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켈라트 경매장 (8)
“여왕님!”
“이게 무슨……!”
여름여왕이 내지르는 비명은 곧 레드 드래곤 진영 전체로 퍼져 나갔다.
그래서 외부에서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은 다급하게 그녀의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다. 허락 없이는 절대 들어설 수 없는 장소였지만, 지금은 그런 규율을 따질 겨를이 없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끔찍한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여름여왕의 몸뚱이 위로 균열이 잔뜩 퍼지고 있었다. 마치 내구도가 다해 산산조각 나려는 도자기처럼. 가뭄에 메마른 논두렁처럼. 균열은 발끝에서부터 얼굴까지 거미줄처럼 잔뜩 퍼져 붉은 열을 토해 내고 있었다.
좀 전까지만 해도 찬란한 은발로 빛나던 머리카락은 시커멓게 죽어 검은색으로 물들고 있었으니.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모습에 그들은 다급하게 움직였다.
* * *
수뇌부의 발 빠른 대처로 일단 여름여왕의 문제에 대한 소문이 새어 나가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레드 드래곤 내에 남아 있는 81개의 눈은 모두 신경을 바짝 곤두세워야만 했다.
여름여왕은 단순히 클랜의 수장이기만 한 게 아니었다.
그녀야말로 레드 드래곤의 근간이고, 레드 드래곤 그 자체였다.
탑이 레드 드래곤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여름여왕이 군림하고 있기 때문이며, 레드 드래곤의 플레이어가 강한 이유도 여름여왕으로부터 힘을 공유받기 때문이었다.
특히 81개의 눈은 모두 여름여왕의 사도라고도 할 수 있는 자들.
갖가지 권능이 그녀로부터 비롯되었고, 온갖 지식들이 그녀로부터 전달된 것들이었다.
그런 그녀가 혹여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81개의 눈은 물론, 클랜 자체가 무너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의 인생도 곧바로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것만큼은 기필코 막아야 했다.
특히 탁본을 가져왔던 탐과 트로이는 더 다급했다.
“마독입니다.”
“말도 안 되는!”
탐은 침중한 표정에 잠긴 트로이를 보면서 주먹을 꽉 쥐었다. 악다문 입술 사이로 짙은 분노가 흘러나왔다.
마독.
위대한 용종에게 해를 입힐 수 있는 유일한 물건이 있다면. 악마들이 분비한다는 마독밖엔 없었다.
“우선 초빙한 고위 사제들이 손을 써서 급한 불은 껐습니다만. 이건 단순한 임시방편일 뿐, 해독은…….”
트로이는 뒷말을 삼켰다. 탐도 더 자세하게 캐묻지 않았다. 무슨 말인지 빤히 알 것 같았다.
마독이 그렇게 쉽게 해소될 리 없겠지. 게다가 현재 여름여왕은 계속된 악몽 때문에 동면도 취하지 못하는 상황. 자체적인 치유도 불가능했다.
이래저래 악화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으니.
탐은 벌써부터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하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수를 써야만 했다. 경쟁자인 다른 형제들에게 물어뜯길 것도 걱정이었지만, 이대로는 클랜 자체가 파멸될 판이었다.
“탁본의 원주인이란 놈은? 판매자는 찾았소?”
트로이는 고개를 저었다. 관리국과 트러블을 일으킬 각오까지 하면서 기록원을 들이쳤지만, 거기엔 아무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인상착의를 바탕으로 목격자를 뒤져 봤지만, 하나같이 돌아온 대답은 ‘기억이 안 난다’였다.
“아예 작정하고 온 놈이로군.”
“그렇습니다.”
탐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그러면서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감히 레드 드래곤에게 이딴 수작질을 해? 게다가 원흉은 여름여 왕이 현자의 돌을 필요로 한다는 것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절대 단순한 테러가 아니었다. 정확하게 여름여왕을 겨눈 테러. 규모가 큰 곳에서 자행했단 뜻이었다.
어느 놈이지? 엘로힘? 혈국? 시의 바다? 청화도의 잔당? 아니면 도망친 검무신?
누가 되더라도 한 가지만큼은 확실했다.
