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여름여왕 (3)
‘역시 이 사람은…….’
연우는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저렇게 무지막지하게 살기를 피워 내는 거대 용 앞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중지를 흔들어 대는 여유라니.
무왕답다면 무왕답달까. 정말이지 상식적으로 보기 힘든 사람이었다. 힘과 여유. 아무나 가질 수 없을 절대자의 오만함이 그에게는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겉으로는 한없이 건들거리지만.
등은 참 넓은 것 같다고.
* * *
『나유!』
아무리 반쯤 이성을 상실했어도, 자존심 강한 여름여왕은 상대가 자신을 능멸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멍청해지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무왕의 저런 뻔뻔한 낯짝 때문에 분노가 더 커지고 말았다.
지난 세월 동안. 여름여왕에게 가장 큰 장벽은 올포원이었다. 탑의 끝을 보고자 하는 열망이 있는 그녀였지만, 언제나 그가 가로막고 있어 76층 이상으로 올라가지 못했다.
그래서 레드 드래곤을 세운 이후, 그녀는 올포원에 대항하는 데 대부분의 세월을 보냈다.
그리고 그런 투쟁은 언제나 번번이 꺾여야만 했다. 만년 2등. 여름여왕은 그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올포원에 대한 열등감은 그녀의 영혼을 옥죄는 저주가 되었다.
그러던 중에 외뿔부족에서 한 남자가 나타났다.
나유. 처음 그 이름을 들었을 때 알 수 있었던 건 ‘새로운 루키’라는 것이 고작이었다. 아래 층계에 별다른 관심이 없던 그녀가 그 이름을 듣게 된 것도 외뿔부족에서 모처럼 기대할 만한 신예가 나왔다는 수하의 보고 때문이었다.
외뿔부족. 한때, 용종이나 거인 족과도 대등했던 초월종. 트리니티 원더의 후예로서, 엘로힘에서도 손꼽히는 계급인 프로토게노이 족이나 바니르 족도 발아래로 볼 정도로 뛰어난 혈통을 지녔던 그들이었지만.
외뿔부족은 자신들에게 주어졌던 신통(神通)과 권능을 아무렇지 않게 버렸다. 그리고 직접 탑 외 지역으로 근거지를 옮기기까지 했다.
조상들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면서. 혈통이나 조상에 기대지 않고, 운명을 개척하겠다는 것이 그들의 의지였다.
그리고 실제로 외뿔부족은 모든 의무를 버렸으면서도, 금세 자신들만의 영역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그랬기에 여름여왕은 외뿔부족을 존경했다.
그리고 언제나 수하들에게 일러 그들과 되도록 갈등을 빚지 말라고 충고했다.
고개를 숙이거나, 싸움을 피하라는 말은 아니었다. 충돌이 벌어진다면 전쟁도 불사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굳이 부딪칠 필요는 없었다.
그것이 여름여왕 나름의 경애 표시였다. 그리고 외뿔부족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다 여름여왕이 나유라는 이름을 다시 들은 것은 그가 21층 그림자 도장에서 자신의 그림자를 이겼다는 소식에서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제법이다’는 생각은 했지만, 경계하지는 않았다. 자신의 그림자야 천 년도 훨씬 전에 남긴 것이니, 아무리 나유가 날고 긴다고 해도 그 정도로 긴 세월을 따라잡을 수 없을 거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다음에는 그가 랭커 빙왕을 이겼다는 보고가 들어왔고, 또 그 다음에는 중층 구간의 입구인 30층을 단기간에 돌파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여름여왕의 귀에 들리는 나유의 소식은 점차 간격이 좁아졌다.
처음에는 연 단위였던 것이, 월 단위가 되었고,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매일같이 그에 대한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럴수록.
여름여왕은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받기 시작했다.
그녀가 절대자로 군림하던 지난 수천 년 동안. 나유와 같은 성장 속도를 보였던 자가 있었던가?
있긴 있었다.
흡혈군주 바토리나 마물왕 하나비, 악마 사냥꾼 드 로이, 검은 현자 파우스트 등.
하나같이 한 시대를 풍미했고, 탑의 절대자로 군림하던 자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끝내 여름여왕의 아성을 넘지 못했다. 76층에 도전했고, 결국 무릎을 꿇어야 했다.
