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켈라트 경매장 (1)
쿠우우-
먼지구름이 자욱하게 날렸다. 그 아래로 지글거리는 불씨들은 위로 타올랐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했고, 깎여 나간 대지는 마치 맹수들의 격전지처럼 모든 게 박살이 나 버린 상태였다.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연우를 보면서.
「……지랄 맞군.」
샤논은 욕지거리를 내뱉으면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육체 곳곳에서 삐거덕대는 소리가 났다. 너무 큰 굉음으로 귀에서 이명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비록 그림자로 형성된 영체(靈體)였지만. 그래도 그는 아직까지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완전히 버리지 못해 감각도 똑같이 느끼고 있었다. 그는 정신적 피로가 육체를 지배하는 경우였다.
쥐고 있던 칼이 여전히 파르르 떨렸다.
이것으로 몸을 재빨리 보호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지금쯤 그림자 속에 처박히고 말았겠지. 육체를 복구하느라 힘이 들었을 테고.
그 와중에도 샤논은 그런 충격파를 받아 내고도 살짝 그을리기만 했을 뿐, 상처 하나 남지 않은 칼을 보고 감탄을 터뜨렸다. 그래도 명장이 만든 물건은 달랐던 것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가 중얼거린 말마따나 이런 일을 만들어 낸 주인이 참 지랄 맞다 싶기도 했다.
현자의 돌을 적용하고 3차 각성까지 이룬 연우는 이제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진땀이 흐를 정도로 강해져 있었다.
특히 권능 흉신악살을 전개한 뒤부터는 살벌한 기세로 살갗이 따끔거릴 정도였으니.
그런 모습이 기억 한편에 자리 잡고 있던 다른 누군가들을 떠오르게 했다.
81개의 눈.
레드 드래곤을 대표하던 자들.
다른 곳으로 나서면 충분히 한 세력의 지배자가 되거나, 탑을 오시할 고수가 될 수 있을 만큼 강한 기운이 연우를 감싸고 있었다.
처음에 만났을 때는 세미 랭커도 겨우 이기고, 검술은 입문자에 불과했던 애송이었건만.
불과 1년 사이에 이렇게나 달라져 버릴 줄이야.
이만한 성장 속도는 과거 헤븐윙 차정우 외에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성장세만 따지고 보면 헤븐윙보다도 훨씬 빠른 것 같았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주눅이 들 테지만.
「……짜증은 나도, 여기서 굽힐 수는 없지. 나도 지지는 않아.」
샤논은 그런 연우의 모습에 더 의욕을 불태우면서, 소드 브레이 커를 지팡이 삼아 몸을 일으켰다.
연우가 강해진 만큼, 샤논도 한참 강해진 상태. 특히 실력만 따진다면 이미 그는 생전의 실력을 초월해, 어느덧 랭커와도 견줄 만한 실력에 다다라 있었다.
랭커.
살아 있을 시절에는 그토록 높게만 느껴졌던 벽이었는데. 막상 그 정도의 성취를 이루고 난 뒤에 느낀 감정은 ‘별것 없네’ 였다.
분명 이 위치에 다다르면 속이 시원해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세상을 충분히 오시할 수 있을 거란 자신감도 있었다. 십수 년 동안 절치부심 노력하고도 얻지 못했던 비원을 이뤘으니까. 그는 스스로를 믿고 있었다.
하지만 연우와 함께하며 새로운 전장을 겪고. 기라성처럼 수없이 많은 고수들을 만나면서.
샤논은 그동안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세계관이 전부 산산조각 나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그건 신세계였다.
또 다른 하늘이었다.
여태껏 자신이 보고 있었던 것은 아주 좁디좁은 우물 속 하늘이었을 뿐. 그 너머에 더 넓은 하늘과 세계가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세계를 겪으면서. 샤논은 자신이 이룬 성취도 전부 덧없다고 여겼다.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자신과 동률을 이뤘던 연우는 다른 먼 곳을 보고 있었고, 그는 그저 그 옆에 서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연우가 달리는 속도가 너무 빨라 이대로 있다가는 뒤처질 것 같은지라, 그도 쉴 새 없이 노력해야만 했다.
그리고 덕분에 72선술과 미후왕의 유산을 바탕으로 큰 깨달음을 얻어 명인 급에 다다를 수 있었지만.
샤논은 아직도 갈 길이 멀다고 생각했다. 연우는 이번에도 다시 크게 성장했다. 그렇다면 자신 역시 빨리 따라붙어야 했다.
그런 판국에 여기서 쓰러진다는 건.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아니다.
