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마녀 사냥 (9)
마장대검이 비에라 듄의 목에 틀어박히려는 순간.
챙강!
갑자기 마장대검이 보이지 않는 보호막에 부딪쳐 위로 튕겨 났다. 그리고 갑자기 하늘에서부터 내려앉는 살기.
아주 짧은 순간 동안에 연우는 비에라 듄을 마저 죽이고 물러나야 할지, 아니면 몸만 내빼야 할지 결정해야 했다.
그리고 결국 비에라 듄을 놔두고 즉각적으로 재빨리 몸을 뒤로 물렸다. 동시에 벗고 있던 가면을 다시 얼굴에 도로 썼다.
쾅!
그러자 연우가 있던 자리로 무언가가 세게 내려앉았다. 바닥이 무너지면서 공간이 위아래로 크게 들썩였다.
“호오. 제법이로군. 그것을 읽어 냈단 말이지? 오행산을 오를 때보다 감각이 제법 많이 단단해졌구나. 애송아.”
보통 랭커들도 목이 달아날 만한 속도였는데 말이지. 다짜고짜 기습을 감행한 녀석은 가볍게 웃으면서 몸을 일으켰다.
키가 작은 탓에, 푹 뒤집어쓰고 있는 로브는 바닥에 질질 끌리고 있었다.
로브 사이로 드러난 얼굴은 악동처럼 익살맞게 웃고 있었다.
하지만 연우는 그 모습에서 등골이 서늘해지는 포악함을 엿볼 수 있었다. 자신의 군주 외에는 세상 모든 것을 찢어발긴다는 마군의 맹수. 역귀가 앞에 있었다.
“킨드레드.”
“그래. 오랜만이구나. 어디 놀라지 않는 것을 보니 내 정체를 알고 있었던 모양이로고?”
킨드레드는 로브를 뒤로 젖히면서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미후왕의 궁전에서 서로 지나친 뒤로 직접적으로 마주치게 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다만, 그동안 이런저런 일이 많았기 때문일까. 왠지 오랜만에 만난 것 같지가 않았다.
“하긴. 모르는 것도 이상한 일이려나? 그렇게나 많이 동선이 겹쳤었으니. 세상사 인연이란 게 참 신기하단 말이지.”
미후왕의 궁전에서도. 악마의 숲에서도. 지금 발푸르기스의 밤에서도.
근 몇 달 동안 킨드레드가 가는 곳에는 언제나 연우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세상에 과연 우연이란 게 있을까? 킨드레드는 없다고 생각했다.
세상 모든 일은 천마께서 직접 주관하시는 것. 그러니 이렇게 만나게 된 것은 천마께서 직접 점지해 주신 일이니. 킨드레드는 기쁜 마음으로 연우를 맞았다. 그의 웃음은 가식 따위가 아닌 진심이었다.
“어떠냐. 브라함은 잘 지내고 있는가?”
“브라함은 죽…….”
“하하. 떽! 아무리 서로 친해질 이유가 없어도 거짓말은 아니 되는 법이지. 내가 설마 그런 것도 모르고 물었을까? 죽긴 죽었겠지. 하지만 지금 제 발로 버젓이 돌아다니는 것을 모를 줄 아는가?”
가면 아래, 연우의 눈빛이 딱딱해졌다. 대체 그걸 어떻게 아는 거지? 분명 칠흑왕의 절망과 관련된 것은 극비 중에서도 극비였다.
일행 중에도 칠흑왕의 절망이 가진 진짜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킨드레드가, 아니, 마군이 어떻게 아는 거지?
하지만 킨드레드는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 씩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천마께서 임하실 곳에 우리가 모르는 것은 절대 없나니. 네가 가진 비밀이 어떤 것인지는 사실 우리도 잘 모른다. 하지만 천마께서는 알고 계실 테니, 우리도 저절로 알게 되는 것이지. 이것 또한 천마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자애로운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광신도들의 말은 반만 알아들을 수 있고 나머지 반은 알아듣기 힘들다는 세간의 말이 틀린 것이 없었다.
하지만 연우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자신이 그동안 어둠 속에서 마군을 지켜봤듯이. 마군 역시 어둠 속에서 움직이며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다는 것.
미후왕의 궁전에서부터 왜 자신을 따라오지 않는가 싶었는데. 따라오지 않았던 게 아니라, 눈만 따로 붙여 뒀던 것이다.
‘앞으로는 움직이는 데 조심해야겠어.’
연우는 속으로 가볍게 혀를 찼다. 자신의 행보는 앞으로도 철저하게 비밀리에 이루어져야 했다. 하물며 마군에게 들킨다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었다.
‘다행이라면 많은 것을 알고 있지는 않아 보인다는 건데.’
만약 녀석들이 자신의 정체를 눈치챘다면. 당장 그를 죽이려 들었을 것이다. 아르티야를 해체시키는 데 가장 앞장선 곳이 마군이었다. 동생과 마군의 대주교는 그만큼 사이가 좋질 않았다.
하지만 지금 킨드레드는 자신에게 호의까지 내비치고 있다. 그렇다는 건 다른 목적이 있단 뜻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러니 애송아. 천마께서 점지하신대로, 이제부터는 우리와 함께 해야겠다. 그동안 나는 네가 나타나기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단다.”
