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203화 (203/862)

3화. 악마대공 아가레스 (3)

-너는 결국. 나의 것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동생이 체내에 남은 독의 병마와 싸우면서 차츰차츰 죽어 가고 있을 때 즈음.

아가레스는 동생과 연결된 고리를 통해 꿈속에 나타나면서 그렇게 말을 했었다.

여기에 동생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아가레스. 미안하지만 나는 너와 함께할 수 없어.

-하! 끝까지 잘난 척이로구나. 죽어 가는 주제에.

-죽는다고 해도, 지켜야 하는 게 있으니까.

동생에 대한 아가레스의 집착은 아주 극심했다. 처음에는 탑에서도 몇 남지 않은 용의 후예를 권속으로 삼기 위해서였다.

동생은 악마학을 통해 악마의 마법을 익히고자 시도했고, 여기에 응답한 자가 바로 아가레스였던 것이다.

솔로몬의 72악마 중 대공 급이 나타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기 때문에, 계약을 맺고자 했던 동생과 그것을 도와줬던 비에라 듄은 크게 경악하고 말았다.

그리고 지금 떠올려 보면 비에라 듄이 동생을 조금씩 질투하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아가레스는 여러 거래를 통해 자신의 마법을 가르쳐 주면서, 이따금 권능도 물려줄 테니 권속이 되라고 제안했다.

권속이 싫다면 사도가 되라고. 그런다면 앞으로 네가 어떤 길을 걷든지 최고의 미래가 기다릴 것이며, 죽고 나서도 자신의 복마전에서 높은 서열을 매겨 주겠노라고 약속을 했었지만.

그럴 때마다 동생은 생각할 것도 없이 단칼에 거절했다.

아가레스가 원하는 것이 자신이 보유한 용의 인자와 만통 특성이란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거절들이 아가레스를 단단히 뿔이 나게 만들었다.

용도 되지 못한 반푼이 따위가 자신이 내린 은총을 계속 걷어차는 꼴이었으니까. 반면에 아가레스는 신으로 치면 최고신의 반열에 해당하는, 까마득한 격의 차이를 지닌 존재였다.

더구나 당시 아가레스는 저층 구간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있던 중이었다.

스스로 해내고자 하는 비원이 있어, 거기에 몰두한 세월이 천 년이 넘을 정도였다. 그러다 간만에 갖고 싶은 ‘물건’이 생겼으니. 얼마나 조바심이 났겠는가.

그래서 아가레스는 몇 번 더 큰 제안을 던졌고, 이마저도 번번이 거절로 돌아오자 동생과의 교류를 끊었다.

동생으로서도 아가레스의 신비를 더 이상 배울 수 없다는 점이 아쉬웠지만.

이미 그때는 필요한 흑마법을 거의 다 익힌 상태였고, 이를 바탕으로 5단계의 각성까지 이뤘기에 더 이상 미련을 두지 않았다.

더구나 그때는 8대 클랜과의 갈등이 심각해지면서, 분쟁이 조금씩 시작될 무렵이기도 했다.

그러다 자취를 감췄던 아가레스가 다시 연결을 복구시킨 건, 몇 년이 지나 동생이 홀로 클랜 하우스에서 생을 다해 가고 있던 중이었다.

아가레스는 마지막 제안을 던졌다.

자신의 손을 잡으라고.

그런다면 너의 육체와 영혼을 좀먹어 가는 병마를 물리쳐 줄 것이며, 막대한 힘을 빌려주어 모든 복수를 이룰 수 있게 해 주겠노라고.

또한, 거기서 생겨나는 인과율의 제약은 자신이 전부 감당하겠다는 말도 안 되는 조건까지 덧붙였다.

인과율의 제약.

신과 악마를 98층에 강제로 억류시키며, 그런 막대한 권능과 능력을 가지고도 아무 일도 할 수 없게끔 손발을 묶어 버리는 규율.

