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현자의 돌 (3)
브라함은 손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진지하게 빛나는 눈동자를 한 채, 머릿속은 여러 생각으로 복잡하게 돌아가는 중이었다.
“발푸르기스의 밤에게로 관심이 쏠리게 할 방법은?”
연우가 계획의 내용을 이어 나갈수록.
브라함의 얼굴에는 어이없다는 듯한 헛웃음이 새 나오더니, 곧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 * *
연우는 도로 가면을 쓰고, 세샤를 브라함에게 맡긴 후 천천히 방을 빠져나왔다. 새롭게 육체를 조정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데다가, 세샤와 나누고 싶은 이야기도 많을 것 같아 일부러 자리를 피했다.
갈리어드와 판트, 에도라가 바로 따라붙었다. 특히 갈리어드의 눈동자에는 초조함이 어렸다.
“브라함은……?”
편히 갔냐는 질문. 브라함이 부활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하는 것이다.
“괜찮으십니다.”
“세샤가 많이 울겠…… 음?”
“들어가 보시면 압니다. 안에 세샤가 자고 있으니 조심하시고요.”
갈리어드는 그게 무슨 말이냐는 얼굴로 연우를 보다가, 서둘러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리고 브라함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누워 있는 세샤를 쓰다듬고 있는 것을 보고 눈을 크 게 떴다.
“브……!”
“쉿. 조용히 하라는 말, 못 들었나?”
갈리어드는 차마 소리는 치지 못하고 너무 기뻐서 어쩔 줄 몰라 우왕좌왕하다가, 다시 연우에게로 돌아와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고맙네. 정말 고마워.”
갈리어드는 연우가 무슨 일을 했는지는 몰랐다. 하지만 연우 덕분에 브라함이 건강을 되찾았고, 세샤도 웃기 시작했다는 것만은 알았다.
한때, 아카샤의 뱀에 가족을 잃었던 그에게, 브라함과 세샤는 새로운 가족이나 다름없었다. 그 둘도 잃는 게 아닐까 노심초사했었는데. 또다시 연우가 구해 준 것이다.
연우는 괜찮다며 갈리어드의 등을 다독였다. 브라함도 그렇지만, 두 사람 모두 무뚝뚝해 보여도 속정은 너무 깊은 사람들이었다.
“나이 먹고 주책을 다 부리는군.”
갈리어드는 눈가에 살짝 맺힌 눈물을 훔쳐 내고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연우의 어깨를 탁 짚으면서 말했다.
“이따 밤에 술이나 한잔하세. 나눌 이야기가 아주 많을 것 같으니까.”
“예.”
갈리어드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브라함의 방으로 들어갔다.
연우는 그런 갈리어드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동생의 첫 스승이나 다름없던 사람. 원래대로라면 순보만 얻고, 더 이상 가까이 할 생각이 전혀 없었던 사람이었건만.
인연의 실은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촘촘하게 얽혀 있어, 갈리어드는 조카를 지켜 준 사람이 되었다.
그런 사람이라면. 무엇이든 내줘야만 했다.
그러다.
연우는 문득 든 생각에,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판트와 에도라를 돌아봤다.
전후 사정을 다 깨달은 브라함, 갈리어드와 다르게 두 사람은 여전히 자신의 사정을 모른다. 계속 숨겨 둘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이제는 생각이 바뀌었다.
이대로 미뤄 둘 수도 있겠지만, 그러면 상황은 그냥 정지해 있기만 할 것이다.
그리고 연우는 더 이상 멈춰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이제는 굴려야 할 때였다.
“판트, 에도라.”
“왜 그러슈?”
“예. 오라버니.”
“이따 너희들에게도 따로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관리자와 이야기가 끝나면 시간 좀 내어 다오.”
판트와 에도라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연우는 고개를 들어 허공을 응시했다.
이제 이블케와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었다. 여기서 나누는 대화에 따라, 앞으로 벌어질 수많은 일들의 향방이 결정될 게 분명했다.
