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악마의 숲 (15)
“제기랄! 대체 이게 뭐야!”
“젠장!”
아이테르와 헤메라 등은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마족들의 공세에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들 모두 마족쯤은 쉽게 찢어 버릴 수 있을 정도로 강했지만. 압도적인 머릿수 앞에서는 그런 실력 차이도 가려지기 마련이었다.
더구나 수십 마리의 각룡이 일제히 내뿜는 불길은 그들을 마치게 만들 정도였다.
가뜩이나 마기가 섞여서 조금 스치는 것만으로도 악영향을 끼치게 만들었는데.
어느 순간부턴가 그들이 딛고 있는 땅까지 늪처럼 질퍽질퍽해지면서 자꾸만 발이 아래로 가라앉고 있었다.
덕분에 한 번 움직이더라도 더 많은 에너지를 소비해야 하는 데다가, 이따금 땅을 뚫고 튀어나오는 마족들도 있어서 정신이 어지러웠다.
하지만 정작 그들을 가장 미치게 만드는 건 따로 있었다.
마족들을 베어 낼 때마다 튀어 오르는 살점과 혈액 속에 섞인 마독이었다.
마독은 단순히 용종에게만 위험한 게 아니었다.
한 번 중독되고 나면 골수까지 침범해 사지를 녹이고, 신성까지 타락시키는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니 그들에게도 충분히 치명타를 입힐 수 있었다.
그런 마독들이 쉴 새 없이 튀어 오르면서 그들을 위협했다. 땅은 자꾸만 내려앉고, 불길은 하늘을 뒤덮으면서 내려왔다.
“아아악!”
헤메라는 정말이지 미쳐 버릴 지경이었다. 처음 심상 결계를 통과할 때까지만 해도 이럴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별다른 방해 없이 결계를 통과시켜 줘서 불안감이 들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브라함이 자신을 어떻게 할 수 없을 거란 자신이 있었다.
최근에 개방한 권능이 있었고, 언제든 신성을 조달할 수 있는 수하들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백광을 비롯한 권능은 발현할 때에만 잠깐 큰 효과를 발휘할 뿐.
수십 마리의 마족이 사라진 자리로 수백 마리의 마족이 더 물밀 듯이 꾸역꾸역 머리를 디밀어 대는 통에 신력이 자꾸만 메말라 갔다.
거기다 암암리에 그녀의 신성을 앗아 가는 보이지 않는 손길은 자꾸만 발을 무겁게 만들었으니.
피로도가 계속 누적되면서 정신력이 어느새 바닥을 기었다.
[‘저주: 혼란’에 노출되었습니다. 극심한 혼란을 겪습니다.]
[‘저주: 공포’에 노출되었습니다. 극심한 두려움을 겪습니다.]
……
빼앗긴 신성과 신력은 심상 세계의 마법진에 동력으로 제공된다.
그럼 마법진의 영향을 받은 악마수는 더 강한 마족과 각룡을 쏟아 내고, 헤메라 등은 그들을 상대하다가 마독에 중독되고 다시 신성을 빼앗기고 만다. 그럼 마법진은 다시 악마수를 키우는 식이었다.
이 숲에 구성된 순환 구조는 그들이 죽어야만 끝날 수 있는 수레바퀴였다.
게다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지, 마법진 속에는 짙은 악마의 냄새도 물씬 풍기고 있었다.
어쩌면 그들을 제물 삼아 악마 같은 것을 소환하려는 건지도 몰랐다.
그제야 헤메라는 자신들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이곳은 덫이었다.
그들을 서서히 말려 죽이기 위해 설치된 덫.
부수는 건 이런 전력으로는 절대 안 된다. 일족의 수장이나 집정관이 직접 나서야만 하는 수준이었다.
‘이대로는. 이대로는 안 돼!’
헤메라는 이를 악물었다. 이미 백옥처럼 새하얗던 그녀의 피부는 꺼멓게 죽었고, 한쪽 눈은 마독에 녹아 거리를 가늠하기 힘든 수준이 되었다.
마음 같아서는 수하들에게 일제히 도망치라고 하고 싶었다.
뭉치면 뭉쳐 있을수록 활동 반경이 좁아지고, 마독에 노출되기 쉬웠으니까. 이대로 있다가는 다 같이 죽는 꼴밖에 되지 않았다.
차라리 각자 제 살길을 찾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도 미래가 달라지지는 않을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마족과 각룡의 틈바구니에 섞여 시체도 남기지 못하고 뜯어 먹힐지 몰랐다.
