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악마대공 아가레스 (7)
여태껏 신과 악마가 열심히 치고받고 싸울 때는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더니. 거의 판세가 끝난 이제 와서 나타난 것이다.
게다가 나타난 면면도 절대 낮은 등급의 관리자들이 아니었다.
이블케와 루피는 물론, 다른 네 명도 모두 일기장에서 봤던 얼굴들이었다. 12지신. 최고 관리자들이었다.
이블케는 어둠과 빛의 잔해로 온통 폐허가 되어 버린 스테이지를 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말이지. 난장판이 따로 없군요. 이래서야 저희들만 위에서 꾸중을 들을 뿐인데 말이지요.”
관리자들은 땅이 꺼져라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몇몇은 팔짱을 끼면서 욕지거리를 내뱉기도 했다. 스테이지를 엄중하게 관리해야 하는 책무가 있는 그들로서는 이런 아수라장이 골치만 썩혔던 것이다.
더구나 이번 소란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플레이어들이 희생되고 피해를 봤는지. 도무지 제대로 추산도 되질 않았다.
다만, 이블케는 송곳니가 훤히 드러날 정도로 우악스럽게 웃고 있었다. 골치 아프다는 말과 다르게 이 상황이 재미있어 죽겠다는 투였다.
“복구.”
그러다 이블케는 외눈 안경을 고쳐 쓰면서 언령을 한껏 담아 외쳤다. 관리자들 중에서도 최고 등급에게만 허락된 시스템 콜이었다.
차차착-
마치 테이프를 되감기한 것처럼, 숲이 빠른 속도로 복구되기 시작했다.
곳곳으로 흩어졌던 먼지와 재가 제자리로 되돌아오면서 깊게 파인 구멍을 도로 메우고, 색이 다시 갈색으로 변하고, 나무를 빽빽하게 세웠다. 심지어 사라졌던 열매까지 도로 맺힐 정도였다.
미리 백업해 뒀던 스테이지의 데이터를 복원시키는 과정은 연우의 눈에도 신기하게 보일 정도였다. 신의 이적도 이런 게 아닐까.
하지만 여기에도 명백한 한계가 있어서, 스테이지의 복구는 가능할지언정, 플레이어들의 목숨이나 피해까지 되돌리지는 못한다는 점이었다.
이번 사태로 대체 얼마나 많은 플레이어들이 죽었을까. 그리고 얼마나 많은 클랜들이 피해를 입었을까. 관리자들은 벌써부터 관리국에 산더미처럼 쌓일 항의가 골치 아픈지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 댔다.
그러다 아직까지 아가레스의 사념이 남아 있어 복구가 더딘 장소로 속속들이 이동, 뒤처리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사이.
이블케는 천천히 연우에게 다가와 그의 정수리에다가 앙증맞은 손을 얹었다.
연우는 관리자들이 나타난 것을 확인한 뒤로, 한창 사경을 헤매는 중이었다.
한계치 이상으로 수용된 마의 인자는 이미 독처럼 빠르게 퍼져 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마룡이 대단할 수 있는 건, 두 종족의 인자가 묘한 균형점을 이루기 때문에 가능한 것일 뿐. 이 균형이 조금이라도 흐트러진다면 큰 위험을 부르고 만다.
덕분에 용의 인자가 쇠락하면서 육체가 붕괴하고, 권능이 빠르게 소멸했다. 한낱 인간의 육체로 되돌아가면서 붕괴는 급속도로 이뤄지는 중이었다.
그나마 시차 괴리를 사용해 의식을 육체와 최대한 분리했기 때문에 속도를 늦추고 있는 것일 뿐.
그마저도 못했더라면 이미 육체가 그대로 마독에 녹아 버렸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마저도 의식이 빠르게 흐트러지면서 위험한 상태였다.
아니, 도리어 연우는 자신을 좀 먹어 가는 마의 인자를 통제하려 들었다.
아가레스에게서 빼앗은 마의 인자는 비록 녀석에게는 한 줌에 불과하더라도, 웬만한 하급 악마쯤은 손쉽게 생산할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양을 자랑했다.