그런 것을 다 떠나서라도. 샤논은 한 번쯤 연우를 이겨 보고 싶다는 호승심이 있었다. 세미 랭커로 만나 패배했을 때부터 줄곧 그의 뒤만을 보고 달렸기에, 이번만큼은 뒤처지고 싶지 않다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그 순간.
화아악-
샤논을 따라 감돌던 검은 기운의 색이 점차 뚜렷해지더니 점차 엄청난 양으로 불어나기 시작했다.
연우와의 연결 고리가 강화되었다. 동시에 현자의 돌 속에 남아 있던 마핵의 잔여분이 고스란히 흘러들어오면서 샤논에게 깃들었다.
[강렬한 의지가 새로운 마(魔)의 인자를 각성시켰습니다.]
[암 속성과 악 속성이 각각 30만큼 상승했습니다.]
[화 속성이 15만큼 상승했습니다.]
……
[축하합니다! 강화된 마의 인자를 바탕으로 죽음에 보다 더 가깝게 접근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데스 나이트(샤논)이 새로운 변화를 일으킵니다. 기존의 ‘격’이 한 단계 이상 상승합니다.]
[기존 특성과 능력치를 산정하여 상위 클래스를 탐색합니다.]
[칭호 ‘죽음을 이끄는 자’의 영향을 받습니다.]
츠츠츠-
샤논이 쓰고 있던 검은색 투구와 갑옷이 점차 또렷해지면서 칠 흑색으로 빛나고, 한 어둠만이 자리 잡았던 투구 아래로 시퍼런 불길이 도깨비불처럼 거칠게 타올랐다.
인페르노 사이트(Inferno Sight).
명계에서도 귀족 반열에 오른 강자들만이 지닐 수 있다는 지옥불이 밝혀지는 순간.
샤논을 따라 감돌던 존재감도 단숨에 몇 배로 증폭되었다. 크기만 커졌을 뿐만 아니라, 마기와 사기도 좀 더 선명한 칠흑색으로 빛나며 불길처럼 이글거렸다.
[데스 나이트(샤논)이 ‘데스 노블’로 진화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데스 노블]
억울한 한을 품은 기사들은 죽어서도 성불하지 못해 귀신이 되어 구천을 떠돈다. 그렇게 탄생한 데스 나이트들 중 일부는 지옥의 군주로부터 권능과 작위를 하사받을 수 있다.
그들이 지나는 자리에는 언제나 죽음이 따라다니며, 작위가 승작(空爵)을 이룰수록 권능이 닿는 범위도 저절로 높아진다.
또한, 권능이 깊어질수록 작위도 같이 상승해 휘하에 사병 집단을 구성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한 단계 위의 클래스로 전직하는 데 성공한 샤논도 끓어오르는 강렬한 힘을 한껏 만끽할 수 있었다.
샤논은 망토를 한껏 흔들면서 크게 귀곡성을 내질렀다. 대지가 위아래로 들썩였다. 손에 쥐고 있던 소드 브레이커도 어느새 칠흑빛이 젖어 마기를 줄줄 흘려 대고 있었다.
현자의 돌이 준 영향 때문일까. 아니면 샤논의 강한 의지 때문일까.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샤논이 뿌려 대는 힘은 이전보다 훨씬 강렬했고, 그런 광 경을 지켜보던 한령과 레베카는 크게 놀라고 말았다.
특히 샤논과 같이 어울리면서도 그동안 그를 몇 수 아래로 보고 있던 한령으로서는. 크게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기도 했다.
샤논은 격의 속박에서 벗어나 저렇게 성장을 이뤘는데도 불구하고. 한때, 하이 랭커에서도 상위에 해당했던 자신은 여전히 데스 나이트라는 틀에 얽매여 있는 상태였으니까.
그리고 그건 레베카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품고 있는 신성이 샤논의 기세에 잔뜩 짓눌리고 있었다. 아군인데도 불구하고, 위화감까지 들 정도였으니.
샤논은 이미 두 사람을 잔뜩 긴장시킬 정도로 강해져 있었다.
하지만 샤논은 그런 것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래전의 자신이었다면 한껏 들떠서 경망스럽게 굴었을 테지만. 지금은 모든 신경이 연우에게만 단단히 집중되어 있었다.
강해진 힘에 대해서도, 이것이라면 연우에게 유효타를 먹일 수 있지 않을까, 어떻게 하면 더 활용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밖엔 없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은 한령과 레베카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두 사람도 저마다 무기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리고 연우를 견제하면서, 살벌한 열풍에 대비했다.
쾅!
