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204화 (204/862)

4화. 악마대공 아가레스 (4)

“아빠? 정말 아빠야?”

세샤는 연우의 소맷자락을 꽉 붙잡았다. 고사리 같은 손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이따금 생각하곤 했었다.

아빠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엄마는 늘 아빠를 이야기할 때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멋있고, 착하고, 자상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리고 웃음이 많다고 했었다.

그래서 세샤는 언제나 상상 속에서나마 아빠를 그려 보곤 했다. 잠이 들 때 머리맡에서 아빠가 동화책을 읽어주면 좋을 텐데. 부엌에서 아빠가 맛난 간식을 해 주면 좋을 텐데. 같이 숨바꼭질을 해 주고, 무동을 태워줄 아빠가 있으면 좋을 텐데.

그래서 연우가 처음 나타났을 때. 세샤는 별님에게 간절히 기도를 하면 소원을 들어준다던 엄마의 말처럼, 혹시 별님이 아빠를 보내 달라는 자신의 소원을 들어 준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었다.

악마 같은 이상한 가면을 쓰고 있어 처음에는 무섭기만 했지만. 자신과 같은 용인이었고, 무뚝뚝해도 자신과 잘 놀아 주었다. 맛있는 간식도 해 주었고. 말 친구도 되어 줬다.

꿈에나 그리던 아빠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그래서 잠이 들 때면 두 손을 꼭 붙잡고 별님에게 감사하다고 인사했다.

그런데.

별님은 정말 자신의 소원을 들어준 것 같았다.

아빠였다.

엄마가 말해 줬던 것과 똑같은 얼굴. 모습. 잘 웃는다던 것과 다르게 엷은 미소를 띠고 있긴 하지만. 슬픈 눈을 하고 있긴 하지만. 아빠가 맞았다.

“으아앙!”

세샤는 결국 연우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면서 엉엉 울어 댔다. 왜 이제야 나타났냐며. 자신도 엄마도 아팠는데. 브라함도 갈리어드도 힘들었는데. 그래도 이렇게 만난 아빠가 너무 고마웠다.

연우는 그런 세샤의 등을 말없이 가만히 다독였다. 걱정 말라는 듯. 이제는 절대 울지 않게 하겠다는 듯.

그러다 조용히 따뜻한 마력을 불어 넣어 세샤를 재웠다. 이런저런 일로 기력이 쇠해져 있었다. 쉬게 해 줄 필요가 있었다.

“레베카.”

『알았어.』

레베카는 연우 뒤에 조용히 나타나 세샤를 안고 사라졌다. 우선은 되도록 여기서 멀리 떨어뜨리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연우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아가레스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가면은 쓰지 않았다. 여기서 더 이상 가면은 무의미했다.

“너……?”

브라함이 겨우겨우 몸을 일으켜 숨을 헐떡여 댔다. 신성과 신격을 모두 잃어 육체가 붕괴 중인 그였지만, 시선은 연우에게 못 박혀 있었다. 그의 눈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크게 요동치고 있었다.

연우는 말없이 그쪽으로 손을 뻗어 늑골에 내장했던 룬 마법을 발동시켰다.

“힐. 리커버리.”

단순한 응급 처치에 불과했지만. 브라함의 상처가 빠르게 회복되면서 혈색이 돌아왔다. 그러나 브라함의 눈은 연우에게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자세한 건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브라함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그는 뒤늦게 알 수 있었다. 연우가 차정우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기량, 기질, 스킬, 말투, 태도, 습관. 한 사람을 정의하는 모든 게 달랐다.

그리고 그건 뒤늦게 망가진 몸을 억지로 이끌며 나타난 갈리어드도 마찬가지였다. 요정안으로 연우를 살핀 그는 대략적으로 어떻게 된 일인지 눈치를 챈 것 같았다.

연우는 비그리드를 뽑고, 아이기스를 전부 뽑아 올리면서 아가레스를 노려봤다. 녀석은 재미난 연극을 보고 있는 관객처럼 엷게 웃으면서 그를 가만히 보고 있는 중이었다.

츠츠츠-

연우의 주변으로 그림자가 길게 늘어나면서 샤논과 한령이 나타나 검을 고쳐 쥐었다. 부는 허공에 높이 날아올라 수정 구슬을 쥐어 언데드 군단을 양산하기 시작했다. 괴이 군단도 조금씩 일어났다.