그것을 거스르고 감당한다는 뜻은. 격에 가해질 막대한 손상을 감내하겠다는 뜻이었다. 아가레스로서는 탑이 세워진 이래로 단 한 번도 내세우지 않았던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하물며 언제나 상위 서열로 올라가기 위해서 호시탐탐 그를 노리는 놈들이 많은 사바나 같은 악마의 사회에서, 그런 제안은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가레스로서는 마지막 남은 자존심까지 내려놓은 셈이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초조함도 느껴졌다. 이대로 동생이 죽어 버린다면, 천 년 만에 그토록 갖고 싶었던 것을 영원히 못 갖게 되어 버리는 셈이었으니까.

하지만.

동생은 웃으면서 한마디 말과 함께 이번에도 매몰차게 걷어차 버렸고.

아가레스는 분을 삭이면서 되돌아가야만 했다. 나타났을 때와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면서.

-너는 결국. 나의 것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 * *

‘나 때문일까?’

연우는 악마의 숲을, 아니, 이제는 숲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폐허가 된 곳을 가로지르는 내내, 그런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혹시 아가레스가 자신이 누군지를 알아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

사실 그런다고 해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외뿔부족의 마을에서 코어의 개념을 처음 깨달았을 때. 여러 신과 악마들은 그를 주시하기 시작했었다.

98층에서 꼼짝할 수 없는 그들로서는 유희라고 할 만한 것이 아래층을 구경하는 것밖에는 없었으니까.

그리고 거기서 힘을 유일하게 발산할 수 있는 통로인 사도의 예비군을 뽑기 때문에, 그들은 한 번 주시하기 시작한 존재에게서 쉽사리 눈길을 떼지 않았다.

그러니 연우의 일거수일투족이 관찰되었고, 가면을 벗고 있는 모습이며 사연들도 어느 정도 알아 냈을 게 분명했다. 동생도 아가레스의 사랑을 받았던 만큼, 여러 신과 악마들의 관심을 받았던 존재였으니까.

이렇다 보니 아가레스가 자신이 누군지 알아내고, 동생의 대체품으로 여겼을 가능성도 없지 않아 있었다.

무엇보다.

연우는 비슷한 메시지를 몇 번씩 보기도 했었다.

‘악마들과 관련된 메시지. 언제나 누군가의 제안으로 나에 대한 논의를 했었지.’

신들은 서로 간의 기호 성향에 따라 연우에 대한 호불호가 많이 갈렸다.

반면에 악마들은 ‘관심’만 보일 뿐 아직 이렇다 할 의사를 보인 적이 없었다.

주로 ‘알 수 없는 누군가’로 표현되는 어떤 악마의 제안으로 연우를 두고 어떤 논의가 거듭되고 있다는 것만 알 수 있을 뿐.

그 이상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개인적인 성향이 뚜렷한 악마들을 그렇게 강제로 모을 수 있다는 건, 서열이 아주 높은 존재가 아닐까, 하고 짐작할 따름이었다.

그런데 만약 그것이 아가레스라고 한다면?

그리고 브라함이 98층과의 통로를 임의로 구축하게 되자, 옳다구나 여기면서 나타나게 된 것이라면.

충분히 말이 되긴 했다.

하지만.

‘아냐. 그런 건 아닐 거야.’

연우는 거듭 고민을 하면서 고개를 가로저어야만 했다.

분명 일리가 있는 가정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가레스가 직접 모습을 비칠 이유는 되지 않았다.

아가레스로서는 그저 산하 복마전 속의 권속을 보내거나, 아니면 하위 서열의 악마를 시켜도 그만일 테니까.

굳이 무거운 엉덩이를 들썩일 필요 없이, 손가락 하나만 까딱거려서 자신을 잡아 오라고 지시하면 그만이었다.

더구나.

아무리 자신과 동생이 쌍둥이라고 해도, 엄연히 다른 존재였다. 인간의 외양이 아닌, 영혼을 직접 보는 악마로서는 자신에게 동생에 버금가는 관심을 둘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만약 가정이 맞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계속 브라함과 드 잡이질을 하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연우를 바로 찾으려 들었겠지.

이미 23층 스테이지는 아가레스의 권역이 되어 버린 상태.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자신을 잡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녀석이 현신을 택한 이유가 뭘까?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여러 가정을 떠올려 봐도, 도무지 이렇다 할 명쾌한 해답이 없었다.

