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권
1화. 악마대공 아가레스 (1)
그 순간.
킨드레드가 양손을 앞으로 뻗더니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붙잡고 그대로 좌우로 크게 찢었다.
촤아악!
마치 종이가 찢어지듯이 가볍게 열린 공간 너머로, 킨드레드가 포악하게 웃으면서 튀어나왔다.
쾅!
킨드레드는 오른손을 갈퀴처럼 구부리면서 브라함의 머리를 내리찍었다.
브라함은 재빨리 블링크를 발동시켜서 공격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완전히 피할 수 없어 손에 쥐고 있던 수성의 서는 겉면이 통째로 찢겨난 상태였다.
애초 이걸 노린 거였나. 브라함이 딱딱한 표정으로 킨드레드를 노려봤다.
아니, 그보다 세계 침투에 이어서 시각 포착, 그리고 공간 접이까지. 녀석의 행동은 너무 자유로웠다.
마치 이 심상 세계가 자신의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하지만 킨드레드는 그딴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다시 한 번 더 공간을 거세게 박차면서 브라함에게로 와락 달려들었다.
쐐애액-
마치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맹렬한 움직임이었다. 브라함은 잇달아 블링크를 발동시키면서 트리플 캐스팅을 돌렸다.
〈뇌전의 추(鎭)〉
〈불의 축제〉
〈범람하는 칼바람〉
하늘에서부터 수십 개의 낙뢰를 응축시킨 벼락을 떨어뜨리고, 떨어진 자리에 일어난 폭발력을 증 폭시키면서, 범위를 수백 배로 확산시키는 그의 연계기였다.
거기다 땅에서는 마독을 한껏 품은 각룡이 잇달아 소환되면서 킨드레드를 집어삼키고자 했다.
전부 하나같이 브라함의 심상 세계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들. 세계를 구축하는 모든 법칙이 브라함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킨드레드는 브라함을 쫓는 속도를 줄이는 것 하나 없이, 손을 거칠게 휘두르는 것만으로 벼락과 각룡을 모조리 찢어 버렸다.
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20층의 오행산에서 수련한 결과는 그만큼이나 대단했다.
더구나 언제부턴가 브라함의 눈에는 킨드레드의 주변을 따라 맴도는 검은 아지랑이가 보이기 시작했다.
‘마령(魔靈)까지……?’
마군의 주교들이 그들이 모시는 신을 접신할 때에 나타난다는 독특한 현상이었다.
저것이 발생하는 동안에는 막대한 가호가 실려서 권능을 몇 배로 증폭시킨다고 알려져 있었다.
아무래도 킨드레드가 그의 권역에서 마구잡이로 날뛸 수 있는 건, 전부 마신의 가호 때문인 듯 싶었다.
브라함은 이를 악물었다. 그는 마군이 모시는 신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신이되, 신이 아닌 자. 악마이면서도, 악마가 아닌 존재. 그렇기 때문에 탑의 플레이어들은 마신이라 부르지만, 사실은 누구보다 빛에 가까워 모든 것을 부수고 다시 도로 세운다는 모순적인 이였다.
그래서 마군 내에서는 이렇게 불렀다.
하늘에 다다른 마(魔).
천마(天魔)라고!
콰콰쾅!
그리고 그런 천마는 설사 브라흐마 신이 모든 권능을 드러낸다고 해도, 절대 이길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는 존재였다.
아니, 이길 엄두도 낼 수 없는 존재였다.
콰콰콰-
그런 천마의 막대한 가호를 받고 있는 만큼, 킨드레드를 당장 꺾기는 힘들 것 같았다.
이미 언제부턴가 심상 세계도 조금씩 천마의 색으로 물들고 있는 중이었다.
‘그만큼 세샤를 필요로 한다는 건가? 하지만 엘로힘은 그렇다 쳐도, 마군은 왜?’
브라함은 결국 생각을 바꿔야만 했다. 킨드레드를 당장 이길 수 없다면, 찍어 눌러서 압살시키는 수밖에는 없었다.
심상 세계와 함께. 통째로!
〈천지 붕괴〉
브라함은 손을 높이 뻗었다가 아래로 세게 내리쳤다.
판단은 빨랐고, 상당한 기간에 걸쳐 고생 끝에 완성했던 심상 세계가 붕괴하는 건 그보다 훨씬 빨랐다.
하늘이 그대로 폭삭 주저앉는 듯한 끔찍한 광경과 함께, 주변을 이루던 공간이 통째로 찢겨지면서 킨드레드도 거기에 휩쓸리고 말았다.
곳곳에 설치했던 마법진들도 잇달아 이펙트를 토해 내면서 브라함의 스킬에 호응했다.
어차피 강적이 나타나면 자폭을 시킬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으니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무너지면 다시 구축하면 그만. 소환 마법진만 남아 있다면 괜찮았다.
콰콰콰!
