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226화 (10권) (226/862)

10권

1화. 마녀 사냥 (1)

화아악!

칼리번 후작은 포탈을 타고 건너편의 공간으로 넘어왔다. 탑 외 지역. 그곳은 23층 스테이지와 다르게 뜨거운 공기로 가득했고, 비릿한 피 냄새가 잔뜩 풍기고 있었다.

그리고 보이는 광경에. 그의 얼굴이 단번에 굳었다.

그가 발을 디딘 장소는 온통 폐허였다. 갖가지 망가진 건물이며 곳곳에 남은 격전의 흔적들.

순간, 칼리번 후작은 자신이 포탈을 잘못 연 건가 싶을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좌표를 찍은 곳은 분명히 켈라트 경매장이었다.

탑의 세계를 통틀어도 이만큼 번영한 곳을 찾기 힘들 정도라는 곳이 온통 폐허가 되었으니 잘못 찾아온 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무너진 건물의 잔해 위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혈국의 수하들을 본 순간.

칼리번 후작은 자신이 잘못 찾아온 게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떻게 된……!”

“왔는가?”

칼리번 후작이 수하들에게 소리를 치려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아르드바드 공작의 목소리. 후작은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헛바람을 들이켜고 말았다.

“공작님……!”

“너무 호들갑 떨지 마라. 다른 신하들이 동요하지 않는가.”

아르드바드 공작은 별것 아니라는 식으로 한 손을 휘저으며 터덜터덜 걸어와 수하들 옆에 털썩 앉았다.

오른쪽 소매가 비어 있었다. 언제나 우람한 근육을 자랑하던 팔뚝이 사라지고 없었다.

“어…… 떻게 된 것입니까?”

칼리번 후작은 울분을 억지로 꾹 눌러 담았다.

혈국이 궐기를 시작한 이래. 칼리번 후작이 검을 쥔 이래, 수많은 전장을 누비고 다녔지만, 이토록 패색 짙은 전장은 본 적도 없었다.

악마의 숲이 망가진 이후로 줄곧 23층에만 머물고 있었기에. 그는 아직 주변 소식에 많이 느린 상태였다.

아르드바드 공작은 손에 쥐고 있던 빵을 한입 크게 물어뜯으면서 담담하게 대답했다.

“레드 드래곤이 미쳐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 말씀은……?”

“트루메기투스의 탁본인지 뭔지 하는 것은 들은 적 있겠지?”

“예.”

“그걸 올린 경매장에서. 레드 드래곤이 죄다 깽판을 놓았다. 마탑, 황금충, 관리국까지 가릴 것 없이 죄다 적으로 돌리는 것으로도 모자라. 흠!”

칼리번 후작은 뒷내용을 알 것 같았다. 경매에 참여하기만 한 다 른 클랜들까지 적으로 돌렸단 뜻이겠지.

대충 어떻게 된 그림인지도 그려졌다.

탁본을 강탈하려는 레드 드래곤과 이것을 저지하려는 여러 세력들 간의 충돌. 여기서 레드 드래곤이 이긴 것일 테다.

사실 놀라울 건 없었다. 굴욕적이긴 하지만. 아무리 혈국이라고 해도 레드 드래곤에 비할 바는 아니었으니까. 녀석들은 정말 탑 전체와 싸워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정도로 강했다.

다만 쉽게 믿을 수 없는 건. 아르드바드 공작의 한쪽 팔을 가져간 자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가 아는 아르드바드 공작은 절대 이렇게 누군가에게 패배할 자가 아니었다. 식탐황제라면 또 모를까. 아니, 식탐황제라고 해도 이렇게 일방적으로 공작을 밀어붙일 수는 없었다. 괜히 괴력난신의 ‘력’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르드바드 공작은 칼리번 후작의 시선을 알면서도 더 이상은 얘기하고 싶지 않다는 듯, 가볍게 손사래를 치면서 물었다.