가면 아래, 연우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 * *
그때, 연우 앞으로 포탈이 하나 열렸다.
“오효효. 이곳으로 넘어오시겠습니까?”
관리자의 초대.
판트는 살짝 놀란 얼굴이 되었고, 에도라는 걱정 어린 시선으로 연우를 바라봤다.
연우는 눈짓으로 괜찮다는 의사를 보이고, 포탈 안쪽으로 발을 넣었다. 그러자 포탈이 저절로 닫히면서 순간적으로 어두웠던 시야가 확 밝아졌다.
아주 넓은 너비를 자랑하는 방이었다. 매끈한 대리석 바닥에는 붉은 양털 융단이 깔리고, 벽에서부터 천장까지 갖가지 성화가 잔뜩 그려져 있었다.
이블케는 천장 정중앙에 매달린 크리스탈 샹들리에 아래에 마련 된 식탁에 앉아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탁상에는 갖가지 고급스러운 자기와 찻잔이 가득 놓여 있었다.
“역시 ### 님은 가면을 쓴 모습이 제게는 더 익숙하단 말이지요. 이쪽으로 와서 앉으시겠습니까?”
연우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블케의 맞은편에 앉았다.
이블케는 연우 앞에 찻잔을 공손히 내려놓고, 주전자를 기울여 차를 따랐다. 맑게 빛나는 붉은 차가 채워지면서 향긋한 꽃향기가 코를 자극했다.
비록 생김새는 우악스러운 고블린이었지만. 자세는 고급스러운 턱시도와 외눈 안경에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릴 정도로 우아하고 공손했다.
“오효효. 트라빌이라는 행성에서 만난다는 귀중한 약초를 우려낸 것이랍니다. 기혈과 정신을 맑게 하는 데 탁월하니 한 번 맛보세요.”
연우는 찻잔을 들어 입가에 갖다 댔다. 확실히 이블케가 자랑스럽게 권할 정도로 맛이 깔끔했다. 조금 피곤했던 것도 말끔하게 사라졌다. 덕분에 연우는 보다 더 또렷한 정신으로 이블케를 볼 수 있었다.
이블케가 씩 웃으면서 물었다.
“어떠신가요?”
“좋아.”
“오효효. 다행이로군요. ### 님은 언제나 저희들을 고생시키기만 하는 데 반해, 저는 이렇게 ### 님께 좋은 것만 드리니. 참 열 일을 마다하지 않는 관리자의 표본이 아닙니까?”
연우는 이블케의 농담을 귓등으로 들으면서 조용히 찻잔을 내려 놓고 물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서.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으면 하는데.”
“확실히 ### 님은 농담을 나눌 수가 없단 말이지요.”
이블케는 그렇게 가볍게 투덜거리면서 박수를 쳤다.
짝!
그러자 연우 앞으로 보랏빛 이펙트가 잔잔하게 퍼지면서 홀로그램을 띄웠다.
붉은 하늘과 악마수로 가득한 23층 스테이지의 정경이었다. 여전히 스테이지의 복구가 계속 이뤄지고 있는 중인지, 끝 부분이 빠르게 수복 중이었다. 하지만 복구를 시도하면 되는 듯하다가 실패하기를 반복하는 구간도 있었다.
“보다시피 헤르메스 님과 아가레스 님의 싸움이 워낙에 격렬했던 탓에, 스테이지의 복구는 아직도 덜 이뤄지고 있는 실정이에요. 아예 스테이지를 임시 폐쇄했는데도 말이지요.”
임시 폐쇄.
그 말을 들은 연우의 눈이 살짝 커졌다. 탑이 생긴 이래 수천 년이 지났지만, 그렇게까지 극단적인 조치를 취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분명 연우가 기절하기 전에 봤던 광경은. 더 이상 스테이지라고 부르기 뭣했으니까. 그런 곳에선 시련 자체가 불가능했다.