그들 나름대로 다양한 방식을 구가하긴 했다.
바토리는 에너지 드레인으로, 하나비는 키메라로, 드 로이와 파우스트는 악마에게로 손을 뻗어 여름여왕에 대적했다. 그러나 실패했다.
애당초. 남들은 그들이 어쩌면 여름여왕과 올포원을 넘을 수 있을지 모른다면서 입방아를 찧어대긴 했었지만, 여름여왕은 그들에게 위협을 느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만큼 그녀는 강했고.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절대자였다. 올포 원만 없다면.
그랬던 그녀가. 처음으로 본능적으로 위험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당시엔 소식만 들었을 뿐, 얼굴도 보지 못했던 애송이 따위에게.
그러다 나유는 최연소로 외뿔부족의 왕이 되었고.
우연히 전장에서 여름여왕과 만나게 되었다.
-아줌마가 그 용가리야?
-아, 줌마……?
-응? 아줌마를 아줌마라고 불렀을 뿐인데. 무슨 문제라도?
용가리라는 하찮은 단어만 해도 짜증나기 충분한데. 아줌마라니. 그런데도 나유는 끝까지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모르는 얼굴이었다. 안하무인에 괴팍한 성격이라더니. 말로 듣던 그대로였다.
그때부터 여름여왕과 무왕이 된 나유는 충돌하기 시작했다.
팽팽한 접전이었다. 격전은 몇 개의 스테이지를 쑥대밭으로 만들 정도로 거칠었다.
사람들은 무왕을 가리켜 여름여왕과 함께 올포원에 대항할 수 있는 새로운 강자라며 추앙했다. 하지만 여름여왕은 그 사실이 너무 수치스럽기만 했다.
이딴 애송이가. 백 년도 살지 못한 이깟 미물이. 필멸자가. 감히 나와 동등한 선을 논한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하지만 무왕을 꺾어 보고자 했던 여름여왕의 시도는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다 언젠가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자신의 신경이 더 이상 위에 있는 올포원이 아닌, 아래에 있는 무왕에게로 집중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수천 년 동안 그녀를 움직이게 만들었던 원동력이 바뀌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더 이상 무왕과의 경쟁에서 신경을 거두고, 다시 시선을 위층으로 돌리긴 했지만.
그때 심장에 남은 상실감은 여태껏 그녀를 괴롭혀 대고 있었다.
하지만 자존심이 강한 용종답게, 자신이 받은 이 수모를 언젠가 갚겠노라고.
자신의 자존심을 무참히 꺾은 무왕을 자신의 이빨로 짓이겨 놓겠노라고 다짐했다.
그리고.
『지금이라면…….』
여름여왕은 지금이 바로 그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저 멀리, 무왕의 뒤편에서 꼿꼿하게 선 가면 쓴 남자가 눈에 밟혔다.
비에라 듄을 죽인 자. 자신이 내건 퀘스트를 압도적인 성적으로 수행한 녀석이다. 현자의 돌에 가장 근접한 자란 뜻이기도 했다.
가면인에게서는 자신과 비슷한 체향이 풍기고 있기도 했다. 용마안도 분명히 상대가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줬다.
그 순간, 여름여왕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가면인이야말로 이 모든 일들의 흑막이며. 자신을 이 꼴로 만든 원흉이라고.
그런 작자를 무왕이 보호한다고? 그렇다는 건 결국 무왕을 짓밟아야만 한다는 뜻이었다. 녀석과 함께!
『내놓아라아!』
쾅!
여름여왕은 지면을 세게 박찼다. 드래곤 피어와 함께 세상이 울리면서 수십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몸집이 빠른 속도로 무왕에게 쇄도했다.
멀리서 보면 거대한 산이 움직이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끔찍한 광경이었다.
“제자야. 거기서 똑똑히 보아라. 이 스승이 얼마나 잘났는지!”
“맞고 울지나 마십시오.”
“하여간 그 주댕이는 진짜!”
무왕은 어마어마한 기세의 해일 앞에서도 연우와 농담 따먹기를 하면서 앞으로 튀어 나갔다. 입술 사이로 송곳니가 훤히 드러나도록 웃으면서 양팔을 앞으로 뻗었다.
쿵!