“그보다 독식자 쪽은 어떻게 되었지?”

“한 번 수도를 방문하겠노라 약조를 받았습니다. 또한, 라오 남작과 관련된 것은…….”

칼리번 후작은 자신이 파악한 바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아르드바드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부 자신들이유추했던 내용이었으니까. 연우를 찾은 것은 좀 더 상황을 파악한다는 명분 아래, 수도로 초빙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군. 이것으로 폐하의 근심은 던 셈이로군. 그나저나. 엘로힘. 그놈들도 이제는 제정신이 아니로구나.”

아르드바드 공작의 두 눈이 활활 타올랐다.

레드 드래곤에 이어 엘로힘까지. 왜 이리도 자신들을 건드리는 놈들이 많은 것인지.

“역시 이 세계에 있는 것들은 전부 싹 다 불태워 박멸해야 할 해충에 지나지 않는구나. 약속된 땅을 되찾기가 왜 이리도 힘이 드는 것인지.”

아르드바드 공작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리면서.

“칼리번.”

후작을 불렀다.

“예. 공작 전하.”

칼리번 후작은 재빨리 한쪽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전장에서 총사령관의 명령은 황제의 뜻과도 같은 것. 후작의 눈이 광망을 번뜩였다.

“군(軍)을 일으킬 것이다. 준비하라.”

군. 황제의 뜻을 실현하는 자신들을 감히 방해하는 해충들을 쓸어버리겠다는 뜻이었다. 선전포고였다.

칼리번 후작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동안 아르티야라는 공통된 적이유산처럼 남겼던 평화가, 드디어 깨어지려 하고 있었다.

“명을, 받듭니다!”

* * *

아르드바드 공작과 칼리번 후작 이 수하들과 함께 사라지고 한참 뒤.

새로운 붉은색 포탈이 열리면서 연우와 일행이 나타났다.

“엉망진창이로군.”

브라함은 켈라트 경매장, 아니, 경매장이었던 곳을 둘러보면서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다른 클랜들을 적으로 돌린 것까지는 그렇다 치자. 하지만 관리국이라니? 거기다 경매장을 건드렸다는 건, 여러 신비 상인들의 조합도 함께 적으로 돌렸단 뜻이었다.

시스템을 이용한 관리자들이 가진 권한과 힘은 플레이어들로선 쉽게 측정하기 힘들다. 특히 12지신으로 대두되는 최고 관리자들은 신과 악마들도 섣불리 건드리지 못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들이 나서서 제재를 가하기만 해도, 레드 드래곤은 큰 타격을 피할 수 없었다.

게다가 신비 상인 조합은 또 어떤가? 그들이 다른 클랜이나 관리국처럼 무력으로 나설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레드 드래곤은 거대한 덩치만큼이나 수많은 물자를 필요로 한다. 그러니 여러 조합이 나서서 보급을 끊기만 해도 싸움이 힘들어질 것이다.

어린애라도 알 수 있는 것을, 레드 드래곤이 모를 리는 없을 텐데.

믿는 구석이 있는 걸까? 하지만 이 정도면 오만하기를 넘어서, 그냥 다 같이 망하자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그만큼 놈들도 다급하다는 뜻일 겁니다.”

“하긴. 놈들의 왕이 죽기라도 하면 모든 게 끝장이니까.”

연우의 말에 브라함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름여왕이 죽거나 권능을 잃는 것만으로도 모래성처럼 무너질 곳이었으니. 생각해 보면, 그만큼 녀석들의 처지가 절벽 끝으로 내몰렸단 뜻이었다.

“여기다 두어 번 걷어차면, 아예 낭떠러지 아래로 추락하겠군.”

“그만한 덩치가 추락하면 꽤나 볼 만하겠죠.”

연우는 피식 웃으면서 그림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부.”

츠츠츠-

그림자가 높게 일어나면서 로브를 뒤집어쓴 리치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명. 하십. 시오.」

“레드 드래곤이 어디로 갔는지 찾아.”