“거기다 스테이지에 머물고 있던 플레이어들도 대부분 사망해 버린 상태라, 여기저기 클랜이며 플레이어들의 항의까지. 지금 관리국 내의 모든 업무가 마비되어 버린 상태랍니다. 오효효! 그 때문에 ### 님에 대한 관리국의 원망이 참 어마어마하지요.”
이블케는 손으로 까끌까끌한 돌기가 잔뜩 난 턱을 쓰다듬으면서 말을 이었다.
“물론, 관리국의 방침 상, ### 님에 대한 다른 제재는 없을 겁니다. 불이익도 없을 거고요. 어쨌건 이번 소란도 시련을 진행하던 와중에 벌어진 것이니까요. 아가레스 님을 미처 제어하지 못한 저희의 책임도 있고요. 아니, 사실은 한 친구가 저지른 것이 가장 크긴 했습니다만.”
연우는 문득 한 녀석이 떠올랐다. 21층에 오를 때쯤, 해(亥)의 루피가 찾아온 적이 있지 않던가. 그리고 그가 언급하던 자가 있었다.
“라플라스?”
10층대의 최고 관리자, 묘(卯)의 라플라스.
이블케는 고개를 끄덕였다.
“눈치채셨군요. 그 친구가 뭘 노렸는지는 저희도 계속 조사 중입니다만. 여하간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저희 관리국에서 별다른 추가적인 제재는 없을 거란 겁니다. 다만, 다른 클랜이나 플레이어들은…….”
“내게 원한을 가질 수 있겠지.”
거대 클랜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브라함을 예의 주시해 왔다. 당연히 아가레스의 갑작스러운 강림이 누구 때문에 벌어진 건지도 눈치챘을 것이다.
당장은 관리국의 보호가 있어 괜찮은 상태였지만.
만약 이블케가 완전히 떠나고 난다면, 다른 거대 클랜들이 일제히 움직일 게 분명했다. 세샤가 있는 이상, 연우는 어떻게든 이들을 지켜야만 했다. 이블케는 바로 이 점을 충고해 준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연우 일행이 그동안 아무 방해 없이 휴식을 취할 수 있었던 건, 이블케의 호의 덕분이기도 했다.
연우는 이블케가 왜 자신들을 도와주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튜토리얼 때부터 느꼈지만, 이블케는 도무지 속내를 읽을 수가 없었다. 그냥 단순한 호의일까? 아니면 빚을 지우려는 걸까?
그것도 아니면.
다른 뭔가가 있는 걸까?
“이런 걸 굳이 이야기하려고, 남은 건 아닐 테고.”
“오효효. 당연히 본론은 따로 있지요.”
이블케는 손을 흔들어 홀로그램을 깼다. 그러자 입자가 부서졌다가 다시 뭉치면서 여러 메시지를 만들어 냈다.
“사실 ### 님에게 드릴 말씀은 따로 있었습니다. 지금도 워낙에 다들 아우성이 심해서, 참 중간에 낀 입장에서는 난처하기만 하단 말이지요.”
이블케는 마치 만찬회장을 공개하는 사람처럼, 짧은 양팔을 가볍게 좌우로 벌렸다.
메시지들이 쉴 새 없이 위아래로 떠올랐다.
[‘아스가르드’의 신, 헤임달이 무언가를 강하게 요구합니다.]
[‘데바’의 신, 시바가 강한 으름장을 놓습니다.]
[‘천교’의 신, 나타태자가 깊은 고민에 잠깁니다.]
[‘올림포스’의 신, 아레스가 목에 핏대를 올리며 다른 신들에게 소리를 지릅니다.]
[다른 신들이 모두 무시합니다.]
……
[‘르 인페르날’의 악마, 아몬이 당신을 관찰합니다.]
[‘절교’의 악마, 도철이 입맛을 다십니다.]
……
수많은 신과 악마들에 관련된 메시지들.
연우는 자기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렸다.
“이게 뭐지?”
