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239화 (239/862)

14화. 여름여왕 (4)

콰콰콰-

분명 거대 요새가 있었던 협곡은 운석의 충돌과 계속된 폭발로 인해 여러 차례 깎이길 반복하다가, 끝내 넓은 평지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마저도 계속 층위가 낮아지고 있었으니.

그 위에서 외뿔부족과 81개의 눈이 충돌에 충돌을 거듭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그들 사이에는 누가 누구를 상대한다는 자각이 없었다. 손에 잡히는 자를 죽여야만 했고, 눈먼 마력 폭풍에 휩쓸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했다.

난전. 상대의 전력을 깎는 것에만 몰두할 뿐이었다.

탑을 지배한다는 레드 드래곤과 탑에서 최강의 전력을 구가한다는 외뿔부족.

두 거대 집단이 전면전을 치르고 있었지만. 겉보기에 화려하다거나 하는 면은 없었다.

오히려 상대를 반드시 찢어 죽이고 말겠다는 처절하고 흉흉한 기세만 맴돌았다.

그리고 그사이에도 드넓은 상공을 따라 붉은색 포탈이 쉴 새 없이 열렸다.

소식을 듣고 부리나케 찾아온 전력들. 아직 참전하지 못한 다른 81개의 눈이며 레드 드래곤을 상징하는 무력 부대들이 하늘에 열린 포탈을 타고 나타나면서 저마다 화려한 스킬을 터뜨려 댔고.

재미난 놀이판이 벌어졌다는 소식을 들은 외뿔부족의 전사들도 속속들이 등장하면서 여태껏 단련만 해 뒀던 무공을 아낌없이 풀어냈다.

콰콰쾅!

그렇게 해서 번져 나간 싸움은 끝내 끝없는 외우주 곳곳으로 흩어지면서 엄청난 범위의 격전으로 확전되었으니.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자들은 총 9명이었다.

용생구자.

왈츠와 탐을 중심으로 한, 여름여왕의 피를 물려받은 용아병들.

비희, 왈츠.

이문, 치미.

포뢰, 웨일즈.

폐한, 트라이거.

이호, 햘.

공복, 이수.

애자, 바하라탄.

금예, 산.

초도, 탐.

이들은 단순히 여름여왕을 수호하는 용아병 내지는 가디언이라고만 알려져 있었다.

막내인 탐이나 바하라탄 외에는 대외 활동을 거의 하지 않은 덕 분이었다. 맏이인 왈츠도 공식 석상에 얼굴을 보이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지금, 그들은 여태껏 숨겨 뒀던 정체를 단번에 개방했다.

크와아앙!

둘째 치미가 빛무리에 잠기더니 갑자기 수십 배 크기로 부풀어 오르면서 거대한 아룡(亞龍)이 되었다.

뱀처럼 길쭉한 체구에 장장 30미터는 될 것 같은 길이. 몸을 덮은 비늘은 검은색으로 빛났고 입가를 따라 독기가 잔뜩 퍼졌다.

흔히 말하는 하위 용종 중 너커를 닮은 모습이었지만. 크기나 생김새는 그보다 훨씬 크고 포악했다. 특히 위압감은 여름여왕의 드래곤 피어 못지않아 주변의 대기가 끓을 정도였다.

『어머니께 위해를 끼치려는 해충들아. 죽어라!』

치미는 아가리를 쩍 벌리면서 숨결을 사방으로 뿌렸다. 숨결이 닿는 자리마다 지독한 산성으로 땅이 녹아내리고, 검은 독안개가 자욱하게 퍼지면서 닿는 모든 것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웠다.

외뿔부족의 전사들이 이것을 피해 옆으로 달아나려 할 때, 이번에는 넷째인 폐한이 들이닥쳤다.

드레이크를 닮은 형체로 변한 녀석은 사족보행에 5미터도 넘는 덩치를 하고 있어서, 돌진할 때마다 부딪치는 것들을 족족 부쉬 나가고 있었다.

