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220화 (220/862)

20화. 켈라트 경매장 (3)

이튿날.

연우는 앞으로의 일을 계획하기에 앞서 부탁할 것이 있어 무왕을 찾았다. 최근에 궁무신을 쫓는 일로 얼굴을 보기 힘들었던 무왕은 평소답지 않게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이번 추격 역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리고 일족이 받은 피해도 제법 컸으니. 이제는 어떤 수를 내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연우를 보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씩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우리 제자님은 나날이 달라지시는군. 요즘 재미난 것을 만드셨다지?”

현자의 돌과 관련된 것들을 묻어 둔다고 합의를 했어도, 무왕에게는 사실이 전달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연우를 보면서 확실하게 기질이 예전과는 선명하게 달라졌다는 사실을 깨닫고 재밌는 물건을 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는 그저 날만 잔뜩 벼린 느낌이었다면. 이제는 제법 기틀이 잡혀 가고 있었다.

“스승님 덕분에 편하게 제작할 수 있었습니다.”

피식. 무왕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면서 손을 휘저었다.

“마음에 없는 소리를 잘도 하는구나. 하여간 가면 갈수록 점점 더 뻔뻔해져? 아주?”

“그 스승에 그 제자 아니겠습니까.”

“주둥이도 잘 나불거리고. 그래도 살판나 보이는 것 같아 다행이다.”

무왕이 히죽 웃으면서 말을 이어 나갔다.

“처음 봤을 때는 꼭 닷새는 굶은 늑대처럼 사납기만 하더니. 이젠 좀 사람다워졌어. 어?”

연우는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무왕이 왜 그렇게 말하는지 알 것 같았다. 분명 그를 처음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연우는 온통 복수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강해진 것도 강해진 것이지만, 이제는 마냥 뾰족하지만은 않고 많이 단단해졌다. 공허했던 마음을 채워 준 것들이 많아서일 것이다.

세샤, 브라함, 갈리어드. 판트와 에도라. 그리고 무왕까지. 이젠 그와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들과 마음을 나누면서 정신적으로 성장을 이루기도 했다.

따지자면. ‘여유’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만약 이들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어쩌면 지금쯤 그는 여전히 날을 잔뜩 벼린 채 탑을 오르는 데에만 몰두하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하여간 성장하는 건 좋은 일이야.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한쪽에만 너무 몰두하게 되면 언젠간 무너지기 마련이지. 넌 그동안 외적 성장에만 치중해서 걱정이었는데, 그래도 다행이다.”

무왕은 싱긋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대견하다는 듯한 눈빛.

연우는 자기도 모르게 가슴 한 편에 뿌듯함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무왕이 이렇게 자신을 두고 칭찬하는 건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조심 또 조심해라. 네가 갖고 있는 것들이 너무 많아. 지금은 잘 해 나가고 있더라도, 언제 흔들릴지 모르는 게 사람이니까. 의외로 사람의 정신은, 허약하기 이를 데 없어. 신외지물(身外之物). 이 말만 잊지 않고 있으면 될 거다.”

신외지물. 몸 밖에 있는 물건. ‘나’가 아닌 것에 매달려 본질을 흐리지 말라는 의미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 즉, 자아였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됐다.”

무왕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뜻하지 않게 인연이 닿아 세 번째로 맞게 된 제자는 생각보다 너무 잘해 주고 있었다.

사실 무왕은 더 이상 제자를 둘 생각이 없었다.

첫 번째 제자는 자기 욕심이 너무 지나친 나머지 자리를 박차고 나가면서 자멸의 길을 걸었고, 두 번째 제자는 스스로가 납득하지 못한 이유로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태어나면서부터 일족의 왕이 되기까지, 언제나 성공의 삶만을 살았던 무왕으로서는 제자 양성이 계속 실패했기 때문에 많은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쩌다 받게 된 세 번째 제자는 제 갈 길을 묵묵히 잘 걷고 있었으니.