킨드레드는 이대로 있다간 무너지는 공간에 눌려 짓이겨지겠다는 생각에 탈출을 시도했다.
하지만 그가 지나는 공간마다 소용돌이를 그리면서 한쪽 지점으로 계속 붕괴해 잘못하다간 그대로 갇힐 것 같았다.
그때, 좌우로 다른 두 주교가 나타났다.
“이주교 님!”
한 명이 막대한 인력(引力)을 전개해 킨드레드를 잡아당기고, 다른 한 명은 마력탄을 날려 브라함을 요격했다. 스킬을 전개 중인 그가 훤히 노출된 탓이었다.
하지만 그런 공격은 곧 갈리어드가 나타나면서 무위로 돌아갔다.
팟-
갈리어드는 순보를 극성으로 밟으면서 화살을 잇달아 날렸다.
피피핑, 묵직한 무게가 실린 쇠화살이 빗발치는 통에 두 주교는 배리어를 잇달아 중첩시켜야만 했다.
콰콰쾅!
브라함이 마법 도식을 새겨 특별히 만들어 준 화살답게, 부딪치는 족족 배리어가 연거푸 부서져 나갔다.
반발력으로 두 주교가 밀려나는 사이, 갈리어드는 바람의 정령을 부리면서 허공을 거세게 걷어차 단숨에 녀석들이 있는 곳까지 진입했다.
〈순보 - 일위도강〉
마치 블링크라도 펼친 것 같은 엄청난 속도.
어느새 갈리어드를 맞닥뜨린 주교가 본능적으로 손을 크게 휘저었다. 로브 자락이 뒤집어지면서 검은 광채로 둘러싸인 손바닥이 드러나며 갈리어드를 덮쳤다.
〈마신의 인(印)〉. 손도장을 찍은 부위의 혈맥을 터뜨리는 마군 특유의 기술.
하지만 갈리어드의 기습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황급히 휘두르느라 동작이 클 수밖에 없었고, 갈리어드는 재빠른 신법으로 공격을 피하면서 단숨에 녀석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허리띠에서 단검이 뽑혀 나와 단숨에 주교의 복부에 틀어박혔다.
퍽!
“터져라.”
갈리어드의 주문과 함께 단검에 내장된 마법이 가동되었다. 단검이 폭발하면서 수십 개의 파편이 녀석의 내장을 짓이겨 놓았다.
아무리 천마의 가호를 받는 주교라 해도 절명할 수밖에 없는 치명타. 마군이 자랑한다는 아홉 번째 주교, 예비치는 그렇게 절명하고 말았다.
“놈!”
여덟 번째 주교, 드미트리는 분노를 드러내면서 마신의 인을 터뜨렸다. 갈리어드는 다시 일위도 강을 펼쳐 몸을 뒤로 내뺐다.
드미트리는 곧장 그 뒤를 쫓으려 했지만, 위에서부터 무너지는 공간의 잔해에 발이 묶여야만 했다.
“제기라알!”
녀석의 욕지거리는 금세 공간에 묻혀 사라졌다.
그렇게.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 버렸다.
심상 세계가 무너지고, 갖가지 폭발이 일어나면서 시야는 물론 모든 감각까지 어지러워졌다.
하지만 그사이, 브라함과 킨드레드는 각각 자세를 바로잡으면서 재차 공격을 시도할 수 있었다.
비틀린 세계가 다시 한 번 더 뒤틀리면서 하늘까지 다다르는 거대한 회오리바람을 일으켰다. 브라함의 권능과 킨드레드의 권능이 그 속에서 뒤섞이면서 충돌했다.
와장창창!
콰콰콰-
결국 거울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심상 세계가 완전히 무너지고, 바깥세상이 훤히 드러났다. 그리고 여태 안에서 몇 번씩이나 빠르게 돌던 회오리는 폭발적으로 팽창해 주변 일대를 모조리 초토화시켰다.
처음 연우가 아이테르 등을 물리치기 위해서 뿌렸던 불의 파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범위와 위력.
막대한 풍속과 기압을 자랑하는 회오리는 장장 수십 킬로미터에 달하는 범위를 통째로 휩쓸었다. 그 속에 있던 악마수들이며 마족, 각룡 어느 것 하나 가릴 것 없이 모든 게 형체조차 남기지 못하고 분쇄되고 말았다.
이대로 뒀다간 스테이지가 통째로 갈려 나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충돌이었지만.
브라함과 킨드레드는 여전히 주도권을 놓치지 않기 위해 막대한 권능을 행사하는 중이었다.
회오리 속에서, 권능과 권능이 부딪쳤다. 신성과 신성이 충돌했다. 신력과 신력이 힘겨루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그럴수록 회오리의 크기도 점차 커져 가면서 악마의 숲을 집어삼켰다. 모래 해일이 수십 미터나 높게 치솟으면서 사방으로 뻗쳐 나가고, 마족과 유령이 피해 달아나다가 강풍에 휩쓸렸다.
