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202화 (202/862)

2화. 악마대공 아가레스 (2)

『우선, 이 너저분한 것부터 치워야겠군.』

아가레스는 가볍게 손을 뻗어 옆으로 휘저었다. 그러자 영원히 이어질 것 같던 직경 수십 킬로미터의 회오리가 금세 가라앉았다. 거짓말처럼.

후두둑. 회오리에 갈린 마족의 사체 조각이나 악마수의 파편들이 무더기로 쏟아지는 가운데.

“아가레스……!”

킨드레드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아가레스를 올려다봤다.

98층에 억류되어 있어야 할 악마가 층계를 벗어나 강림했다. 그것도 대공의 작위를 가진 최고위 악마였다.

킨드레드는 신격까지 아무렇지 않게 내던진 브라함을 떠올리면서 이를 바득 갈았다.

한편으로는 엉덩이가 무거워 자신의 영지를 쉽사리 떠나지 않는다는 저런 악마가 왜 하찮게 여기는 저층 구간에 직접 강림한 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막대한 제물이 소비되었다고 하더라도, 하급이나 중급 악마가 아니고서야 녀석에게는 별다른 도움도 되지 않을 텐데.

하지만 이미 일은 벌어지고 말았다.

그렇다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든 타개책을 마련해야만 했다.

녀석에게 강림 시간에 한계가 있다고 해도, 그는 그사이에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는 존재.

그리고 녀석이 뭘 노릴지는 빤히 보였다.

용인.

자신들과 똑같은 목표였다. 엘로힘, 혈국, 마군에 이어 악마들까지. 이번에는 쉽게 생각했던 목표였었는데. 생각보다 일이 너무 복잡하게 꼬이고 말았다.

고생의 정도만 따진다면. 천마의 다른 얼굴, 제천대성의 허물을 만나기 위해 십 년이 넘는 세월을 허비한 것에 맞먹을지도 몰랐다.

킨드레드는 품에서 샛노란 철 조각을 다섯 개 꺼내 허공에다 띄웠다. 여의봉의 조각. 그것을 매개체로 쓴 순간, 곧 하늘에서부터 황금색 빛의 기둥이 내려오면서 그를 감싸 안았다.

여의봉의 조각이 그의 주변을 뱅글뱅글 맴돌았다. 검은 기운도 거기에 스며들면서 막대한 신력을 불어 넣었다.

〈마령〉

〈접신 – 미후왕〉

화아악!

킨드레드는 막대한 신력을 손끝으로 집중시켰다. 원래대로라면 접신은 마령을 꺼내는 정도 선에서 끝내야 했다.

천마의 다른 얼굴까지 빌리는 것은 마력과 영력의 막대한 소모를 필요로 했다. 설사 빌린다고 하더라도, 브라함의 저항이 끈질겨 신격을 찍어 눌러야 할 때에 쓰려 했던 것이지만.

아가레스가 나타난 이상, 지금은 이것저것을 따질 겨를이 없었다.

파지직-

콰콰콰!

72선술 중 ‘벽(驛)’과 ‘응(凝)’을 섞은 오른손에는 강렬한 뇌기가 튀었다. ‘빙(水)’과 ‘시(澌)’가 합쳐진 왼손에는 차가운 한풍이 맴돌았다. 양과 음. 두 개의 상반된 속성을 동시에 운용하면서, 그 위에다 여의봉의 조각으로 끌어당긴 미후왕의 힘을 불어넣었다.

킨드레드로서도 어떻게 감당하기 힘들 만큼 막대한 양의 힘이 몸에 바짝 실렸다. 피부 위로 핏줄이 금세 터질 것처럼 잔뜩 부풀어 올랐다.

더불어 그의 두 눈도 짙은 황금색으로 빛났다.

〈화안금정〉

킨드레드는 미후왕만이 얻을 수 있었다던 능력들을 내보이면서, 두 손바닥을 힘껏 마주쳤다.

“터져라!”

우르르, 콰콰쾅!