무왕은 부디 이 아이만큼은 앞으로도 제 길을 무사히 걷길 바랐다. 처음에는 자신과 일족의 비원을 이뤄 줬으면 하는 바람으로 맞아들였지만. 이제는 정말 진심으로 그를 응원하고 있었다.

“그럼 잔소리는 여기까지 하고.”

무왕은 혹시나 눈치 빠른 제자에게 속내가 들킬까 싶어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아무래도 생각을 들키는 건 여러모로 부끄러웠다. 판트가 알면 놀려 댈 게 분명했다.

“이렇게 찾아온 이유는 뭐냐? 뭐 부탁할 게 있어서 온 것 같은 데.”

“꼭 제자가 용건이 있어야 스승님을 찾는 법은 아니지요.”

“그래? 그럼 내 도움은 아무것도 필요 없단 거지?”

“그래도 스승님의 손길을 거부하는 건 제자로서의 도리가 아니지 않겠습니까?”

“하여간 주둥이는. 뭔데?”

무왕이 피식 웃으면서 물었다.

연우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인피면구를 구하고 싶습니다.”

“인피면구를?”

무왕은 이놈이 또 무슨 짓을 하려는 건가 싶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인피면구는 일족에서도 비밀리에 취급되는 물건. 외부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었다.

하지만 무왕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대장로에게 말해서 몇 개 챙겨 가. 그리고 앞으로 그런 건 굳이 나 찾아올 필요 없다.”

그러다 보니 놀란 쪽은 연우였다.

“인피면구는 귀중하게 취급되는 게 아니었습니까?”

“그래서? 내가 그런 거 하나 제자에게 안 빌려줄 정도로 쪼잔해 보이디?”

“아니셨습니까?”

“어쭈? 말하는 본새 봐라. 취소한다?”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연우는 무왕의 말이 바뀔까 싶어 고개를 숙이고 황급히 집무실을 벗어났다.

무왕은 그런 연우의 뒷모습을 보면서 피식 웃고 말았다.

“이제는 나한테 농담까지 한다. 이거지? 많이 컸네. 많이 컸어.”

* * *

연우가 가장 먼저 시도하려는 건, 브라함에게 미리 언질을 줬던 것처럼 현자의 돌의 가짜 구조식을 뿌려 탑을 혼란케 하는 데 있었다.

그래서 연우는 사흘 동안 브라함과 머리를 맞대서 가짜 에메랄드 타블렛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말만 가짜일 뿐. 수많은 플레이어들을 속여야 하기 때문에 내용은 진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처음 연우가 입수했던 에메랄드 타블렛보다 더 내용이 상세했다. 여러 개의 항목에는 자세한 주석이 붙었고, 심지어 진짜 구조식도 일부 섞었다. 실제로 실험을 해 보면 어느 정도 결과물을 볼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결과물만 볼 수 있는 수준. 현자의 돌이라고 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수준. 거기에 빠져 있는 부분들은 절대 찾아낼 수 없을 수준으로만 제작했다.

그리고 연우는 이것을 4개의 파트로 분리시켰다.

“이것을 차례대로 풀 거란 말이지?”

브라함은 분리된 에메랄드 타블렛을 살피고, 그답지 않게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미소는 차갑게 변했다.

“다들 미쳐 환장하겠군.”

특히 레드 드래곤이 가장 크게 날뛰겠지. 하지만 브라함은 다른 거대 클랜들이며 하이 랭커들도 다르지 않을 거라고 자신할 수 있었다.

무한한 마력 기관에 대한 갈망은. 드래곤 하트가 망가진 여름여왕만큼이나 모든 플레이어들에게 간절한 염원이나 다름없었으니.

브라함은 하루라도 빨리 잿더미가 된 발푸르기스의 밤을 보고 싶었다.

그의 눈빛이 흉흉하게 빛났다.

“그럼 시작하지.”

* * *

연우는 가면을 벗고 인피면구를 뒤집어썼다. 아주 얇은 막이 피부 위를 덮었다. 떨어지지 않도록 흡수된 약초가 피부를 따끔거리게 만들어 조금 답답한 느낌이었다.

