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마녀 사냥 (7)
“이건 뭐야? 생긴 건 꼭 누렇게 뜬 옥수수처럼 말라 비틀어져선.”
……아난타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내게 강한 인상을 주었다. 누렇게 뜬 옥수수라니. 같이 자리에 있던 동료들은 빵 터졌고, 비에라 듄은 고개를 돌릴 정도였다.
그때 처음으로 난 진지하게 거울을 보고 싶은 충동에 잠겼다. 그래도 여태 살아오면서 못생긴 얼굴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정말 그렇게 생겼나?
하여간 그런 독설을 서슴없이 내뱉을 정도로 아난타는 독기에 가득 차 있었다.
그녀에겐 타인의 접근을 꺼리게 만드는 날카로운 분위기가 있었다. 그래서 팀원들도 그 자리에선 가볍게 웃었지만, 그녀와 굳이 가까이 할 필요가 있냐면서 내게 몇 번이고 물었다.
그런데.
왜 유독.
내 눈에는 꼭 이만 잔뜩 드러냈을 뿐, 꼬리는 살랑살랑 흔드는 강아지처럼 보였던 건지.
나는 문득 그녀의 속내를 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용인이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 그랬던 건지.
가까워져 보고 싶었다.
단순히 브라함이 내건 조건이 아니더라도.
동생이 처음 아난타와 만났을 때 받았던 느낌은 ‘표독스럽다’였다.
그리고.
‘외로워 보인다’도 있었다.
아마 차갑지만 그 속에 숨겨진 쓸쓸함이 동생의 마음을 잡아당긴 것 같았다.
‘원래 오지랖이 넓은 녀석이었으니까.’
언제나 방구석에 처박혀 있는 것을 좋아하던 주제에, 눈치는 빨라서 여기저기에 참견하지 않는 곳이 없던 녀석이었으니까. 탑에 와서도 성격은 바뀌지 않았던 것이다.
아난타는 처음에 뒤를 쫄래쫄래 따라다니는 동생이 너무 귀찮기만 했다.
그래서 독설을 퍼부으며 으르렁거려 보기도 하고, 나중에는 칼을 들고 공격하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거머리처럼 끈질기게 따라붙어서 ‘친구가 되자’고 말하는 동생의 끈질긴 구애 아닌 구애에, 끝내 한숨을 내쉬면서 물었다.
-너, 나 좋아해?
-아니. 나 애인 있는데.
-뭐야, 그럼? 왜 자꾸 귀찮게 구는 건데? 노인네 만나라고 하기만 해 봐. 그 혓바닥부터 잘라 줄 테니까.
-브라함 만나라는 소리만 안 하면 칼 안 휘두를 거지?
-보고.
-으흐흐. 사실 같이 놀아 주려고.
-뭐?
-입은 걸걸하면서, 눈은 꼭 눈 만난 강아지처럼 초롱초롱하잖아. 그래서 놀아 주려고. 고맙지 않냐? 나 같은 친구가 세상 어디 있……!
-이 새끼가, 진짜!
-우와악! 칼 안 휘두른다며!
저런 장난 같은 대화들에서. 그녀가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확실한 건, 그 대화를 기점으로 아난타가 동생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물론, 마음을 연 대상은 동생에게만 한정되었을 뿐. 아르티야에 마음을 연 건 아니었다. 아르티야도 계속 욕설만 퍼붓는 아난타에게 질린 상태였기에 언제부턴가 그녀 주변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은 아난타와 브라함의 화해로 이어지고, 동생에 대한 연모로, 그리고 세샤의 구출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바로 눈앞에 그런 아난타가 있었다.
‘왜 이렇게 있는 거냐. 아난타.’
일기장 속에서나, 브라함의 기억 파편으로만 봤던 모습이 눈앞에 있었다.
동생을 열렬히 사랑했지만, 끝내 그 보답을 받지 못했고.
대신에 세샤를 딸처럼 키웠지만, 끝내 딸을 제대로 어루만져 주지도 못했던 비운의 여인.