놈은 절대 그들의 눈을 피해 갈 수 없었다. 끝까지 쫓아서 물어뜯고, 관련된 모든 것을 부술 것이다.
이미 탁본을 모두 입수하기 위해 관리국, 마탑, 황금충을 보호하던 혈국까지 모두 적으로 돌린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이었지만.
탐은 그런 것 따위는 개의치도 않는 눈빛이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여름여왕의 생존과 원수의 파멸밖에 들어 있지 않았다.
“하면. 탁본이 발견된 경로는? 누군가 우리를 노리고 손을 썼다면, 어디엔가 흔적은 남았을 것 아니오?”
트로이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서류를 하나 건넸다.
“혹 6년 전에 있었던 파우스트 유적지를 기억하십니까?”
“파우스트? 그곳이라면 가짜라고 판명 난 곳이 아니었소?”
파우스트. 지금은 기억하는 사람도 없을 정도로 오래전에 사라진 존재였지만, 그래도 한때 ‘빛의 경멸자’라는 특이한 별칭으로 여름여왕과도 대립각을 세웠던 자였다. 오늘날로 치면 무왕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었던 플레이어.
특히 그가 유명했던 것은 별다른 소속 없이도 최강자로 분류되던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의 유일한 계약자였다는 점 때문이었다.
메피스토펠레스는 수많은 지식을 가진 보고였고, 파우스트는 그의 영향을 받아 여러 업적을 수도 없이 기록했다.
다만, 문제라면 이런 업적을 세간에는 크게 알리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의 곁에는 언제나 친구도 동료도 없었다.
그래서 파우스트가 머물렀을 거라고 판단된 옛 연구실이 발견되었을 무렵. 탑은 꽤나 들썩였다.
하지만 곧 관심은 수그러졌다. 거창한 소문과 다르게 정작 연구실에는 이상한 것들만 있었던 것이다. 별 볼 일 없는 마법사의 던전이었던 셈이었다.
“저도 여태 그런 줄로만 알았습니다만. 한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하면?”
“그런 소란이 있고 1년 뒤에 청화도와 발푸르기스의 밤이 손을 잡고 유적지를 재탐사했었더군요. 그리고 당시 청화도의 책임자는 리언트였습니다.”
탐의 눈이 번들거렸다. 리언트. 현자의 돌을 제작하던 놈.
“그 말은?”
트로이는 일그러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하게 그곳에서 무엇이 발견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리언트와 발푸르기스의 밤이 유적지 탐사에 들어가고, 석 달 뒤에나 나오면서 어떤 석비 같은 것을 챙겼다는 목격담이 있습니다. 혹 이와 관련이 있지 않겠습니까?”
탐은 주먹을 꽉 쥐었다. 주먹 위로 시퍼런 핏줄이 잔뜩 올라왔다. 리언트는 이제 죽고 없다. 그렇다면 남은 용의자는 단 한 곳. 발푸르기스의 밤뿐.
한낱 마녀들 따위가 왜 여름여왕을 노렸는지는 모른다. 어쩌면 정작 마녀들은 이 일에 별 연관이 없을지도 몰랐다. 유적지에서 발견한 것이 탁본과 관계가 없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녀들이 리언트와 수상쩍은 행동을 벌였고, 그 사실이 레드 드래곤의 눈에 포착되었다는 점이었다.
혐의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의심이 조금이라도 간다면. 싹 다 털어 보면 될 일이었다.
그러다 보면 발푸르기스의 밤이 원흉이 아니더라도 진짜 범인을 금세 찾을 수 있겠지. 꼬리를 잡았다는 게 가장 중요했다.
“그년들이 감히 이딴, 깜찍하지도 않은 짓을, 저질렀단 말이지?”
으드득!
탐은 이가 으스러져라 갈면서 트로이를 봤다. 트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발푸르기스의 밤과 싸운다면 레드 드래곤으로서도 상당한 출혈을 각오해야 할 테지만.
이미 레드 드래곤은 물불 가릴 때가 아니었다. 정말 탑과 정면에서 전쟁을 치르는 한이 있더라도, 원흉을 찾아 해결책을 마련해야 했다.