이블케는 재미있다는 듯이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무엇이겠습니까. 전부 ### 님에게 깊은 관심을 보이는 분들이시지요.”
“……!”
연우는 살짝 눈을 크게 떴다.
“신 측에서는 모두 41분이, 악마 측에서는 그보다 조금 더 많은 55분이 ### 님을 탐내하고 있습니다. 전부 ### 님과 다리를 놓아 달라는 부탁이지요.”
“사도직을 제안하는 건가?”
하지만 연우는 곧 놀랐던 마음을 다스렸다. 신과 악마들이 어떻게든 나설 거란 생각은 이미 하고 있었다. 아무리 헤르메스와 아테나의 도움을 받았다고 해도, 아가레스에게 그런 상처를 입힌 데다가, 브라함을 권속으로 받아들이기까지 했으니.
다만, 그 정도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격렬해서 놀랐을 뿐이었다. 41명의 신과 55명의 악마라. 모두 96명이나 되는 불멸자들이 자신에게 관심을 보인단 뜻이 아닌가.
“예. 맞습니다. 아무래도 ### 님을 받아들이면 그만큼 하계에 대한 자신들의 영향력도 커지게 될 테니까요.”
“하지만 시바나 아레스 같은 신들은 따로 사도가 있을 텐데?”
신과 악마는 신도는 여럿을 둘 수 있을지언정, 화신인 사도는 단 한 명밖에 두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를 두는 데 있어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었다.
특히 파괴의 신, 시바와 전쟁의 신, 아레스의 사도는 하이 랭커들 사이에서도 이름을 날리는 자들이었다.
그런데도 자신에게 관심을 둔다고?
“필요하다면 기존의 계약을 깰 각오까지 하신다더군요.”
이쯤 되니, 연우는 조금 어이가 없었다. 사도 하나를 키우기 위해 신과 악마들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지 떠올린다면. 그런 계약을 일방으로 파기하는 건, 엄청난 피해를 감수하면서 연우를 탐내한다는 뜻이었다.
‘브라함을 권속으로 삼았을 때에는 그렇게 노발대발해 놓고선. 역시 속내는 겉보기와 다를 수밖에 없지.’
언제는 신의 영광에 위해를 끼친다고 그렇게 화를 내더니. 연우는 아무리 격이 높아져도, 결국 인간과 다를 바가 없는 신들의 속이 보이는 것 같아 비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사도의 조건은 랭커부터라는 것, 잘 알고 계시겠지요?”
연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랭커로 분류되는 3개의 직군, 사도, 군주, 초인. 이것들의 특성이 본격적으로 개화되는 것은 50층의 용의 신전을 극복하고 난 뒤부터다.
“하지만 50층까지 기다리기엔 너무 늦을 거 같다고 생각하셨는지, 저를 통해 몇 번씩 제안을 하려는 겁니다. 우선 가계약부터라도 하고 싶으시다는 거지요.”
쉽게 말해, 남들이 낚아채기 전에 먼저 침부터 발라 놓겠단 뜻이었다.
“그리고 몇몇 분들 중에는 가계약을 마친 순간부터, 권능을 내주겠다고 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어떠십니까?”
권능은 크게 보면 스킬의 범주에 들어가도, 궤를 달리한다. 신과 악마라는 ‘개념’을 특징짓는 힘이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저층 구간에서부터 권능을 가진다는 것은 막대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하지만 팔짱을 낀 연우는 심드렁하기만 했다.
이미 그에게는 용종 각성이라는 아주 큰 권능이 있었다. 그것도 한때 최고신들도 찍어 누를 만큼 강했던 고룡 칼라투스에게서 비롯된 것이니. 웬만한 권능은 눈에 찰 리가 없었다.
그래서 연우는 단칼에 거절을 하려 했다. 어차피 어디에도 종속 될 생각이 없었으니까.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자신을 탐내는 신과 악마들이 많은데. 굳이 한 명에게 얽매일 필요가 있을까?