“큭……!”
브라함은 금방이라도 팔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고통에 이를 악물었다. 심상 세계가 무너지면서 신성과 권능이 물 빠지듯이 쑥 빠져나갔지만, 그런데도 그는 억지로 영혼을 쥐어짰다.
여기서 주도권을 놓친다면 반발력으로 죽음을 맞고 만다. 아니, 죽는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미련 따윈 없는 인생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되어 버린다면 세샤를 녀석들에게 빼앗기게 되었다. 그렇게 내버려 둘 순 없었다.
‘그렇게는, 안 돼!’
세샤. 세샤. 나의 불쌍한 아이. 평생 제 어미의 사랑도 한번 못 받아보고 살았던 아이다. 제 아비의 얼굴도 모른 채 살아야만 하는 아이다.
알 수 없는 병환으로 몇 년 안 되는 짧은 생애 동안 계속 누워만 있어야 했고, 이제야 겨우 털고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웃기 시작하면서, 그 고사리 같은 손으로 자신의 손을 잡아 주었다. 그리고 웃어 주었다.
그때 보았던 작은 미소는 아마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미소를 다시 잃게 하라고? 절대 그럴 수 없다. 설사 신격이 바닥에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이 아이를, 부탁할게요.
야밤중에 곤히 잠든 갓난아기를 품에 안은 채 찾아왔던 아난타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쳤다.
슬픈 눈망울을 한 채, 처연한 얼굴로 말하던 모습.
-네가 지금 제정신이더냐! 이 아이는 네 아이도 아니잖……!
-아뇨. 제 아이에요. 제 배로 낳은 아이는 아니지만, 제 마음으로 낳은 아이에요. 그러니 부탁할게요.
그러면서도 내 아이라고 말하던 눈빛은 단호했다.
-아버지.
여태껏 단 한 번도 ‘아버지’라고 부른 적이 없던 자식의 부탁이었기에. 언제나 자신을 원망하며 살았던 딸의 간절한 바람이었기에 거뒀고, 길렀다.
어쩌면 세샤에게 주었던 마음은 옛날의 못났던 자신의 잘못에 대한 속죄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속죄는 진심이 되었고, 이제 그는 세샤를 친손녀처럼 여기고 있었다.
콰아앙!
그때, 자꾸만 커져 가던 회오리가 어느새 구름을 뚫고 붉은 상공까지 다다르고 말았다. 멀리서 보면 마치 하늘과 땅을 잇는 기둥이 세워진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리고 브라함은 어느새 회오리가 자신의 통제를 벗어난 것을 알 수 있었다.
회오리는 자신의 신성을 송두리째 빨아들였지만, 안에서 느껴지는 건 킨드레드의 권능이었다. 아니, 천마의 신성이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모든 신성을 빼앗기는 것으로도 모자라, 영혼과 격까지 뜯기고 말리라. 그리고 세샤까지 잃고 말겠지.
그래서 브라함은 생각했다.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다행히 딱 한 가지가 남아 있었다.
여전히 지하 깊숙한 곳에 박혀 있을 소환 마법진. 심상 세계와는 별도로 설치했으니 지금쯤이면 막대한 제물을 집어삼켰을 게 분명했다.
엘로힘과 마군의 침입자들이며 수만 그루의 악마수, 마족과 각룡들까지. 충분하다 못해, 아예 넘쳐흐르겠지.
만약 그것을 통째로 소비해 버린다면?
그리고 거기에다 자신의 신격까지 갖다 바친다면.
브라함은 회오리를 겨우 붙잡고 있던 권능을 손에서 놓아 버렸다. 몸이 회오리 바깥으로 튕겨 났다. 마력 역류로 정신이 어지러웠지만, 가까스로 붙잡으면서 지상으로 손을 뻗어 마지막 스킬을 발동했다.
〈악마 소환〉
영혼에서 뭔가가 통째로 뜯겨 나가는 듯한 끔찍한 고통과 함께,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아래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그 순간, 막대한 너비에 걸쳐 지면 위로 숨겨졌던 연성진이 떠올랐다. 역오망성 수십 개가 겹쳐진 연성진은 검은 빛으로 물들다가, 그 위로 거대한 철문을 토해 냈다.
흉측한 악귀들이 잡다하게 일그러진 문양을 가진 철문. 막대한 마기를 뿌려 대는 문이 곧 활짝 열렸다.
쿵!
세상이 내려앉는 듯한 어마어마한 충격과 함께, 문 너머로 어둠이 밀물처럼 차오르면서 한 남자가 둥실 떠올랐다.
수십 개의 검은 날개를 갑옷처럼 두르고 있는 남자.
『하층의 공기는, 위와 달리 참으로 상쾌하구나.』
르 인페르날의 72악마 중 두 번 째 서열을 자랑한다는 자. 또한, 파멸과 광기를 상징한다는 마계 동부의 대공.
아가레스.
그의 강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