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현자의 돌 (5)
『야누가 죽었어.』
어느 날, 영매가 불쑥 꺼낸 말은 외뿔부족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야누가? 녀석이 갑자기 왜?”
무왕은 인상을 단단히 굳혔다. 전장에 용병으로 참전한 것도 아니다. 그저 명장 헤노바에게 의뢰한 물건이 있어 재료를 조달하러 가던 중이었을 뿐인데. 대체 왜?
하지만 영매가 가진 신기에는 절대 거짓이 섞이지 않는다. 특히 야누는 영매의 후계자 후보군에 있던 아이. 그 아이가 죽었다면 영매가 즉각 알아챌 수밖에 없었다.
『몰라. 자세한 건. 다만, 보이는 건, 짙은 탄내, 피 냄새, 쇳조각…… 그 외에 활과 화살, 마물 같은 것들이야. 그 아이, 고통스럽게 죽었어. 너무 끔찍하게.』
무왕은 이를 바득 갈았다. 아끼던 아이가 죽었다. 이건 자신에 대한 도전이었고, 일족에 대한 시비였다. 절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외뿔부족이 길거리에서 객사를 하는 일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전장에서 죽는 건 있을 수 있었다. 용병으로 참전해 다치는 것도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것이 일족의 자랑이었고, 전통이었다.
하지만 명예롭지 못한 죽음은. 아무도 알아주지 못하는 개죽음은 절대 허락되지 않았다.
만약 그딴 일을 저지른 놈이 있다면 탑 끝까지라도 쫓아가서 복수하는 것. 그리고 그 주변까지 전부 지워 버리는 것. 그것 또한 일족의 전통이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들었다.
야누를 각별히 아끼던 에도라가 이 사실을 안다면. 딸은 어떤 심정이 되어 버릴까. 그러니 더더욱 범인을 잡아야만 했다.
“놈을 당장 잡아 와. 내 눈앞에.”
무왕의 명령에 따라, 추격대가 빠르게 만들어졌다. 야누를 죽인 살해자가 하이 랭커급일 거란 영매의 판단에 따라, 확실한 제압을 위해 장로 두 명이 포함된 추격 대였다.
그리고 추격대는 곧장 범인의 흔적을 쫓기 시작했다.
야누가 죽은 곳으로 판단되는 장소를 찾아 주변 일대를 파악하고, 부리는 수법이 청화도의 궁무신과 닮았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리저리 흔적을 지우려는 흔적이 남아 있었지만. 빛의 화살이 훑고 지나간 자리마저 완전히 지우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때부터 그들은 궁무신의 행적을 수색했고, 끝내 23층으로 향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거기까지 가자 23층에 있다던 연우 일행을 노리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어 조금 걱정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아가레스와 헤르메스의 강림으로 스테이지가 초토화되고, 입장이 임시 금지되었을 무렵이었다.
그리고 스테이지가 다시 개방된 순간.
추격대는 곧바로 입장해서 궁무신의 위치를 파악하고, 그곳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영매의 눈과 외뿔부족의 발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콰콰쾅-
전투는 만난 순간부터 바로 이뤄졌다.
장웨이 역시 추격대가 다가온 것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던 바. 어차피 설득 따윈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차라리 먼저 선수를 쳤다.
빠른 발로 도망칠까 하는 생각도 잠깐 들었었다. 장웨이에게 승부란 이기는 것만 중요할 뿐. 이기지 못한다면 전략상 후퇴도 나쁜 선택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당장 달아난다고 해도 외뿔부족의 추격이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데다가, 우선 추격대의 머릿수라도 줄여 놔야 후퇴할 때 조금 편해질 것 같았다.
장웨이는 커다란 악마수 사이에 잠복해 있다가, 루트를 따라 추격대가 나타난 순간 화살을 잔뜩 뿌려 댔다.
〈소증(素矰)〉. 이예 신이 그에게 선사한 신물이자 권능을 터뜨리는 순간. 빛의 화살은 단번에 수십 갈래로 쪼개지면서 추격대의 머리 위를 덮었다.
