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213화 (213/862)

13화. 현자의 돌 (6)

역시 무슨 말이든 한 마디 한 마디 하는 게 너무 직설적이다. 어쩌면 뛰어난 실력을 지니고도 한동안 거대 클랜들로부터 외면 당했던 건 이런 불같은 성격 때문이었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과연 이대로 헤노바를 합류시켜도 될까 하는.

“꽤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절대 외부로 새어 나가서도 안 됩니다.”

헤노바는 연우가 진지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곰방대를 입에 물었다. 살짝 찡그린 얼굴로 턱짓을 했다. 어서 말해 보라는 듯.

연우는 현자의 돌에 관한 것들을 이야기했다. 레드 드래곤이나 청화도의 이야기는 뺐다. 대신에 에메랄드 타블렛과 재료들을 구했고, 연구 방향도 거의 가닥을 다 잡았으며 브라함이 도와주고 있다는 설명까지 전부 다했다.

사실 연우는 헤노바를 합류시키는 데 있어 약간 망설여 했었다.

판트와 에도라와는 조금 경우가 달랐다. 사연에 대해서 말하지 않은 건 똑같았지만, 이유가 달랐다. 헤노바를 위험한 가시밭길로 끌어들여도 되는가 하는 생각이 계속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브라함은 딱 잘라서 말했다.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건, 이론과 실험밖에 없다. 그것을 제대로 구현해 낼 수 있는 건, 아마 탑에 헤노바밖에는 없을 거다. 그분의 손은 반드시 필요해.

무언가를 제작할 때에는 여러 시행착오를 겪기 마련이다. 이때는 실수를 빠르게 잡아내고 고칠 점을 찾는 게 가장 중요했다. 그런 면에서는 여러 노하우를 가진 헤노바가 훨씬 낫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브라함이 이어서 한 말은 연우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너와 헤노바 사이는 잘 모른다. 하지만 정우와 헤노바 사이는 잘 알지. 부자지간처럼 가까웠다면서? 너는 그럼 그런 부자지간의 신뢰를 깨 버릴 참이냐?

-헤노바가 고통스러워하리란 건 알고 있다. 힘들어하리란 것도. 하지만 한평생 떠나 버린 자식 같은 아이에 대한 죄책감을 안고 사는 것보단 낫지 않을까?

죄책감.

그 말을 들은 순간, 연우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물건이 있었다.

마장대검.

처음 연우가 헤노바를 만나 강짜를 부리다시피 하면서 얻었던 아티팩트. 그리고 그와 가까워질 수 있게 인연을 만들어 줬던 물건은 분명히 설명 창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원래 소중한 이를 떠올리면서 만들었던 것이라고. 하지만 그 주인이 죽어 원념이 깃들었다고.

아마도.

그 주인은 동생이 아니었을까.

헤노바는 언제나 떠나 버린 동생에 대한 죄책감을 안고 살았던 것이다. 조금만 더 좋은 장비를 맞춰 줬더라면. 조금만 더 녀석의 옆에 있어 줬더라면. 조금만 더 녀석에게 신경을 써 줬더라면.

지금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러했던 마음은 모두 연우에게로 향해 마장 세트를 만들어 냈다.

-앞으로의 싸움이 가시밭길이라고 했지? 그곳으로 헤노바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다고. 하지만 그건 네가 판단할 일이 아니야. 헤노바가 선택할 일이지.

브라함은 연우를 강하게 꾸짖으면서 아무것도 숨기지 말라고 말했다. 오히려 모르고 사는 것이 그에게는 더 큰 가시밭길이라고. 네 마음대로 누군가를 위험하게 만드니 마니 함부로 재단하지 말라고 말이다.

그래서 그때부터 연우는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헤노바에게도 제대로 털어놓기로. 다만, 갑작스레 말한다면 그가 놀랄 수 있으니, 자신이 가진 비밀들을 천천히 보여 주면서 말할 시기를 찾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말하고 싶었다. 동생을 대신해서.

