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여름여왕 (1)
연우는 숯 덩어리가 된 채 바닥에 널브러진 킨드레드를 보면서 가볍게 혀를 찼다.
이젠 꿈쩍도 할 수 없는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녀석은 여전히 숨이 붙어 얕게 헐떡이고 있었다. 끈질긴 생명력이었다. 바퀴벌레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이것도 72선술의 영향인가?’
아마 이대로 둔다면 부활까지도 가능하겠지. 말도 안 되는 수준의 재생 능력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72선술이 가진 깊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대단하다는 사실이 기쁘기도 했다.
“널…… 찾아, 와 죽……!”
연우는 제멋대로 지껄여 대는 킨드레드의 머리통에다 비그리드를 쑤셔 넣었다.
퍼석. 녀석의 머리가 아주 가볍게 부서졌다. 검은 가루가 허공에 흩어졌다.
“역시 가짜였군.”
연우는 가볍게 혀를 찼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바토리의 흡혈검으로 흡수를 하지 않고 일단 비그리드로 찔러 본 것이었는데. 아무래도 분신이었던 모양이었다.
미후왕의 궁전에서 발견되었던 사체도 바로 이런 분신이었겠지. 어쩌면 본체나 다른 분신이 찾아와 복수를 하려 들지도 몰랐지만. 연우는 당분간은 힘들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분신이라고 해도 정신적인 타격까지 만회할 수 있는 건 아닐 테니.’
분신이 죽는다고 해서 리플렉트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정신적 반작용이 더 클 것이다.
아무리 킨드레드라고 해도 제정신을 찾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릴 터였다.
그리고 연우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도저히 속내를 알 수 없는 마군의 개입을 차단하는 것만 해도 아주 큰 성과였으니까. 게다가 킨드레드가 데려온 다른 주교 등은 모두 죽었을 게 분명했다.
연우는 킨드레드가 있던 자리를 지나쳤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폭발의 잔해에 반쯤 파묻힌 비에라 듄을 발견할 수 있었다.
비에라 듄은 킨드레드와 달리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체부 환승을 한 흔적이 없었다. 용마안으로 녀석의 영혼이 묶여 있는 것이 보였다.
캬아아!
망령으로 타락한 비에라 듄은 연우에게 날을 잔뜩 세웠다. 하지만 망령 따위가 연우에게 해코지를 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쯧.
연우는 그녀를 보면서 가볍게 혀를 찼다.
고작 이따위로 허망하게 죽을 줄 알았다면, 더 많이 괴롭히다 죽일 것을.
그래도 명색이 하이 랭커이고, 한 집단의 수장이었기에 기습을 한다 해도 어려운 싸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아무리 현자의 돌의 기능을 정지했어도, ‘위대한 어머니’의 총애를 받는 사도였으니까.
하지만 비에라 듄은 변변한 저항도 하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기습에 너무 내몰려 마법을 쓸 겨를이 없었던 걸까, 아니면 현자의 돌을 너무 믿었던 걸까.
어떤 이유가 되었든 간에. 연우로서는 조금 허무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이 여자는 이렇게 죽어서는 안 되었어.’
연우의 두 눈이 스산하게 빛났다. 비에라 듄은 다른 배신자들보다 더 끔찍하게 죽었어야만 했다. 다른 놈들은 동료였다가 등을 돌렸을 뿐이지만, 비에라 듄은 동생의 마음을 갖고 놀기까지 했으니.
그리고 세샤의 일까지, 절대 용서할 수가 없는 자였다.
컬렉션에 묶어 두고 끔찍한 고통을 가할 수 있다지만. 그래도 생자일 때와 사자일 때의 차이는 큰 법이었다.
그래도 일이 이렇게까지 된 이상 어쩔 수 없는 일.
연우는 영혼이라도 끝까지 쥐어짜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삼켜라.”
왼손을 활짝 펼쳐, 바토리의 흡혈검으로 비에라 듄의 사체를 흡수했다.
사도의 몸이었기 때문일까. 막대한 양의 마력과 생기가 체내로 흘러들어 왔다.
[생기와 정기를 갈취합니다.]
[힘이 1만큼 올랐습니다.]
[민첩이 2만큼 올랐습니다.]
……
[‘바토리의 흡혈검’의 스킬 숙련도가 올랐습니다. 49.8%]
이미 육체가 거의 완성될 대로 완성되었기 때문에 능력치에 큰 변화는 없었다.
하지만 뜻하지 않은 수확도 있었다.
[영혼을 수거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영혼과 연결된 모든 마법 무장이 해제되며, 아티팩트는 강탈자에게로 환원됩니다.]
[‘불길한 현자의 돌’을 획득했습니다.]
연우의 왼손 위로 보라색 광채가 맴돌았다. 손바닥 반쪽만 한 크기의 돌. 연우가 가진 것보다는 못했지만, 여태 발푸르기스의 밤이 가진 것들 중에서는 가장 큰 돌이었다.
