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205화 (205/862)

5화. 악마대공 아가레스 (5)

헤르메스가 내려온 하늘은 어느새 푸른빛으로 물들면서 산뜻한 공기를 가져다주었다.

반면에 아가레스가 서 있는 지면 위는 온통 어둠으로 가득했으니. 빛과 어둠은 서로 맞물리면서 일정한 경계선을 만들었다.

헤르메스는 보아뱀의 머리 위에서 산뜻한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이야. 아가레스. 이게 팔백 년 만이던가, 구백 년 만이던가? 루시엘 봉인 때 이후로 처음이지 아마?”

『보고나 지키고 있어야 할 네놈이 왜……!』

“왜긴 왜겠나.”

헤르메스는 당연하지 않냐는 투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자네와 같은 이유로 왔지. 공양을 받았고, 거기에 대한 답례를 하러 온 것일 뿐이야.”

미소가 더 짙어졌다.

“반쯤 사기를 치고 있는 자네와는 좀 다르게 나는 더 풍족하게 답례를 줄 생각이지만.”

신은 제물을 받아도 거기에 대한 답례를 자기 마음대로 조절할 수가 있었다. 애당초 제물을 공양으로 보아, 신도가 ‘헌상’한다고 여기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주 이따금, 필요에 따라서 자신이 손해를 보는 경우도 있었다.

신이 내린다는 은총이나 기적이 여기에 해당했다. 종교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신도들에 대한 관리가 아주 철저하게 필요했다.

반대로 악마는 제물에 대한 답례를 철저하게 ‘거래’에 입각해 결정한다. 받은 것만큼 돌려줘야 하지만, 여기에는 몇 가지 장난이 들어가게 된다. 절대 손해 보는 장사를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헤르메스는 간만에 아예 대놓고 손해 보는 짓을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었다.

네가 무슨 짓을 저지르더라도 끝까지 따라가 훼방을 놓겠다는 뜻.

헤르메스는 이 순간이 너무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 가볍게 키득거렸다.

당연한 말이지만.

신과 악마는 절대 서로에 대한 감정이 좋을 수 없는 사이였다.

으드득!

아가레스는 이를 바득 갈았다.

웬만한 신 따위는 발아래로 놓는 그였지만. 헤르메스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녀석이 가진 권능은 악마들로서도 상당히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더구나 문제는 여기에 와 있는 신이 헤르메스만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보아뱀이 나오고 있는 저 하늘 너머에.

다른 뭔가가 이곳을 보고 있었다. 헤르메스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만큼 높은 신격이. 아니, ‘싸움’이라는 좁은 분야만 따진다면, 헤르메스보다도 더 골치가 아픈 존재였다.

둘이나 되는 신을 상대하는 건, 아가레스로서도 어려운 일이었다.

“자. 그럼 이제 결정하게나.”

그런 아가레스를 보면서 헤르메스는 더 크게 미소를 지었다.

“이대로 나와 싸울 텐가, 아니면 그만두고 물러날 텐가?”

보아뱀은 아가레스의 주변을 둘러치면서 언제든 명령이 떨어진다면 달려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주 잠깐.

아가레스는 고민에 잠겼다.

그리고.

『하계(下界)에서 악마와 신이 한데 어울려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아가레스가 흉악한 미소를 폈다. 그 순간, 수십 개의 검은 날개가 활짝 펼쳐졌다. 그러다 아가레스가 허공 속에 확 하고 흩어지자, 어둠이 차오르면서 하늘 위로 수백 수천 개의 촉수가 뻗쳐졌다.

동시에 다섯 보아뱀이 아래로 내려왔다.

쿠르르릉!

스테이지가 울리기 시작했다.

* * *

화아아-

신화 속에서 언급되는 신과 악마의 충돌은 흔히 천지가 개벽하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땅이 솟구쳐 산이 되고, 바다는 메마르며 하늘에서 비가 억수 같이 쏟아지는 그런 광경.