〈음양합벽〉. 극한까지 압축시킨 두 개의 상반된 힘을 합쳐서 단 번에 커다란 폭발을 일으키는 킨드레드의 시그니처 스킬.

천마의 힘도 부쩍 실렸으니, 아가레스를 쓰러뜨리지는 못할지라도 현신을 깰 정도는 된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뭘 그렇게 열심히 하나 싶었더니. 이런 깜찍한 것을 준비하고 있었나?』

아가레스는 피식 웃음을 흘리더니 그쪽으로 손길을 뻗었다.

『하지만.』

그러다 그는 웃음을 뚝 그치면서, 두 눈을 가늘게 좁혔다.

『미후왕을 흉내 내기에는 아직 많이 어설프다.』

23층의 스테이지를 이대로 부숴 놓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강렬하게 내리꽂히던 음양합벽은 아가레스에게 닿기도 전에 허망하게 사라졌다.

그리고 마치 귀찮은 파리를 털어 버리듯. 아가레스는 몸을 두르고 있던 날개 하나를 가볍게 흔들었다.

『사라져라.』

그러자 짙게 깔리던 어둠이 해일처럼 범람하면서 킨드레드를 비롯한 남은 주교를 모두 쓸어버렸다.

어떻게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마령을 키우거나, 새로운 접신을 시도해 볼 것도 없이 형체가 사라져 버렸다.

여태껏 스테이지를 마구잡이로 휘젓고 다니고, 마군의 두 번째 주교로서 자자했던 악명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너무 허망한 최후.

하지만 아무리 강한 플레이어라 할지라도, 악마나 신에게는 한 줌의 모래에 불과한 법이었다.

하지만 아가레스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한쪽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분신이었나? 언제나 잠만 자기에 바쁜 제 주인을 닮은 종놈다운 짓이로군.』

그러다 가볍게 혀를 차면서 다른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뭐, 아무래도 상관없겠지.』

킨드레드 등이 사라지면서 23층에 개입하려던 천마의 손길은 완전히 차단되었다.

이제 여기서 그를 막을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었다.

『하면, 이제 방해꾼들도 전부 사라졌으니 그대의 소원을 말해 보라, 계약자여.』

악마는 소환자의 부름에 응답해 모습을 나타내어 소원을 이뤄 주고, 대신에 소환자는 대가로 영혼을 내준다.

브라함은 바위에 등을 기댄 채 쓰게 웃었다. 그의 입가에서는 쉴 새 없이 핏물이 쏟아졌다. 신격을 강제로 뜯으면서 생긴 반동. 영혼이 큰 타격을 입으면서 육체가 붕괴하고 있단 뜻이었다.

하지만 브라함은 그런 것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차피 저층 구간으로 내려오면서 신격이니 신위니 하는 건 신경 쓰지 않은 지 오래였으니까. 그리고 이미 각오도 했었다. 모든 게 계산 안쪽이었다.

그러나. 아가레스는 계산에 전혀 없었다.

“내가 부른 건, 끽해야 벨리알이나 단탈리안이었을 텐데…… 어째서 네가 나타난 거지?”

『글쎄. 왜일 거라고 생각하나?』

아가레스의 한쪽 입술 끝이 말려 올라갔다.

브라함은 이를 악물었다.

“용의 사체를 원하는 거라면, 이미 예전에 확보해 둔 게 있으니 그것을 내주겠다. 로드의 사체다. 너희들 눈에 용인은 쓸모없는 것 투성일 테니, 그걸로 충분하겠지?”

드래곤 로드의 사체. 천금을 주어도 절대 바꿀 수 없는 아주 귀중한 재료였다. 악마는 물론, 신까지 탐낼 만한 조건이었다.

하지만.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브라흐마. 설마 내가 아직도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아가레스는 팔짱을 끼면서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악다문 브라함의 입술이 쉽게 떼어지질 않았다.