콰콰쾅!

이외에도 씨-서펀트를 닮은 셋째 웨일즈는 지상 위를 미끄러지고, 프로스트 웜으로 변한 다섯째 할은 지하로 파고들었다가 행동이 굼뜬 이들만 집요하게 노리며 지면을 뚫고 나왔다.

와이번을 닮은 이수, 엠피티어의 바하라탄, 린트부름을 연상케 하는 산 등.

용생구자는 곳곳에서 끔찍하게 생긴 괴수로 변해 주변을 있는 대로 짓밟고 부쉈다.

여름여왕이 자신의 유전자를 바탕으로 갖가지 마법과 연금 지식을 더해 탄생시킨 분신들. 용생구자는 정확하게 말하자면 변형 아룡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룡이라고 해도, 여름여왕의 뛰어난 형질을 타고 났기 때문에 이미 녀석들은 아룡의 한계를 넘어 새로운 용종으로 재탄생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들은 원래 하위 용종에게는 절대 허락되지 않았던 권능까지 마구잡이로 발동시키고 있었으니까.

드래곤 피어가 들끓고, 브레스가 지면을 훑었다. 녀석들이 선포한 영역 내에서, 녀석들은 왕이나 다름없었다.

그들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자는 맏이인 왈츠였다.

용의 날개와 꼬리, 비늘을 잔뜩 드러낸 채. 왈츠는 자신이 개척한 권능을 바탕으로 대장로가 뿌려 대는 혈뢰를 잇달아 옆으로 쳐내면서 그와의 간격을 바짝 좁혔다. 그리고 강하게 내지르는 정권.

대장로는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무공에 있어서 무왕도 이따금 대련을 피하는 자신에게 직접 육탄전을 걸어? 왈츠의 행동은 혈기가 넘치는 것을 넘어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녀석의 가녀린 팔뚝을 따라 갖가지 마법진이 회전하는 것이 보였지만, 그래도 한계가 있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파앙!

대장로는 순간 섬뜩한 느낌이 들어 머리를 옆으로 홱 돌렸다. 그러자 정권에서 발출된 기파가 옆으로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 애꿎은 하늘을 때렸다.

콰아앙!

그리고 울려 퍼지는 폭발 소리. 저 멀리, 대기가 일그러지면서 마치 하늘 한가운데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구름이 산산이 흩어지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정작 대장로를 놀라게 한 건 위력이 아니었다. 왈츠가 방금 전에 보였던 자세. 주먹을 비트는 동작. 분명 진각(震脚)과 전사경(轉絲勁)이었다. 권법의 달인들이나 해낼 수 있다는 것들. 게다가 정권에서 발출된 힘이 허공을 격타하는 것은.

“백보신권?”

무공이었다. 그것도 일족 내 무서고에서도 금급에 놓인 신공절학. 아무에게나 허락된 것이 절대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있는 용인이 그것을 펼쳤다. 이리저리 뜯어 고친 흔적은 있었지만. 그렇다고 원형이 사라진 정도는 아니었다.

대장로의 인상이 딱딱하게 굳었다다.

“레드 드래곤의 플레이어가, 어떻게 우리 일족의 비기를 알고 있는 거지?”

하지만 왈츠는 그의 추궁 따윈 신경 쓰지 않겠다는 듯, 몸을 도중에 비틀면서 왼쪽 팔꿈치로 대장로의 명치를 찍어 나갔다. 격산붕첨. 역시나 백보신권과 자웅을 견줄 만한 무공이었다.

대장로는 몸을 타고 흐르던 혈뢰를 앞으로 끌어모았다. 콰아앙! 혈뢰와 격산붕첨이 부딪치면서 충격파로 두 사람 간의 거리가 벌어졌다.

왈츠는 다시 한 번 더 진각을 밟으면서 주먹을 내뻗었다. 그러자 팔뚝을 타고 희뿌연 오러가 올라와 구슬처럼 단단히 뭉치면서 꽃잎 형태를 폈다.