하지만 그런 건 단순히 신화 속 표현일 뿐인 건지, 아니면 이 둘만 다른 건지는 모르겠지만.

헤르메스와 아가레스의 싸움은 생각보다 더 단순했다.

빛과 어둠. 백색과 흑색이 서로 뒤엉키는 것으로만 보일 뿐이었다.

마치 검은 잉크가 맑은 물을 탁하게 물들이기 위해서 이리저리 퍼져 나가듯, 지상에서 시작된 어둠은 빛을 침식하면서 하늘까지 닿으려 했다.

반면에 빛은 수십 개로 갈라져서 그런 어둠의 사이사이로 파고 들어 정화를 시도했다. 지면에 빛이 비쳐지고, 어둠이 강제로 눌렸다가 튀어 오르기를 반복했다.

그것은 하나의 ‘관념’이 되어 버린 두 존재가 서로에게 영향력을 끼치고, 지배를 하기 위해서 겉으로 보이는 형태일 뿐.

용마안을 열고 있는 연우의 눈에는 똑똑하게 보였다.

지상에서는 도저히 크기를 짐작하기 힘들 만큼 거대한 무언가가 천천히 움직이고 있는 중이었다. 보아뱀조차도 괴물에 비하면 턱 없이 작게 보일 정도로 커서 형체도 제대로 분간하기 힘들 정도였다.

아가레스의 본체일 게 분명한 녀석이 꿈틀거릴 때마다 불과 빛, 얼음과 강풍이 잇달아 토해졌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반면에 헤르메스는 여전히 보아뱀에 올라탄 채, 더 많은 보아뱀을 불러들이면서 아가레스를 잡아 나갔다. 역시나 불과 빛, 얼음과 강풍이 만들어졌다가 사라지면서 폭발과 폭발이 이어졌다.

그리고 스테이지 또한 두 존재의 움직임에 따라 붕괴와 재생을 반복했다.

이미 크게 망가졌다고 생각한 악마의 숲이었지만.

거대한 두 존재의 부딪침으로 인해 지면이 끝도 보이지 않을 만큼 깊숙하게 파이면서 지글거리는 용암이 솟구치기도 하고, 다시 쓸려오는 강풍에 구멍이 메워졌다가 그 위로 나무들이 빠른 속도로 자라나 다시 울창한 숲을 이루기도 했다.

둘은 그야말로 법칙을 휘두르는 중이었다.

그 속에 다른 존재가 끼어드는 건 절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저게 바로…… 신과 악마.’

연우는 헤르메스와 아가레스를 보면서 주먹을 꽉 쥐었다. 도저히 어떻게 범접할 수도 없는 거대한 두 존재가 부딪치는 광경은 보는 이로 하여금 침이 바싹 마르게 만들었다.

비그리드를 쥔 연우의 손은 파르르 떨리고 있는 중이었다.

분명히 냉혈 특성으로 이성을 유지하는 중인데도 불구하고. 겨우 정신을 차리는 것만으로 허덕일 정도였다. 지금 이 순간에도 폐부를 꽉 조인 것처럼 숨을 쉬는 것조차 버거웠다.

특히 헤르메스의 경우에는 올림포스의 보고에서 만났을 때가 떠올라 더 놀랍기만 했다.

역시 그때는 자신을 생각해서 존재감을 숨기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우르드 신조차도 저 둘 앞에서는 너무 허약하게 보였다. 굳이 비교하자면 미후왕의 던전에서 만났던 허물과 비슷하지 않을까.

그런 자들이 둘이나 되니.

이 정도 규모의 충돌은 연우가 상상했던 것 이상이었다. 당장 스테이지의 기능마저 정지해 버리고 말았다.

바깥은 현재 어떤 상태가 되어 버렸을지. 스테이지를 한창 뛰어 다니고 있던 플레이어들은 어떻게 되었을지. 도무지 짐작도 가질 않았다.