연우가 눈을 가늘게 뜨면서 물었다.
“세샤 때문인가?”
“겸사겸사. 그대를 묶어 둔다면 브라함도 따라올 테고. 하면 그 아이도 같이 올 테지.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다. 너는 미후왕의 후예가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와도 형제라 할 수 있을진대, 섭섭하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미후왕과 마군 간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연우는 유독 세샤가 마음에 걸렸다. 엘로힘은 그렇다 쳐도, 마군이 왜 세샤를 노리는지는 도무지 짐작 가는 바가 없었다.
“세샤를 대체 어떻게 하려는 거지?”
“나도 모른다.”
연우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뭐?”
“하하. 말하지 않았나. 전부 천마의 뜻에 따를 뿐이라고. 천마께서 그러라고 계시를 내리시었고, 그분의 종인 나는 그저 묵묵히 말씀을 따를 뿐이다. 이보다 명확한 이유가 달리 필요하겠는가?”
역시 이들은 정상인의 사고로 이해를 해서는 안 되는 미친놈들이었다.
천마가 세샤를 필요로 해? 하지만 단언컨대, 그건 천마의 뜻이 아닌 대주교의 뜻일 가능성이 컸다.
‘천마가 직접 계시를 내리지 않게 된 건 꽤 오래되었으니까.’
결국 세샤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마군과 대적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였다. 엘로힘이나 혈국처럼. 어차피 달라지는 건 없었다.
쿠쿠쿵!
그때, 요새 전체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성문을 통과한 자들이 벌써 내성까지 침투했다는 뜻이었다.
킨드레드는 이제 숨만 겨우 내뱉는 비에라 듄의 뒷덜미를 잡으면서 연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 이제 잡설은 여기까지다. 곧 잡스런 이교도 놈들이 여기까지 닥칠 것이니. 나와 가자꾸나.”
“싫다면?”
순간, 호선을 그리던 킨드레드의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살갑던 분위기가 반전되면서 흉흉한 살기가 휘몰아쳤다. 입술 사이로 송곳니가 훤히 드러났다.
“감히 천마의 행사를 따르지 않으려 하다니. 불경한 놈이로고. 설마 너에게 다른 선택지가 있을 거라 생각하는 것이냐?”
“선택지야 만들면 그만이지.”
“무슨 말을 할……!”
킨드레드가 으르렁거리면서 한 발자국을 내딛으려는 순간.
콰아앙!
갑자기 요새가 위아래로 크게 요동쳤다. 킨드레드가 등장했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강한 충격파. 지진과 함께 요새가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무슨?”
성내에 있던 모든 물건들이 기울어진 방향으로 쓸려 내려갔다. 천장과 벽면을 따라 균열이 일어나고, 낙석이 분진을 마구 뿜어대면서 우수수 쏟아졌다.
요새가, 무너지려 하고 있었다.
지난 수백 수천 년 동안 발푸르기스의 밤이 있게 만들었던 요새가!
브로켄 성이!
쿠쿠쿠!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이냐, 너!”
킨드레드가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그는 두 번째 주교가 된 후, 처음으로 오싹한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가면 속에 비치는 연우의 두 눈은 웃기만 하고 있었다. 그는 연결 고리를 통해 권속들에게 말했다.
‘시작해.’
* * *
“우리의 주인께서 시작하라는군.”
브라함은 연우의 목소리를 듣고 차갑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 말에, 옆에 있던 갈리어드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활시위를 저만치 높은 상공에 떠 있는 푸른색 거대 크리스탈에게로 겨누었다.
“저것이란 말이지? 그 요상한 결계들을 만든 축(軸)이란 것이?”
브로켄 성을 따라 둥근 반구를 그리면서 다섯 겹으로 이뤄졌던 결계들.
귀계 결진에서 앙계 재진까지 이어지는 결계들은 결국 침입자들을 허락하고 말았지만, 여전히 제대로 작동하는 중이었다.
브로켄 요새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결계들은 겹겹이 쌓인 상공 부분이 가장 튼튼했다. 때문에 플레이어들은 공성(攻城)을 시도하면서도 공중전은 아직 엄두도 내지 못하는 중이었다.
브라함과 갈리어드는 이런 결계들을 완전히 해체시키고자 했다.
결계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축이 있어야 했고, 발푸르기스의 밤은 이것을 어떻게든 숨겨두려 했다.
하지만.
그들이 전혀 염두에 두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죽음’에 있어서는 이미 플레이어들 중에 연우를 따라올 사람이 없다는 점이었다.
[제3천의 영]
[무면목 법서]
두 권능을 이용, 연우는 부의 도움을 받아서 마녀들의 영혼을 쥐어짜 ‘축’의 위치를 알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것들은 브로켄 요새를 둘러싼 여러 협곡들에 몰래 숨겨져 있었다.
연우는 즉각 귀계 결진에서 흩어져 일행들을 찾으러 갔던 권속들에게 일러, 요새로 모이지 말고 각 축의 위치에서 대기하도록 지시했다.