그리고 그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서로 약속한 것처럼 일제히 연우에게로 달려들었다.
연우도 마장대검을 고쳐 쥐면서 눈을 차갑게 번뜩였다. 흉신악살. 방어력과 저항력을 낮추는 대신에 공격력을 대폭 증가시키는 권능에 따라, 흉신이 내려앉은 눈빛은 다른 어느 때보다 잔혹하게 빛나고 있었다.
검은 불길이 다시 한 번 더 대지 위를 휩쓸었다.
* * *
브라함은 못 말린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주인이라는 작자나. 권속이라는 것들이나. 어찌 그리도 하는 짓들이 똑같은지.”
연우와 세 권속들의 싸움은 결국 무승부로 끝나고 말았다.
지칠 줄 모르고 휘둘러 대는 칼질과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넷은 정말이지 서로를 죽이려는 게 목적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살벌하게 싸웠다.
덕분에 그동안 연우가 수련장으로 애용했던 장소는 아예 초토화가 되고 말았다.
내내 흥미롭게 싸움을 구경하고 있던 대장로도 지금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는 중이었다.
온통 새카맣게 그을린 땅은 거북이 등껍질처럼 여기저기 갈라져 있었고, 주변에 있던 숲이며 산은 맨몸이 드러나 보기 흉측했다.
“어떤가? 이제 속이 좀 시원한가?”
브라함은 바닥에 주저앉아 가만히 숨을 고르고 있는 연우를 보면서 물었다.
연우는 대답 대신에 쓰게 웃고 말았다.
그동안 단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착각이었던 모양이었다. 한 번 날뛰기 시작하니 그동안 쌓여 있던 체증들이 모두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그래도 이렇게 한바탕 풀어내니 속이 탁 트였다. 몸도 나른해지고, 그동안 알게 모르게 받았던 스트레스며 근심 걱정들도 싹 사라졌다.
하지만.
“아쉽습니다.”
모든 게 만족스러운 것만은 아니었다.
“아쉽다고?”
브라함은 뭔 이런 미친놈이 다 있냐는 표정으로 연우를 바라봤지만. 연우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 셋의 힘이, 사실 여기서 그칠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연우는 이렇게까지 강해졌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소싯적의 한령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만큼 일기장 속에 거론되는 도무신의 위광은 너무나 대단한 것이었다. 괜히 창무신과 더불어 청화도의 2인자로 군림했었던 게 아니었다.
그렇기에 아직까지 전성기의 힘을 되찾지 못한 한령을 볼 때면, 연우는 여러모로 안타까울 수밖에 없었다.
레베카도 마찬가지. 케르눈노스는 최상급 신에 해당하는 만큼, 그의 선택을 받은 레베카도 당연히 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너무 많은 것을 잃은 상태였다.
샤논만은 생전의 힘을 뛰어넘었다지만. 그렇기 때문에 데스 노블이 되고 나서도 여전히 힘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중이었다.
이런 이유로, 연우는 그들이 전부 본래의 힘을 되찾게 하기 위해서라도 더 강해져 격을 높여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이런 속내를 들은 브라함은 질린다는 표정이 되었다가 곧 피식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연우가 왜 이토록 더 강한 힘을 갈망하는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럼 앞으로 이 늙은이에게도 계속 재촉을 해 대겠군.”
“신격을 빨리 찾으셔야지요.”
“후후. 그렇게 말해 주는 것은 고맙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너부터 그것을 뛰어넘어야 하지 않겠느냐.”
브라함은 이미 과거로 돌아가길 포기한 지 오래였기에,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연우의 말마따나 신격을 되찾으려면, 주인인 연우부터가 그냥 신격도 아닌 대신격을 얻어야 할 판이었으니까.
그리고 당연한 말이었지만. 탑이 세워진 이래로, 플레이어가 신격을 얻은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올포원이 이루지 않겠냐는 말만 무성할 뿐이었다.
하지만 연우는 고요한 눈빛으로 말없이 브라함을 바라보고 있었다.
브라함의 눈이 저절로 커졌다.
“너, 설마?”
피식.
연우는 그렇게 가볍게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면서 엉덩이를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돌의 기능도 확인했으니 다음 차례로 넘어가셔야죠.”
브라함은 더 이상 연우에게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마따나 신격과 관련된 건 아직도 먼 훗날의 일이었다.
지금 해야 할 일은 따로 있었다.
마녀 사냥.
그리고 딸의 구출.
브라함은 인공 육체인데도 불구하고, 심장이 크게 뛰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쿵. 쿵. 빨리 딸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으로 숨이 가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