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221화 (221/862)

21화. 켈라트 경매장 (4)

상인 A.

튜토리얼에서 한창 뛰어다닐 당시. 연우와 수시로 거래를 했었던 신비 상인이었다.

이름은 가르쳐 주지 않고, 지나가던 배역 A라고 우스갯소리로 말했었는데. 설마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로브를 뒤집어써서 얼굴 생김새가 잘 보이지 않아도 우스꽝스러운 말투와 몸짓 때문에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물론, 지금은 신분을 가리고 있었으니 아는 척할 수 없었다.

다만, 잘되었다는 생각은 들었다. 어느 정도 성격을 잘 파악하고 있는 녀석이니, 쉽게 다룰 수 있을 것 같았다.

녀석은 쉬운 호구가 하나 걸려 들었다면서 즐거워하겠지만.

연우는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잔뜩 긴장된 표정으로 봇짐을 고쳐 쥐며 녀석에게 다가갔다.

* * *

상인 아트란은 원래 하늬바람 조합에서도 제법 직급이 높은 편이었다.

대행수를 제외하면, ‘행수’라는 직급은 충분히 임원급이라고 할 수 있었으니까.

실제로 그는 최근에 튜토리얼 내의 여러 마정석 광산을 획득하고, 여러 클랜들과 비싼 값에 거래하면서 큰 차익을 남기기도 했다.

다만, 언동이 가볍고 성격이 괴팍한 탓에 수시로 상사들과 충돌하곤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 그는 재수 없던 대행수의 머리통을 후려친 죗값으로 켈라트 경매장 내 하급 거래소의 관리자로 쫓겨나다시피 해 버린 상태였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하급 거래소는 딱히 할 게 그리 많지가 않았다.

있더라도 그저 그런 플레이어들이 와서 내놓는 물건을 싼값에 후려치는 게 전부일 뿐. 그래도 한때 마정석 시장을 좌지우지했던 그로서는 지금 만지는 액수는 코 묻은 돈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호객, 아니, 고객님. 다음에도 저 상인 A를 이용해 주시기 바라겠습니다.”

그래도 일은 일이니, 양손을 흔들어 가면서 거래가 끝난 플레이어에게 알랑방귀를 뀌고 있던 중이었는데.

‘에휴. 또 호구 한 마리 왔구만.’

마침 문이 열리면서 다른 플레이어 한 명이 들어왔다.

어수룩한 외모에 봇짐 하나를 거머쥐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녀석. 별다른 기질도 느껴지지 않았다.

딱 보기에도 후려치기 좋은 호구, 아니, 먹잇감이었다.

보아하니 여태 모은 물건을 바탕으로 작게나마 장사를 시작해 보려는 초보 상인인 것 같은데. 그런 놈일수록 때리기가 훨씬 좋았다.

경매장 내에 시세 거래가가 잘 측정되어 있다고 해도, 상인들은 자기들 재량껏 플레이어들을 후려치는 게 가능했다.

하물며 이제 막 장사를 시작하려는 햇병아리면 어떨까. 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도 그런 속내를 드러내는 건 멍청한 놈들이나 저지르는 실수. 자신 같은 베테랑이 할 짓은 아니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호…… 아니, 고객님?”

녀석은 아트란이 부르자 움찔 몸을 떨기까지 했다. 여전히 어수룩한 태도. 저런 배짱으로 어떻게 플레이어가 됐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순간, 아트란은 저 초보 장사꾼이 연기를 하는 건가 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이가 하급 거래소에서 뭔 연기를 하겠나 싶어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무, 물건을 좀 팔고 싶어서 왔는데요.”

“판매를 하시고 싶으신 거군요. 하면 저희 거래소는 처음 이용하시는지요?”

“예. 그렇습니다.”

“오오. 그럼 더 잘 찾아오셨습니다. 저희 하늬바람 조합이야말로, 여러 상인 조합 중에서도 가장, 단연, 최고의 양심적인 운영과 시세의 최고 거래가로 거래를 하는 곳이니까 말이지요.”

“그렇습니까?”