그렇게 만들어진 꽃잎이 수십 개. 돌개바람과 함께 강기(罡氣)로 이뤄진 꽃잎들이 대장로에게로 휘몰아쳤다.

파지직!

대장로를 따라 감돌던 혈뢰가 강하게 발출되어 지상으로 내리꽂혔다.

한 발에 꽃잎 하나씩.

혈뢰도 하나하나가 강기로 이뤄진 힘이었기에, 꽃잎을 요격하기에 충분했다. 강기가 부서지면서 일어난 폭발이 일대 공간을 몇 번씩이나 뒤흔들었다.

차이점이 있다면 대장로는 높은 깨달음을 바탕으로 강기를 단단히 밀집시켜 파괴력을 높이는 데 반해, 왈츠는 그와 비교했을 때 뒤처지는 부족분을 막대한 양의 마력으로 커버한다는 점이었다.

이 정도의 마력량이라니.

대장로는 침음했다. 한평생 운기행공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자신도 저만한 내공을 모으지 못했었는데.

어떻게 저렇게 과년한 처자가 가능한 걸까? 드래곤 하트라도 어디서 훔친 게 아니고서야.

게다가 왈츠가 뿌려 대는 무공들은 절대 수박 겉 핥기식으로 익힌 수준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연구하고, 단련에 단련을 거듭하여 육체에 단단히 새긴 것들.

“이스메니오스가 우리의 왕을 견제한다는 말을 들었었지만…… 그대가 바로 그 결과물인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의아한 점이 전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아무리 여름여왕의 용마안이 뛰어나다고 해도 무공을 저렇게 완벽하게 훔칠 수는 없었다. 형태는 어떻게 할 수 있어도, 그 속에 있는 구결까지는 불가능했다.

직접 본 것이 아니라면.

“…….”

하지만 왈츠는 답변을 할 이유가 없다는 듯이, 다시 꽃잎들을 흩날리면서 접근을 시도했다.

역근경, 제운종, 백보신권으로 이어지는 일격. 서로 연원이 다른 무공들을 한데 뭉그러뜨렸는데도 불구하고, 마치 물 흐르듯이 너무 자연스러웠다.

여기에 왈츠를 따라 갖가지 마법이 추가로 발동되었다.

다리에서, 머리에서, 팔뚝에서, 팔꿈치에서, 주먹에서. 화려한 이 펙트와 함께 마법진이 솟아오르면서 갖가지 버프를 싣고, 용의 권능까지 추가로 얹어졌다.

마법과 무공의 결합. 여름여왕은 무왕에게서 느꼈던 위기감을 이런 식으로 극복하고자 했다.

무왕을 있게 만든 무공에 용종의 마법이 더해진다면. 더 높은 경지를 노릴 수 있을 것이고, 여기서 허실도 파악할 수도 있다.

그래서 만들어진 연구 결과가 바로 왈츠. 실제로 왈츠는 뛰어난 재능을 바탕으로 여름여왕의 기대를 충분히 만족시켰다.

쿠쿠쿵!

대장로와 어느 정도 대등한 일전을 벌일 수 있다는 게, 바로 그 증거였다.

“하지만.”

대장로는 그런 여름여왕의 생각을 꿰뚫어 보면서. 비웃음을 흘렸다. 어쩐지 왈츠의 모습에서 어떤 친구의 모습을 떠올린 탓이었다.

연우.

그 친구도 용의 힘을 바탕으로 무공을 개척하고 마법을 익히는 등, 다양한 일을 해내고자 했었다. 열의가 너무 대단해서 대장로는 이따금 그에게서 젊은 시절의 무왕을 엿볼 수도 있었다.

어쩌면 왈츠의 지금 이런 모습도 연우와 패턴이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지 몰랐다. 무공, 마법, 용체까지. 너무 비슷했다.