고마웠노라고.

“……그렇게 된 겁니다.”

“흠.”

헤노바는 곰방대를 입에 문 채로 한참 동안 깊은 생각에 잠겼다.

연기로 실내가 가득 찰 정도가 되어서야, 헤노바는 곰방대에 남은 재를 털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장비들을 하나둘씩 챙기면서 물었다.

“어디로 가면 되는 거냐?”

“도와주시는 겁니까?”

“도와주긴 누가 도와줘? 간만에 브라함도 만나고. 현자의 돌이나 되면 재미도 있을 것 같아서 그런 것뿐이다.”

헤노바는 툴툴거리면서도 부끄러웠던지 귓가가 살짝 빨개져 있었다.

“감사합니다.”

연우는 정말 진심을 담아 고개를 숙였다. 동생에게도, 자신에게도. 헤노바는 정말 고마운 존재였다.

* * *

“오랜만입니다, 헤노바.”

“쯧. 어쩌다 저런 못난 놈한테 붙잡혀 이런 신세가 된 것이오, 브라함? 여하튼 20년 만이로군. 반갑소.”

브라함과 헤노바는 서로 만나자마자 반갑게 포옹을 나눴다. 두 사람은 20년 전에 교류를 나누기 시작한 이후로, 이따금 편지를 통해 서로 안부 인사를 나누기도 할 정도로 두터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둘은 서로가 가진 기예를 깊이 인정하고 있었다. 단순히 5대 명장으로 손꼽혀서가 아니라, 정말 상대가 한 분야에 가진 학식과 실력에 깊이 탄복해서였다.

그리고 현자의 돌이라는 희대의 보물을 만들기 위해 같이 의기투 합하게 되었단 사실이, 두 사람을 잔뜩 고무되게 만들었다.

연우는 여기에 리치 부와 정령 레베카도 같이 소환했다.

부는 최근에 연우가 준 무면목 법서를 깊이 탐독하면서 빠른 성장세를 보이는 중이었다.

원래 리치가 가진 그릇 때문인지, 연우가 영혼을 다루는 기술이 깊어졌기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원래 부의 재능이 깊었던 건지 모르지만. 부가 가진 지식도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레베카도 마찬가지.

사도로서 살았던 경험이 풍부했던 그녀이니만큼, 케르눈노스 신의 지식을 풀어낼 생각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외뿔부족의 대장로도 더해졌다.

“이 늙은이가 여러분들의 발목을 붙잡지나 않았으면 좋겠는데 말입니다.”

대장로는 안경을 고쳐 쓰면서 사람 좋은 미소를 흘렸다.

“‘핏빛 현자’가 그런 말씀을 하다니. 그럼 우리는 다 나가 죽어야 한다는 거요? 허허!”

헤노바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지만 대장로는 그저 웃기만 할 뿐이었다.

핏빛 현자. 지금은 탑 내에서도 기억하는 사람이 드물었지만, 한때 대장로를 가리키던 별칭이었다.

무왕이 외뿔부족의 새로운 전성기를 열었다면, 그런 전성기를 구축할 수 있도록 기반을 마련했던 건 전부 핏빛 현자가 활약한 덕분이었다.

학식이면 학식, 무위면 무위. 문무에 모두 통달해서 당대에는 그와 견줄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마군의 선대 수장, ‘검은 새벽’과 쌍벽을 이룬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시대가 흐르면서 마군에서는 새로운 대주교가 나타나 검은 새벽을 죽이고, 외뿔부족에서는 무왕이 태어나 이름을 크게 떨쳤으니.

핏빛 현자는 그때부터 일선에서 물러나, 대장로로서 일족을 돕는 데에만 집중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으니. 아마 모르긴 몰라도, 그의 머릿속에 담긴 지식과 지혜는 브라함에 못지않을 게 분명했다. 외뿔부족의 모든 정수를 그가 갖고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다만, 이런 일에 크게 관심을 보일 것 같던 다른 장로들은 참여하지 않았다.