이것이라면 현자의 돌을 완성할 동력원으로 충분했다. 아니, 연우의 머릿속에는 현자의 돌이 들어 있지 않았다. 이것이라면 세샤의 병을 치료해 줄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어떻게든 한 곳에 모아 두고 싶었다.
하지만 정상적인 컨디션으로도 가능할지 알 수 없는 일을, 모든 기력과 체력이 다 빠진 채로 한다는 건 도무지 불가능이었다.
이블케는 그런 연우의 상태를 꿰뚫어 보았고, 못 말린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오효효효. 탑이 생긴 이래로, 이처럼 제 골머리를 썩이시는 분은 당신이 딱 두 번째랍니다. 우선 시련 정산부터 하실까요?”
[모든 시련이 종료되었습니다.]
[정산을 시작합니다.]
[공적치를 합산합니다.]
이미 연우가 새긴 업적은 시련을 달성하고도 한참 남을 정도였다.
[위대한 기록을 달성했습니다.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시겠습니까?]
[등록을 거부하셨습니다.]
[하지만 공개되지 않아도…….]
……
층계 공략이 끝날 때마다 항상 보이던 메시지가 빠르게 올라가고, 그다음 23층의 공적치가 합산된 누계 공적치가 나왔다.
이블케는 대단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11층 이후로 단 한 번도 공적치를 쓰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 치더라도 일개 저층 구간의 플레이어는 도저히 가질 수가 없을 만큼 높은 수치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러다 이블케는 씩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이것이라면 연우에게 필요한 보상을 정산하고도 남았을 테니까.
“이렇게 쓰는 게 조금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 님에게도 나쁘지는 않을 겁니다.”
필요에 따라, 플레이어에게 당장 알맞은 보상을 강제로 쥐여 주는 것도 관리자의 몫이었다. 보통 월권행위가 될 수 있어 잘 하지 않았지만, 이블케는 전혀 그런 걸 신경 쓰지 않았다.
촤르륵-
누계 공적치가 빠른 속도로 소모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더불어 연우의 정수리에 얹었던 이블케의 손이 시린 빛을 토해 내면서 천천히 연우에게로 흡수되었다.
그러자 금방이라도 연우를 집어 삼킬 것처럼 날뛰던 마의 인자가 거짓말처럼 착 가라앉았다. 그리고 무기력해졌던 용의 인자가 다시 생생해지면서 다시 균형점을 잡아 나갔다.
까맣게 물들었던 용의 비늘이 빠른 속도로 제 색을 되찾아 사파이어처럼 투명하게 빛났다. 상처가 복구되고, 피부도 깨끗해졌다. 입가에 남은 핏자국만 마독에 시달렸다는 것을 말해 줄 뿐이었다.
“하아……!”
그러다 의식을 되찾은 연우는 깊게 날숨을 내뱉었다. 입가를 따라 시커먼 매연이 토해졌다가 허공에 흩어졌다.
몸에 기력은 되돌아왔지만, 정신력까지 회복된 건 아니어서 많이 피곤했다.
“이것도 마시세요.”
이블케는 겨우 남아 있던 누계 공적치도 모두 소모해서 나온 것을 연우에게 던져 주었다.
손바닥 크기의 크리스탈 유리병 속에 푸른색 액체가 출렁이고 있었다.
연우는 거리낌 없이 뚜껑을 열고 입에 갖다 대 한껏 들이켰다. 식도에서부터 육체 전체로 청량감이 잔뜩 퍼져 나갔다. 남아 있던 피로감도 확 달아났다.
“방금 드신 건, 넥타르라는 영약이랍니다. 저희 최고 관리자들도 쉽게 구하지 못하는 것이라, 사실 공적치가 조금 부족하긴 하지만. 뭐, 남은 부분은 제 서비스라고 해 두자고요. 오효효효.”