그러나. 단언컨대, 연우와 왈츠가 비슷하냐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대장로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절대 아니라고.

또한,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조잡해. 너무.”

무왕과 여름여왕의 결합. 도무지 말도 안 되는 그런 시도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무왕은 새로운 무의 영역을 개척했고, 여름여왕은 위대한 마법 체계의 꼭짓점이었다.

애당초 걷는 길이 다르며, 구축한 영역이 달랐다. 그런데 한참이나 떨어진 두 사람을 만나게 한다? 터무니없는 짓이었다.

하지만 왈츠가 그랬다.

무공은 무왕을 모방했고, 마법은 여름여왕을 따랐다. 이런 말도 안 되는 해괴한 짓거리를, 용케 잘도 저질렀다 싶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거리가 동떨어진 것들을 억지로 붙이려 해 봤자, 언젠가는 무너질 얕은 교량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왜 모를까.

반면에 연우는 달랐다.

분명 연우도 처음에는 이것저것 잡다하게 쌓은 것들은 많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하려 했고, 이를 토대로 여태 얻은 것들을 차곡차곡 정리했다. 그리고 이제는 ‘길’을 찾아 움직이고 있었다.

대장로도 이따금 옆에서 지켜보고 있으면 감탄이 저절로 나올 정도로. 무척이나 탄탄한 행보였다.

물론, 지금 당장은 왈츠가 연우보다 앞서 있을지는 몰라도. 언젠가 대등한 위치에 놓였을 때 어떻게 될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리고.

연우와 비교한 덕분에. 대장로는 왈츠에게 가졌던 의문을 쉽게 풀 수 있었다.

쿵!

대장로는 왈츠가 내뻗은 주먹을 오른손으로 막았다. 마치 범종을 두들긴 것처럼 웅장한 소리와 함께 수십 개의 파문이 주변으로 흩어졌다.

그는 고요한 눈빛으로. 재차 공격을 시도하려는 왈츠를 노려보면서 물었다.

“너. 외뿔부족 출신이로군. 그렇지?”

“…….”

“누구의 자식이냐?”

쐐애액!

하지만 왈츠는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았다. 마법이 다시 여러 개 중첩되면서 연타(連打)가 이어졌다.

쾅, 쾅, 쾅-

지반이 들썩이고, 대기가 터져나갔다.

“대답하지 않는다면.”

대장로는 왈츠의 주먹을 막아 내고, 밀치고, 피하면서 곧바로 녀석의 뒤를 점했다.

“제대로 답할 때까지 볼기짝을 두들기는 수밖에.”

파지지지직!

콰르르릉-

최대로 출력된 혈뢰가 잔뜩 응축되면서 하늘에서부터 떨어졌다. 〈혈뢰파천〉. 하늘마저 부순다는 오만한 이름이 붙을 정도로 강한 일격에 왈츠가 두 눈을 부릅뜨면서 실드를 중첩시키려는 순간.

“으랏차차차!”

갑자기 하늘을 따라 우렁찬 고함소리가 울리더니, 거대한 그림 자가 빠른 속도로 이쪽으로 날아왔다.

대장로와 왈츠는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황급히 자리에서 멀찍이 떨어져야만 했다.

이곳으로 날아온 건, 용이었다. 여름여왕. 여태 팽팽한 힘겨루기를 하던 무왕이 끝내 여름여왕을 들어 냅다 패대기를 쳐 버린 것이다. 저 산처럼 무식하게 크기만 한 것을!

“저 미친놈이, 또!”

특히 여태껏 근엄한 태도로 싸움에 임했던 대장로는 인상을 와락 일그러뜨리면서 욕설을 내뱉었다.

콰아앙!

하지만 그의 욕설은 곧 들린 굉음에 파묻혀 사라지고 말았다. 마치 공성을 위해 사용하는 투석기처럼, 여름여왕도 하늘로 높이 떠올랐다가 지면에 처박히면서 끔찍한 소리를 냈던 것이다.