설마? 어떻게든 관심사를 돌리려 했지만, 녀석은 사실을 알고 나타난 것 같았다. 하지만 어떻게? 분명히 그 사실은 신의 눈에서도, 악마의 귀에서도, 철저하게 숨겼을 텐데?

『난 용인을 가져갈 것이다. 재능도 크게 없는 하등 쓸모없는 쓰레기에 불과하지만. 헤븐윙의 자식이라면, 직접 이 몸이 다녀간 전리품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

브라함은 설마가 현실이 된 순간 몸이 빳빳하게 굳어 버리고 말았다. 꽉 쥔 주먹에 힘이 잔뜩 실렸다.

그리고 그건 몸을 숨긴 채, 여차하면 브라함을 데리고 스테이지를 빠져나갈 생각이던 갈리어드도 마찬가지였다.

‘뭐라고?’

갈리어드의 시선은 아가레스에게서 브라함 쪽으로 움직였다. 그의 두 눈이 크게 요동쳤다.

‘세샤가…… 정우의 딸?’

헤븐윙. 차정우. 튜토리얼에서 햇병아리였을 때 만나 자신을 ‘스승’이라고 부르며 쫄래쫄래 따라 다니던 녀석.

그 뒤로도 녀석은 이따금 튜토리얼을 찾아와 자신의 말 상대가 되어 주고, 함께 아카샤의 뱀을 쫓으면서 유품을 찾는 것을 도와 주기도 했다.

웃음기가 많고, 살갑기도 하던 녀석이었다.

그래서 그런 녀석이 주변 동료들의 배신으로, 탑의 공적이 되어 눈을 감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갈리어드는 억장이 무너지는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일이 벌어지고도 시간이 너무 많이 흐른 뒤였고, 자신만으로는 어떻게 녀석의 한을 달래 주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억지로 화를 삭이면서, 언젠가 힘을 갖게 될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리고 브라함을 도우면서 녀석을 꼬드겨 힘을 키우자고 설득하려던 차였는데.

그 아이의 흔적이, 이렇게나 가까이 있었다고?

“아니. 그 아이는…….”

하지만 브라함은 악에 바친 목소리로 소리쳤다. 두 눈은 시뻘겋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아난타의 딸. 나의 손녀다!”

수성의 서를 쥐는 손길에 힘이 바짝 실렸다.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파라락. 거기에 맞춰서 수성의 서가 빛을 뿌리면서 자동으로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마도서의 발현이었다.

“아가레스! 그대에게 소원을 말하겠다.”

『일단 들어주지. 말하라.』

“내 손녀를 위해 희생되어 줘야겠다.”

그리고 그 말이 끝나는 순간.

화아악-

소환진보다도 더 깊숙한 곳에 박혀 있던 연성진이 일제히 가동되었다. 지면 위로 수십수백 개의 연성진이 떠올랐다. 연성진은 전부 크고 작은 톱니바퀴처럼 서로 맞물려 있어, 언제든지 작동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브라함은 여기에다 마지막 남은 신의 증거, 신성을 전부 박아 넣었다.

끼릭, 끼리릭-

톱니바퀴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연성진들이 일제히 회전하면서 사방으로 흩어지고, 대신에 그 위로 수천 개의 쇠사슬이 치솟았다.

연우가 봤던 신진철의 구조식을 연성하면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신진철이었다.

촤라락!

쇠사슬은 단숨에 아가레스의 팔다리는 물론, 몸뚱이와 수십 개의 검은 날개까지 전부 칭칭 감았다. 그리고 브라함의 수신호에 따라 빳빳해지면서 아가레스를 단단히 구속했다.

신성이 부여된 신진철. 이것이라면 아무리 아가레스라고 하더라도 쉽게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유지하는 중인 브라함의 육체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피부 위로 주름이 지고 검버섯이 폈다. 신성으로 멈춰 뒀던 노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중이었다.