* * *
연우는 칼리번 후작을 봤다. 일기장에 나와 있던 대로 날카로운 인상이 강한 중년인이었다.
식탐황제가 가장 아낀다는 12자루의 보검. 그중 4개는 네 공작들을, 8개는 후작들 중 가장 뛰어난 무위를 가진 자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칼리번 후작은 거기에 꼽힐 만큼 뛰어난 실력을 가진 하이 랭커였다.
연우는 아주 잠깐 녀석과 싸운다면 이길 수 있을까 고민했다. 아직 현자의 돌을 완벽하게 다루는 게 아니니 일대일로는 힘들 것 같았다. 하지만 샤논 등이 가세한다면?
‘잡을 수 있다. 충분히.’
이제는 하이 랭커도 노릴 수 있을 만한 전력을 갖춘 셈이다.
연우는 부쩍 강해진 스스로의 힘을 느끼면서 칼리번 후작을 바라봤다.
“그런데?”
무뚝뚝한 짧은 말.
순간, 칼리번 후작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지만, 별다른 내색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나 보군. 확실히. 추방자에 뱀 사냥꾼, 거기다 청람가의 남매까지 있으니 아닐 수가 없겠지.”
칼리번 후작은 눈을 가늘게 좁히면서 물었다.
“난 여태껏 그대가 밖으로 나오길 기다렸다. 몇 달 전에는 탑 외 지역의 사창가 일대를 방문한 것 같던데. 찾으러 가니 이미 자리를 비우고 없더군.”
“라오 남작 때문에 그런 건가?”
“역시! 그대와 관련이 있는 건가?”
칼리번 후작의 두 눈이 광망으로 번들거렸다.
“라오는 내가 각별히 아끼던 수하였다. 폐하의 명에 따라 그대와 추방자를 초빙하기 위해서 사절로 갔다가 여태 돌아오지 못했지. 그때의 일에 대해서 알고 싶은데.”
“이미 어느 정도 파악하지 않았나?”
혈국은 엘로힘이 브라함을 쫓고 있는 것을 진즉에 알고 있었다.
게다가 복원된 23층의 데이터는 아가레스가 강림하기 직전의 것. 그렇다면 드 로이 호수 곳곳에 남아 있던 엘로힘과의 충돌에 대해서도 파악했을 것이다. 거기다 연우가 동기화를 이용해서 꾸며 놓은 것들도 많았다.
“소상히 알고 싶어서.”
“그쪽이 말한 대로 라오는 나와 브라함을 혈국으로 초대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어. 그 뒤에…….”
연우는 전혀 흔들리는 기색 없이 담담하게 생각해 뒀던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라오의 방문. 연우의 승낙. 그 뒤에 각룡을 잡으려는데 라오가 호의로 도와주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엘로힘이 갑자기 나타나 훼방을 놓았고, 너무 큰 전력 차에 라오의 도움으로 그들만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믿을진 모르겠지만. 라오는 황제의 손님들을 위험으로 내몰 수 없다면서, 자기가 시간을 버는 동안에 도망치라고 했어. 덕분에 우리는 살았지만…….”
연우는 뒷말을 흐렸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칼리번 후작은 주먹을 꽉 쥐었다. 칼처럼 날카롭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충정.
이것만큼 혈국의 플레이어들을 다루는 데 편한 것은 없었다.
“녀석의 마지막은…… 어땠나?”
“기사, 그 자체였다.”
“그런가? 그럼 되었다.”
칼리번 후작은 침음을 삼키면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라오. 국가와 황제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충신의 이름을 입 안에 몇 번이고 담았다.
뒤따라온 무리들은 분개하면서 엘로힘의 비겁함에 대해 성토했다. 분노가 들끓고 있었다.
그들 중 누구도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지 못했다. 애초에 눈썰미가 뛰어난 신비 상인마저 속인 게 연우의 연기력이었으니. 머릿속에 돌만 가득 찼다는 혈국이 눈치챌 수 있을 리 없었다.
연우는 비웃음이 삐져나오려는 것을 가면으로 겨우 숨길 수 있었다. 어쩌면 그는 생각지도 못한 재능을 발견한 건지도 몰랐다.