용의 영역이 단단하게 구축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23층 스테이지를 장악한 아가레스의 기운을 완전히 거스를 수 없었다.

「젠장. 정말 엿 같네. 저딴 걸 대체 어떻게 상대하란 거야?」

「악마는 정말 악마군.」

샤논과 한령은 너무 거대하게만 비쳐지는 아가레스를 보면서 병장기를 꽉 쥐었다. 특히 한령은 전성기 때의 자신이 오더라도 발 끝조차 미치지 못할 아가레스를 보면서 소멸까지 각오했다.

아무리 하이 랭커라고 해도 절대 엄두도 내지 못할 존재가 신과 악마였고, 그중에서도 최상위 서열인 아가레스는 어떻게 범접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압박감은 연우도 마찬가지로 받고 있었다.

16층에서 우르드 신과도 이렇게 대면한 적이 있다지만. 그렇게 커다란 태양처럼 느껴지던 우르드조차도 아가레스에는 비교할 게 못 되는 것 같았다.

거기다 어깨를 짓누르는 힘도 그더러 당장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라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연우는 여기서 고개를 조아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초감각 - 동기화]

연우는 누군가를 모방하는 것으로 아가레스의 압박감으로부터 해방되고자 했다. 브라함의 사념 파편에서 봤던 킨드레드처럼 비슷한 술수를 부렸다.

미후왕의 던전에서 만났던 미후왕의 허물을 떠올렸다.

그러자 순간 몸 안쪽에서부터 힘이 부쩍 차오르면서 압박감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악마로부터의 강한 압박감에서 해방됩니다. ‘냉혈’ 특성으로 이성을 유지합니다.]

[정신적 공격에 대한 강한 면역력을 획득합니다.]

있다고 생각지도 못했던 조카를 만났다. 정우가 남긴 흔적이 저기에 있었다. 어떻게든 지켜야만 했다.

그런 연우의 생각이 전해진 걸까. 아가레스의 압박감에 떨고 있던 괴이들도 조금씩 눈빛을 되찾으면서 저마다 가래 끓는 소리를 냈다. 명령만 떨어지면 얼마든지 달려들겠다는 의지가 물씬 풍겼다.

순간, 아가레스의 눈가에 이채가 스쳐 지나갔다.

괴이와 언데드는 따지자면 악마 쪽과 가까웠다. 어둠 쪽 계통이니 만큼 자신을 절대 거스를 수 없을 텐데. 저렇게 대놓고 적의를 드러낼 수 있다니.

연우가 그만큼 대단한 정신력을 가진 걸까. 아티팩트가 대단한 걸까. 아니면 둘 다일까?

뭐, 아무래도 상관없겠지. 아가레스는 피식 웃으면서 연우를 바라봤다. 세샤만큼이나 보고 싶었던 존재가 바로 녀석이었다.

『그래도. 형제는 형제라는 거냐? 재미있군. 확실히 이렇게 직접 보고 있으니 위에서 보던 것과는 달라. 아주 많이.』

연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선 아가레스의 꿍꿍이부터 파악하는 게 중요했다.

『무슨 대답이라도 하는 게 어떤가? 혼자서 떠벌려 대는 건 내 성미에 맞지 않는데.』

연우는 그제야 입을 뗐다.

“원하는 게 뭐지?”

『여태껏 지켜본 바로는 그래도 꽤 머리가 잘 돌아가는 편인 것 같던데. 이미 파악하고 있지 않나?』

“나와 세샤를 갖고 싶은 거겠지.”

『맞다.』

아가레스는 입을 훤히 드러냈다. 잘려 나갔다가 어느새 복구된 오른손은 가볍게 턱을 쓰다듬었다. 뾰족한 송곳니가 훤히 드러났다.

『오래전, 네 형제가 나에게 물을 먹였다. 그 때문이라도 지금 보상을 받아야겠어.』

아가레스를 따라서 어둠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공이나 되어 한낱 필멸자를 겁박하는 것도 모양새가 영 좋질 않아서 말이지. 기회를 주마. 너와 용인. 둘 중에 하나만 받는 것으로 지난 죄를 사해 주마.』

어둠은 연우가 구축한 영역도 별 어려움 없이 침범해 그와 괴이 군단 등을 감싸 안았다. 부드럽게 일렁거렸지만, 금방이라도 집어삼킬 것처럼 위협적이었다.