쿠르르.

여름여왕은 그러고도 한참이나 더 밀려가다가 협곡 서너 개를 부순 뒤에야 겨우 멈출 수가 있었다.

“흐흐.”

무왕은 그 광경을 보면서 뿌듯한 표정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손등으로 훔쳤다. 마치 작물을 수확하는 농부처럼 보일 정도였다.

대장로, 왈츠, 용생구자와 81개의 눈 등. 전투를 치르던 사람들은 모두 거짓말처럼 동작을 멈추고, 입을 쩍 벌리면서 볼썽사납게 나자빠진 여름여왕을 쳐다봐야만 했다.

쿠쿠쿵!

결국 위태롭게 서 있던 나머지 협곡들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여름여왕 위로 와르르 쏟아졌다. 거대한 용의 몸체가 낙석 더미에 파묻히고 말았다.

“푸하핫!”

“역시, 우리 왕! 힘 하나는 대단하다니까! 어떻소?”

“거봐, 나 아직 안 죽었지? 이참에 우리 판트와 에도라에게 74번째 동생이나 만들어 줄까?”

“으하핫! 그거 좋은 생각이오!”

“그래! 그래야 남자지!”

무왕과 성정이 비슷한 전사들만이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이 무릎을 치며 웃음을 터뜨려 댔다.

무왕은 저 멀리서 자신을 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자식들의 시선을 받았지만, 전혀 개의치 않으면서 농담 따먹기를 해댔다.

그러다 낙석 더미가 들썩였다. 바위 사이사이로 대기가 일렁일 정도로 지독한 드래곤 피어가 마구 피어 나왔다.

『죽인다.』

분노 섞인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여름여왕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날개를 활짝 펼치면서 이글거리는 눈으로 무왕을 노려봤다. 이제 그녀는 영혼을 쥐어짜 영력을 마구잡이로 뽑아내기 시작했다. 격이 빠른 속도로 상실되겠지만, 이제는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죽인다아, 나유!』

오로지 무왕을 씹어 삼키겠다는 생각밖에 남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의 강렬한 의념에 따라. 이미 권역으로 구축되었던 끝없는 밤의 세계도 이리저리 휘기 시작했다. 공간이 어지러워지면서 여러 플레이어들은 구토감을 느껴야 했다.

하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무왕은 여전히 웃는 낯짝으로 히죽거렸다.

“그래. 그러자니까, 이스메니오스? 아까 전부터 말했잖아.”

주먹을 불끈 쥐었다. 손등 위로 핏줄이 잔뜩 올라왔다. 그리고 그 위로 저마다 다른 색을 자랑하는 8개의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올라왔다.

〈팔괘(八卦)〉. 팔극권을 극성으로 단련했을 때 나타난다는 현상. 대장로가 개척한 무의 끝이 혈뢰라면, 무왕에게는 팔괘였다.

그를 휘감는 아지랑이 하나하나가 전부 강기를 극한까지 압축시킨 것들.

팔괘에 따라 무공을 펼친다면, 강기는 일제히 속성을 바꾸어 사방을 난도질할 터였다.

“올포원의 재수 없는 낯짝에다 주먹을 갈길 놈이 누군지. 여기서 겨루자고.”

콰앙! 쐐애애액-

무왕은 포탄처럼 앞으로 날아가면서 일격을 내질렀다. 파공. 연우도 이미 알고 있는 8대 비기 중 하나였지만, 위력은 절대 그가 알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여름여왕이 날개를 펼치며 날아 오른 장소로 파공이 박혔다. 콰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산자락 중심에 거대한 구멍이 휑하게 뚫렸다.

결국 엄청난 산사태와 함께 산이 무너졌고, 여름여왕은 그 위에서 입에 머금은 브레스를 내뱉었다.

화르르륵!

마치 지옥의 유황불을 끌어올린 것처럼 매서운 불길은 순식간에 외우주의 대기를 뜨겁게 달궈 놓을 정도였다.