그렇게 세상 구석까지 내몰리다 결국 마녀들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부는 여러 마녀들의 영혼을 심문했고, 그 과정에서 얻은 아난타와 관련된 사념 정보를 연우에게 고스란히 넘겼다.
덕분에 연우는 아난타가 겪은 일들에 대해서 대략적으로 알 수 있었다.
-실험체는? BX-71은 어디 있지?
-실험체? 그딴 걸 왜 나한테 찾아?
-모른 척한다고 달라질 것 같나? 네년이 데려간 용인 말이다! 우리들의 어머니를 잉태시켜야 할 그릇!
-하하! 하하하!
-왜 웃는 거지?
-너희들, 정말 미쳤구나.
-뭐?
-비에라 년에게 똑똑히 전해. 자기 딸에게 실험체니 그릇이니 지껄이는 그 주둥이. 언젠가는 내가 찢어 버리겠다고.
실험체 BX-71.
발푸르기스의 밤이 세샤를 부르는 호칭.
그녀들은 자신들을 잉태했다던 ‘위대한 어머니’를 이 땅에 강림 시키고자 아주 오랫동안 수많은 연구를 진행했고, 그 과정에서 파우스트의 지식을 손에 넣었다.
그리고 갖가지 인체 실험을 자행하다가, 끝내 용인인 세샤를 이용하기까지 이르렀다.
아난타뿐만 아니라, 이 방에 있는 수많은 유리관 속에 갇힌 사람들이 전부 그런 실험체들이었다.
면면도 가지각색이었다.
평범한 성인 남자부터 새끼 고블린, 정령, 노인 등등. 공통점이 있다면, 보라색 수액에 잠긴 채 아무 미동도 없이 가만히 누워만 있다는 것이었다. 마치 인형처럼.
이들에게는 이름이 없었다. 그저 실험 번호만 있을 뿐. 실험이 잘못되어서 죽으면 폐기 처분할 물건밖에 되지 않았다.
세샤 역시 마찬가지. 세샤도 아난타를 만나고 난 뒤에야 ‘세샤’라는 이름을 얻을 수 있었다.
-기대해도 좋아. 사실 내가 이렇게 호락호락 당할 정도로 선인은 아니거든? 너희들 전부 팔다리를 찢어서 죽여 줄 테니까.
아난타는 계속된 고문에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상태로도 끝까지 저항했다.
아니, 오히려 피투성이가 된 몰골로도 예리한 눈빛을 보이면서 마녀들을 노려보기까지 했으니.
때문에 꽤 많은 마녀들은 아난타에게서 섬뜩한 느낌을 받아야만 했다. 분명 움직일 수 없게 단단히 구속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리고 결국 아난타에게서 아무런 정보도 밝힐 수 없을 것 같다는 판단 하에, 발푸르기스의 밤은 아난타에게 PA-12라는 뜻을 알 수 없는 개체 번호를 부여하고 실험실로 보냈다.
아난타 역시 용인. 비록 세샤와 다르게 자아가 완전히 갖춰져 그릇으로 쓰긴 힘들었지만, 갖가지 실험을 하기엔 좋았다.
‘그리고 실제로 엘로힘에게 비싼 값에 거래하려 하기도 했었지.’
이 역시 마녀들의 영혼을 쥐어 짜면서 알게 된 사실이었다. 발푸르기스의 밤은 최근에 엘로힘이 숙원 사업에 착수했다는 말을 듣고 접촉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고대종 복원 작업? 쓸데없는 짓을 잘도 하는군.’
엘로힘들의 혈통에 대한 집착은 정말이지 신물이 날 정도였다. 사실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후손을 볼수록 신혈(神血)은 점차 옅어지고, 권능도 사라져 가니까. 그래서 몇몇 세력가들은 암암리에 근친상간을 일삼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러는 데도 한계가 있으니, 아난타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쓸모가 다할 때까지 씨받이로 쓰다가, 나중에는 갖가지 실험 용도로 부리면서 폐기 처분하겠지.