「해답이 있긴 어디 있어? 악마 놈들이 하는 일들이 죄다 그렇지. 음험하고, 악랄하고. 안 그래?」

「그래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만큼, 만반의 준비를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알았어.’

샤논과 한령의 말을 들으면서, 어느새 브라함의 심상 세계가 있던 곳과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연우는 용체 각성을 시도했다. 피부 위로 잔뜩 올라오는 용의 비늘을 느끼면서, 마법 무장도 몇 번씩이나 발동시켜 전력을 최대 한으로 끌어올렸다.

이런 상태로도 아가레스의 발톱 때만 못할 테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들었다.

그냥 몰래 23층에서 달아났다가 한참 뒤에 찾아온다면, 아가레스의 현신도 모두 끝나 있을 텐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드는 자신의 모습이 신기하다고.

그때.

허공을 둥둥 떠다니는 검은 구름 조각 같은 것들이 보였다. 안쪽에서 여러 장면들이 언뜻 나타났다가 사라지길 반복하고 있었다. 처절하게 싸우고 있는 브라함과 킨드레드의 모습이 보였다.

심상 세계의 파편들. 결계가 강제로 붕괴되면서 조금씩 남은 것 같았다.

파편들은 금세 사라질 것처럼 흐려지고 있는 중이었다.

연우는 초감각의 인지 영역을 확대시켜 파편들을 하나하나씩 흡수하기 시작했다.

심상 세계에는 여러 강렬한 사념들이 기록으로 남기 마련이다. 자신이 없는 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빨리 파악하고 싶었다.

달리는 내내, 여러 장면들이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갔다.

‘아이테르의 배후에 마군이 있었다고? 그것도 킨드레드가?’

연우는 인상을 살짝 좁혔다. 도무지 납득이 가질 않아서였다.

아이테르는 왕이 되고자 했던 아버지의 잘못으로 가문 전체가 엘로힘과 일족으로부터 추방되었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언제나 절치부심 노력했다. 스스로가 지고종이며, 신의 혈통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자랑스러워하기도 했다.

그런 녀석이 신도 악마도 되지 못한 ‘반편이’의 종이 되었다는 건, 도무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의문은 무의미했다. 이미 아이테르는 쌍둥이 동생을 희생시키면서 킨드레드를 비롯한 세 명의 주교를 불러들였다. 그리고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엘로힘을 잡을 계획만 짰던 연우로서도 실책이었다.

하지만.

정작 가장 큰 문제는 바로 그 뒤였다.

-내가 부른 건, 끽해야 벨리알이나 단탈리안이었을 텐데…… 어째서 네가 나타난 거지?

-글쎄. 왜일 거라고 생각하나?

악에 찬 목소리로 소리치는 브라함과 그런 브라함을 보면서 조소를 띠는 아가레스.

특히 브라함의 목소리에는 당황함과 초조함이 섞여 있었다. 파편에 잔뜩 얽혀 있는 브라함의 사념도 떨고 있는 중이었다.

제발 자신의 가정이 아니길 바라는 간절한 바람.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브라흐마. 설마 내가 아직도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하지만 아가레스는 그런 브라함의 바람을 비웃듯이 웃었다.

-난 용인을 가져갈 것이다. 재능도 크게 없는 하등 쓸모없는 쓰레기에 불과하지만. 헤븐윙의 자식이라면, 직접 이 몸이 다녀간 전리품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다른 말은 들리지 않았다.

오로지 단 한 문구만이 연우의 머릿속을 왱왱 울려 댔다.

헤븐윙의 자식이라면…….

헤븐윙의 자식이라면…….

자식이라면!

‘정우에게…… 자식이 있었다고?’

[혼란스러운 상태입니다.]

[‘냉혈’ 특성이 알 수 없는 이유로 불발됩니다.]

[‘냉혈’ 특성이 알 수 없는 이유로 불발됩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숨이 가빠졌다. 머릿속이 새하였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일기장에는 분명히 자식을 낳았다는 말이 없었다. 동생이 탑에 머무는 동안 사랑했던 사람은 비에라 듄밖에 없었고, 연인에게서 배신을 당한 뒤로는 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았다.