기세와 기세가 충돌했다. 세상이 크게 위아래로 들썩였다. 새로운 운석이 떨어진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굉음이 사방으로 뻗쳐 나가고, 충격파가 동심 원을 그리면서 협곡을 넘어 외우주 전체로 퍼져 나갔다.
연우는 혹시나 마력 폭풍에 휩쓸릴까 싶어 불의 날개를 활짝 펼치면서 뒤쪽으로 블링크를 잇달아 전개했다.
‘이기십시오. 꼭.’
연우가 넓은 무왕의 등을 보면서 그의 승리를 기원하는 동안에.
‘스승님.’
무왕과 여름여왕 사이에 팽팽한 힘겨루기가 이뤄졌다.
무왕은 여름여왕의 덩치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작은 양팔로 녀석의 양쪽 아가리를 밀어냈다.
크롸롸롸!
여름여왕은 길게 울부짖었다. 자신의 주둥이보다도 작은 무왕을 씹어 삼키고자 으르렁거렸지만, 무왕의 양팔은 바들바들 떨리기만 할 뿐 녀석의 돌격을 버텨 내고 있었다.
오로지 상대를 밀어내고 찍어 누르기 위한 힘 대결. 힘과 힘이 팽팽한 대치를 이뤘다.
콰콰콰-
두 사람을 따라 퍼져 나가는 기세는 이미 다른 사람들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았다.
“아, 그거 진짜. 이 아줌마, 다이어트도 안 하나. 더럽게 무거워 죽겠네!”
무왕은 꿈쩍도 않는 여름여왕을 보면서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제자를 구해 주겠답시고 기세 좋게 나섰다가 아무것도 못하고 있는 꼴이라니.
스승이 되어서 이게 대체 무슨 모습인 건지. 쪽팔렸다.
원래는 수하의 원수를 갚기 위해 왔던 길이었다. 반 년 가까이 일족을 골탕 먹였던 궁무신이란 놈이 이곳에 왔단 사실을 알고 쫓아왔다가, 제자를 발견하고 이렇게 나서게 된 것이다.
지금 저 멀리서 수상쩍은 가면을 쓴 채 자신을 보고 있는 녀석이 없었다면.
애당초 무왕은 이런 시끄럽기만 한 전쟁에 뛰어들 생각도 않았을 것이다.
제자. 제자라. 무왕에게 있어 제자란 단어는 언제나 낯선 단어였다. 절대 익숙해질 수 없는. 그런 단어.
이전에도 제자라고 말할 수 있는 녀석은 둘이나 있었지만. 녀석들은 그에게 실망감만 안겨 줬다. 한 놈은 하고 싶은 게 있다며 떠났고, 다른 한 놈은 길이 다르다며 떠났다. 사실상 실패한 놈들이었다.
그래서 세 번째 제자를 받아들였을 때. 무왕은 녀석에게 더 이상 마음을 주지 않으려 했다. 척 보기에도 앞선 두 놈보다 더 제멋대로인 놈이었고, 금세 떠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랬던 녀석이 지금은 그를 가장 많이 의지하고 있었다. 이따금 존경 섞인 시선을 보내기도 하고.
바로 지금처럼.
존경.
그 단어가 무왕의 마음을 열었다.
‘저런 눈으로 똘망똘망하게 쳐다보면.’
그래서 무왕은 스승으로서의 위엄을 되찾기 위해서라도. 어디로 튈지 모르는 제자의 길을 조금이라도 밝혀 주기 위해서 이를 악물었다.
“씨발. 아무것도 안 할 수가 없잖아! 안 그래?”
무왕은 송곳니가 훤히 드러나라 웃으면서 소리를 질렀다. 팔뚝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으랏차차!”
그때. 힘과 힘의 대결에서 무왕이 조금씩 우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핏대가 잔뜩 선 발을 한 걸음, 한 걸음씩 앞으로 옮기면서. 여름여왕을 뒤로 밀어내기 시작했다.
마치 거대한 산이 떠밀리는 듯 한 광경에.
뒤늦게 여름여왕을 쫓아 따라온 용생구자와 레드 드래곤은 모두 충격에 빠진 얼굴이 되었다.
“어머니!”
“여왕님!”
무왕이 강하다는 사실을 그들도 익히 알고는 있었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힘겨루기에서 자신들의 주인을 밀어낼 정도로 강하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아니, 할 수조차 없었다.