아무리 고고한 척해도, 엘로힘도 발푸르기스의 밤과 똑같았다. 언젠가는 치워야 할 쓰레기였다.
‘일단은 구하자.’
연우는 부와의 연결 고리를 통해 실험실을 장악하고 있는 마법진의 소스 코드를 파악하고, 손을 뻗어 마력을 마법진과 접촉시켰다.
현자의 돌의 장점 중 하나를 꼽으라면, 어느 종류의 마력으로도 전환이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여기에 칭호 ‘마력의 축복을 받은’의 효과가 더해지자, 금세 해킹이 가능해졌다.
지잉, 펑-
아난타의 유리관으로 향하는 모든 펌프와 파이프가 일제히 기능이 차단되면서 떨어졌다. 바닥에 끈적끈적한 보라색 액체가 한가득 쏟아지고, 김빠지는 소리가 나면서 천천히 유리관의 문이 열렸다.
연우는 재빨리 아난타의 안색을 살폈다. 모든 마법과 실험이 중단되었는데도, 그녀는 일어날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안색이 창백했다.
‘탈진이 너무 심해. 이성도 완전히 제압되었고. 빨리 치료가 필요해.’
아예 인형으로 만들 속셈이었던지, 이성이 거의 마비가 된 상태였다.
연우는 임시방편으로 치유 마법을 잔뜩 걸어 탈진을 중단시키고, 인트레니안을 열어서 미리 챙겨 왔던 캡슐을 꺼내 그곳에 아난타를 조심스레 눕혔다.
부상자가 생겼을 때를 대비해 따로 챙겼던 힐링 캡슐이었다. 이 속에 들어가 있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치료 효과가 있었다.
“다음에 눈을 떴을 때는 그토록 보고 싶던 가족들이 있을 테니까. 조금만 더 참고 기다려.”
연우는 곤히 잠든 아난타의 이마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그러자 여태 살짝 일그러져 있던 그녀의 눈꼬리가 부드럽게 풀어졌다.
자신의 말을 듣기라도 한 걸까? 아니면 단순한 우연인 걸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연우는 다행이라고 여기면서 힐링 캡슐을 도로 인트레니안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실험실에는 아난타 말고도 많은 실험체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에게서는 아무런 생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숨만 쉬고 있을 뿐, 이미 영혼은 죽어 있는 상태였다.
그렇다면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게, 편하게 보내 주는 것이 맞겟지.
우웅-
연우는 오러를 손끝에다 잔뜩 끌어모았다. 그리고 이대로 터뜨리려는 순간.
“이게 뭐야?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창고가 왜 텅 비어 있어?”
“보물이 전부 사라졌습니다! 유령 함대의 보석 상자가 보이질 않습니다!”
“무구 창고도 텅 비었습니다!”
“서고도 똑같습니다! 마, 마법 서적들이며 에메랄드 타블렛까지 싹 사라졌습니다!”
“대체 언제 쥐새끼가……!”
“실험실! 실험실로 뛰어! 당장! 실험실이 위험하다!”
지하 통로 전체로 넓게 퍼뜨려 놨던 초감각 너머로. 갑자기 마녀들이 바쁘게 뛰어다니는 것이 느껴졌다.
텅 비어 버린 보물 창고와 서고를 보고 난리가 난 것이다.
‘시간이 조금 부족하지 않을까 했었는데. 부가 생각보다 잘해 준 것 같군.’
저들로서는 얼마나 황당할까. 잔뜩 일그러졌을 비에라 듄의 얼굴이 떠오르자, 연우는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주인. 님.」
그때, 부가 그림자 위로 해골 머리만 불쑥 올리면서 메시지를 전달했다.
「적들. 이.」
“그래. 수고했다.”
「주인. 님의 기쁨은. 제게. 크나큰. 영광. 입니. 다.」
부는 연우의 칭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푹 숙이면서 몸을 파르르 떨었다. 두 눈두덩이 사이로 지펴진 인페르노 사이트가 환희로 일렁였다.
연우는 다섯 손가락을 강하게 튕기면서 응축시켰던 오러를 쏘아 보냈다. 탄지(彈指). 최근에 오러를 연구하면서 터득한 기술이었다.