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까.
구원 요청을 하고 싶어도 결계에 들어선 순간부터 외부 통신은 일절 단절되었다. 앞이 너무 막막했다.
그래도 어떻게든 활로를 열어야겠다는 생각에 마지막 남은 신성을 쥐어짰다.
일단은 여기서 탈출해 위험성을 알리는 게 급선무였다.
원로원의 불신임? 두렵기는 하지만, 그래도 목숨을 잃는 것보단 나았다.
하지만 헤메라는 권능을 발현할 새가 없었다. 갑자기 뒤에서 서늘한 느낌이 들더니, 새하얀 창날이 가슴을 뚫고 앞으로 튀어나왔다.
퍽!
“컥……! 아이…… 테르, 너 무슨……?”
헤메라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억지로 고개를 돌렸다. 쌍둥이 오빠, 아이테르가 차갑게 웃으면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수하들이 그녀의 이름을 다급하게 외치면서 다가오려 했지만, 어느새 진형이 붕괴되면서 그들 모두 마족들 틈바구니에 갇히고 말았다.
“백광? 그거 분명히 원로원에 압류된 상태였을 텐데, 어느새 네가 갖고 있었단 말이지?”
〈백광〉. 그들 남매의 가문이 찢어지기 직전, 원래 가문의 당주였던 아버지가 갖고 있다가 박탈당하고 말았던 권능.
“그걸로 마지막에 내 뒤통수를 치려 했고? 만약 이런 일을 겪지 않았다면, 끝까지 모르다가 당할 뻔했어. 못된 누이.”
헤메라는 이를 악물었다. 사실 용인만 확보하고 나면 아이테르를 죽여 입막음할 생각이긴 했다.
공적은 나누는 것보다 홀로 독차지하는 쪽이 훨씬 크게 얻을 수 있으니까. 그리고 그건 아이테르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어쩔 수 없이 숨겨 뒀던 권능을 개방했고, 아이테르도 뒤통수를 치지 못할 거라고 여겼는데.
아이테르는 그걸 보란 듯이 어기고 말았다. 차갑게 웃는 녀석의 눈가는 탐욕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헤메라는 이를 악물었다.
“내가…… 죽으면 너도…… 죽어!”
“아니. 난 산다.”
“뭐……?”
“누이, 네 덕분에 말이지.”
순간, 아이테르의 미간에 새하얀 멍울이 지더니 좌우로 길게 찢어지면서 기괴한 문장을 그렸다.
삼각 도형 속에 마치 눈을 뜬 것처럼 둥근 원 3개가 나란히 박힌 문장.
그 순간, 헤메라는 헛바람을 들이켜고 말았다.
생각지도 못한 문장이었으니까. 엘로힘에게는 오랜 숙적이라 할 수 있는 자들의 것이었다.
“너……!”
“세상 모든 것은 언젠가 이 땅에 강림하실 위대한 신의 소유물에 지나지 않나니.”
아이테르는 손을 뻗어 헤메라의 머리를 우악스럽게 쥐었다.
“그것을 탐하려는 자, 바스러져라.”
화아아-
헤메라는 소리를 지르기도 전에 머리부터 가볍게 부서지면서 흩어졌다.
어떻게 말릴 새도 없이 이뤄진 죽음. 아이테르는 쌍둥이 동생을 죽였는데도 불구하고,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곧 하늘을 따라 녹색 포탈이 활짝 열렸다.
그리고 그 아래로 세 명의 인물들이 나타났다.
커다란 로브를 두르고, 머리는 후드로 뒤집어쓰고 있어 정체를 알아보기 힘든 자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을 본 순간, 헤메라의 수하들은 하나같이 경악성을 토해 내고 말았다.
저들을 따라 감도는 수상쩍은 기운이 그들의 마독 중독을 더 심하게 만들고 있었다.
“마, 마군!”
하지만 그들의 경악 따위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아이테르는 그들에게 한쪽 무릎을 꿇으면서 고개를 조아렸다.
“주교님들을 뵙습니다.”
“……!”
“……!”
소리 없는 비명이 퍼졌다.
마군의 주교. 최고 간부들이 강림한 것이다. 그것을 엘로힘의 원로 의원이나 되는 아이테르가 불렀다는 건,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세 주교는 당연하다는 듯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중에 검은 로브를 쓴 자가 나서면서 물었다. 착 가라앉은 목소리라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옥체는?”
