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208화 (208/862)

8화. 현자의 돌 (1)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연우는 에도라의 품에서 나온 후 잠깐 동안 제대로 눈을 마주치질 못했다. 살짝 분위기에 취했었다는 사실을 알긴 했지만, 정신이 돌아오자 보기가 계면쩍었던 것이다.

에도라는 그런 연우가 귀엽다는 듯이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언제나 딱딱한 연우만 봐 왔던 그녀로서는 처음 보는 모습이라서 신선했다. 이렇게 눈만 보고 있는 게 아니라, 얼굴 표정까지 제대로 볼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게 다가왔다.

“오라버니도 부끄러움을 타긴 하시네요.”

“……그동안 날 뭐로 봤던 거지?”

“그건 오라버니의 생각에 맡길게요.”

에도라는 가볍게 농을 던지면서 손에 쥐고 있던 가면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것을 받는 연우의 손길이 살짝 경직되었다. 여전히 생각이 많은 얼굴이었다. 이전처럼 독한 생각까지 가진 건 아니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그런 갈등이 잔뜩 묻어났다.

하지만 걱정 말라는 듯이. 에도라는 연우의 손을 가만히 잡아 주었다. 보석처럼 아름답게 반짝이는 눈동자가 연우를 담았다.

“판트 오빠는 오라버니의 얼굴을 보지 않았어요.”

연우가 무슨 말이냐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쓰러진 오라버니를 보고 그러더라구요. 자기는 아직 볼 때가 아닌 것 같다고. 오라버니가 마음을 열고 보여 준 게 아니니까, 그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했어요.”

“…….”

“그리고 저도 비슷한 생각이었지만…… 끝이 조금 달랐어요. 오라버니가 어떤 멍에를 지고 있는지 보고 싶었어요. 그것을 같이 나누고 싶다고 하면 잘못된 걸까요?”

에도라는 그렇게 말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이후는 연우에게 전부 맡기겠다는 듯이.

연우는 이제 때가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을 것인가, 말 것인가.

언젠가 이런 시기가 올 거란 건 알고 있었다. 언제까지 숨기고만 있을 수는 없으니까. 그리고 털어 놓지 못한다면 알아서 마음 정리를 끝내고 갈라서야 한다는 것도.

그래도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기에, 다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연우는 굳게 결심했다. 이 아이들이라면. 이 친구들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그래도 뒤가 걱정이라면 지금이라도 자신이 떠나는 게 맞았다. 그렇다면 더 이상 같이 있어 봤자 폐를 끼치는 것밖에는 되지 않을 테니까.

그러다 생각을 정리하고, 가면을 천천히 얼굴에다 썼다.

“언젠가는. 전부 털어놓을게.”

“네.”

에도라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배시시 웃었다. 어느 때보다 밝게 빛나는 미소였다.

* * *

연우는 에도라와 함께 건넛방으로 이동했다. 판트, 세샤와 갈리어드, 브라함이 머물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왜 아직도 남아 있는지 모를 손님도 함께.

끼익-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가니, 문가에 서 있던 갈리어드가 연우를 보고 고개를 까닥거렸다. 다시 가면을 쓰고 있어 살짝 놀란 눈치였지만, 곧 이유를 짐작했다.

“왔나?”

“브라함이 널 기다리고 있었다.”

연우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침상 쪽으로 다가갔다. 판트가 착잡한 표정으로 연우를 보다가 옆으로 슬쩍 물러났다. 침상 옆에 앉아 있던 세샤는 쪼르르 달려와 연우의 품에 폭 안겼다.

“으아앙! 삼촌!”

이미 그에 대해 갈리어드가 설명했던 걸까. 세샤는 연우를 아빠가 아닌 삼촌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 걸 알게 된 뒤 처음으로 만난 혈육에 대한 반가움을 표시할 새도 없이, 세샤는 눈물을 펑펑 쏟아 냈다.

브라함이 침상에 누운 채 조금씩 죽어 가고 있었다. 메마른 거죽만 남은 앙상한 몸과 얕은 숨결. 신이 죽어 가고 있었다. 그것도 한때 주신 급으로 불리던 위대한 신이. 인간으로 한없이 영락해 버린 채로.