피피핑!
수십 개의 탄지는 유리문을 뚫고 정확하게 실험체들의 미간에 박혔다. 실험체들의 머리가 크게 뒤로 휘청거리다가 힘없이 떨어졌다. 핏물이 보라색 액체와 뒤섞이면서 부서진 유리 조각과 함께 바닥에 잔뜩 쏟아졌다.
부는 바닥을 흥건하게 적신 보라색 액체를 남김없이 흡수했다. 그것도 전부 현자의 돌을 만드는 재료들. 강화를 위해서는 필수였다. 이미 지하 창고들에 있던 다른 현자의 돌들도 죄다 수거한 상태였다.
비에라 듄과 마녀들이 지하 실험실에 도착한 건, 연우와 부가 기척을 완전히 숨긴 바로 뒤였다.
“어, 어, 어떻게 이런 일이……!”
“실험체들이!”
“PA-12는? PA-12부터 찾아!”
“PA-12만 보이질 않습니다!”
“제기라아알!”
“흔적이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쥐새끼들도 멀리 도망치지 못했을 테니 어서 찾아! 서둘러!”
마녀들은 엉망이 된 실험실에서 가장 먼저 아난타를 찾았다. 하지만 아난타가 없는 사실을 눈치채자 바쁘게 주변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사이.
다른 마녀들은 손끝을 덜덜 떠는 비에라 듄을 진정시켜야만 했다.
“그릇을 만들 재료가…… 어머니를 강림시킬 그릇이……!”
비에라 듄이 위대한 어머니로부터 받게 된 계시(啓示).
그것은 자신이 몸을 담기에 부족하더라도, 임시방편으로라도 앉을 그릇을 준비해 두란 것이었다. 그런다면 몸소 내려와 감히 자신의 단잠을 깨우는 것들을 징벌하겠다는 내용까지 담겨 있었다.
그건 계시라기보다는 신탁에 가까운 것이었기에, 비에라 듄은 가장 먼저 아난타를 떠올렸다.
비록 아난타를 엘로힘에게 비싼 값에 넘기고 동맹까지 맺을 예정이었지만.
지금은 워낙에 상황이 급박한 데다가, 이렇게 아이온이 아예 대놓고 뒤통수를 치려는 상황에서는 남아 있는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그릇이 되어야 할 아난타가 사라지게 되면 모든 계획이 헝클어지게 된다.
다급히 그릇이 될 만한 다른 것들이 있나 싶어 주변을 살폈지만, 실험체 전부가 머리에 주먹만 한 바람구멍을 달고 있어 쓸 수가 없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정말 발푸르기스의 밤은 끝장이었다.
“듄, 일단 진정하십시……!”
“진정?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다들 뭐하는 거야? 일이 여태 이렇게 될 때까지 다들 그동안 뭘 하고 있었던 거냐고!”
비에라 듄은 자신의 어깨를 짚으려는 마녀의 손을 매섭게 쳐내면서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흰자위만 남은 눈이 유달리 매서웠다.
마녀들은 놀란 나머지 흠칫 물러서고 말았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어도 단 한 점도 흐트러지는 기색이 없던 수장이, 처음으로 앙칼진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들은 여태 자신들이 모시던 비에라 듄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떠올릴 수 있었다.
비에라 듄은 정말 마녀다운 마녀였다.
그녀는 아무런 배경도 없이 클랜에 들어와 경쟁자들을 모두 물리치고 수장이 된 인물이었다.
그동안에 경쟁자들은 하나같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죽었다. 중독, 암살, 세뇌, 실종……. 증거는 없지만, 모두가 비에라 듄이 철저한 계획 아래에 저지른 짓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초대 마녀들을 비롯해 모든 마녀들이 그녀를 두려워했다. 달콤한 애정을 나눴던 연인의 심장에 서슴없이 칼도 박아 넣은 자가 아닌가. 그들 따위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처치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더구나 위대한 어머니의 총애를 받을 정도로 재능도 깊었으니. 어느 누구도 그녀를 건드릴 수 없었다.