『너에게도 나쁘지는 않을 거야. 강한 힘을 원한다지? 얼마든지 내주마. 조건은 네 형제에게 제안했던 것과 동일하다. 탑을 오시할 수 있는 힘이다. 탐이 나지 않나?』

연우를 바라보는 아가레스의 눈가에는 기이한 광기마저 흐르고 있었다.

원하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얻어야만 한다는 광적인 성격. 하지만 얻고 나면 금방 지루함을 느껴 버린다는 악마들의 대공. 저 광기에 노출된 사람은 누구나 미쳐 버리게 된다.

하지만 그렇기에 연우를 따라 일렁대는 어둠은 오히려 연우를 한창 유혹하는 중이었다.

네가 원하기만 한다면 이것이 곧 네 것이 된다고. 그렇게 달콤한 말로 속삭이며, 힘을 가지라고 종용하고 있었다. 동생 때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정말이지 악착같은 집착이었다. 녀석은 동생이 죽기 전에나, 죽은 뒤에나, 여전히 녀석을 가지기 위해 말도 안 되는 고집까지 부리고 있었다.

연우도 알고 있었다.

지금 내민 아가레스의 손을 붙잡으면 그토록 바라던 강한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이걸로도 부족한가? 그렇다면 네 조카를 제물로 바쳐라. 하면 그에 상응하는, 아니, 훨씬 값진 보상을 내어 줄 테니.』

하지만 동생은 죽음이 바로 눈앞에 닥친 상태에서도, 하루 한시가 급박한 상황에서도, 결국 아가레스의 유혹을 거절했다.

이유?

간단했다.

악마에게 종속된다는 것은. 영혼을 저당 잡힌다는 것은, 원래의 자신을 잃어버린단 뜻이었다. 모든 의사를 잃고, 전혀 다른 존재가 된단 뜻이었다. 동생은 그걸 거부했고, 그건 연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대답은 거절이었다.

“싫다면?”

여자인지 남자인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고왔던 아가레스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마치 흉신 악살처럼 강렬한 마기가 휘몰아쳤다. 연우를 따라 뱅글뱅글 맴돌던 어둠은 금방이라도 그를 삼킬 것처럼 잔혹한 이빨을 드러냈다.

『감히 주제도 모르고!』

정우에서 연우까지, 한낱 인간 따위에게 연속으로 거절을 당한 아가레스는 당장 그를 집어삼키고자 손을 뻗었다.

강제로 종속을 시키려면 영혼에 손을 대야 하기 때문에 재미를 잃어버리고 만다. 그래서 되도록 손을 쓰지 않으려 했지만. 이렇게까지 거부를 한다면 어쩔 수 없이 힘을 써야 했다.

휘휘휘!

어둠이 확 번지면서 연우를 비롯한 괴이 군단 전체를 둘러쌌다. 그대로 어둠 속에 침식시킬 셈이었다. 그런다면 영혼도 알아서 물들고 말 것이다.

안쪽에서 괴이들이 날뛰는 게 느껴졌지만, 아가레스에게는 별다른 기별도 가지 않았다. 이 어둠은 아가레스의 일부나 마찬가지였다. 한낱 플레이어 따위가 거스를 수 있는 힘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가레스는 왠지 모르게 찝찝함을 느꼈다.

자신이 여태껏 98층에서 지켜봐 온 연우는 이렇게 호락호락 당할 녀석이 아니었다.

연우는 정우와 다르게 언제나 냉철함을 잃지 않았다. 자신보다 훨씬 더 강한 존재들 앞에서도 전혀 주눅 드는 법이 없었고, 언제나 판세를 자기가 유리한 대로 이끌던 녀석이었다.

레드 드래곤과 청화도의 전쟁 때도 그랬고, 우르드 신을 엿 먹일 때도 그랬다. 미후왕의 유산도 그렇게 얻지 않았던가?

그러던 녀석이 이렇게 순순히 당한다고? 아무리 플레이어로서 악마를 거스를 수 없다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는다는 게 이상했다.

그 순간, 아가레스는 등골이 쭈뼛 서는 것을 느꼈다.