금방이라도 숨이 꺼질 것 같았지만. 옆에서 그에게 꾸준히 마력을 공급하고 있던 이블케의 도움으로 겨우 숨이 이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이블케는 연우가 만난 이후 처음으로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달고 있었다. 그는 연우를 보고, 외눈 안경을 고쳐 쓰면서 천천히 침상에서 나왔다.

“나눌 말씀이 많으신 것 같으니, 외인인 저는 잠시 자리를 비우도록 하지요. ### 님, 헤르메스 님께서 남기신 전언이 있으니, 이따가 잠시 시간을 내주세요.”

연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블케는 포탈을 타고 자취를 감췄다. 그러자 방 안에는 연우 일행만 남게 되었다.

연우는 천천히 침상에 다가갔다. 브라함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힘겹게 열렸다. 초점이 잘 잡히지 않는 동공이 천천히 움직이면서 연우에게로 고정되었다.

“왔는가?”

“예.”

“얼굴, 볼 수 있겠나?”

연우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가면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러자 판트와 에도라, 갈리어드가 전부 자리를 비웠다.

찰칵-

브라함은 한참 동안 연우의 맨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짙은 눈썹. 쌍꺼풀이 없는 눈매. 각진 턱 선. 뚜렷한 이목구비가 훤칠하다는 인상을 주는 얼굴이었다.

“똑같군. 정말 똑같아. 하지만 인상이 많이 달라.”

“그런 말, 많이 들었습니다.”

“보통 쌍둥이면 타고난 형질이 똑같기 마련인데.”

“하지만 이상하게 저희는 전혀 다르게 컸습니다.”

“그렇군. 확실히 풍기는 느낌이 전혀 다르니. 싸우기도 많이 싸웠겠어?”

“형제는 원래 주먹다짐하면서 크는 법 아니겠습니까?”

“하하. 그도 그렇긴 하지.”

죽음을 앞뒀기 때문일까. 브라함은 처음 만났을 때보다 유순해져 있었다. 훨씬 부드러운 인상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너무 잘 어울렸다.

원래는 냉소적인 인상이었지만. 어쩌면 사실 그런 모습은 그저 연우의 가면처럼 거짓된 모습이었는지도 몰랐다.

그러다 브라함은 쓴웃음을 흘렸다.

“그거 아나? 난 그 얼굴을 참 싫어했었어.”

연우는 뜻밖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내 딸을 힘들게 했던 얼굴이었으니까.”

연우는 쓰게 웃고 말았다.

“그놈이 나쁜 놈이었군요.”

“그렇지. 나쁜 놈이었지. 암. 정말 나쁜 놈이었지.”

아난타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언제나 동생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몇 번은 마음을 언뜻 드러낸 적도 있지만, 그때마다 동생은 매몰차게 거절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당시에 연인이 있었으니까.

따지고 보면, 동생이긴 하지만, 참 바보 같은 놈이었다.

그렇게 꾸준히 동생을 살폈기에 아난타는 우연찮게 동생에게 자식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아이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졌다. 그리고 세샤가 구해졌다.

그렇다 보니, 브라함에게는 딸에게 모진 고생을 시킨 동생이 참 미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동생이 죽고 나서도, 딸은 여전히 세샤를 지키기 위해 어딘지 모를 곳에서 싸우고 있었으니까.

“비록 내게 딸이 있다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을, 그런 삶을 살았던 건 아니었지만. 자상한 아비는 아니었네만. 그래도 그렇게 오랫동안 그 아이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건, 싫어도 너무 싫었어.”

브라함의 시선은 이제 연우가 아닌, 연우와 같은 얼굴을 한 다른 누군가에게로 향해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고맙기도 하다네. 아무런 교류도 없이, 멀리서 딸을 지켜보기만 했던 나와 딸을 다시 연결시켜 준 것도, 결국은 그 녀석이었으니.”