원래 비에라 듄이 가지고 있던 물건. 확실히 수장의 것이라 그런지 다른 것들과는 등급도 달랐다.
연우는 아주 잠깐 자신이 가질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곧 원래 임자에게로 넘겼다.
‘부.’
「감사. 합니. 다.」
자신이 가진 현자의 돌과는 섞이기 힘들 것 같았다. 게다가 이번 기습에서 가장 큰 공헌을 한 일등 공신은 부. 그에게 제대로 된 선물을 해 주고 싶었다.
부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돌을 받았다. 인페르노 사이트가 활활 타올랐다. 눈두덩이에 갖가지 감정이 깃들었다. 환희, 황홀, 감동.
그는 이제 탈피를 위한 마지막 지점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이 돌이라면 아주 큰 도움이 될 터.
이런 물건을 아무렇지 않게 내어 주는 주인에게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새롭게 태어나 얻은 가장 큰 행운은 역시 연우를 모실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연우는 그런 부를 보면서 피식 웃다가, 다시 왼손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갈취가 끝나 가고 있었다.
그리고 다행히 원하던 메시지가 망막에 떠올랐다.
[‘바토리의 흡혈검’이 상대의 근원을 갈취, 스킬을 일부 강탈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스킬 ‘체부 환승’이 생성되었습니다.]
‘됐다.’
비에라 듄의 시그니처 스킬을 빼앗는 데 성공한 것이다. 체부 환승. 다른 육체만 있다면 에고 데이터를 몇 번씩이나 옮길 수 있게 하는 스킬.
용인이라는 새로운 육체를 구할 수 없을 연우에게는 별다른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지만.
스킬은 플레이어의 특성에 맞춰 조금씩 성질이 달라질 수도 있는 법이었다.
[스킬 ‘체부 환승’의 등급은 권능입니다.]
[권능의 원주인이 자신의 사도를 죽이고 권능을 강탈한 데에 대해 강한 불쾌감을 드러냅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이가 권능을 회수했습니다.]
[사라진 스킬을 대신해 새로운 스킬을 탐색합니다.]
[특성 ‘마룡체’의 강한 영향을 받습니다.]
[칭호 ‘죽음을 이끄는 자’의 영향을 받습니다.]
[칭호 ‘마의 인도자’의 영향을 받습니다.]
……
[새로운 스킬 ‘재생(再生)’이 생성되었습니다.]
‘됐다!’
연우는 주먹을 꽉 쥐었다. 체부 환승은 마녀들의 위대한 어머니가 내려 준 힘이기 때문에 애당초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지 않았다.
하지만 보상을 철저하게 챙겨 주는 시스템의 특징상, 그와 비슷한 것을 찾으려 할 게 분명했다.
그렇게 해서 얻은 스킬은 아주 만족스러웠다.
[재생]
넘버링 91
숙련도: 0.0%
설명: 빼앗긴 권능 ‘체부 환승’을 대신해서 얻게 된 스킬.
부상을 입었을 시, 자가 치유 속도가 빨라진다. 숙련도가 높아질수록 잘려 나간 팔다리의 복구도 가능해진다. 때에 따라서는 부서진 심장의 수복도 가능하다.
단, 뇌는 반드시 살아 있어야 한다는 절대 조건이 붙는다.
* 충전
체력과 마력이 일정 한계치 이하로 저하되었을 시에 임의로 활력을 불어 넣어 빠른 수복을 가능케 한다.
만약 체력이 10% 이하로 떨어졌을 시, 하루에 단 한 번 정신적 각성을 통해 체력을 최대 50%까지 복구시킨다.
* 복원
육체가 크게 손상되었을 시, 자동적으로 세포와 인자에 저장되어 있는 원래 형태로 되돌아가고자 한다. 치유 속도나 한계 범위는 숙련도와 마력량에 비례한다.
넘버링 스킬이라면 절대 나쁜 것이 아니었지만. 사실 권능을 대신해서 얻은 것 치고는 등급이 낮은 편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연우는 이것으로도 충분히 만족했다. 갖가지 부상 위험을 겪는 그로서는 여러 개의 목숨을 갖게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게다가 연우가 재생을 노린 건 다른 이유도 있었다.
‘이것으로 순보에 이어서 올포원으로 갈 수 있는 두 번째 스킬을 연 셈인가?’
축지와 천리안. 이 두 가지에 더해 뒤늦게 플레이어들이 알아낸 올포원의 세 번째 스킬이 있었다.
불사(不死)
물론, 이름처럼 정말 죽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존재는 신과 악마 같은 자들 말고는 없을 테니까. 아니, 그들도 결국 ‘소멸’이라는 죽음을 맞을 수 있었다.
다만, 올포원이 가진 불사 스킬은 정말 사람들이 보기에 불사와 다를 게 없을 정도로 사기적이었다.
심지어 머리와 영혼이 부서져도 되살아날 수 있는 힘.
몇 번씩 죽어도 거짓말처럼 다시 나타날 수 있는 힘.
그 힘 때문에. 모든 플레이어들은 올포원이라는 벽을 끝내 넘지 못했다.