대공이 되고 난 뒤로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했던 감각. 언제 이런 느낌을 받았었지? 죽은 용왕, 로드 칼라투스와 일전을 벌였을 때로 기억한다. 정말 소멸될 뻔한 기억이었기에, 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때와 비슷한 감각이라니.

자신과 비교해도 전혀 뒤지지 않을 격(格)을 지닌 존재가, 스테이지의 하늘을 가르며 등장하려 하고 있었다.

그때.

연우가 디디고 있던 땅을 따라 다시 연성진이 둥실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연우를 둘러싸던 어둠을 강제로 흩어 놓았다.

파앙-

붉은 하늘이 갑자기 개면서 밝은 빛이 내려와 연우를 비추기 시작했다.

그 아래에서.

연우는 천천히 눈을 떴다. 활짝 열린 용마안이 황금빛으로 반짝 이고 있었다. 마치 화안금정처럼.

그러다 연성진을 이루던 갖가지 도형과 룬 문자들이 잘게 부서지면서 하늘로 올라갔다.

그리고.

쿠쿠쿠-

아가레스가 소환되기 위해 땅에서부터 철문이 올라왔듯이. 이번에는 반대로 하늘을 따라 거대한 철문이 내려왔다.

갖가지 천사와 신령의 그림이 복잡하게 그려진 성스러운 철문이었다.

* * *

연우는 아가레스와 맞서기 전에 고민했다. 어떻게 하면 아가레스와 겨룰 수 있을까?

녀석이 자신과 세샤를 탐할 것은 분명했다. 그러니 거기에 놀아 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연우에게는 아무 힘도 없었다. 브라흐마 신도 꺾을 정도로 강한 아가레스인데, 한낱 필멸자인 자신이 어떻게 그를 이길 수 있을까.

그래서 연우는 생각을 바꿨다.

‘막을 수 없다면. 녀석에게 맞설 수 있는 존재를 부를 수밖에.’

다행히 수단은 남아 있었다.

아가레스가 통과했던 소환진. 분명 아가레스가 파괴시켰었지만, 브라함의 신성이 녹아든 마법진은 그리 손쉽게 부서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조금은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연우는 곧바로 의념을 몽땅 여기다 투입해 접촉했다.

막대한 양의 정보가 홍수처럼 쏟아졌다. 브라함이 수성의 서를 풀어냈던 계산식들. 너무 방대하고 복잡해서 평소 연우로서는 도저히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어려웠지만.

[시차 괴리]

연우는 여태 배운 바를 토대로 망가진 부분을 빠르게 수복시켜 나갔다. 뇌가 타 버릴 것처럼 아팠지만, 그래도 그만큼 막대한 지식도 쌓여 나갔다.

그리고 소환진이 기능이나마 얼추 복구되었을 때.

언제나 마력회로를 가득 채우던 마력이 한순간 증발되었다. 순간 강한 현기증이 느껴졌지만 정신을 잃지 않고 고개를 들었다.

붉은 하늘이 개기 시작했다. 푸른 하늘이 열리면서 빛의 기둥이 내려와 어둠을 물리쳤다. 이 가호 아래에서는 아가레스의 마수도 절대 침범할 수 없었다.

그리고 곧.

거대한 철문이 천천히 구름을 가르면서 나타났다.

『누굴…… 부르려는가……?』

그리고 머릿속을 울리는 목소리. 영험하지만 그만큼 위엄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연우는 저 문 너머 어딘가에 있을 존재에게 말했다. 아가레스에 대적할 수 있는 신을.

『대가는……?』

‘아이기스.’

그동안 그에게 큰 도움이 되어 주었던 신급 아티팩트였지만. 아가레스를 물리치기 위해서는 그만큼 값어치가 있는 물건을 내놔야 했다.

『성립…… 되었다.』

쿠쿠쿠!

철문이 기이한 소리를 내면서 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아래로 기괴한 뭔가가 몸을 길쭉하게 쭉 빼면서 지상으로 내려왔다.

웬만한 산자락 하나는 가볍게 가릴 수 있을 만큼 어마어마한 몸집을 지닌 보아뱀이, 그것도 무려 다섯 마리나 나타나 붉은 혀를 날름거렸다.

그리고 그중 가장 중심에 놓인 녀석의 머리 위에는 익숙한 얼굴이 앉아 있었다.

그를 본 아가레스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헤르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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