[‘말라흐’의 신, 아즈라엘이 어서 말하라며 채근합니다.]
[‘니플헤임’의 악마, 요르문간드가 고요한 눈빛으로 바라봅니다.]
……
원래 이런 건 애가 타는 쪽이 굽히고 들어갈 수밖에 없다. 연우는 별 흥미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당장 주어진 것만 해도 전부 잘 다루지 못하고 있어서. 그리고 한 곳에 묶일 필요도 못 느끼겠고.”
[‘올림포스’의 신, 아레스가 다급하게 소리를 지릅니다.]
[‘르 인페르날’의 악마, 단탈리안이 생각을 바꿀 것을 권고합니다.]
[‘절교’의 악마, 거라건타가 짜증스러운 눈빛을 보냅니다.]
……
메시지에 떠오르는 신이며 악마들 전부, 각각의 사회에서 제법 위계가 높은 자들이었다. 어쩌면 하위 서열들은 상위 서열들의 눈치를 보느라 찔러 보지도 못해, 그나마 96명인 것일지도 몰랐다.
녀석들은 연거푸 메시지를 쏟아 내면서 연우더러 생각을 바꿀 것을 종용했다.
그리고 몇몇은 자신들이 얼마나 대단한지, 가계약을 맺으면 내어 줄 권능이 얼마나 위대할지 떠들어 대기도 했다.
하지만 연우는 귀찮다는 듯 덤덤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블 케는 그런 연우를 보면서 웃고 말았다. 그가 무엇을 노리는지 눈치챈 것이다.
이렇게 신과 악마들을 농락하는 플레이어는 아마 연우밖에 없을 것 같았다.
“오효효. 아무리 좋은 보물을 줘도 본인이 싫다면 어쩔 수 없는 법이지요. 아쉽군요. 그럼 채널은 이걸로 닫……!”
[‘데바’의 신, 아그니가 괄괄히 날띕니다. 24층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없나 물색합니다.]
[신의 사회, ‘올림포스’의 신들이 일제히 관리국에게 항의를 합니다!]
[악마의 사회, ‘절교’가 관리국에게 으름장을 놓습니다.]
이블케가 소란스럽기만 한 채널을 닫으려던 그때.
“하지만.”
연우는 적절한 타이밍에 불쑥 끼어들어 한 박자를 쉬었다. 이블케도 기다렸다는 듯 종료하려던 것을 멈췄다.
“굳이 준다는 것까지 마다하지는 않겠어.”
이블케는 입꼬리가 찢어져라 흉측하게 웃으면서 채널을 보며 말했다. 수많은 시선들이 그에게 따라붙고 있었다.
“오효효효. 다들 들으셨지요? ### 님께서 그렇다고 하시는데.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지요?”
여태 소란스럽던 채널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하지만 이블케에게 붙은 시선들은 점점 날카로워졌다. 연우가 뭘 노리는지 이제 알아챈 것이다.
당장 가계약으로 얽매이긴 싫다. 그래도 자신이 탐난다면 권능부터 내놓아라. 물건부터 먼저 받고 나서 살지 말지를 결정하겠다는 의미였다.
신과 악마들을 상대로 강짜도 이런 강짜가 없었지만.
연우는 정말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태도로 일관했고, 이블케는 금방이라도 채널을 닫을 것처럼 그들의 애간장을 계속 태워 댔다.
하지만 아주 잠깐 누구 하나 메시지를 띄우지 못했다. 초월자로서 가진 마지막 남은 자존심일 수도 있고, 다른 신과 악마들의 눈치를 보느라 섣불리 나서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채널을 박차고 나가 지는 않았다.
그렇게 고요함만이 흐르던 그때.
[‘르 인페르날’의 아가레스가 권능, ‘흉신악살’을 제안합니다!]
갑자기 메시지가 하나 불쑥 떠오르는 것을 시작으로.
채널은 금세 폭주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