머릿수가 많으면 자칫 이야기가 새어 나갈 수도 있어, 이를 우려한 것이기도 했지만 현재 외뿔부족의 분위기가 흉흉하기 때문이었다.

‘궁무신이라.’

연우는 작게 중얼거리다, 이내 앞에 모인 사람들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그럼 모두 시작하겠습니다.”

헤노바, 브라함, 부, 레베카, 대장로.

이들을 진두지휘하는 건, 그가 맡을 예정이었다.

여러 명사들 앞에 나서기엔 여러모로 부족한 면이 많았지만.

그래도 에메랄드 타블렛에 대한 이해도가 가장 깊고, 현자의 돌을 완성할 방향을 그린 사람은 그였다.

그러니 그가 중간에서 충돌이나 차질이 없도록 잘 이끌어 나가야만 했다.

가면 아래, 연우의 눈동자가 또렷하게 빛났다.

* * *

연구는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이미 방향이 머릿속에 대략적으로 잡혀 있으니, 거기에 맞춰서 진행하면 되었던 것이다.

물론, 아무런 차질이 없는 건 아니었다.

아무리 많은 검증을 거쳤다지만 연우가 짰던 구조식에도 허점은 더러 있었고, 맞는 구조식이라고 하더라도 알 수 없는 이유로 불발로 그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럴 때에는 수식을 다시 처음부터 짜면서, 거기에 맞춰 실험을 재개해야만 했다.

브라함과 대장로, 레베카는 머리를 맞대면서 수식을 몇 번씩이고 뜯어고치기를 반복했다. 그럼 부는 이를 바탕으로 마법도식을 풀어 보면서 가능한지 여부를 따졌다.

그리고 가능하다고 판단이 들면, 즉각 헤노바가 구현해 보는 식이었다.

물론, 그럼에도 잘되지 않을 경우에는 헤노바가 자신이 오랫동안 쌓은 현장 지식을 일러 주면서 방향을 잡아 나가기도 했으니.

탑에서도 내로라하는 이들이 머리를 함께 맞대니, 쉽게 풀리지 않을 문제도 금세 해답을 찾아 나갈 수 있었다.

다만, 여기에는 막대한 비용이 들어갔다.

이곳에 있는 이들이 딱히 돈을 필요로 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실험을 위해서는 여러 재료들이 투입될 수밖에 없었고, 그 과정에서 돈이 필요했던 것이다.

우선 필요한 비용은 인트레니안의 금은보화로 충당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급속도로 메말라 갔다. 현자의 돌이나 되는 것을 만들기 위해서는, 갖가지 비싼 술식이 많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그래도 어느 정도 완성점이 보이고, 연우의 사정을 안 무왕이 뒤에서 도와주라고 지시를 내린 덕분에 한숨 돌릴 수는 있었다.

그러나.

언제나 완성 막바지에 생각지도 못한 문제점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힘들어. 이대로는.”

브라함은 피곤했던지 검지와 엄지로 눈덩이를 가볍게 문질렀다. 호문클루스의 육체였지만, 정신적 피로까지 쌓이지 않는 건 아니었다.

대장로도 안경을 벗고, 머리를 식히기 위해 잠시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는 여전히 여러 숫자와 도식이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레베카와 부도 벽에 적힌 도식을 보면서 깊은 생각에 잠겼다.

연우도 고요한 눈빛으로 뚫어져라 도식을 바라봤다. 시차 괴리를 수없이 발동하면서 계속 연산을 거듭해 봤지만, 도무지 해답이 보이지 않았다.

‘그릇과 내용물을 단단히 고정시킬 방법은 찾았어. 하지만 그릇에다 내용물을 담을 방법이 없다니. 미칠 노릇인데.’

그릇은 현자의 돌을, 내용물은 동력원을 뜻했다. 연우에게는 아가레스가 남긴 마핵이 동력원이었다.

문제는 이 마핵을 현자의 돌에 온전하게 담을 방법이 없다는 점이었다.

