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214화 (214/862)

14화. 현자의 돌 (7)

연우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레베카의 말마따나 빅토리아라면. 이 일에 충분히 도움이 되고도 남았다.

붉은 신목이라 불릴 정도로 뛰어난 룬 마법사이자 주술사. 또한, 5대 명장으로 손꼽히는 사람이었다.

다양한 방면에 있어 걸출한 지식을 갖고 있을 테니, 현자의 돌에도 큰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게다가 지금 동력원이 현자의 돌에 담기는 과정이 어려운 건, 그것을 단단히 얽어맬 법칙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룬 문자로 이것을 묶을 방법이 있지 않을까?』

옳은 말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가능하다면 나도 부르고 싶긴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행방을 알 수 없는데. 어떻게?”

20층에서 그런 소란이 있고 난 뒤. 연우는 여전히 칸과 빅토리아에 대한 행방을 수소문 중이었지만,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빅토리아를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확실치는 않지만. 방법이 하나 있긴 있어.』

“뭐?”

『빅토리아에게 주술을 가르쳐 준 스승이 있어. 룬 마법은 그녀가 독학으로 익힌 거지만, 주술은 원래 다른 사람으로부터 배운 거라. 만약 정말 빅토리아가 외부로부터 잠적을 하려 했으면 그쪽으로 갔을 가능성이 커.』

연우는 인상을 찡그렸다.

“왜 그걸 말하지 않았던 거지?”

『사실 나도 여태 잊고 있었어. 빅토리아를 떠올리다 보니까 갑자기 떠오른 것이라. 그 점은 미안해.』

레베카와 연결된 연결 고리는 진실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숨긴 것도 사실인 것 같았다.

그래도 연우는 더 자세히 따지지 않았다. 사념체이니만큼, 여전히 기억이 일부 혼란스러울 수 있을 테니까. 유실된 기억도 상당할 것이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떠올린 게 다행일지 몰랐다.

더구나 레베카는 연우에게 종속되었지만, 여전히 그를 완전히 믿을 정도로 마음을 연 것도 아니었다.

오행산에서 레베카와 빅토리아가 제법 가까웠던 사이였던 것을 감안한다면. 자신들에게 어떤 일이 닥쳤을 때를 대비해 상대에게 비상 대책을 미리 일러 줬을 수도 있었다.

다만, 시간이 한참 흐르면서 서로 잊어버렸던 것이겠지만.

“그 스승이라는 사람, 어디로 가면 찾을 수 있지?”

레베카에게 질문의 답을 듣는 순간.

“뭐?”

연우는 대놓고 인상을 찡그리고 말았다.

* * *

“이런 곳에 그런 대단한 주술사가 있다니. 믿기지가 않네요.”

“으핫! 좋기만 한데. 뭐가 문제야? 이야아. 저, 저, 봐라. 와아. 죽인다. 라인이 아주 그냥.”

“죽을래?”

에도라는 도끼눈을 뜨면서 판트를 노려봤다. 하지만 판트는 슬쩍 고개를 돌려 동생을 무시하면서 주변을 구경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밤이 내려앉은 자리.

길을 따라 곳곳에 붉은색으로 치장된 건물이 줄지어 섰고, 그 앞에는 갖가지 아슬아슬한 복장을 입은 여인들이 추파를 던져 댔다.

그들이 있는 곳은 탑 외 지역에서도 제법 유명한 환락가였다. 각종 성매매나 클럽 골목, 심지어 마약상 등, 음지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일들이 얽히는 곳.

당연한 말이지만, 에도라는 이런 곳이 영 거북하기만 했다. 안쪽으로 들어가면 여성들을 위한 곳도 있다고 해도 싫은 건 싫었다. 너무 노골적이고, 퇴폐적이었다. 온갖 음욕과 욕망들이 복잡하게 얽히는 것이 불쾌하기만 했다.

그래도 따라오겠다고 한 건, 순전히 한 사람 때문이었다.

에도라는 옆에서 무심한 눈길로 서 있는 사람을 힐끔 쳐다봤다.

연우는 검은 가면을 쓴 모습으로, 팔짱을 끼며 무심한 태도로 서 있었다.

다부진 체격 때문인지, 아니면 단단한 눈빛 때문인지. 이따금 호객 행위를 하는 여인들이 대놓고 연우에게 눈길을 보내거나, 슬쩍 다가와서 소맷자락을 잡아당기면서 유혹하기도 했다.