‘이것으로 혈국도 확실하게 끌어들인 셈이군.’
포석(布石)은 이제 끝났다.
곧 레드 드래곤이 발푸르기스의 밤을 쫓을 것이다. 연우는 브라함과 아난타를 명분으로 들어 개입할 생각이었다. 그런다면 엘로힘도 즉각 나설 것이고, 뒤따라 혈국도 그 뒤를 치려 할 것이다.
단숨에 거대 클랜 중 세 곳이 분란에 휩싸이는 것이다.
여기에 이미 끌려온 마탑이며 황금충 상단, 관리국에 탁본의 원본을 확인하고자 하는 자들도 여럿 뛰어들 테니.
아마 탑의 역사와 전례를 통틀어 봐도, 이만한 이전투구의 장이 마련된 적은 없었을 것이다.
연우는 그런 혼란의 도가니 속에서 아난타를 비롯해 필요한 것만 챙기고 나올 생각이었다.
‘가능하다면 아이테르나 비에라 듄의 머리도.’
판트는 어떻게 입술에 침 한 번 안 바르고 저렇게 청산유수처럼 거짓말을 할 수 있는지 기가 찬다는 표정이 되었지만. 그래도 칼리번 후작 쪽으로 얼굴을 보여 주지는 않았다.
그러다 칼리번 후작은 감정을 조금씩 추스르면서. 연우에게 도로 물었다.
“그럼 그때 당시 그대의 대답은?”
“가겠다고 했다.”
“지금도 대답은 동일한가?”
“당연히. 우리를 구해 준 전우, 아니, 동지가 있던 곳인데.”
“동지라, 동지…… 그래. 그대의 말이 맞도다. 라오의 동지라면 나의 동지이기도 하며, 또한 혈국의 동지이기도 하지.”
칼리번 후작의 눈이 스산하게 빛났다.
“이곳에서 맹세하지. 라오의 뜻에 따라. 그대가 우리 혈국을 배반하지 않는 한, 우리는 영원토록 그대를 맹우로 생각하며, 어떤 위험이 온다 해도 그로부터 그대를 보호해 주겠노라고. 그대의 뜻이 있는 곳에, 혈국과 폐하의 뜻이 함께할 것이다.”
목소리에 마력이 잔뜩 실렸다.
“그리고 이런 일을 저지른 엘로힘은 그만한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치이잉-
[‘칼리번 후작’의 맹약이 선언되었습니다.]
칼리번 후작과 연우를 따라 보이지 않는 실이 연결되었다. 방금 전 그가 내뱉은 말들이 전부 마나의 맹세에 따라 언령으로 작용하여 시스템에 적용된 것이다. 엘로힘에 대해서는 선전포고라고 봐도 무방했다.
절친한 동료들 사이에서도, 군신 관계에서도 절대 쉽게 맺지 않는 맹약이었지만.
그만큼 칼리번 후작의 울분이 극심하단 뜻이었다.
칼리번 후작은 맹약이 제대로 이뤄진 것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연우를 돌아보면서 다시 한 번 더 혈국으로 초빙을 하고자 했다.
하지만.
“후작님.”
그때 갑자기 수하가 다급히 달려와 칼리번 후작의 귀를 빌렸다. 곧 칼리번 후작의 인상이 딱딱하게 굳었다.
연우는 그의 표정 변화를 읽고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눈치챌 수 있었다.
‘시작했군.’
칼리번 후작은 조금 찝찝한 얼굴로 연우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아무래도 초빙은 다시 또 미뤄야 할 것 같다. 여름여왕이 무슨 사고를 친 것 같아서.”
레드 드래곤이 움직이는 만큼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겠지. 연우는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급할 건 없으니까. 이야기는 다음에.”
“이해해 줘서 고맙군.”
칼리번 후작은 몸을 반대로 돌리면서 수하들과 함께 스테이지를 빠르게 벗어났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브라함이 연우에게 다가왔다.
“카인.”
연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희도 가도록 하죠.”
연우와 일행은 활짝 열린 포탈 위로 몸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