부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상공으로 높이 두둥실 떠올라, 검은 수정구를 들었다.

화아악! 수정구가 시린 빛을 토하면서 갖가지 마법을 뿌려 대기 시작했다.

녀석에게 건넸던 룬 마법과 빅토리아의 논문, 현자의 돌을 연구 하면서 더해진 여러 지식, 권능 무면목 법서, 그리고 이번에 추가된 악마술까지.

갖가지 마법을 받아들이면서 부는 빠른 속도로 성장해 이제는 웬만한 리치의 수준을 넘어서고 있었다.

브라함은 그런 부를 보면서 묘한 눈빛을 떴다.

“확실히 저 친구, 볼 때마다 대단하군. 대체 어디서 찾은 친구인가?”

“무슨 말씀이십니까?”

연우가 부를 찾은 건 보상으로 얻은 귀걸이에서였다. 연우가 알고 있는 건, 부가 오래전에 플레이어였다는 점밖에 없었다.

“음? 모르고 있었나? 아직 스스로 자각은 못한 것 같네만. 저 친구, 아마 생전에 이름깨나 날렸을 거야. 아무리 리치라고 해도 이런 성장은 말이 안 되지. 정확하게는 성장이 아니라, 제자리를 찾아가는 중이라는 말이 맞을 거야.”

브라함은 손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저 정도라면 자네가 데리고 있는 다른 세 친구보다도 훨씬 위였을 것 같네만. 지금으로 치면…… 아홉 왕쯤은 될 것 같군.”

「……!」

「……!」

『……!』

심령을 따라. 경악에 찬 샤논, 한령, 레베카의 감정이 전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아직까지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부를 너무 높이 평가하니, 그동안 녀석을 아래로 여기고 있던 그들로서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연우도 묘한 눈빛을 떴다.

‘부가, 원래는 아홉 왕 급이었다고?’

연우가 여태 만났던 아홉 왕은 단둘. 무왕과 여름여왕이었다. 하지만 다른 자들도 얼핏 21층의 그림자 도장에서 봤기에, 그들이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부가 거기에 비교될 거라니. 도무지 짐작이 가질 않았다.

더구나 그런 녀석이 어떻게 망령으로 떨어지고, 이상한 아티팩트에 속박되어 한낱 튜토리얼의 보상으로 나타난 것이었을까?

게다가 당시 부가 빙의되어 있던 아티팩트의 등급은 D. 그만한 인물이 사용할 물건이 절대 아니었다.

심지어 ‘부’라는 이름도 부두술사 출신이었다는 정보 하나만으로 붙인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렇게 격이 하락하게 된 이유라도 있었던 걸까? 아홉 왕 급의 인사가 한낱 망령 따위로 떨어질 만한?

하지만 부는 그런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연우와 브라함의 대화를 들었을 텐데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부의 목소리가 울렸다.

「보여. 드리겠습니다.」

검은 수정구가 시린 빛을 토했다.

동시에 연우의 망막 위로 여러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이곳에서 벌어졌던 일들이.

화아악!

-드디어 미친 것이냐, 레드 드래곤!

-보물이 본래 주인을 찾아가는 것뿐이지. 안 그래? 힘으로 재물을 강탈한다. 원래 너희들도 잘하는 짓이지 않나?

초도 탐의 비웃음에서부터 시작된 레드 드래곤과 여러 세력들 간의 충돌을 시작으로.

켈라트 경매장은 삽시간에 붕괴되기 시작했다.

연우는 유령이라도 된 것처럼, 높은 허공에서 떠 있는 채로 경매장에서 벌어졌던 모든 일들을 지켜볼 수 있었다.

〈혼란스러운 눈〉. 무면목 법서에 서술된 마법 지식을 바탕으로 부가 창안한 마법이었다. 사물에 강하게 남은 사념을 바탕으로 옛 사건을 재구성하는 특징을 갖고 있었다.