그들이 가진 상식선에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레드 드래곤에게 있어서 여름여왕이야말로 신이자 군주였으니까.
그러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탐이었다.
‘지금이 적기다!’
탐은 욕심이 많은 막내답게, 계속해서 때를 노리고 있었다.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어쩌면 기회 정도가 아니라, 맏이로 올라갈 수 있는 행운의 순간이었다.
어차피 이대로 있다가는 용생구자의 자리를 내어 줘야 할 판이니, 여름여왕을 구해서 판세를 바꿀 생각이었다.
쾅!
탐은 지면을 으스러져라 박차면서 여름여왕과 무왕의 격전지로 뛰어들었다.
기세가 사납게 휘몰아쳐 대기마저 찢어발길 정도로 위험천만한 곳이었지만. 탐은 전혀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용생구자들도 탐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깨닫고, 뒤따라 몸을 던졌다.
“저놈이!”
특히 용생구자의 맏이이자, 용아병의 수장을 겸하고 있는 비희(贔屭) 왈츠는 이를 세게 바득 갈았다.
여름여왕이 가장 먼저 사도이자 자식으로 받아들인 그녀의 입장에서는. 감히 자신의 자리를 탐내려는 탐의 노림수가 간교하게만 비쳐졌다.
콰콰쾅!
탐을 시작으로. 용생구자들은 저마다 가지고 있는 시그니처 스킬을 잇달아 발동시켰다.
화려한 이펙트들이 하늘을 따라 길게 수를 놓았다. 무왕과 여름여왕의 사나운 기세 속에서도 용케 균형을 잡고, 공격을 시도할 수 있다는 건. 그만큼 그들이 뛰어나다는 증거였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다른 81개의 눈들도 개입했다. 트로이와 가라비토를 비롯한 하이 랭커들도 공격을 시도했다.
목표는 무왕. 비록 합공을 한다는 점이 마음에 들지 않긴 하지만, 어떻게든 여름여왕을 도와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하지만.
“감히 우리의 왕께서 하시는 행사를 누가 방해하려는가?”
갑자기 하늘에서부터 사나운 목소리가 울리더니. 짙은 선홍색으로 빛나는 벼락이 용생구자와 81개의 눈의 머리 위로 세차게 떨어졌다.
콰르르릉-
용생구자와 81개의 눈은 일제히 스킬 발동을 중단하면서, 각자 허공에서 크게 몸을 비틀어 자리에서 최대한 벗어나고자 했다.
핏빛 벼락과 충돌하면 절대 무사하지 못할 것 같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벼락이 꽂힌 자리에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크레이터가 깊게 파였다. 마치 메테오 스트라이크가 다시 나타나기라도 한 듯한 파괴력이었다.
하지만 벼락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애꿎은 지면을 때리고 위로 튀어 오른 수백 수천 개의 스파크가 서로 거미줄처럼 연결되면서, 주변 세상을 핏빛으로 환하게 물들였다.
파지직!
이대로 눈이 머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밝은 광채.
주변에 있던 플레이어들은 물론, 심지어 외우주의 외곽으로 달아 나고 있던 아이테르마저도 비명을 지를 정도로 강렬했다.
그리고 겨우 다시 시야를 되찾았을 때.
감히 무왕을 방해하려던 용생구자와 81개의 눈은 표정을 딱딱하게 굳혀야만 했다.
탁!
핏빛 벼락이 떨어진 자리로, 안경을 쓴 외뿔 노인이 천천히 착지했다.
겉보기에는 심유한 지식을 가진 학자로만 보였지만. 그를 따라 감도는 선홍색 뇌기는 보는 이로 하여금 간담을 서늘케 만들었다.
파직, 파지직 -
“핏빛…… 현자.”
한때, 마군의 검은 새벽과 함께 쌍벽을 이루며 탑의 세계에서 정점을 이뤘던 자.
그리고 지금은 무왕의 등장과 함께 일선에서 물러나, 외뿔부족 내 대장로 직을 맡고 있다는 핏빛 현자의 등장에 용생구자도 잔뜩 경계를 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도 이 늙은이를 알아봐 주는 사람이 있다니. 감개가 무량하군.”
말은 저렇게 한다지만. 하이 랭커까지 되어 그를 모르는 게 더 이상했다.