하지만 연우는 꿈쩍도 않았다. 귀찮다는 듯 손사래를 쳐서 쫓아 보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이 재미있었는지, 시간이 갈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주변으로 몰려들긴 했지만. 그래도 연우는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에도라는 그런 연우의 태도에 속으로 다행이라고 여기면서도, 약속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도 나타나지 않는 사람을 떠올리면서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사실 이런 광경은 연우에게도 그리 낯설지 않았다.

아프리카에서, 크게 임무를 한 번 뛰고 나면 부하 병사들은 어떻게든 긴장을 풀고 싶어 했다. 그런 녀석들을 인솔하다 보니 숱하게 들락날락거렸지만, 정작 그가 즐긴 적은 없었다.

당시에 사귀는 사람도 있었고, 별 흥미도 느끼지 못했다. 그런 연우를 볼 때마다 부하들은 스님이라도 되냐고 놀려 댔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에도라처럼 불쾌해하거나 하는 것도 아니었다.

이런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으면 저런 삶을 사는 사람들도 있는 법이니까. 여기도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똑같이 사람들이 사는 동네였고, 연우는 거기에 대해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가 관심 있는 건, 이 환락가 어딘가에 있다는 주술사밖에 없었다.

‘주술이라.’

연우가 튜토리얼을 거쳐 탑에 들어온 지도 거의 1년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동안 숱한 플레이어들을 만났지만, 사실 주술사를 만난 적은 없었다.

그만큼 주술사가 귀하기도 하지만, 마법의 여러 분파 중에서도 주술 분야는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편에 속하기 때문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주술을 마법의 한 갈래로 여기는 편이었지만. 정작 마법사와 주술사 사이에는 이걸 두고 언쟁이 치열한 편이었다.

마법사는 법칙을 구성해서 마나 스트림에서 힘을 가져오지만, 주술사는 법칙과는 거리를 두고 거대한 영적인 존재에게서 힘을 빌리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마법사는 주술사를 가리켜 남에게 의지나 하는 종놈이라고 업신여겼고, 주술사는 마법사를 일러 앞을 못 보는 소경이라고 무시했다.

주술에도 여러 가지 내용이 있지만, 그 원리를 쉽게 말하자면 보이지 않는 어떤 영적인 존재로부터 힘을 빌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신에게서 힘을 빌리는 사제나, 악마와 계약을 맺은 흑마법사와 가깝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또 깊이 따지고 들어가면 많은 면이 달랐다.

사제나 흑마법사는 대개 한 존재에게만 얽매이지만. 주술사가 힘을 빌리는 영적인 존재는 다수이기 때문이었다. 그 대상은 신과 악마가 아닌 경우도 많았다.

다만, 한 곳에 매이지 않기 때문에 한계도 명확해서, 보통 대를 잇기가 어려운 편이었다. 또한, 크게 성공하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주술사 중에는 대가라 불릴 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빅토리아를 가르친 인물이라면. 분명히 연우도 한 번쯤 들어 봤을 법한 거물일 텐데.

문제는 마땅히 짚이는 인물이 없다는 점이었다.

‘누굴까, 대체?’

물론 자신이나 동생이 미처 파악하지 못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탑은 장구한 역사와 규모만큼이나,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실력자들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다만, 정말 레베카 말대로 이런 곳에 사는 사람이라면. 골치가 아픈 성격일 가능성이 커서 조금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 같았다.

‘슬슬 날 알아본 것 같은 눈길도 있는 것 같고.’

자신이 외뿔부족의 마을에서 나왔다는 소식은 아마 거대 클랜들의 귀에 들어갔을 것이다. 어차피 계획상 그들의 눈치를 크게 볼 필요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얽힐 필요도 없었다.

그때.

“음? 저건 또 뭐야?”

“아무래도 쟤네들인 것 같은데.”

판트와 에도라의 시선이 한쪽으로 쏠렸다. 저 멀리서부터 일단의 무리들이 다급하게 우르르 몰려오고 있었다.

그러자 그동안 연우 등의 주변을 맴돌면서 귀찮게 굴던 매춘부건 여리꾼 모두 하나같이 기겁을 하면서 부랴부랴 달아났다.

호객 행위를 열심히 하던 녀석들도 그들과 눈이 마주칠세라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손님들도 자세를 낮추거나 하면서 딴 곳으로 숨었다.

판트와 에도라의 표정이 묘해졌다. 방금 전까지 떠들썩하던 환락가가 이렇게 싸늘해질 줄이야. 아무래도 이 일대를 주름잡고 있는 놈들인 모양이었다.

“오, 오셨습니까?”

하지만 정작 그런 광경을 연출한 녀석들은 연우 앞에서 굽실거리기 바빴다.