브라함은 이제 신격과 신성을 모두 잃은 평범한 인간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죽는다는 건 진짜 죽음을 맞는다는 것과 같은 뜻. 하지만 브라함은 자신의 남은 목숨을 전부 아가레스를 봉인시키는 것에 집중할 생각이었다.

손녀가 건강한 모습으로 웃는 것을 못 본다는 게 아쉬웠지만. 그것을 이룰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수성의 서에다 더 크게 마력을 불어 넣었다. 그의 분신이라 할 수 있는 수성의 서도 마찬가지로 빳빳해지면서 곧 바스러질 것 같았지만, 조금만 더 버텨 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리고 그사이, 브라함의 눈빛을 받은 갈리어드가 몸을 돌려 다시 움직였다.

친구의 마지막을 못 보는 것이 안타까웠지만, 그래도 그의 유지는 어떻게든 지켜 줄 생각이었다.

끼리릭!

톱니바퀴가 돌아가면서 다시 쇠사슬이 안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봉인진이 가동되면서 아가레스를 집어삼키기 위해 맹렬하게 움직였다.

그때.

쇠사슬에 꽁꽁 묶인 채. 아가레스가 흥미롭다는 듯이 울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것이로군. 그동안 그대가 준비했던 것이. 한데, 미안하게도 그대의 소원은 이뤄 줄 수가 없겠어.』

* * *

[대량으로 마의 인자를 터득했습니다.]

연우는 모든 흔적을 남기고 난 뒤, 손에 쥐고 있던 낡은 책자를 가볍게 찢었다.

각룡을 봉인시키고 보상으로 얻은 드 로이의 탐험일지였다.

[‘드 로이의 탐험일지(2번째 파트)’를 파괴하였습니다. 앞으로 같은 아티팩트에 대한 추가 습득이나 활용이 불가능해집니다.]

[숨겨져 있던 히든 피스가 드러납니다!]

드 로이의 탐험일지는 겉보기엔 그냥 단순한 낡은 일기장에 불과했다. 진짜 모습은 이것을 찢어서 흡수했을 때에 비로소 나타났다.

화아아-

아주 고운 입자로 잘게 부서진 일지는 천천히 연우의 오른손에 스며들었다.

그러자 오른쪽 손바닥 위로 검은 문장이 생성되었다. 두 개의 뿔이 난 산양의 모습이었다.

[스킬 ‘악마학’이 생성되었습니다.]

[악마학]

등급: D+

숙련도: 0.0%

설명: 탐험가였던 드 로이가 평생에 걸쳐 악마를 추적하면서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탄생한 학문. 98층에 체류 중인 악마의 힘을 빌려 흑마법을 행사할 수 있다. 숙련도가 깊어질수록 더 강한 악마와의 계약도 가능해진다.

지금은 일지의 파트가 부족해 등급이 낮게 책정되었으며, 더 많은 파트를 찾을수록 등급이 상승할 것이다.

* 마의 주술

일정한 대가를 치러, 흑마법에 필요한 마기를 일부 생산할 수 있다. 흑마법은 따로 스킬북을 찾아 익혀야만 한다는 조건이 따른다.

* 마독

마족과 악마만이 분비한다는 맹독을 생산한다. 어둠 계통 속성력이나 마의 인자 보유량에 따라 생산량이 달라진다.

악마학은 아직 파트를 하나밖에 찾지 못한 것 때문인지 등급이 아주 낮게 책정되어 있었다. 가능한 마법도 사실상 주술과 마독이 전부였다.

하지만 처음 얻는 게 어려울 뿐, 그 뒤는 쉬웠다. 경매장 같은 곳에 심심찮게 보이는 것이 흑마법서였으니까. 웬만한 조건으로는 손을 댈 엄두도 내지 못하기 때문에, 흔히 흑마법은 공급에 비해 수요가 턱없이 부족한 편이었다.

‘물론, 대부분의 흑마법은 부에게 거의 다 줄 생각이지만. 우선은 마의 주술과 마독만 해도 큰 소득이야.’