연우는 일기장 한 귀퉁이에 있던 내용을 떠올렸다. 동생이 아난타와 처음 만나게 된 건, 사실 브라함을 위해서였다.

‘브라함이 도무지 자길 도와주지 않으려 하니, 알아서 브라함에게 필요한 걸 찾아내고 아난타를 설득하러 갔었지. 그때 뺨도 한 대 맞지 않았었나?’

동생은 절대 브라함을 만나지 않으려 했던 아난타를 끈질기게 설득했다.

처음에는 브라함에게서 연금술을 배우기 위해서였지만. 나중에는 정말 그들 부녀가 잘되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자신에게도 지구에 두고 온 가족이 있었으니까. 자신의 모습이 투영되어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리고 이 아이를 내게 가져다 준 것도 그 녀석이었으니. 밉더라도 고마울 수밖에 없지.”

브라함은 손을 뻗어 세샤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세샤의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이 그렁그 렁 맺혔다.

“이 아일 두고 내가 어떻게 가누.”

브라함의 목소리에 안타까운 기색이 어렸다. 악마는 결국 잡지 못했다. 세샤의 병증은 계속 깊어질 테고, 엘로힘과 혈국 같은 여러 곳이 세샤를 탐내고 있었다. 그리고 딸은 어딘지 모를 곳에서 여전히 분투 중이었다.

이대로 떠나기엔, 너무 많은 미련이 남아 있었다. 아난타를 낳고 여기에 이르기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은 결국 뭐 하나 제대로 이룬 것 없이 못난 선택만 해 대는 멍청이었다.

창조의 브라흐마라고? 한때 주신 급에 다다르지 않았냐고? 하계로 유배를 온 신? 그딴 게 다 무슨 소용인가. 바로 옆에 있는 소중한 것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반편이에 불과한 것을.

그렇기에 세샤의 머리를 쓰다듬는 브라함의 손길에는 미련이 잔뜩 묻어났다.

“브라함, 어디 가지마.”

세샤는 그런 브라함의 손을 꼭 붙잡으면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축 가라앉은 꼬리가 세샤의 슬픔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때.

연우가 브라함을 보면서 물었다.

“살고 싶지 않으십니까?”

방법이 있었다. 자신에게는.

브라함이 고개를 들어 다시 연우를 바라봤다. 눈빛이 어느새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자네가 가진 능력을 말하는 것이로군.”

역시.

그림자 속에 숨어 있는 샤논과 한령을 이미 예전부터 알아챈 게 틀림없었다.

“그렇습니다.”

“내가 산다…….”

브라함은 잠시 말없이 눈을 감다가, 다시 천천히 떴다.

“하지만…… 내가 살아도 되겠나?”

그의 목소리가 가녀리게 떨렸다.

“난 자네들에게 죄를 지었어. 세상에는 폐만 끼쳤고. 그런 내가 정말…… 살아도 될까?”

“됩니다.”

연우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세샤를 위해 사십시오. 또한, 아난타를 위해서 사십시오. 그리고 저 또한 부탁드리겠습니다. 살아 주십시오. 그리고 그래야.”

연우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이었다.

“앞으로 저도 녀석을 같이 흉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

브라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에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또한, 세샤의 병을 빨리 낫게 하고, 따님을 만나러 가야 하시지 않습니까?”

“……방법이 있나?”

연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떠오른 방법이 있습니다. 세샤와 아난타를 전부 구할.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브라함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브라함은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도 똑같군. 사람을 귀찮게 하는 건. 그놈도 그랬었는데.”

“형제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한때…… 신이라고까지 불렸던 나일진대. 하하. 이제는 다른 누군가의 권속이 되어 버리라니.”

브라함이 가진 자존심이 얼마나 강한지 아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경악할 만한 말이었다. 신과 악마들조차 놀라고 말리라.

“하지만 이런 것도 나쁘진 않겠…… 지.”

그리고 그 말을 끝으로.

브라함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얕게 오르락내리락하던 가슴이 가라앉았다. 수명이 다한 것이다. 활짝 열린 연우의 용마안으로, 육체를 떠나려는 브라함의 영혼이 보였다.

