에 뭉쳐! 절대 떨어지지 말고!”

안개가 집어삼키는 것은 윌 오 위스프만이 아니었다. 플레이어도 삼키고 있었다.

위기감을 느낀 그들은 아이테르의 지시에 따라 한곳으로 뭉쳤다. 하나같이 병장기를 빼어 들면서 어디서 닥칠지 모르는 기습에 대비했다.

하지만 주변 경계를 강화시켰어도 불안감은 계속 증폭되었다. 이 사이에도 바로 옆에 있던 동료가 하나둘씩 사라지고 있었다.

헤메라는 이렇게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수하들을 돌아봤다. 원래대로라면 브라함을 만날 때까지 최대한 숨겨 두려 했지만, 당장 쓰지 않으면 자신이 위험해질 것 같았다.

게다가 아까 전부터 몸에서 힘이 조금씩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마치 항아리에 자그마한 구멍이 생겨 그곳으로 물이 새어 나가는 듯한 기분.

뭔가 이상했다.

‘이 안개, 아니, 이 땅에 뭔가가 있다. 내 신성을 먹어 치우는 뭔가가……!’

헤메라는 브라함이 부족한 신성을 채우기 위해 그들의 신성을 갈취하고 있는 중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더라도 그와 비슷한 뭔가가 이뤄지는 게 분명했다.

이대로 계속 있는다면 모든 힘을 송두리째 빼앗겨 말라 죽고 말 것이다.

헤메라의 눈빛을 받은 수하들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뜻을 알 수 없는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그러자 헤메라의 몸이 서서히 광휘에 젖기 시작했다. 신은 신도 들의 신앙을 먹고 산다. 프로토게노이 족이 비록 신의 사회에서 축출되어 격이 한참 떨어진 지 오래라지만, 그래도 여전히 강한 신성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프로토게노이 족의 열 개 가문은 언제나 신성을 강화시킬 수 있는 신도들을 많이 모으고자 했다.

그들은 대개 가문에 소속된 가신들이었고, 이들은 헤메라의 가신들로서 언제나 자신들의 신앙은 물론, 필요하다면 순교라는 이름 아래,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자들이었다.

“제길…….”

아이테르는 그런 가신들을 이전 전투에서 상당수 잃었기 때문에 질투 섞인 시선으로 헤메라를 바라봤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섬뜩한 느낌을 받아야만 했다. 헤메라의 신성이 자신이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깊어진 것 같았다.

그사이, 헤메라는 모든 준비를 끝내고, 손바닥을 활짝 펼쳤다. 그녀의 신성, ‘낮’이 구현되면서 사방을 환하게 밝혔다.

“백광.”

화아악!

그들을 둘러싸고 있던 안개가 걷히기 시작했다. 음산했던 기운까지 지우개로 지운 것처럼 말끔하게 사라지면서, 밝은 숲의 정경이 훤히 드러났다.

“됐……!”

헤메라의 수하들은 살짝 수척해진 얼굴로 환호성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러다 곧 다시 딱딱하게 인상을 굳혀야만 했다.

안개가 사라진 자리. 빽빽한 숲 사이사이로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많은 도깨비불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마치 23층 스테이지에 있는 모든 마족들을 끌고 오기라도 한 듯. 보랏빛으로 반짝이는 상급 마족 수만 마리와 수십 마리의 각룡들이 그들을 보며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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