명령을 내리면 곧바로 축을 부술 수 있도록.
현재 파악된 축의 위치는 동서남북, 중앙까지 총 5개.
브라함과 갈리어드가 맡은 곳은 동쪽이었다. 서쪽은 샤논과 판트가, 남쪽은 한령과 에도라가, 북쪽은 레베카가 대기 중일 터였다. 중앙에 있는 축은 부가 언제든지 부술 수 있다고 이야기를 해 둔 상태였다.
물론, 결계를 없앤다고 해서 바로 어떤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뒤에 새로운 공격을 시도할 수는 있겠지. 이미 부와 브라함은 모든 준비가 끝난 상태였다.
‘많기도 많군.’
브라함은 축을 부수기 전에 아주 잠깐 저 발아래를 내려다봤다.
요새로 한창 진격 중인 군중들이 보였다.
동쪽에는 시의 바다가, 서쪽에는 하늬바람 조합 소속의 용병들이. 남쪽에는 마탑과 랭커들이 포진해 있었으며, 북쪽에는 엘로힘이 폭격을 맞아 한창 어지러워져 있었지만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있는 중이었다.
그 외에도 여러 용병단이며 암살 집단 등등. 수많은 인파들이 뒤섞여 있는 모습은 마치 배고픔에 굶주린 아귀들로 보일 정도였다.
아무리 그들이 만든 무대라지만.
불구덩이인지도 모르고 저렇게 불나방처럼 뛰어드는 놈들을 보니 딱하기만 했다.
저만한 위치까지 올랐을 정도라면 분명 명석한 자들일 텐데. 무엇이 저들의 눈을 가린 걸까.
욕심? 야망? 무엇이 되었든 간에 그 어리석음의 결과로 저곳에서 살아 나올 자는 그렇게 많지 않을 듯했다.
“킨드레드, 그 친구의 얼굴이 꽤나 망가질 텐데. 직접 이 두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게 아쉬울 따름이로군.”
브라함은 지금쯤 주인과 마주하고 있을 킨드레드를 떠올리면서 혀를 찼다. 녀석은 과연 알까? 사실 킨드레드가 접촉해 오길 기다린 건, 오히려 연우 쪽이었단 것을?
‘제 놈만 똑똑한 줄 알고 까불다가 도랑에 빠진 꼴이지.’
브라함은 나중에 연우에게 킨드레드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 자세히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마녀들의 영혼을 쥐어짜 심문했다지만. 부는 결계들의 약점을 너무 쉽게 파악했어. 그게 그렇게 쉬운 거였나? 그래도 마녀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것인데 말이지. 옛 기억이 꽤 돌아왔다던데. 그것과 관련이 있는 건가?’
하지만 의문은 잠시. 당장 해야 할 일은 따로 있었다. 브라함은 친구를 돌아봤다.
“갈리어드.”
“그러지.”
갈리어드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시위에서 손을 뗐다. 〈폭발시(暴發矢)〉. 순보와 함께 다크 엘프 족 내에서도 ‘사냥꾼’의 호칭을 받은 자들만이 얻을 수 있다는 스킬이었다.
콰콰쾅!
푸른색 크리스탈에 쇠 화살이 깊숙하게 박혔다. 화살이 폭발하면서 크리스탈 안에 다시 크고 작은 연쇄 폭발을 일으켰고, 결국 크리스탈은 잔뜩 균열이 가다가 부서져 바닥에 우수수 쏟아지고 말았다.
첫 번째 축이 박살 났다.
가장 외곽에 위치해 있던 귀계 결진이 흐릿해지면서 사라진 순간.
화아악!
브라함은 책자를 하나 꺼내면서 마법을 외기 시작했다. 〈화성의 서〉. 아직 기존에 자랑하던 수성의 서만큼은 되지 못하더라도, 연금술 지식이 더해지면서 탄생한 마도서였다.
“나와라.”
브라함은 소환 마법을 발동시켰다. 막대한 대가를 지불해서 외계의 물건을 강제로 끌어오는 마법.
상공을 따라 거대 마법진이 형성되었다.
대가는 아주 손쉽게 마련할 수 있었다.
마녀들이 결계 강화를 위해 축에 심어 뒀던 현자의 돌들.
비록 연우가 가진 것에 비하면 질은 떨어졌지만, 그래도 시공간을 제멋대로 돌아다니던 물건들을 부르기엔 충분했다.
아마 마녀들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만든 것들이, 도리어 자신들을 겨누는 칼이 될 줄은.
쿠쿠쿠-
하늘이 크게 진동하면서. 마법진 밖으로 열기에 휩싸인 운석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브라함은 그것을 보면서 차갑게 웃었다.
“메테오 스트라이크.”
콰아앙!
* * *
바로 그때.
팅, 팅, 티티팅-
기다렸다는 듯이 남은 축들이 차례대로 끊어졌다.
요계 상진과 화계 화진, 명계 수진이 사라지고, 마지막 남은 앙계 재진마저 흩어지면서. 요새를 보호하고 있던 결계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거대 운석은 바로 그 시점에 브로켄 요새 한가운데에 떨어졌다.
거대한 재앙이 되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