“삼촌!”

세샤가 연우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겼다. 연우는 걱정 말라는 얼굴로 세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왼손을 활짝 펼쳐 브라함의 육체에다 갖다 댔다.

[바토리의 흡혈검]

찰칵, 찰칵-

톱니 이빨이 브라함의 육체에 박히면서 정기를 흡수하기 시작했다.

얼마 남지 않은 생명력이라 큰 도움이 되진 않았지만, 그래도 한때 신이나 되었던 거대한 영혼을 수거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막대한 양의 에너지가 체내로 쏟아졌다.

그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것은.

[신의 인자를 획득했습니다.]

[신의 인자를 획득했습니다.]

……

신의 인자에 관한 내용이었다.

연우로서도 흥미로울 수밖에 없는 메시지였다. 사용하기에 따라 서는 마룡체를 한 단계 이상으로 각성시킬 수 있는 재료가 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연우는 미련 없이 신의 인자를 한데 모아 에너지와 규합시켰다.

어차피 지금은 주어진 마룡체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상황에서 더 큰 힘이 주어져 봤자 짐만 될 뿐이다. 그리고 지금은 ‘세샤의 할아버지’를 어떻게든 되살리고 싶었다.

지이잉!

그때, 칠흑왕의 절망이 잘게 울렸다.

연우는 오른손을 활짝 펼쳤다. 그러자 손바닥 위로 사람 머리보다도 더 큰 순백색의 영혼이 나타났다. 망령도 아니었다. 워낙에 영혼의 격이 높다 보니, 흡수를 하고 나서도 망령으로 쇠락하지 않은 것이다. 이 정도면 신령(神靈)이라고 봐도 될 것 같았다.

사귀나 괴이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다만, 연우는 아주 잠깐 이 거대한 신령이 제대로 데스 나이트나 리치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낱 언데드가 되기엔 용량이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컸다. 한령도 겨우 데스 나이트로 만들 수 있었는데. 브라함은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아무리 영락했어도 신은 신이었다.

그래도 해 보겠다는 생각에 시도를 하려는데.

“잠깐만, 삼촌! 이거, 이거!”

세샤가 갑자기 연우를 만류하더니 손목에 착용하고 있던 팔찌를 두들겨 아공간을 활짝 열었다. 그리고 손을 불쑥 넣어 한참 동안 뒤적거리다가, 뭔가를 찾아내고 쏙 뺐다.

밀봉된 작은 유리병. 안쪽에 민들레 홀씨 같은 것들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연우는 그게 뭔지 확인하고 눈을 크게 떴다.

[호문클루스의 영액(靈液)]

분류: 물약

등급: ??? (측정 불가, 미완성)

설명: 브라함이 자신의 모든 연금 지식과 마법 정수를 쏟아서 만든 인공 생명체의 원재료. 하지만 ‘영혼’을 생성할 방법을 알아내지 못해 미완성으로 남아 있다.

수성의 서와 함께 브라함이 자랑한다는 두 개의 보물 중 하나였다.

수성의 서가 연금술과 연단술의 지식을 총망라한 마도서라면, 호문클루스의 영액은 그런 지식을 바탕으로 완성된 총아였다. 다만, 설명에 나와 있는 대로 영혼을 연성할 수는 없기 때문에 계속 미완성인 채로 남아 있었는데.

“내 병이 만약 치료가 안 되면 쓴다고 했었어. 이거면 브라함도 나을 수 있을 거야!”

작은 유리병을 꽉 쥐는 세샤의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두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기대가 섞인 눈. 삼촌이 반드시 해 줄 거란 믿음이 잔뜩 묻어났다.

연우는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이거 실패하면 정말 큰일 나겠는데.’

조카의 바람이라면 뭐든지 들어 줘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래서 유리병을 받아 그 안에다 브라함의 영혼을 불어 넣었다.

화아악!

유리병이 환한 빛을 발했다.

그리고 그것을 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어쩌면 벌써부터 조카 바보가 된 건지도 모르겠다고.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