옮길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 뒤가 문제였다. 마핵은 웬만한 악마쯤은 쉽게 만들고도 남을 만큼 어마어마한 양의 마기를 담고 있었고, 겨우 고정시켜 놓은 것을 억지로 움직였다가는 금세 폭주로 이어질 수 있었다.

이제는 쌓아 둔 공적치도 없고, 관리자의 도움을 빌릴 수도 없었다. 한번 마핵이 흐트러지면 육체가 붕괴할 위험이 컸다.

아니, 어쩌면 육체가 그대로 마화(魔化)되어, 악마가 되어 버릴지도 몰랐다.

게다가 설사 어떻게 옮긴다고 해도, 현자의 돌에다 고정시킬 방법이 없었다.

결국.

이 마지막 지점에서 막혀 버린 채 한 달이 훌쩍 지나고 말았다.

여태껏 아무런 거리낌 없이 일을 진행하다가, 갑자기 턱 하니 막혀 아무런 진전도 없이 시간만 훌쩍 지나 버렸으니. 일행들의 속도 같이 답답해졌다.

“환장할 노릇이군.”

특히 브라함으로서는 그답지 않게 조급한 마음까지 들었다.

이 구조식을 완성해야만 세샤를 낫게 하고 아난타도 구할 수 있을 텐데. 신의 지식을 지닌 그로서도 길이 보이지 않았다.

흔히 사람들은 신이 전지(全知)하고 전능(全能)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지만. 실제로 신들은 절대 전지전능하고 완전한 존재가 아니었다.

오히려 신위에 묶여 결여만 가득한 불쌍한 존재였다.

「저게 대체 전부 뭐래? 순 외계어 아냐? 우리 같은 세상에 살고 있는 거 맞나?」

「…….」

「근데 한령, 넌 요즘 들어 부쩍 말이 없다?」

「나 역시 고민하고 있으니까.」

「동작 그만. 어쭈, 어디서 밑장 빼기야? 네가 저걸 이해한다고?」

「그럴 리가. 이해도 안 되는 걸 봐서 뭘 하겠나. 72선술을 연구하고 있었을 뿐이다.」

긴 시간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해 심심해하던 샤논과 한령의 농담 따 먹기만 계속 이어졌다.

그때.

깊은 고민에 잠겨 있던 레베카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깊게 가라앉은 눈이 연우에게로 향했다.

『주인.』

“왜?”

『아무리 해도 술식이 나오질 않는다면. 다른 분야의 명사를 데려와서 도움을 청하는 건 어떨까? 다른 시점에서 보면 해결책이 보일지도 모르잖아.』

확실히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이미 서로 너무 많은 것들을 공유하면서 밑천이 거의 드러난 상태였다.

다른 명사를 초빙해서 본다면 새로운 해결책을 볼 수 있을지도 몰랐다.

사실 이런 분야에 특화된 곳들이 있긴 했다.

마법사들의 길드, 마탑.

마녀들의 고향, 발푸르기스의 밤.

엘로힘도 갖가지 지식을 갖고 있을 것이다.

확실히 그들의 손을 빌린다면 어떻게든 방법을 찾을 수도 있겠지만.

연우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가 신뢰하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동료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다른 자들은 달랐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더구나 시간이 한참 흐른 지금까지도, 23층의 일로 연우에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많은 상황에서. 그런 위험수를 던질 수는 없었다.

『조직에 묶이지 않고, 오히려 여러 사람들로부터 지탄을 받고 있는 사람이라면 어떨까? 그러면서도 우리의 일을 깊게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똑똑하고, 세상일에 무관심하기도 한 사람이라면.』

연우의 눈이 빛났다.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여전히 위험한 수이긴 해도, 위험 요소를 바짝 낮출 수는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때에 따라서는 독하게 마음먹고 입을 막기도 쉬울 것 같았다.

“그런 사람이 있나?”

『어. 너도 잘 아는 사람이야.』

“누구지?”

레베카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빅토리아.』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