만약 하늘에서 내려온 빛의 기둥이 그를 보호하는 게 아니었다면 버틸 수 없었을지도 몰랐다.

따뜻하면서도 익숙한 기운.

연우는 고개를 들어 빛의 기둥이 내려오는 곳을 바라봤다. 아무것도 보일 리 없었지만. 어쩐지 누군가가 자신을 따스한 눈빛으로 바라본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테나.’

아이기스의 옵션인 여신의 창칼로 아테나의 가호를 받을 때의 느낌이 이랬다.

분명히 자신이 아이기스를 제물로 삼아 불러들인 건 헤르메스밖에 없을 텐데. 아테나까지 이렇게 직접 나타난 건 연우로서도 뜻밖이었다. 다만, 대가가 부족해서 직접 나타나지 못하고, 헤르메스가 열어 놓은 창구를 통해 그를 지키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가 왜 자신을 보호하고 있는지는 몰랐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녀가 헤르메스처럼 자신에게 호의적인 감정을 내비치고 있는 중이고, 어딘가에 있을 판트와 에도라, 그리고 브라함까지 구해 주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연우는 그런 눈빛을 응원이라고 받아들였다.

직접 어떻게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그녀는 연우가 아무런 압박감도 받지 않고 하고자 하는 것을 이룰 수 있게 도와주려 했다.

“후우……!”

연우는 아테나의 가호 아래, 크게 숨을 골랐다. 긴장을 풀면서 무뎌졌던 감각을 깨우고, 서서히 전의(戰意)를 끌어올렸다.

‘세샤를 돕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악마를 잡아야만 해.’

연우는 현자의 돌도 현자의 돌이었지만, 우선 조카의 병부터 빨리 낫게 할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재료치고 아가레스가 너무 넘치긴 했지만…… 당장 녀석을 대체할 만한 것이 없었다. 브라함의 심상 세계를 재건축하려면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할 테니까.

큰 도움이 되지는 못할지언정, 아가레스를 잡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어야만 했다.

[‘아테나’가 고요한 눈길로 바라봅니다. 당신의 굳건한 의지에 흡족해합니다.]

[‘아테나’가 당신에게 가호를 내립니다!]

막대한 힘이 영혼 안쪽에서부터 차올랐다. 이대로 둥실 몸이 떠오르는 게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아찔한 고양감.

연우는 순간 정신을 잃을 뻔한 걸 가까스로 참아 내면서, 아테나가 실어 준 막대한 힘을 일일이 컨트롤해 세포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마의 세포를 자극했다.

콰드득, 콰득-

신력은 용의 인자와 상성이 잘 맞지 않는다. 반면에 성질을 조금만 바꾸면 마의 인자를 자극해 더 크게 키울 수 있었다.

연우는 이 점을 노렸고, 바토리의 흡혈검으로 각룡에게서 흡수했던 마의 인자를 대량으로 증폭시켰다.

그리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인트레니안을 열어 원래는 나중에 히든 피스로 섭취하려 했던 보라색 마귀꽃과 각룡의 심장 5개, 크라켄의 내핵까지 전부 바토리의 흡혈검으로 흡수했다.

원래대로라면 일정한 비율과 여러 공정을 통해 환단을 제조해야겠지만.

지금은 그럴 틈이 없었다.

뼈가 으스러지고, 몸이 뒤틀리는 격통이 뒤따랐지만. 연우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거기다 초감각을 이용해 억지로 동화시킨 미후왕의 기운이 자칫 복잡해질 수 있는 두 개의 힘을 동시에 억눌러 하나로 규합시켰다.

쾅!

그러다 엄청난 폭발 소리와 함께 몸이 그대로 터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크게 부풀어 올랐다가, 강제로 수축되었다.

푸른색으로 빛나던 비늘에 검은 빛깔이 스며들면서, 검푸른 비늘이 아름답게 반짝였다.