나이트 워치. 오래전에 연우에게 된통 당하고 나서부터 그의 사냥개가 된 곳이었다.

연우는 팔짱을 낀 상태 그대로, 클랜장 비스터와 녀석을 따라온 수하들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규모가 제법 많이 커진 듯한데.”

“그, 그저 앞가림할 정도는 되, 될 뿐입니다.”

비스터는 혹시 연우가 이상한 말이라도 하지 않을까 싶어 굽실 거리기 바빴다. 이제는 제법 뛰어난 수완으로 환락가의 왕처럼 군림하고 있는 그였지만. 그에게 연우라는 존재는 여전히 너무 두렵기만 했다.

특히 정보를 주로 취합하는 그는 최근 23층의 소란이 연우를 중심으로 벌어졌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터라, 이제는 숫제 그가 괴물처럼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연우는 그런 비스터의 시선에 별 관심 없다는 투로 물었다.

“부탁했던 건?”

“우, 우선 위치를 찾아 뒀습니다. 그, 그런데 그곳이, 조, 조금…….”

비스터는 섣불리 말하길 꺼려 했지만.

“앞장 서.”

연우는 턱짓을 했다.

비스터는 몇 번이고 망설이다가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따라오시지요.”

비스터가 앞장서서 길을 걷기 시작하자, 북적대던 환락가 사이로 길이 금세 열렸다. 연우 등은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이 사람들과는 어떻게 아시는 거예요?”

“어쩌다 보니.”

에도라가 슬쩍 물었지만, 연우는 대답하기 쉽지 않아 대충 둘러댔다.

비스터가 안내한 곳은 환락가에서도 가장 번화한 곳에 위치한 제일 큰 건물이었다.

이미 이야기가 되어 있었던 건지, 종업원들은 알아서 문을 열고 위치까지 비스터에게 귀띔했다.

“마, 말씀하신 분은 8층…… 특실에 계시다고 합니다.”

8층이라면 이 건물의 가장 꼭대기였다. 통째로 빌린 모양이었다. 연우는 일행들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말하고, 계단을 타고 8층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이곳은 다른 환락가 건물과는 조금 다른 것 같았다. 간간이 보이는 종업원들은 전부 남자였다. 어리고 잘생긴. 그리고 여리여리한.

게다가 곳곳에서 질펀하게 나는 마약 냄새나 분 냄새 따위도 잡다하게 섞여서 거북하기만 했다.

그리고 그런 냄새는 위로 갈수록 더 심해져, 8층에 다다랐을 때에는 코가 썩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쾅!

연우는 짜증 섞인 손길로 특실의 문을 활짝 열었다. 이런 곳에 있는 자가 정말 제대로 된 놈이 맞나 싶은 의문과, 빨리 빅토리아의 행방만 찾고 돌아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비스터가 이미 사람을 시켜 손님이 올 거라고 언질을 줬다고 했으니, 별 개의치도 않았다.

하지만 실내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엉망이었다.

많이 잡아야 열 살도 되지 않았을 것 같은 미소년과 미소녀들을 잔뜩 껴안은 채로, 한 여자가 곤히 잠에 빠져 있었다.

몸에는 넉넉한 두루마기만 두르고 있어서 뽀얀 살결이며 긴 다리까지 너무 적나라하게 보였다.

그리고 한쪽에 배치된 향로에서는 쉴 새 없이 연기가 흘러나와 방을 뿌옇게 만들 정도였으니.

연우는 눈살을 팍 찌푸렸다. 어쩐지 16층에서 만났던 한빈이 얼핏 떠올랐다.

「개판이로군.」

「왜? 보기 좋은데. 으흐흐.」

한령도 연우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불쾌한 목소리를 냈다. 반면에 샤논은 여인의 매끈한 각선미를 보면서 실실 웃어 댔다.

연우는 바닥에다 발을 세게 굴렸다.

쿵!

그러자 마력이 파문을 그리면서 퍼져 나가 건물을 크게 흔들었다. 향로가 깨지고, 특실에서 곤히 잠자고 있던 사람들의 의식도 같이 깨웠다.

“너, 뭐야……?”

여인이 부스스한 모습으로 일어났다. 두루마기가 흘러내렸지만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퇴폐적인 눈매가 연우를 위아래로 훑었다.

“흐응. 가면 페티쉬는 딱히 없는데. 부르지도 않았고. 서비스인가? 뭐, 그래도 몸은 탄탄한 것 같으니 한 번 받아 볼까.”

여인은 배시시 웃으면서 이 옆으로 앉으라는 듯 손으로 바닥을 두들겼다. 마약으로 흐릿한 눈이었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뇌쇄적으로 다가왔다.