올포원의 ‘불사’가 진짜 스킬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다른 이름을 가진 스킬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동생은 오랜 추적 끝에 불사에 어떤 비밀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여기에 필요한 재료가 재생이나 체부 환승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다만, 재생은 그 자체로도 넘버링 스킬이기 때문에 마스터리나 승급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마스터리를 이루고, 다른 조건들도 추가적으로 갖출 수 있다면.
여름여왕이나 무왕마저도 넘지 못한 올포원의 비밀에 다가설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이것으로 필요한 건 모두 챙겼고.’
연우는 컬렉션에 비에라 듄의 망령이 제대로 소속된 것을 확인하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여기서 비에라 듄의 심문도 같이하고 싶었지만.
아직 모든 싸움이 끝난 건 아니었다.
초감각으로 뿌려 둔 감각 영역 사이사이로 아직 살아 있는 사람들이 느껴졌다. 그런 난장판 속에서도 목숨을 부지한 것이다. 역시 랭커는 랭커. 절대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다행히 일단 이것으로 가장 큰 목표는 처리한 셈이었으니.
조금은 긴장을 풀며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띠링, 띠링-
[서든 퀘스트(현상 수배2)가 끝났습니다.]
[최종 성적]
1위. ###(182,333Point)
2위. 에도라(812Point)
3위. 판트(695Point)
4위. 아이온(30Point)
……
[퀘스트를 압도적인 성적으로 달성했습니다.]
[보상으로 ‘인트레니안 개방’을 획득했습니다.]
[레드 드래곤이 보유한 11번 인트레니안으로 이동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습니다. 앞으로 주어진 12시간 동안 원하는 물건을 총 5종을 획득하여 갖고 나올 수 있습니다.]
[숨겨진 조건, ‘비에라 듄의 사살’을 달성했습니다.]
[보상으로 ‘용의 피(적룡종의 혈청)’를 획득했습니다.]
분명 끝없는 밤의 세계로 들어오면서 받았었지만, 비에라 듄을 추적하느라 잊고 있었던 두 개의 현상 수배 퀘스트.
그중 하나를 달성했다는 메시지를 받은 것이다.
연우의 눈이 저절로 커졌다.
* * *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아이테르는 흔들리는 눈으로 뒤를 돌아봤다. 요새에서 갑자기 일어난 폭발과 불어닥친 먼지 구름은 한창 광기를 띠고 있던 레드 드래곤과의 싸움을 강제로 중단시켰다.
콰르르-
협곡이 무너지고, 능선을 따라 거대한 산사태가 일어났다. 저곳에는 분명 아이온과 엘로힘이 있을 텐데. 과연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미 엘로힘에게서 마음이 떠난 아이테르로서는 그들이 걱정스럽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다른 감정이 들었다.
불신. 아이테르에게 있어 아이온을 비롯한 원로원의 의원들은 절대 죽을 수도, 사라질 수도 없는 절대성, 그 자체였다.
단 몇 마디로 자신의 가문을 몰락시키고, 신분을 복구시켜 줄 수 있었던 절대성. 그를 둘러싼 모든 세상을 바꿀 수 있었던 힘을 가진 이들이 바로 저들이었다.
그랬기에. 아이테르의 세계관에서 저들이 죽는다는 건, 절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저런 폭격이라면. 저 정도 규모의 폭발이라면. 아무리 아이온과 엘로힘이라고 해도 위험하지 않을까. 아이테르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무언가가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받아야만 했다.
“메테오?”
그리고 그런 충격은 탐을 비롯한 레드 드래곤도 마찬가지였다. 엘로힘인지 마군인지, 정체도 알 수 없는 이놈들 따위야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저 요새로 가던 길이었다.
만약 메테오가 떨어진 게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다른 놈들과 똑같이 휘말리지 않았을까. 그리고 과연 그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확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과연 어떤 놈이 외우주에다가 저런 무식한 짓을 저지를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녀들이 자폭이라도 하자는 심정으로 제집 앞마당에 운석을 소환한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외우주의 결계를 뚫고 운석이 나타날 수 있었던 건지 도무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드래곤 하트가 멀쩡할 때의 여름여왕도 쉽게 엄두 내지 못할 일일 텐데.
그래서 탐은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언제 또 운석이 2차, 3차로 떨어질지 몰랐으니까. 현자의 돌을 구하러 가다가 괜히 목숨만 위험해지는 건 사양이었다.
결국 아이테르와 탐, 둘 모두 눈치만 볼 뿐. 아무도 섣불리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암묵적인 대치만 길게 이어지던 그때.
우웅, 웅-
갑자기 탐의 머리 위로 새로운 포탈이 열렸다. 익숙한 얼굴들이 대거 나타났다.
백발을 길게 늘어뜨린 여인과 그녀를 호종하는 여덟 명의 용아병들. 탐의 형제들이, 그들의 어머니이자 왕인 분을 모시며 등장한 것이다.
여름여왕의 강림.
전쟁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드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