그러자 녀석은 다행이라는 듯이 빙긋 웃었다. 역시 딱 촌티 나는 웃음이었다.

“그럼 감정을 해야 하니 잠깐 가져오신 물건을 보여 주시겠습니까?”

녀석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카운터에 봇짐을 풀기 시작했다.

아트란은 별 볼 일 없는 녀석이니 그냥 최저가로 후려치고 보내 야겠다는 생각밖에 하지 않았다.

하지만 봇짐 안에 든 물건을 본 순간, 아트란은 속으로 적잖게 놀라고 말았다.

‘이런 놈이, 어디서 이런 걸?’

가져온 물건들은 대개 검이나 창 같은 병장기였다. 그것도 재질이 단단하고 날이 바짝 선 상등품들. 절대 초보 상인이 취급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그래도 물건이, 좀 괜찮지 않습니까? 하하.”

녀석도 자기 물품이 괜찮은 걸 알고 있는지 눈치를 보면서도 슬쩍 자신 있는 미소를 떴다.

‘까마귀로군.’

아트란은 단번에 녀석이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있었다. 속칭 까마귀.

망가진 전장을 전문적으로 돌아다니면서 시체들을 ‘파밍’해서 장물을 끌어모으는 놈들을 뜻하는 은어였다.

탑의 세계는 아주 크고 넓었고, 사람들의 시선이 잘 닿지 않는 곳에서도 전투는 빈번하게 벌어지곤 했다.

보아하니 꽤 한몫 두둑하게 챙긴 모양이었다.

조금 낡은 흔적이 있지만, 사용에는 무리가 없어 경매장에 내놓는다면 꽤 비싼 값에 거래될 것 같았다.

물론, 속내를 드러낼 수는 없기 때문에, 지금부터는 값을 후려쳐야만 했다.

“예. 하나같이 품질이 꽤 괜찮은 것들이로군요. 좋습니다. 이 정도면, 아주. 게다가 몇 개는 마법이 내장된 상급 아티팩트구요.”

“그럼 값을 어느 정도……!”

“다만, 조금 안타깝군요.”

“무, 엇이 말입니까?”

“여길 보세요. 보시다시피 검면에 적힌 룬 문자들이 대개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부식이 심해져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망가졌고, 내구도가 많아 닳아 버렸습니다. 이래서는 값이 4분의 1 정도로 확 떨어져 버립니다. 그리고 이것 같은 경우에는…….”

관리국의 깐깐한 관리 때문에 코를 베어 갈 만큼 값을 깎을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말하기에 따라서 눈탱이를 후려칠 정도는 되었다.

조합 내에서도 아트란의 말솜씨는 손꼽힐 정도였기 때문에, 그의 설명이 이어질수록 촌놈의 안색은 점점 시퍼렇게 질려 갔다.

큰 몫 단단히 챙길 수 있을 거란 부푼 마음으로 왔다가, 기대가 단번에 박살 나 버렸으니 오죽할까.

아트란은 그쯤 하기로 했다. 그는 값을 너무 후려쳐도 거래가 불발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값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다른 거래소로 가 버리면 닭 쫓던 개가 되는 거니까.

“……하지만 관리가 안타깝게 이뤄졌다고 해도, 진주가 모래 속에 파묻힌다고 해서 가치를 잃지는 않는 법이지요. 조금 보수를 한다면 아주 괜찮은 값에 파실 수 있을 겁니다.”

“그, 그렇죠?”

잔뜩 주눅 들었던 녀석의 얼굴에 다시 혈색이 돌았다.

아트란은 미끼에 단단히 걸려들었다는 것을 알고, 계산기를 적당히 두들기면서 앞에다 내밀었다.

“그러니 원래 이 정도 가격이지만, 물건도 많이 가져오셨고, 또 앞으로 고객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제가 이만큼을 재량껏 올려 드리겠습니다. 어떠신지요?”

“조, 좋습니다! 당장 거래하죠!”

비록 처음에 기대했던 가격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그래도 처음에 비해 많이 올라간 가격을 보고 녀석은 아트란의 손을 붙잡았다.