다만, 동생의 상처를 어루만져주려 했던 사람은 있었다.

‘아난타.’

아난타는 원래 오래전부터 동생을 짝사랑했었다. 탑에 유일하게 남은 용인이었던 그녀는 차가운 척해도 언제나 외톨이었고, 동족인 동생을 만났을 때 크게 기뻐했었다.

동생도 칼라투스의 유지에 따라 아난타와 가까이 지냈다. 다만, 연애적인 감정이었던 아난타와 다르게, 동생은 우정으로만 그녀를 대했다.

결국 동생의 마음을 살 수 없으리란 걸 깨달은 아난타는 훌쩍 떠나고 말았다.

그러다 마지막에 나타났던 때가 동생이 홀로 클랜 하우스에 머물던 시절이었다.

다시 만난 둘의 대화는 서로 그동안 잘 지냈냐는 안부 인사를 나눈 정도가 전부였다.

다만, 아난타는 동생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당시 계속된 배신과 병마로 신경이 날카로워질 대로 날카로워져 있었던 동생은 차갑게만 아난타를 대했었고, 결국 아난타는 별다른 말을 남기지 못한 채 다시 사라졌다.

뜻을 알 수 없는 한마디만 남긴 채.

-어떻게든 지킬게.

그때 남겼던 말이 바로 세샤를 지킨다는 뜻이었을까?

‘그러고 보면…… 당시 아난타는 많이 다친 상태였었어. 마치 뭔가에 쫓기는 듯한 눈빛이기도 했고. 대체 뭐에 쫓기고 있었던 거지?’

연우의 머릿속으로 스며들던 브라함의 사념 파편은 계속 과거로 거슬러 올라갔다.

갓난아기를 브라함에게 맡기던 아난타의 모습. 네가 낳은 아이도 아니잖느냐는 질문에, 마음으로 낳은 아이라고 대답하던 아난타의 목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브라함의 생각에 닿는 순간, 연우는 여태 꽁꽁 숨겨져 있던 모든 비밀을 알 수 있었다.

마치 진짜 브라함이 된 것처럼. 그의 모든 사념들에 동화되었다.

화아악!

……그것은 실수였다. 신으로서의 책무가 모두 지겨워져 유희를 즐길 시절, 용과의 장난으로 저지르고 만 실수. 아이에게는 미안했지만, 내 아이라고 인정할 수 없었다……

……아이가 잘 자랐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다. 여태 모른 척하며 살았었지만.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이가 또 다른 용인을 좋아한단 말을 들었다. 차정우, 그 아이인가? 연금술을 가르쳐 줬던 놈이었기에, 세상은 참 좁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어디선가 쓸쓸하게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그저 풋내기 감정에 불과하다고 여겼던 모든 것들이, 사실은 내게 모든 것이었단 것을. 지난날을 후회했다. 나의 못난 선택을 저주했다. 그녀가 남긴 아이가 보고 싶었다……

……아이가 갓난아기를 데려왔다. 처음으로 날 아버지라 부르며 갓난아기를 맡겼다. 차정우와 비에라 듄 사이에 난 자식이었다……

……비에라 듄은 오래전부터 차정우에게 자식이 있단 것을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는 우연찮게 그것을 알아챘고, 그 자식을 몰래 훔쳐 달아났다. 그리고 정말 자신의 자식처럼 길렀다. 이름은 ‘세샤’. 잔여란 뜻이었다. 차정우가 남긴 흔적이란 뜻이겠지……

……어디선가 마녀들과 아이가 싸우고 있단 말을 들었다. 차정우도 다른 클랜들과 전쟁을 치르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난 어디에도 도움을 줄 수가 없었다. 아이가 준 아이. 세샤를 지켜야만 했다……

브라함의 사념은 온통 후회로 얼룩져 있었다.

하지만 연우는 그 속에서 지난 날의 모든 의문들을 해소할 수가 있었다.

‘그렇구나. 그렇게 된 것이었나.’

브라함이 동생을 도와주지 못했던 이유. 처음에는 거래가 되지 않는 차가운 성정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세샤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아난타가 아무 말 없이 동생을 훌쩍 떠났던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마녀들로부터 세샤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당시 세샤는 발푸르기스의 밤에서 실험을 당할 처지에 놓여 있었고, 아난타는 아이를 가까스로 구조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을 피할 수는 없어서, 세샤는 언제나 커다란 병을 앓고 살아야만 했다.