매혹을 거는 주술이라도 달고 있는 걸까.

연우는 순간 여인에게 달려들고픈 충동을 강하게 받았다. 같이 살을 부대끼고, 거꾸러뜨리고 싶은 욕망. 마약과 분 냄새로 났던 짜증은 순간 갈망으로 변했다. 화를 열락으로 풀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냉혈’ 특성으로 이성을 유지합니다.]

[매혹에 대한 내성이 생겼습니다. 주술에 대한 강한 면역력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주술은 특성에 의해 단번에 튕겨 나갔고, 여인의 눈도 살짝 동그래졌다.

“아나스타샤, 맞지?”

“날 알아?”

“빅토리아를 찾고 싶은데.”

그 순간.

화아악!

흐리멍덩하던 아나스타샤의 눈동자 위로 살의가 번뜩이더니, 곳곳에 흩어졌던 연기 조각들이 갑자기 기괴하게 생긴 생물처럼 변했다. 그리고는 예리한 이빨을 잔뜩 드러내면서 연우에게로 날아 들었다.

너무 갑작스레 벌어진 광경이었지만, 이미 그 정도쯤은 예상하고 있던 연우는 준비해 뒀던 스킬을 발동시켰다.

[제3천의 영]

[72선술 - 벽]

검은 팔찌를 따라 망령이 대거 쏟아져 나오면서 벽을 둘러쳤다. 여기에 72선술까지 섞이면서 망령으로 만든 벽은 아주 탄탄했다.

권능을 획득한 이후, 현자의 돌을 연구하면서도 틈틈이 쉬지 않고 단련한 덕분에, 꽤 강한 주술이 섞인 공격이어도 벽을 뚫지는 못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도리어 코웃음을 치면서 손날을 세게 아래로 내리쳤다.

그러자 연기들이 한데 뭉쳐 커다란 칼을 만들어 내면서 연우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망령의 벽과 연우를 한꺼번에 잘라 버리기 위해서.

연우도 마력회로를 돌리면서 마장대검을 뽑았다. 가뜩이나 주술로 자신을 유혹하려던 것도 짜증이 나던 차였는데. 빅토리아에 대해 물었다고 다짜고짜 공격부터 해 대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일단 제압부터 하고 나서 화제를 바로잡을 생각이었다.

쾅!

커다란 폭발이 일어나면서 8층 전체를 날려 버리고 말았다. 미소년과 미소녀들은 휩쓸리지 않게 하기 위해 방향을 틀었지만, 벽 한쪽이 지붕과 함께 통째로 무너지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자욱하게 퍼진 먼지 구름 위로, 연우와 아나스타샤가 높이 치솟으면서 각각 멀리 떨어진 마천루의 지붕 꼭대기에 착지했다.

화아악!

연우는 불의 날개를 한껏 펼치면서 마장대검을 따라 성화를 칭칭 감았다.

그리고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건너편을 노려봤다. 손끝이 여전히 울렸다. 만만치 않은 실력자란 뜻이었다.

아나스타샤도 첨탑 위에서 노여운 얼굴로 연우를 쏘아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모습이, 두루마기가 바람에 펄럭이면서 드러나는 몸의 곡선과 한데 어울리면서, 또 다른 야릇한 느낌을 자아내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런 아나스타샤의 뒤편으로 연기가 뭉치면서 거대한 형상을 드러냈다. 족히 수십 미터는 될 것 같은 어마어마한 크기를 자랑하는 그림자. 그건 네 발로 서서, 아홉 개의 꼬리를 펼친 여우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구미호.

신수 중에서도 높은 격을 자랑한다는 녀석이었다.

아나스타샤가 구미호에게서 힘을 빌리고 있는 걸까, 아니면 그녀가 구미호인 걸까.

정확한 건 알 수 없지만, 아나스타샤가 뿌려 대는 구미호의 요기(妖氣)는 주술과 섞여 요술(妖術)로서 큰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주변의 대기가 흔들리면서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언제라도 연우를 노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연우도 여기에 맞춰서 용체 각성을 드러내야 하나 싶던 그때.

“둘 다, 그만두세요!”

갑자기 그들 사이로 무언가가 뚝 하고 떨어졌다. 그림자가 열리면서 빅토리아가 나타나 버럭 소리를 질렀다.

순간, 연우는 단번에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새하얗게 변한 머리와 어둡게 가라앉은 눈. 거기다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왜소해진 체구와 탁한 목소리. 그만큼 빅토리아는 오행산에서 헤어졌을 때보다 훨씬 초췌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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