무왕은 이것을 피하지 않았다. 도리어 손날을 바짝 세우면서 옆으로 크게 비틀었다. 단천. 공간을 따라 길쭉한 단층이 새겨졌다.

공간의 위아래가 서로 비틀렸고, 브레스도 똑같이 허망하게 사라졌다. 아니, 그것으로도 모자라, 그 뒤에 있던 공간까지 모조리 비틀어 버렸으니.

구름이 갈라지고, 하늘이 벌어졌다. 그리고 태양이 쪼개졌다.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엄청난 양의 불꽃이 아래로 우수수 쏟아지면서 한순간 어둠이 내려앉았다.

그러다 태양이 제자리를 찾아 다시 거짓말처럼 세상이 밝아졌을 때. 드높은 상공에서는 어느새 무왕과 여름여왕이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여름여왕이 수십 개의 마법을 잇달아 구동시켰다. 곳곳에서 마법진이 피어났다. 거기서 휘몰아치는 마법들은 하나같이 8써클 이상의 대마법밖엔 없었다.

블리자드, 인페르노 헬, 메테오 스트라이크, 파워 워드 오브 킬. 하나하나가 전부 스테이지에 떨어지면 거대한 재앙이 될 것들밖에 없었고, 무왕은 그것을 정면에서 두 주먹만으로 부숴 나가는 기행을 보였다.

그러면서도 전진은 멈추지 않았으니.

무왕을 따라 감돌던 팔괘들이 뱅그르르 회전하면서 갖가지 이적을 풀어냈다. 하늘, 땅, 바람, 불, 물, 벼락…… 8개의 서로 다른 속성들이 강기라는 형태를 띠며 마법들을 일제히 부숴 나가다가.

콰앙!

끝내 한 지점에서 충돌했다. 극한의 힘과 힘이 서로 누르고 누르면서 압박이 거세졌다.

여러 마법과 팔괘들이 한 점까지 단단히 압축되었다가, 결국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폭발했다.

콰르르르릉-

불길은 상공을 타고 외우주 전체를 뒤덮었다. 공기가 전소되고, 끝없는 밤의 세계는 이제 열과 빛만이 가득한 세상으로 변하고 말았다.

산과 협곡은 어떤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싹 밀려 사라졌다. 그러고도 여진은 한참이나 이어지다가.

쩌저적-

끝내 외우주를 둘러싸고 있던 공간까지 달걀 껍질처럼 쪼개 나가기 시작했다.

스테이지를 붕괴시킬 정도의 힘.

아홉 왕 중에서도 끄트머리에 앉아 있다는 두 존재의 싸움은. 이미 더 이상 단순한 플레이어들의 싸움이 아니었다. 대재앙일 뿐이었다.

그런데도 무왕과 여름여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듯, 다음 공격에 들어갔다.

무왕이 주먹을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폭발과 함께 떠밀려 났던 대기가 다시 무시무시한 속도로 안쪽으로 몰려들었다. 그를 중심으로 엄청난 크기의 태풍이 형성되었다.

사일과 궤월, 두 개의 비기를 하나로 합치려 했다. 여태껏 도안만 구상했을 뿐, 한 번도 펼쳐 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자칫 조절에 실패해 크게 다칠 수도 있었지만. 무왕은 아주 기뻤다.

마을에서는 절대 펼칠 엄두도 내지 못했던 것을, 이번 기회에 마음껏 해 볼 수 있었으니까.

아홉 왕이 된 이후로 억눌러 둬야만 했던 맹수로서의 욕망이 한 번 뚜껑을 열고 나니, 이제 더 이상 걷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참에 그 욕망을 한데 털어 여름여왕의 머리를 부수려던 순간.

“죽어라, 여름여와아앙!”

난데없이 불청객이 끼어들었다. 여태 몰래 사태를 관망하고 있던 아이온이 두 사람 사이로 와락 달려들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