연우는 그제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리고 명치 부근에 묵직하게 새롭게 자리 잡은 물질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가레스의 마핵]
분류: 보석
등급: S~??? (측정불가)
설명: 악마대공 아가레스로부터 추출한 사념(마의 인자)을 강제로 구슬 형태로 가공한 형태. 가공 처리가 불안정하기 때문에 섣불리 건드릴 경우, 얼마든지 다시 해제될 수 있다.
이블케는 연우가 여태껏 쌓아 두고 있던 누계 공적치를 대량으로 소모해서, 마의 인자를 보석으로 가공한 것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웬만한 기술로도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연우가 그동안 누적시킨 공적치 수치가 워낙에 높은 데다가, 최고 관리자인 이블케가 특별히 손을 써서 가능했던 것이다.
웬만한 악마를 잡아 봉인시킨 것보다 훨씬 양이 많은 데다가, 질적으로도 워낙에 대단해서 세샤를 치료하는 건 전혀 무리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기뻐했지만. 연우는 곧 마핵을 살펴보고 인상을 딱딱하게 굳혀야 했다.
가공 처리가 너무 불안정했던 것이다. 이런 상태라면 절대 체외로 배출시키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연우는 이블케를 바라봤지만, 이블케는 너의 생각을 잘 안다는 듯이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이상은 안 된답니다. 이것만 해도 사실 제게는 충분히 월권행위나 마찬가지예요. ### 님의 공적치로도 턱없이 부족하고요. 그리고 무엇보다 보상이란 건, 타인에게 전가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는 걸 잘 아시지 않나요?”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머릿속이 어지러워지는 동안.
어느새 다시 붉게 물든 하늘에서부터 누군가가 조용히 착지했다. 헤르메스였다.
이블케가 옆으로 슬쩍 비켜나면서 인사했다. 다만, 공손하다기보다는 살짝 껄렁대는 투였다.
헤르메스는 익숙하다는 듯이 피식 웃고, 연우에게 다가갔다. 그는 어느덧 존재감을 모두 지운 상태였다.
“그대가 무엇을 그리 조급하게 생각하는지 잘 안다. 하지만 급하다 하여 너무 서두르지 마라. 그런다면 주변에 있는 것들도 놓치게 될 것이니. 그대는 그런 사람이 아니지 않은가?”
헤르메스는 자상한 손길로 연우의 얼굴을 덮어 주었다. 연우는 그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지만, 곧 저절로 눈이 스르르 감기면서 상체가 앞으로 무너졌다. 피로했던 정신력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한 것이다.
그때, 쓰러진 연우를 따라 새하얀 구체가 생성되었다. 그리고 따뜻한 기운이 천천히 연우에게로 스며들었다.
헤르메스는 자신이 하려던 게 먼저 만들어지자 눈을 살짝 동그랗게 뜨다가, 곧 하늘을 슬쩍 보면서 가볍게 웃었다.
아테나. 저 여인은 언제나 연우를 따스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지금도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빤히 보였다.
“오효효. 가시렵니까?”
그때, 이블케가 슬쩍 물어 왔다. 입가까지 찢어진 입꼬리가 흉측했지만,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 보였다.
헤르메스는 슬쩍 이블케를 돌아보다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마디만 남기고 저 위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보아뱀에게로 되돌아갔다.
“내게 시간이 없어서. 뒤를 잘 부탁하지.”
“오효효효. 보는 눈길이 얼마나 많은데 어련히 알아서 하지요.”
헤르메스는 보아뱀들과 함께 다시 하늘로 돌아갔다. 잠시 모습을 숨기고 있던 철문이 나타나 크게 열렸다가 도로 닫혔다.
쿵!
23층을 가득 메우던 마지막 남은 위대한 존재의 흔적도 그렇게 사라졌다.
이블케는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몸을 다시 연우가 있는 곳으로 돌렸다.
“자. 그럼 다시 남은 뒷마무리를 해 볼까요?”
* *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연우는 무겁기만 한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흐릿했던 시야가 조금씩 초점이 잡혔다.
에도라가 물수건으로 그의 이마를 훔쳐 주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친 에도라가 살짝 눈을 크게 떴다가, 곧 미소를 지었다.
“일어나셨어요?”