“산개!”
하지만 추격대는 이미 장웨이가 무슨 짓을 저지를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고, 삐쩍 마른 장로의 외침에 따라 15인으로 구성된 추격대는 전원 뿔뿔이 흩어져서 화살의 범위에서 이탈했다.
“규합!”
그리고 이번에는 짜리몽땅한 다른 장로의 외침에 따라 크게 원호를 그리면서 장웨이에게로 일제히 달려들었다.
파바밧!
장웨이는 활시위에다가 소증을 다시 다섯 개나 걸고, 이번에는 바닥에다 그대로 왔다.
콰쾅!
한 순간, 지면이 그대로 폭발하면서 먼지구름이 높게 치솟아 추격대의 시야를 한껏 가렸다. 장웨이는 그 위로 높게 훌쩍 뛰어오르면서 먼지구름 안쪽에다가 소증을 잇달아 쏘아 댔다.
퍼버버벙!
수백 수천 갈래로 쪼개진 빛의 화살은 자욱한 먼지구름에다가 구멍을 숭숭 뚫어 단번에 주변을 누더기로 만들었다.
〈소증 - 광폭취우〉
그리고 그 뒤에도 자잘한 폭발이 이어지면서 겨우 복구되었던 숲이 잔뜩 망가지고 말았다.
그때 장웨이의 앞뒤로 뭔가가 불쑥 솟구쳤다. 추격대에 명령을 내리던 두 장로들. 그들은 입고 있던 옷은 걸레짝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둘 모두 두 눈이 활활 불타올라 장웨이에게 단단히 고정 되어 있었다.
콰과콰-
셋은 서로 허공 한가운데에서 잇달아 충돌했다. 두 장로의 합공에도 불구하고, 장웨이는 능숙하게 그들의 공격을 물리쳤다. 원거리 공격에 특화되어 있었지만, 근접 무술에도 일가견이 있는 그였다.
쾅!
결국 그들은 커다란 폭발과 함께 잠시간 서로 거리를 벌려야만 했다.
장웨이는 허공에서 아주 가볍게 몸을 뒤틀면서 근처 악마수의 꼭대기에 착지했다. 그러면서 자신과 비슷한 눈높이에 선 두 장로들을 보며 비웃음을 흘렸다.
“외뿔부족, 외뿔부족, 그러더니. 고작 이건가? 백마왕과 흑선군. 이름값에 먹칠하는 것밖엔 안 되었군.”
두 장로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짜리몽땅한 체구의 백마왕과 고목나무처럼 삐쩍 마른 흑선군. 둘은 오랫동안 한 몸처럼 붙어 다니면서 탑을 공략했던 것으로 유명했다.
한 명 한 명의 실력도 뛰어났지만, 두 사람이서 펼치는 합공은 아홉 왕의 간담도 서늘하게 만들 정도라고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장웨이는 그런 소문에 거품이 잔뜩 끼어 있었던 게 아니냐며 힐난하고 있었다.
야누를 죽인 범인이기 이전에, 그들의 자존심과 명예마저 뭉개 버리는 화법에 짜증이 솟구쳤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장웨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실력이 뛰어나다는 사실에 혀를 찼다.
백마왕과 흑선군은 힐끔 고개를 돌려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아도, 눈치로 의사를 교환할 수 있을 만큼 가까웠다.
‘아무래도, 안 되겠지?’
‘어쩔 수 없지.’
원래대로라면 제압해서 마을로 압송하려 했지만. 반발이 심한 만큼 생포는 힘들 것 같았다. 전력을 다해 죽이자는 결정이 내려진 순간.
화아악!
갑자기 두 장로를 따라 막대한 기파가 회오리치기 시작했다. 입고 있던 옷자락이 나풀나풀 흔들렸다. 이제부터 전력을 다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나무 아래에서는 어느덧 먼지구름이 가라앉으면서 추격대원들이 하나둘씩 나타나 모이고 있었다.