제대로 낚인 것이다.

아트란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면서 손을 맞잡았다.

그렇게 거래가 즉각 이뤄졌다.

아트란은 머릿속으로 거래하고 있는 대장장이들에게 보수를 맡기고, 경매장에 올렸을 때에 남을 차익을 빠르게 계산했다.

조합에 일정 수수료를 넘겨도 꽤 많은 이문이 남았다. 이런 호구는 언제나 대환영이었다.

“아, 저 그리고…… 이런 것도 거래가 가능한지 여쭙고 싶습니다만.”

그때, 녀석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조심스레 품속을 뒤적거렸다. 뭐 얼마나 대단한 물건을 내 놓으려는 건가 싶어서 보는데, 생각지도 못했던 물건이었다.

아티팩트나 장신구가 아니었다. 탁본이었다.

상당히 낡은 비석을 떠냈던지 글자들이 대부분 망가져 알아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암호 해독 관련 스킬을 발동한 순간. 아트란은 억지로 기함을 삼켜야만 했다.

‘이건……!’

여러 물건을 취급해야 하는 상인들은 잡지식에 능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아트란은 연금술에도 어느 정도 일가견이 있었다.

그런데 탁본의 내용이 심상치 않았다.

꽤 수준 높은 내용의 연금술 지식이 적혀 있었다. 그것도 고대 지식인지, 하나같이 낯선 지식들이었다.

간혹 왕왕 이런 경우가 있었다.

탑은 여러 세계의 이주민들이 교차하는 곳. 플레이어들 중에는 고향의 보물을 몰래 훔쳐 달아나 탑에 온 자들도 꽤 많았다.

하지만 대개 그런 자들의 경우에는 보물을 습득할 만한 재능이 없었고, 결국 비명횡사해 버리곤 했다. 그리고 가져온 보물은 가치를 알아보지 못한 사람들에 의해 아무렇게나 내버려졌다가, 다른 어느 인연자들의 손에 닿는 것이다.

이 물건이 딱 그랬다.

조금 아쉬운 점이 있다면 후술 된 뒷부분이 잘렸다는 점이었지만. 분명 이것만으로도 지니고 있는 가치는 대단했다. 망가진 글자들쯤은 연구하면 쉽게 수복할 수 있었다.

‘이건 어떻게든 손에 넣어야 해.’

보통 상인들은 이런 물건을 만나면 ‘심봤다’는 표현을 사용했다. 아트란은 제대로 ‘심봤다’를 외치고 싶었다.

탁본을 쥔 손길에 힘이 바짝 실렸다.

이것이라면 지난 손해를 뒤집고, 다시 제자리로 되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뒤집어쓴 로브 사이로 눈이 강렬하게 빛났다.

* * *

‘그래도 값어치를 알아본 것 같으니 생각보다 쉽게 일이 풀리겠어.’

연우는 거래소를 빠져나오면서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원래대로라면 여러 사람들의 손을 떠다니게 하다가, 가치를 알아본 사람에 의해 소문이 나기를 기다리려 했는데.

아니면 소문이 나게끔 조작을 하거나.

하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신비 상인을 속이기 위해서 까마귀인 것처럼 행세하고, 적당히 두들겨서 가져온 물건을 장물처럼 속였다.

여기에 조작한 에메랄드 타블렛의 탁본을 내보였으니, 준비를 철저히 한 만큼 정체를 들킬 염려는 없었다.

씨앗은 뿌렸다.

이제 열매가 맺히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 * *

아트란은 탁본을 손에 넣은 뒤에도 곧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머릿속은 이 뒤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하는 생각으로 복잡했다.

‘그냥 경매장에 올리는 걸로는 안 돼. 제대로 포장을 해서, 소문이 나도록 만들어야 해.’

경매장에서는 여론을 형성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소비자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을 제치고 값어치 있는 물건을 손에 넣었다’는 만족감과 희열을 느끼도록 해야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물건에 대한 소문을 넌지시 퍼뜨려서 기대와 흥미를 갖게 만들어야만 했다.