악마학에 필요한 마의 인자야 각룡의 심장과 보라색 마귀꽃을 이용한 환단으로 대폭 증가시키면 그만이다.

그렇게 해서 얻은 마기와 마독은 여러 방면으로 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괴이 군단의 운용뿐만 아니라, 다양한 스킬 응용에까지도. 이미 생각해 둔 것도 몇 개가 있었다.

다만, 악마학 스킬을 활용하더라도 최대한 조심해서 다뤄야만 했다. 마기를 깊게 다룬다는 건, 그만큼 연결된 악마와도 가까워진다는 뜻.

악마와 가까워져서 좋을 건 하나도 없었다. 연우가 필요한 것은 힘일 뿐이었다.

“형님, 이건 어디다 두면 되우?”

그때, 판트와 에도라가 직접 뽑은 심장을 갖고 왔다. 연우는 인트레니안을 열어 그 속에다 넣게 했다.

“우선은 여기다 보관해. 나중에 다 정제하고 나면 나눠 줄 테니까.”

“으흐흐. 악마의 힘이라. 이 뿔하고 잘 어울리려나.”

악마학을 잘못 다루면 위험하다고 몇 번이나 경고를 했지만, 판트는 더 강해진다는 사실에 기뻐할 뿐이었다.

연우는 피식 웃으면서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참 한결같은 녀석이었다.

“후우! 그나저나 정말 요란하게도 싸웠네. 형님은 또 대체 어떤 놈이랑 싸웠기에 이런 꼴이 됐……!”

판트는 주변을 둘러보면서 뭔가를 말하려다 말고 갑자기 눈을 크게 떴다. 동시에 몸을 반대로 돌렸다. 연우와 에도라도 똑같은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브라함의 심상 세계가 있는 방향. 그곳에서부터 어마어마한 기파가 퍼져 나오더니 곧 뭔가가 깨져 나가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회오리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부!’

연우는 재빨리 그림자 속에 있는 부를 불러 자신과 판트 남매 주변에다가 임시 방어막을 몇 겹이나 둘러쳤다. 그걸로도 모자라 아이기스를 가져와 거대한 결계를 형성했다.

하지만 상당한 거리가 떨어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거대한 회오리바람에서부터 휘몰아치는 강풍은 결계와 방어막을 몇 번씩이나 부수고 흔들기를 반복했다.

판트와 에도라도 연우의 보호 아래, 가지고 있던 스크롤을 잇달아 찢으면서 몸을 보호하는 데 집중했다. 그리고 간간이 바람에 쓸려 날아오는 바위나 악마수 따위를 쳐 내면서 상황을 지켜봤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걸까? 연우의 시선은 회오리바람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분명히 브라함이 구축한 심상 세계라면 엘로힘의 침입을 충분히 막아 내고도 남았을 텐데. 혹시 생각지 못한 변수라도 벌어진 걸까.

하지만 연우의 경악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회오리바람이 거짓말처럼 그치고 난 뒤. 그 뒤에 불어오는 바람에 섞인 짙은 어둠과 농밀한 마기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본능적으로 용의 감각을 자극하는 힘. 악마의 마기였다. 어차피 연성진과 봉인진의 의도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 놀라지는 않았다.

다만, 연우를 놀라게 한 건, 마기의 기질이 그에게 너무 익숙하다는 점이었다.

끈적끈적하고 눅눅한 느낌 아래, 사람의 신경을 자꾸 자극하는 이질적인 기질.

동생과 계약해 힘을 빌려주고, 그 뒤로 몇 번씩이나 달콤한 말로 영혼을 유혹하려 했지만, 결국에는 얻지 못해 울분을 삭이며 훗날을 기약하던 녀석이었는데. 그 외에는 다른 일에 일절 관심도 두지 않던 녀석이 갑자기 왜 하층에 나타난 거지?

‘아가레스가 여기는 왜……?’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들었다. 연우는 불의 날개를 활짝 펼치면서 그쪽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뒤에서 그를 다급하게 부르는 판트와 에도라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도무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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