연우는 아주 잠깐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자신이 왜 여기 있는 걸까. 관리자들이 나타나고, 이블케의 도움으로 마의 인자를 다스렸다. 그리고 헤르메스가 다가와서 잠이 들었었다.
앞선 일을 떠올리니 대강 어떻게 뒷일이 돌아갔는지 알 것 같았다. 딴 곳에 피신해 있던 판트와 에도라가 자신을 구해 준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된 걸까? 세샤는? 브라함은? 갈리어드는? 그리고 다른 관리자들은?
하지만 한꺼번에 물을 수가 없어, 짧게 축약해서 물었다.
“여긴, 어디지?”
“24층이에요.”
“24층?”
뜻밖의 말이었다.
에도라가 연우의 반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악마의 숲은 공기가 너무 탁한 것 같아서, 곧바로 모시고 이동했어요. 여긴 스타트 존 인근에 위치한 도시의 객관이구요.”
확실히. 24층은 23층과 다르게 자연 경관이 맑은 곳으로 유명했다. 요양하기엔 적당했다.
“그럼 다른 사람들은?”
“그게…….”
에도라는 섣불리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연우는 불현듯 불안감이 들었다. 그래서 억지로 일어나려는데, 순간 현기증이 강하게 돌았다.
“오라버니!”
에도라가 재빨리 연우를 부축했다. 연우는 괜찮다면서 손을 뻗어 그녀를 제지하려다가, 문득 든 생각에 얼굴 쪽으로 손을 가져갔다. 손끝에 얼굴이 만져졌다. 가면이 없었다.
연우는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에도라를 돌아봤다. 하지만 에도라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근처 탁상에 놓아 뒀던 가면을 연우에게 정성스레 내밀었다.
하지만 연우는 섣불리 가면을 받을 수가 없었다. 여러 생각이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너…….”
세샤 등에게 얼굴을 보여 준 건, 혈육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판트와 에도라는 미묘하게 달랐다. 이미 두 사람을 동생처럼 여기고 있었지만, 정체를 밝히는 건 전혀 차원이 다른 이야기였다.
동생도 아르티야의 멤버들을 가족처럼 생각했다. 애틋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저마다 가진 욕심으로 갈라졌고, 무너지고 말았다.
이 둘도 언젠가 그러지 말란 법은 없었다. 두 사람을 믿었지만, 믿었기에 오히려 더 믿을 수가 없었다. 가면을 벗는다는 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준다는 의미였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건 두고두고 언젠가 자신의 목을 옥절 약점이 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연우는 아주 잠깐이지만 차가운 생각까지 가졌다. 대체 몇 명이나 보았을까. 둘? 아니면 24층으로 오는 내내 마주쳤던 사람들 전부? 아니다. 에도라가 그렇게 안일하게 굴 리가 없으니, 둘이 전부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면. 둘만 봤다면. 에도라와 판트를 어떻게 해야 할까. 둘의 입을 막아야 하나? 하지만 어떻게? 둘이서 자신의 얼굴이 의미하는 바를 모를 가능성도 있지만, 알고 있을 가능성이 더 컸다. 동생은 너무나 유명했으니까.
아니, 설사 모른다고 해도. 굳이 위험 요소를 남겨 두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여러 생각들로, 머릿속이 너무 복잡했다.
그런 스산한 눈빛을, 혜안을 가진 에도라가 읽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에도라는 아무렇지 않게 천천히 다가왔다. 그리고 손을 뻗어 연우를 끌어안았다. 저항할 수 있었지만 어쩐지 그러지 못한 이유로, 연우는 에도라의 품에 꼭 안기고 말았다. 따뜻한 살 냄새가 풍겼다.
에도라는 그렇게 연우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모두 이해한다는 듯이. 얼마나 고생이 많았냐며 위로하듯, 너무 걱정 말라며 따뜻하게 그를 다독였다.
연우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미 머릿속에는 아무런 생각도 남지 않았다. 아니,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한참 동안 우두커니 멈춰 있었다.
에도라의 품은. 너무나 따뜻하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