그러다 아트란은 한 가지 방법을 떠올리고, 탁상 위에 있던 종을 흔들어 수하를 불렀다.

따랑, 따랑-

“부르셨습니까?”

“혹시 손이 빠른 서사(필사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를 알고 있나?”

“아마 인력 시장에 가면 있지 않겠습니까?”

“그럼 열 명만 수소문해서 데려와. 최대한 빨리!”

* * *

아트란은 서사들을 시켜 탁본의 상단 2할 정도만 똑같이 베껴 쓰게 했다.

샘플을 만든 것이다.

그리고 질 좋은 비단으로 곱게 포장하고, 갖고 있던 고객 명단 중 VIP들 앞으로 샘플을 보냈다.

몇 줄 글귀를 같이 실어서.

-이 편지를 받으신 분들께 행운이 깃들길. 이 안에 있는 것이, 당신에게 그러한 행운이 되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편지를 받은 사람 중 일부는 별달리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럴듯한 편지 봉투 안에는 이상한 문자들만 나열되어 있었고, 미처 샘플의 값어치를 알아보지 못한 전사 계통의 플레이어들은 이게 뭐냐면서 편지지를 구겨 쓰레기통에다 던지기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성직자나 사도, 마법 계통의 플레이어들은 단번에 탁본의 값어치를 알아볼 수 있었다.

에메랄드 타블릿!

여태껏 전설처럼 전해지던 연금술의 진리, 그중 일부가 그곳에 적혀 있었던 것이다.

단순히 일부만 본 것인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편지를 본 그 자리에서 감탄을 터뜨렸다. 그동안 막혔던 연구가 풀리고, 놓치고 있던 진리가 재탄생되었다.

덕분에 마탑의 여러 학파를 비롯해서 연금술사 클랜, 발푸르기스의 밤, 그리고 여러 종교 및 종파들이 구름 떼처럼 켈라트 경매장에다 문의를 넣기 시작했다.

대체 이것이 무엇이냐고.

어디서 구했으며, 나머지 완본은 언제 경매장에 나오는 것이냐고.

하루에도 수백 명이 하늬바람 조합을 방문했고, 수천 개의 편지가 아트란 앞으로 도착했다.

반향은 아트란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클 정도라, 아트란의 이름은 순식간에 랭커들 사이에 퍼져 나갈 정도였다.

심지어 신의 말씀을 깨닫겠다면서 오랫동안 은둔 생활을 자처했던 성직자며 수도승들도 찾아올 정도였으니.

덕분에 소문을 접한 8대 클랜에서도 호기심을 갖기 시작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그동안 아트란을 한직으로 내보내고 수수방관 하고 있던 하늬바람 조합은 다시 아트란을 중앙직으로 ‘모셔’ 와야만 했다.

처음에는 강제로 강탈하려 했지만, 아트란이 샘플을 만들자마자 탁본을 숨겨 버린 까닭에 울며 겨자 먹기로 그를 우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직급도 대행수 직을 내리면서, 간만에 조합에 찾아온 빅 이벤트를 무사히 이끌 수 있도록 주문했다.

아트란은 그런 호기를 절대 놓치지 않았다.

5%의 분량이 추가된 샘플을 한 번 더 제작해 더 많은 사람들에게 편지로 보냈고, 탁본의 내용이 ‘진짜’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이 더 크게 호응하게끔 만들었다.

그렇다 보니 관리국에서도 아트란과 탁본에 대해 크게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호응도가 크면 클수록 다른 물품들의 거래량도 늘어날 수밖에 없었으니까. 오히려 판을 더 크게 키울 생각을 가졌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시간대에 일정을 잡고,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메인 경매장을 내놓았다.

또한, 켈라트 경매장의 이름을 걸어 메시지를 이용한 대대적인 광고까지 띄웠으니.

덕분에.

경매 당일, 경매 참여자들을 비롯해 랭커며 클랜들, 여러 장사꾼과 구경꾼들까지.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구름 떼처럼 경매장으로 몰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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