2명이 보이지 않았다. 폭발에 휘말려 죽은 것이지만, 그들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살벌한 기세를 띠며 장웨이를 어떻게든 죽일 생각으로만 가득했다.
장웨이는 살갗을 따끔거리게 만드는 자극에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간만에 느껴보는 긴장감이었다. 어쩌면 자신이 원하던 건 이런 것일지도 몰랐다.
지구에서나 탑에서나. 결국 제 버릇은 남에게 주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너희들은, 날 웃게 해 줄 수 있을까?”
장웨이는 다시 백마왕과 흑선군에게로 달려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펼친 마물 소환에 따라, 지반이 흔들리며 네 마리나 되는 괴물들이 일제히 몸을 일으키면서 추격대를 공격했다.
콰콰쾅!
* * *
“……음, 그러니까 형님 말씀은, 원래 주려 했던 히든 피스를, 형님이 홀라당 다 까먹어 버렸다, 뭐 이 말 아니우?”
연우는 새롭게 획득한 권능들의 점검이 끝난 뒤, 다시 판트와 에도라를 찾았다.
그런데 판트는 연우를 보자마자 히든 피스에 대해 물었다. 각룡의 심장과 보라색 마귀꽃을 정제해 환단을 만들어 주겠다던 약속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연우는 순간 아차 싶었다. 아가레스와 싸우기 위해 마의 인자가 급박하게 필요했고, 그 상황에 모아 뒀던 히든 피스를 죄다 먹어 버렸으니.
판트는 이 말을 듣고 툴툴대기 시작했다. 그러다 좋은 건 혼자서만 먹는다느니 하는 말을 하면서 성큼 객관을 나서 버렸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반응. 연우는 얼떨떨한 눈빛으로 에도라를 봤고, 에도라는 가볍게 피식 웃고 말았다.
“부끄러워서 그런 거예요.”
이건 또 무슨 소릴까.
“부끄럽다니?”
“오라버니가 진지한 이야기를 하실 것 같으니까, 괜히 낯간지러워서 저러는 거란 뜻이에요.”
연우는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저놈한테 그런 귀여운 면이 있었나? 둔해 보이는 겉보기와 다르게 눈치가 빠른 녀석이니 어쩌면 가면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알아챈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어떻게 붙잡아 놓고 이야기를 해야 하나 생각이 들었는데. 에도라가 불쑥 연우의 손을 꼭 잡으면서 예쁜 얼굴을 내밀었다.
“너무 다급하게 생각지 마세요. 어차피 오늘만 날이 아니잖아요.”
계속 함께 있지 않을 거냐는 말. 연우는 자신을 빤히 올려다보면서 말하는 에도라를 보며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둘이라면 모든 걸 맡겨도 괜찮겠다는 확신이 조금씩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에도라는 지금이 기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졌다. 둘밖에 없는 공간과 애틋한 공기.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천천히 손을 뻗어 연우의 가면을 벗겨 가려는데.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더니, 판트가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형님 편이우.”
판트는 그 말만 남기고 다시 문을 닫고 사라졌다. 연우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피식 웃었다. 확신이 생겼다. 탑에 올라와 만난 인연들 중에서도, 두 동생들은 정말 특별한 아이들이었다.
반면에.
에도라는 분위기를 다 깨 버린 판트를 보면서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 * *
일행은 탑에서 나와 외뿔부족의 마을로 향했다.
이블케의 경고처럼 이번 소란은 절대 거대 클랜의 관심을 피할 수 없었다. 여태껏 브라함과 세샤를 방관하던 곳들도 움직일 게 분명하니, 24층에 더 이상 남아 있으면 위험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한적하던 마을은 소란스러웠다.
“아버지, 이게 무슨 일이에요?”
에도라는 마을로 들어오는 내내 바쁘게 움직이던 부족원들을 떠올리고 인상을 딱딱하게 굳혔다. 마을에서 피 냄새가 잔뜩 났다. 누가 다쳐서 왔단 뜻이었다.