레드 드래곤은 정말이지 압도적이었다.

용생구자의 막내, 탐이 나타난 것만 해도 놀라운 일인데. 그들은 여러 클랜들을 압도적으로 밀어 붙이기까지 했다.

아르드바드 공작의 오른팔이 검노 하난이 휘두른 지팡이에 썰려 허공으로 튀었고, 마군의 두 주교는 쌍둥이 살인마 잭, 리퍼와 부딪치면서 승기를 잡지 못했다.

호크 아이 트로이는 손톱을 길쭉하게 빼면서 반발하는 마탑의 학자들을 학살하는 등, 보이는 것은 여러 충격적인 광경의 연속이었다.

‘개판이군.’

연우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애당초 이런 광경을 노리긴 했다지만,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판이 크게 커질 것 같았다.

‘그럴수록 나야 좋겠지만.’

물이 흐려지면 흐려질수록. 분탕이 커지면 커질수록. 이득을 취하는 건 자신이었다.

그사이 탐은 탁본을 챙기고, 포탈을 열어 76층으로 이동했다.

켈라트 경매장에서의 소란은 거기서 끝났지만, 그 뒤에 남은 혼란은 한참 동안 길게 이어졌다.

우왕좌왕하는 여러 클랜과 플레이어들 사이로.

연우는 그토록 찾던 마녀들을 찾을 수 있었다. 그는 시야를 아래로 돌리면서 녀석들에게로 다가갔다.

연우에게도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다르크와 마가릿.’

비에라 듄에게는 언제부턴가 그녀를 보호하듯이 따라다니는 존재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마녀들의 어머니, ‘밤’에게서 잉태되었다는 초대 마녀들은 언제나 비에라 듄을 지키면서 스승이 되어 주기도, 그리고 수족이 되어 주기도 했다.

비에라 듄은 발푸르기스의 밤의 수장이지만, 그녀 혼자서 집단을 이끌 수는 없었다. 그래서 대모가 되어 그녀를 지켜 주는 자들이 따로 있었다.

초대 마녀들.

녀석들의 기원에 대해서는 아직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탑이 열린 초창기부터 살아온 늙은 괴물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다르크와 마가릿은 그런 초대 마녀들에 해당하는 자들로, 비에라 듄에게 각각 ‘매혹’과 ‘신통’을 가르쳐 주기도 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에메랄드 타블렛이 어째서 저곳에 있냔 말이야. 여러 가지로 수를 쓴 흔적들이 있긴 하지만…… 내용물은 정말 에메랄드 타블렛이라고!

-누구에게서 흘러나간 걸까? 리언트 쪽인 것 같은데. 대체 누가 이딴 짓을…….

두 마녀가 경매장에 참여한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탁본의 진위를 확인해 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진짜라는 사실을 알았고, 누군가가 고의로 탁본을 흘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마 바보가 아니라면, 이 일로 인한 여파가 자신들에게 튈지도 모른다는 사실쯤은 감지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내색할 수는 없는 일.

-일단은…… 자리부터 피하자.

우선 원하던 대로 에메랄드 타블렛을 확인했으니, 자신들의 본거지인 브로켄 성으로 돌아가 뒷일에 대해 논의를 나눌 예정이었다.

다르크와 마가릿은 휘하의 어린 마녀들을 데리고 자리를 피했고, 멀찍이 떨어진 장소에서 마법을 외워 텔레포트를 발동시켜 본거지로 되돌아갔다.

‘부!’

연우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브로켄 성은 특정된 물리적 장소에 있지 않았다.

마녀들이 말하는 ‘끝없는 밤의 세계’라는 아공간에 위치했고, 그곳으로 통하는 통로나 좌표는 여태 알려진 바가 없었다.

그래서 녀석들이 남긴 흔적을 쫓아 좌표를 찾도록 했고.

결과는.

「알아. 냈습니다.」

빙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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