마의 인자가 새겨지면서 2차 각성이 완숙한 지경에 다다랐단 표식이었다.

[마의 인자가 각성됩니다.]

[마의 인자가 각성됩니다.]

……

[마의 인자가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용의 피를 따라 마혈(魔血)이 더해집니다.]

[용의 뼈에 마성(魔性)이 단단히 새겨집니다.]

……

[마의 인자와 용의 인자가 합쳐지는 데 성공했습니다.]

[성질 변환이 성공적으로 이뤄졌습니다. 특성 ‘용체’가 ‘마룡체(魔龍體)’로 변경되었습니다.]

[위대한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추가 경험치가 제공됩니다.]

[공적치를 10,000만큼 획득했습니다.]

[추가 공적치를 15,000만큼 획득했습니다.]

……

마룡체.

동생은 고룡 칼라투스의 인연 때문에 이론적으로 생각해 두기만 했지, 개방할 생각은 못했던 힘을 터득하면서.

연우는 느껴지는 막대한 힘으로 비그리드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쩌어엉!

비그리드에 막대한 마력이 실렸다. 검신이 새하얀 광채를 뿌려 대며 금방이라도 부러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크게 울렸다.

[검의 정화]

[투쟁의 삶]

연우는 용마안으로 어둠의 장벽 너머에 있는 거대 괴물을 표적으로 지정했다.

그러자 연우도 어떻게 감당하기 힘들 만큼 막대한 양의 투기가 쏟아졌다.

검의 정화는 지정된 표적이 강하면 강할수록 더 많은 힘을 실어 주는 옵션이기 때문에, 아가레스를 표적으로 지정하면서 받아 들이는 기운은 엄청날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투지를 불사르는 만큼 공격력을 많게는 수십 배로 불려 주는 투쟁의 삶까지 더해지니.

다시 육체 곳곳이 부러지거나 망가지면서, 피부 위로 핏줄이 잔뜩 올라왔다.

아무리 연우가 새로운 특성을 깨달아 육체가 더 단단해졌어도, 한계를 벗어나는 힘은 육체를 붕괴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극한까지 내몰린 육체는 임계점을 돌파하면서 다시 새로운 변화를 이뤄 내는 법이었다.

고오오-

[용의 인자가 한계점에 다다랐습니다. 임계 상태를 돌파해 새로운 변화가 이뤄집니다.]

[마의 인자가 한계점에 다다랐습니다.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또 다른 변이가 이뤄집니다.]

[3단계 권능이 개방됩니다.]

[권능: 원소 접촉]

바로 3차 각성이었다.

콰드득-

연우의 등을 뚫고 피막으로 구성된 거대한 용의 날개가 튀어나왔다. 불의 날개는 용의 날개와 한데 뒤섞이면서 한없이 커져 갔고, 용의 비늘은 오른쪽 눈가까지 다다랐다. 입술 사이로 뾰족한 송곳니가 훤히 드러났다.

연우는 권능을 사용해서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이글거리던 막대한 힘을 비그리드에 집중시키고, 여기다 아테나가 불어넣은 신력까지 덧씌우면서.

‘니케. 네메시스.’

여태껏 현자의 돌 속에서 타이밍을 재고 있던 두 환수를 깨웠다.

『주인, 힘내!』

『꿈이…… 저문다.』

[화령]

[꿈꾸는 미몽]

한순간, 연우를 따라 공허가 내려앉고, 검에 불의 속성이 더해져 위력을 다시 몇 배로 부풀렸다.

그리고.

그대로 검을 세차게 횡대로 휘둘렀다.

[성화]

[불의 파도 - 화뢰]

[72선술 - 절, 폭, 단]

콰아앙!

비그리드에게서 피어난 화염 줄기는 이대로 스테이지의 끄트머리까지 닿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쭉 이어지면서.

어둠을 가르고, 스테이지를 뒤덮을 정도로 거대한 괴물의 한복판을 그대로 꿰뚫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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