아이테르는 이마로 땅바닥을 찧었다.
“죄송합니다. 저의 불찰로 인해 아직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어쩔 수 없군.”
주교는 가볍게 혀를 차고, 남은 둘에게 턱짓을 했다.
“쓸어라.”
명령을 받은 두 주교는 나란히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강렬한 기파가 휘몰아치면서 앞에 있던 마족과 각룡을 모조리 쓸어 나갔다.
마독도, 짙은 안개도, 두 사람에게는 그저 파도 앞의 모래성처럼 부질없기만 했다.
그때, 검은 로브를 쓴 주교가 한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아무것도 없는 빈 허공이었지만, 로브 사이로 언뜻 드러난 차가운 눈은 예리하게 그 너머에 있는 것을 주시하고 있었다.
“브라흐마. 소꿉장난은 여기까지다.”
* * *
“아, 안 돼!”
갈리어드는 세샤를 데리고 안전한 곳으로 피신을 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세샤가 걸음을 멈추더니 갈리어드의 소맷자락을 단단히 붙잡았다.
“왜 그러니, 세샤?”
세샤가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창백해진 얼굴 위로 식은땀이 흘렀다.
“브, 브라함이 위험해요!”
“뭐?”
갈리어드의 눈이 커졌다. 그는 알고 있었다. 이따금 세샤가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는 절대 무시할 만한 게 아니라는 것을.
세샤는 남들이 가지지 못한 초감각적인 지각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정확도도 아주 높았다.
보통 용종이나 용인은 가지지 않은 이 아이만의 선천적인 능력. 브라함은 이걸 두고 어쩌면 ‘예지’ 특성에 가까워질지도 모른다고 했었다.
하지만 갈리어드는 섣불리 세샤의 말을 따를 수가 없었다. 적들이 원하는 건 세샤지, 브라함이 아니었다.
하지만 세샤는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다급하게 소리쳤다.
“브라함에게 가야 해요! 제발!”
* * *
한 손에 수성의 서를 펼쳐 놓고 있던 브라함의 눈이 번뜩 뜨였다.
‘계산 미스로군, 이건.’
마군의 등장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전개였다. 특히 주교급 인사가 나서는 것은 더더욱.
애당초 이곳에 설치된 대부분의 마법진은 엘로힘을 상대하기 위한 것들이었다.
오만한 엘로힘은 언제나 다른 누구와 손을 잡는 걸 꺼려 한다. 그래서 여태껏 암묵적인 단일 행동을 한 적은 있었어도, 동맹을 맺은 적은 없었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굴복 따윈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아이테르는 그런 곳의 최고 의결 기관인 원로원 소속의 의원이었다. 그런 자가 숙적인 마군으로 전향할 거라고는 생각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이미 일은 벌어진 상태였다.
더구나 세 주교를 영접하는 아이테르의 자세는 아주 공손했다. 마음속 깊이 따르고 있단 뜻이었다.
그밖에도 쉽사리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은 더 있었다. 아이테르 등이 들어오고 나서 분명히 결계를 닫아 뒀을 텐데.
대체 저놈들은 어떻게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던 거지?
결계가 부서지거나, 외부에서 심상 결계에 침투한 흔적도 없었다. 헤메라를 제물로 삼았다는 것 외에는 알 수 있는 게 없었다.
탁!
“어쩔 수 없지.”
브라함은 펼쳐 놨던 수성의 서를 도로 덮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교씩이나 되는 자들을 그냥 제자리에 앉아 상대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것도 세 명이라면 전력을 다해야 했다.
수정 구슬 옆에 나란히 놓인 모래시계를 봤다. 위 칸에서 떨어진 모래가 아래 칸에 거의 다 쌓인 상태였다.
저게 다 떨어지면 비로소 소환 마법진이 가동될 예정이었는데. 시간을 좀 더 들여야 할 듯싶었다.
아니, 차라리 잘되었는지도 몰랐다. 어차피 언젠가 상대해야 할 놈들이었다면 지금 미리 처리해 두는 게 좋았다. 소환진의 가동을 시작할 때쯤에 난입하면 골치만 아팠다.
악마도 주교의 영혼을 가져다준다면 더 좋아하겠지.
브라함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면서 녀석들이 있는 곳으로 통로를 열려 했다.
바로 그때.
『브라흐마. 장난은 여기까지다.』
갑자기 수정 구슬 속에서 주교 한 명이 이쪽을 정확히 보면서 비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브라함의 눈이 커졌다.
“……킨드레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