무왕은 그답지 않게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카람 영감이 죽었다.”
“예?”
“테이나, 스라브, 얀도.”
“천천히 말씀해 주세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무왕은 야누가 갑자기 죽은 것을 시작으로, 장웨이를 쫓기 위해 보낸 추격대까지 거론했다. 그리고 녀석과의 싸움에서 추격대는 패퇴하고 말았다. 15인 중에서 6인이 죽었고, 그중에는 백마왕 카람 장로가 섞여 있었다. 남은 9인도 중태라고 했다.
“야누가…….”
에도라가 바닥에 주저앉으려는 걸, 연우가 재빨리 부축해 줬다. 웬만한 일에는 절대 흔들리지 않던 그녀였지만. 지금만큼은 다른 것 같았다. 친형제처럼 같이 살아 왔던 소중한 지인이었기에 충격은 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걸 듣고 있던 연우도 잔뜩 굳은 눈빛이 되었다.
‘궁무신이? 외뿔부족은 갑자기 왜?’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헤노바를 노렸던 것일까? 살해 장소가 헤노바의 대장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그럼 놈은? 어떻게 할 생각이우, 아버지?”
판트가 눈에 불을 잔뜩 켜며 무왕에게 달려들 것처럼 물었다. 바득바득 이를 갈았다. 장웨이가 눈앞에 있었으면 씹어 먹으려 들었을 것이다.
“다시 잡으러 가야지. 이렇게까지 건드렸다는 건, 우릴 개호구로 봤단 뜻이니까.”
무왕이 한쪽 입술 끝을 비틀렸다. 잔뜩 벌어진 입가 사이로 송곳니와 어금니가 훤히 드러났다.
“놈의 모가지는 내가 비틀어 놓을 거다.”
* * *
무왕이 직접 움직인다는 건, 외뿔부족 전체가 움직인다는 말과 똑같았다.
무왕을 중심으로 장로와 전사들이 대거 투입된 추격대가 새롭게 재편성되고, 곧장 자취를 감춘 장웨이를 추격했다. 웬만한 클랜쯤은 손쉽게 부수고도 남을 전력이니, 장웨이로서도 바짝 도망칠 수밖에 없을 터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가뜩이나 23층의 소란으로 시끄럽던 탑에, 무왕이란 거대한 바위를 던져 버린 꼴이었으니 소란은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레드 드래곤과 청화도의 전쟁 이후, 거대 클랜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면서 다들 촉각을 바짝 세우긴 했지만.
일 년 가까이 이렇다 할 별 사건이 없어 잠잠해지려던 여론도 다시 팽팽하게 날이 섰다.
그렇게 탑이 복잡하게 움직이는 상황 속에서.
연우는 새로운 바위를 준비하기 위해서 헤노바의 대장간을 찾았다.
“으음? 네놈은 한동안 탑 오르는 데에만 집중할 것처럼 굴더니 웬일이더냐?”
헤노바는 연우의 갑작스러운 방문이 의아했던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만들어 준 무구들이 부서지기라도 했나 싶어 미심쩍은 시선으로 연우를 위아래로 살폈다.
바깥 상황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다친 구석도 없어 보였다. 연우는 다행이라며 속으로 안도에 찬 한숨을 내쉬고, 용건을 꺼냈다.
“부탁드릴 게 있어서 왔습니다.”
“또 뭐?”
연우와 엮이면 골치 썩히는 일만 있었었지. 헤노바는 대놓고 인상부터 찌푸렸다.
여전하다는 생각에, 연우는 약한 웃음을 흘리면서 물었다.
“혹시 현자의 돌을 아십니까?”
마치 ‘도를 아십니까’하고 묻는 듯한 말투. 헤노바는 구겨진 인상을 더 크게 구겼다.
“그건 또 무슨 개풀 뜯어먹다가 목 막혀서 물 찾는 소리야? 뭔 약 팔러 왔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