한동안은 별다른 일이 없어 잠잠했다지만. 비에라 듄이 가진 성정이 완전히 바뀐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동안 억눌러왔기 때문에 독기는 더 지독했다.
샤아아!
고깔모자 아래로 내려온 머리카락들이 칭칭 감기면서 뱀이 되었다. 시그니처 스킬, 〈메두사〉. 제 부모를 잡아먹고, 눈이 마주치는 상대는 돌로 만든다는 뱀들이 길게 몸을 뻗어 마녀들의 목을 돌돌 감았다.
마녀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수십 마리의 메두사 뱀과 독기로 일렁이는 비에라 듄의 흰자위가 그녀들의 숨을 턱턱 막히게 만들었다.
“모두들. 똑똑히 들어요. 불청객들이 이곳으로 오기 전에 어떻게 든 PA-12, 아니, 아난타, 그년을 찾으세요. 당신들이 전부 여기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
“…….”
“알아들었나요?”
“예!”
“아, 알겠습니다!”
“뛰세요. 그럼.”
비에라 듄의 목소리는 다시 차분하게 가라앉았지만, 싸늘한 분위기만큼은 여전히 마녀들의 목을 단단히 옥죄었다.
그녀들은 다급하게 뛰어야만 했다. 정말 이대로 있다가는 메두사의 먹이로 전락할 수가 있었다.
비에라 듄도 적을 추격하기 위해 여러 마법을 발동시켰다. 보안 체계가 해킹당한 흔적이 있었다. 대체 소스 코드를 어떻게 훔친 건지, 원인과 방법을 찾아 역으로 추적할 셈이었다.
그러다 그녀는 뜻밖의 사실을 알아차렸다. 마력의 사용 패턴이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었던 것이다. 용종의 체계와 흡사했다. 아니, 정확하게는 옛 연인과 비슷했다.
분명 자신이 죽였던 옛 연인.
순간, 비에라 듄은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듯한 공포를 느꼈다. 그래서 다른 마녀들에게로 고개를 돌리려는데.
콰앙!
갑자기 천장에서부터 폭발이 일어났다. 어마어마한 고열을 품은 검은 불길은 천장과 벽면을 따라 잔뜩 퍼져 나가면서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주변에 있던 마녀들을 흔적도 없이 고스란히 녹이고, 수색에 나섰던 마녀들의 뒤를 쫓아 찢어 버렸다.
실험실, 서고, 창고. 어느 구획할 것 없이, 지하 6층에서부터 시작된 검은 불길은 단숨에 1층까지 치고 올라가 지하 전체를 위아래로 크게 격동시켰다.
그러다 지하가 과부하를 견디지 못하고 통째로 무너지면서 함몰 되었다. 수많은 낙석들이 우수수 쏟아지면서 발푸르기스의 밤이 지난 세월 동안 쌓은 모든 결과 물들을 통째로 무너뜨리고 말았다.
그리고.
연우가 검은 불길을 헤집으면서 나타나, 비에라 듄을 보호하던 결계를 거침없이 부수고 바로 그녀의 눈앞까지 다가왔다.
“너……!”
검은 가면 사이로 비치는 두 눈동자를 마주친 순간, 비에라 듄의 눈동자는 활짝 커지고 말았다.
비록 가면을 쓰고 있다지만. 5년이 넘는 시간 동안 손을 잡고, 입을 맞추고, 살을 섞으면서 마주치곤 하던. 아침 햇살과 함께 눈을 뜨면 자신을 보며 환하게 웃고 있던. 그 눈을 알아보지 못할 수가 없었다.
죽었던 옛 연인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퍼억!
하지만 연우는 그 어떤 대화도 할 가치가 없다는 듯, 가차 없이 비그리드를 휘둘렀다.
잘린 비에라 듄의 머리가 허공으로 튀었다. 검은 불길에 휩싸이기 전까지. 녀석의 두 눈에는 충격과 공포, 그리고 경악이 가득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