아무리 은퇴를 했다고 해도. 그는 무왕과도 자웅을 겨룰 만하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으니까. 무왕 같은 괴물이 하나 더 있다는 것. 레드 드래곤으로서도 긴장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야기하기 훨씬 순조롭겠지? 뒷골목 왈패처럼 굴긴 해도, 우리에겐 하나밖에 없는 왕이시다. 이 이상 방해를 한다면.”
파지지직-
〈뇌정권〉. 청람가의 비기이자, 판트를 상징하던 힘. 하지만 대장로는 오랜 연구 끝에 뇌정권을 뜯어고쳤고, 파괴력에 있어서만큼은 무왕의 팔극권과도 견줄 수 있다는 절학을 탄생시켰다.
그것이 바로 〈혈뢰(血雷)〉. 핏빛 벼락은 당장이라도 녀석들을 잡아먹을 것처럼 강렬한 천둥소리를 냈다.
“죽는다.”
콰콰쾅!
대장로를 따라 감돌던 뇌기가 다시 한 번 더 사방으로 번져 나갔다. 주변에 있던 모든 것들이 쓸려 나갔다.
콰르르르-
용생구자와 81개의 눈은 정면에서 혈뢰와 부딪칠 엄두도 전혀 내지 못한 채, 다시 있는 힘껏 자리에서 달아나야만 했다.
탑을 지배한다는 레드 드래곤의 간부들이라고 해도, 압도적인 힘 앞에서는 여타 플레이어들과 다를 바 없는 약자였다.
하지만 유일하게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은 자가 있었다.
발끝까지 흑발을 길게 늘어뜨린 여인. 비희 왈츠가 몸을 크게 틀면서 하늘에서부터 떨어지는 혈뢰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왈츠를 따라 매서운 마력 폭풍이 휘몰아침과 동시에.
촤르륵!
피부가 뒤집어지면서 용의 비늘이 잔뜩 올라와 눈 밑까지 덮었다. 등 뒤로 삐죽 솟은 날개와 꼬리는 헤븐윙 차정우의 죽음 이후로 사라졌다던 새로운 용인의 탄생을 말해 주었다.
콰아아앙!
콰콰과-
왈츠는 손에 잡힌 혈뢰를 바닥에 내려치면서 그대로 양팔로 찢어 버렸다.
부서진 뇌기의 잔해가 뒤로 뿌려지면서 땅거죽을 몇 번이고 뒤집었다. 먼지 구름이 치솟고, 탄내가 사방에 진동했다.
아무리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지만 무왕에 버금간다는 대장로의 공격을 찢을 정도의 힘.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 용생구자의 맏이인 왈츠는 용인에게 주어진 한계를 넘어, 이미 용의 권능을 5단계나 각성한 상태였다.
여름여왕을 제외하면, 레드 드래곤에서 그녀를 당해 낼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자욱하게 퍼져 나가는 모래 안개 사이로.
“방금, 죽는다고 했나요?”
왈츠는 흉포한 기세를 잔뜩 드러내면서. 여름여왕에 비교해도 크게 뒤지지 않을 드래곤 피어를 잔뜩 담아 으르렁거렸다.
“그 말씀, 그대로 돌려 드리죠. 감히 레드 드래곤에게 대항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똑똑히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그 말이 끝난 것과 동시에, 왈츠는 피막으로 이뤄진 용의 날개를 활짝 펼치면서 단숨에 대장로에게 쇄도했다.
대장로는 양손에 잔뜩 끌어모은 혈뢰를 앞으로 터뜨렸다. 혈뢰만강〈血雷滿罡〉. 강기가 섞인 핏빛 벼락이 소낙비처럼 녀석에게로 쏟아졌다.
콰르릉, 콰릉, 콰르르!
그리고 그것을 기점으로.
쐐애애액 -
콰콰쾅!
“왈츠를 엄호해!”
“여왕님을 구해야 한다!”
곳곳으로 흩어졌던 81개의 눈이 일제히 궤적을 그리면서 다시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의 앞으로 무왕을 따라왔던 외뿔부족의 장로와 전사들이 막아서면서 거세게 충돌했다.
“이거. 간만에 좀 재미있게 놀 수 있겠는데? 어?”
청화도에서도 벌어지지 않았던.
레드 드래곤과 외뿔부족의 전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