아마 아난타는 지금 다른 어디선가에서 여전히 발푸르기스의 밤과 전쟁을 치르고 있는 게 아닐까?

브라함은 결국 모든 사실들을 알면서도 어디에도 도움을 주지 못한 채, 그렇게 긴 세월을 버려야만 했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렀을 때.

그는 동생과 아난타에 대한 속죄로, 세샤를 보호하고 병을 낫게 하고자 했다.

모든 비극은, 한 사람에게서 비롯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브라함은 모든 잘못을 자신에게로 돌리는 중이었다.

‘비에라 듄! 너는 대체……!’

연우의 두 눈에 불이 잔뜩 붙었다. 분노로 이글대는 머릿속은 온통 비에라 듄에 대한 분노로만 가득했다.

그때.

「정신 차려, 주인 놈아!」

연우의 머릿속으로 샤논의 거친 목소리가 울렸다. 연우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럴 때일수록 더 똑바로 정신을 차려야 할 것 아냐! 뒈지고 싶어서 환장했어?」

연우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맞는 말이었다. 어떻게든 정신을 차려야만 했다.

비에라 듄에 대한 분노는 잠시 접어야 했다. 브라함에 대한 슬픔도 일단은 묻어 둬야 했다.

모든 사실을 안 이상, 지금은 한 가지에만 집중해야 했다.

아가레스가 현신한 이유는 간단했다. 동생이 이 땅에 남긴 유일한 흔적을 갖고 가기 위해서였다.

그것만은 막아야 했다.

‘정우는 지키지 못했더라도…….’

세샤만큼은.

조카만큼은.

‘너만은 지키겠다.’

화르륵-

마력회로가 맹렬하게 돌아가면서 불의 날개를 더욱 크게 키웠다. 이제 막 스며들기 시작한 마의 인자도 악마학에 반응하면서 활동을 개시했다.

그리고 어느덧, 아가레스와 브라함이 있는 곳에 다다를 수 있었다.

『이것이로군. 그동안 그대가 준비했던 것이. 한데, 미안하게도 그대의 소원은 이뤄 줄 수가 없겠어.』

봉인진이 발출시킨 신진철에 꽁꽁 묶여 있던 아가레스는 짧은 비소를 흘리면서. 힘을 한껏 방출시키고 있었다.

콰아앙!

수십 개의 검은 날개가 활짝 펼쳐지면서 결박을 손쉽게 부쉈다. 자잘한 신진철의 조각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원래대로라면 제대로 작동을 해야 했지만. 심상 세계가 무너지면서 봉인진의 위력이 현저히 낮아 지면서 생긴 결과였다.

브라함은 신성까지 무효로 돌아가 버린 반동으로 결국 피를 토 하면서 고꾸라지고 말았다. 손에 쥐고 있던 수성의 서가 수명이 다해 바스라지고 있었다.

“안, 돼……!”

그런데도 그는 어떻게든 아가레스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억지로 손을 뻗었다. 신진철이 다시 튀어 나왔지만, 아가레스를 둘러싼 보호막에 힘없이 부딪치기만 할 뿐이었다.

『귀찮군.』

그리고 아가레스는 손을 가볍게 흔들어 아예 남은 봉인진과 연성 진을 뿌리째 부숴 버리고 말았다.

브라함은 양팔로 몸을 끌어안으면서 머리를 지면에 박고 말았다. 내부 장기가 죄다 망가지면서 핏물이 쉴 새 없이 쏟아졌다. 그나마 남아 있던 생명력도 이제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단 뜻이었다.

그리고 아가레스는 이번에는 다른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무너진 폐허 한복판에서 뭔가가 둥근 막에 갇힌 채 두둥실 올라오기 시작했다.

“브라함! 브라함!”