“이렇게 하면 되나?”

“이곳이 삐져나왔잖수.”

연우는 판트를 돌아봤다. 판트는 옆에서 어색하다 싶은 부분을 매만져 주고, 거울을 가져와서 연우 앞에 비췄다.

“어떻수? 감쪽같지 않수?”

연우는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평범한 인상을 지닌 낯선 얼굴이 거기에 있었다.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 보면서 곳곳을 꼼꼼하게 체크했다. 보면 볼수록 신기했다. 그는 정말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내친김에 연우는 마력도 최대한 안쪽으로 갈무리하면서 기질을 유약한 형태로 변질시켰다. 현자의 돌을 얻고 난 뒤에 생긴 이점 중 하나는, 마력을 제어하는 솜씨가 이제 다른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깊어졌다는 점이었다.

마력 통제까지 마치고 나니 정말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평범하고, 유약한 인상. 어딜 가더라도 흔히 볼 수 있는 얼굴이라 쉽게 잊힐 것 같았다.

“그럼 다녀오지.”

“이따 21층에서 뵙겠수.”

“몸조심하세요.”

연우는 봇짐을 등에 짊어지면서 마을을 빠져나왔다.

연우가 켈라트 경매장을 찾는 동안, 판트와 에도라는 갈리어드, 브라함과 함께 21층으로 먼저 가서 지시한 것을 해 둘 예정이었다.

스테이지 곳곳에 흩어졌을 아가레스의 마기 파편을 한데 모으고, 드 로이 호수에다 던져 하급 악마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녀석은 세샤의 병을 낫게 하는 데 쓰일 예정이었다.

「으흐흐. 이제부터 악당의 세계 정복 음모가 시작되는 건가?」

그때, 샤논이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이 키득거렸다.

‘악당?’

「그럼 아냐?」

‘악당이라. 틀린 말은 아니지.’

연우는 피식 헛웃음을 흘렸다. 사실 샤논의 말이 정확했다.

어쨌거나 이제부터 탑을 혼란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을 생각이었으니까.

그가 노리는 건 발푸르기스의 밤만이 아니었다. 탑, 그 자체였다.

연우는 붉은 혀로 입술을 축였다. 눈빛이 냉랭하게 빛났다. 마치 먹잇감을 포착한 포식자의 눈처럼.

* * *

켈라트 경매장은 여러 사설 마켓과는 다르게, 모든 플레이어들에게 개방되는 마켓이었다.

다만, 그 속에는 총 9개의 구획이 있어, 철저한 등급제로 운영되었다.

이용자의 명성, 업적, 랭킹, 층계, 소유 재산, 이용 빈도 등 복합적인 요소를 바탕으로 점수가 매겨지며, 여기에 따라 이용할 수 있는 경매장에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곳은 이름만 ‘경매장’으로 지칭될 뿐, 하루에도 수천 수만 개의 물건들이 거래될 정도로 방대한 규모를 자랑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관리국에서 승인한 공식 지정 장소이기 때문이었다. 항상 관리자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어 만약에 있을 분쟁에 대비되어 있었고, 꼼꼼한 관리 아래 물품들은 흠결 하나 놓치지 않고 세세하게 파악되어 사기를 당할 우려도 없었다.

게다가 필요에 따라서는 물품을 제공한 사람에 대한 익명도 철저하게 보장되니. 우연히 구한 장물을 처분하기 쉽다는 이점도 있었다.

그렇다 보니 여러 거대 클랜에서도 대량으로 필요한 물품이나, 비밀리에 구할 물건이 있으면 이곳을 많이 찾는 편이었다.

그 때문일까.

켈라트 경매장은 오늘도 평소와 마찬가지로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덕분에 연우도 아무런 눈길 한 번 받지 않고 그 속에 자연스레 섞일 수 있었다.

허름한 옷차림에 등에 짊어진 봇짐 하나. 그리고 딱딱하게 굳은 표정은 이제 막 장사를 시작하려는 초보 장사꾼의 그것이었다.

「이야! 여긴 언제 와도 떠들썩하네. 사람이 뭐 이렇게 많아? 무슨 장날도 아닌데.」

샤논은 간만에 사람 많은 장소에 와서 즐거웠던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한령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옛 추억에 잠긴 것 같았다.

탑의 플레이어 치고 좋은 물건을 구하기 위해서 켈라트 경매장을 찾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그동안 이곳을 한 번도 방문하지 않았던 연우가 특이한 케이스였다.

경매장은 거대한 장터를 이루고 있어서, 하나의 건물만 있는 게 아니었다. 넓은 부지를 따라 아홉 개의 크고 작은 구획으로 나눠져 있고, 그 구획 안에서도 여러 분야로 세세하게 구분되어 있었다.

실질적인 경매가 이뤄지는 중심 건물을 비롯해 물건을 구경할 수 있는 가판대며 노점상은 물론, 물건을 내다 팔 수 있는 거래소도 따로 배치되어 있었다.

그중에서 연우가 향하는 곳은 거래소가 밀집된 구획이었다.

물건을 내다 팔고자 하는 판매 자들은 보통 이곳을 방문했다. 거래 방법은 총 두 가지였다. 위탁과 판매.

전자는 거래소에 일정 수수료를 지불하고 물건을 경매장에 올려 팔리는 액수만큼 돈을 벌 수 있었고, 후자는 그런 과정 없이 경매장 내에 정해져 있는 가격에 그냥 파는 것이었다.

보통 자신의 물건에 자신이 있는 사람들은 전자를, 급하게 목돈이 필요하거나 시장가가 매겨진 물건을 가진 사람들은 후자를 채택하는 편이었다.

연우는 한쪽에 갖가지 병장기를 짊어지고 서 있는 플레이어들이 가득한 인력 시장을 지나쳤다.

그들 앞에는 가능한 층계 숫자가 적혀 있어, 언제든지 용병으로 차출될 수 있었다. 켈라트 경매장에서는 용병도 하나의 거래 물품이었다.

‘여기 어디에 있을 텐데?’

연우는 일기장에 남아 있는 거래소 구획의 지도를 상기하면서 주변을 둘러봤다.

거래소도 한 곳만 있는 게 아니었다. 그렇다면 상인들 사이에 경쟁이 되지 않을 테니까.

관리국은 어디까지나 켈라트 경매장을 관리만 할 뿐, 실질적인 거래는 전문 상인들이 도맡아 하고 있었다.

연우가 튜토리얼에서 만난 적 있었던 신비 상인들. 그들은 플레이어도, 관리자도 아니면서 탑을 구성하고 있는 또 다른 주축 중 하나였다. 여러 세계와 차원을 오고 가면서 갖가지 물건들을 교역하고, 이문을 남기는 자들이었다.

그중에서 연우가 찾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단체였다.

플레이어들이 클랜을 이루듯, 신비 상인들은 조합(Union)을 구성했다.

그중에서 연우가 찾고자 하는 곳은 ‘하늬바람 조합’이었다.

과거에 동생이 자주 거래하던 곳.

거래 방식이 아주 깔끔하고, 여러 조합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만큼 대규모를 자랑했다.

‘이런 곳에다 물건을 내다 판다면 쉽게 팔려 나가겠지. 소문도 금세 퍼질 테고.’

그런 생각과 함께, 어느덧 발견한 ‘하늬바람 조합 거래소’라고 적힌 건물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호객, 아니, 고객님. 다음에도 저 상인 A를 이용해 주시기 바라겠습니다.”

동시에 들리는 목소리. 때마침 거래가 하나 끝났던지 로브를 뒤집어쓴 상인이 방실방실 웃고 있었다.

그런데.

어딘지 모르게 목소리가 낯이 익었다.

연우는 상대가 누군지 금세 알아채고 눈이 살짝 커졌다.

‘저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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