세샤가 애타게 울면서 둥근 막을 두들겨 대고 있었다. 갈리어드가 바짝 뒤쫓아 왔지만, 역시나 보이지 않는 힘에 크게 튕겨 바닥에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이것이로구나. 그놈이 남긴 과실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전리품 정도로는 되겠군.』

아가레스의 손짓에 따라, 어둠이 여러 줄기로 나뉘어 둥근 막을 감싸면서 녀석에게로 딸려 갔다.

아가레스는 붉은 혀로 입술을 핥으면서 천천히 입을 벌렸다. 그러자 입꼬리가 귓가까지 잔뜩 찢어지고, 턱이 벌어지면서 흉측한 이빨을 훤히 드러냈다. 세샤를 단번에 삼킬 생각이었다.

세샤는 눈물을 펑펑 쏟았다. 아가레스에게 먹히는 건 무섭지 않았다. 하지만 피를 쏟으면서도 애타게 자신을 찾는 브라함과, 부서진 몸으로도 어떻게든 일어서려는 갈리어드의 모습이 가슴을 꽉 옥죄었다.

그건 아주 오래전 ‘엄마’를 떠올리게 하는 모습이었다. 세샤는 비정상적인 기억력을 갖고 있어, 갓난아기 시절의 일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온통 어둡기만 한 이상한 곳에서. 알 수 없는 얼굴들은 자신을 두고 이상한 말만 해 대면서 수시로 칼을 갖다 댔다. 세샤는 언제나 그것이 두려워 울어 대기만 했다.

그런 자신을 구해 준 사람이 엄마였다. 엄마는 이상한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지켜주면서, 언제나 미소를 잃지 않았다.

세샤야, 세샤야. 너는 아빠를 닮아 웃는 모습이 예쁜 아이란다. 그러니 울지 말고 웃으렴. 그 말은 아직도 그녀의 가슴에 깊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웃으려고 노력했다. 처음에는 어려웠지만, 언제부턴가 쉬워졌다. 그래서 좋았고, 그래서 기뻤다.

자신이 웃고 있으면 브라함이 언제나 즐거워했으니, 더 좋았다.

그런 브라함이 다치고 있었다.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었지만, 힘이 없는 자신은 아무런 도움도 될 수 없었다.

엄마 때와 똑같았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다쳤다. 그때처럼. 브라함의 모습 위로 엄마의 얼굴이 겹쳐졌다.

그 순간, 세샤는 누군가가 자신을 도와줬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을 가졌다.

아빠가 있으면 좋겠지만, 아빠는 없다.

대신에 아빠가 있다면 이런 사람이 아닐까 싶었던 다른 사람이 떠올랐다.

아가레스의 벌린 입이 어느새 그녀를 삼켜 가고 있었다. 세샤는 두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카인!’

그때, 갑자기 어둡던 세상 위로 한 줄기 빛이 떠올랐다. 붉은빛은 어마어마한 열기를 동반하며 아가레스의 오른손을 자르고 지나갔다. 세샤는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그러다 뭔가에 폭 안겼다. 탄탄한 가슴. 따뜻한 가슴이었다. 세샤는 눈물에 푹 젖은 채 고개를 들었다.

거기에 간절히 바라던 얼굴이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가면이 있었다. 악마처럼 무섭게 생겼지만, 그 속에 담긴 눈빛은 너무 따뜻했던 가면.

“……카인?”

연우는 블링크를 몇 번씩 전개하다가, 세샤를 품에 꼭 안은 채 조용히 바닥에 내려앉았다. 후끈한 열풍이 불어오면서 머리카락을 잔뜩 헝클어놓았다.

그리고.

연우는 한쪽 무릎을 낮춰 세샤와 눈높이를 맞추면서.

딸칵-

천천히 가면을 벗었다.

순간, 연우의 얼굴을 본 세샤의 눈이 크게 요동쳤다. 단 한 번도 보지 못했지만, 이상하게 익숙한 얼굴이 거기에 있었다.

언제나 잠들 때면 머리맡에서 엄마가 들려줬던 이야기 속 모습. 얼굴.

“아빠……?”

세샤가 떨리는 목소리로 연우를 불렀다.

연우는 말없이 다시 세샤를 끌어안았다.

다시는 놓치지 않겠노라고. 그런 다짐을, 속으로 몇 번씩이나 되새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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