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240화 (240/862)

15화. 여름여왕 (5)

“저건 또 뭐하는 새끼야?”

무왕은 인상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잔뜩 올랐던 흥이 갑자기 확 식었다. 그는 뭔가에 집중하고 있을 때 방해받는 것을 가장 싫어했고, 그럴 때면 방해꾼을 꼭 뒤집어엎어야 직성이 풀렸다.

하지만. 다급한 건 아이온도 마찬가지였다.

‘놈의 목숨만큼은! 내가! 내가아!’

아이온은 자신을 이딴 비참한 꼴로 만든 레드 드래곤에게 어떤 식으로든 보복을 하지 않으면 속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켈라트 경매장에서는 한참 어린 탐이란 놈에게 능멸을 당해야만 했고, 이곳에 오고 나서도 어떻게 탁본을 손에 넣었다 싶었을 때 갑작스런 변고를 당해야만 했다.

위대한 가문의 가주로서. 한평생 존경과 경외만 받고 살아왔던 그로서는 절대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게다가 여기에 같이 왔던 원로원의 의원들이며 가신들이 전부 나가 죽은 상황에서.

이대로 엘로힘에 돌아간다면 그는 한평생 뒷방 늙은이 신세가 되어 원로원의 구석 자리를 전전하다가 몰락할 게 틀림없었다.

수천 년 동안 엘로힘을 지탱하던 생명의 가문이 이대로 자신의 대에서 무너지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죽어서도 조상을 뵐 면목이 없는 수치였다.

하지만 아이온은 한 가지 믿는 구석이 있었다.

네브로. 나의 모든 것을 다 바친 소중한 자식. 비록 피를 물려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자신의 영지(靈智)를 내어 주었다. 그것만 해도 그 아이는 아이온의 분신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아이가 앞으로도 제 길을 걷게 하려면. 아니, 날게 하려면. 자신이 여기서 희생되어야만 했다. 그래야 원로원에 빚을 씌워 무너질 가문을 복구할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미래가 밝은 아이에게 날개는 되어 주지 못할망정, 장애물이 될 수는 없었다.

콰콰쾅!

아이온은 푸른 빛무리에 잠기다가 곧 거대한 수백 수천 개의 화살이 되어 여름여왕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재앙의 별〉. 프로토게노이 족은 원래 신이었지만, 격이 박탈되어 지상에 떨어진 존재들. 하지만 신성은 일부 남아 있어, 존재를 해체해 ‘개념’으로 환원되는 것이 가능했다.

이때에는 원래 그가 가져야 할 신위를 잠깐이나마 구현할 수 있으니. 촛불이 마지막에 타오를 때 가장 화려한 것처럼, 개념으로 돌아간 프로토게노이도 한순간만큼은 그토록 원하던 신의 힘을 낼 수 있었다.

하물며 한 가문의 가주나 되는 이가 스스로를 해체시켰다면. 그 힘은 어떨까.

아이온이 해체되어 나타난 수천 개의 화살은 무더기로 쏟아져 여름여왕의 몸 곳곳에 구멍을 숭숭 뚫었다.

『감히! 감히이!』

그리고 이 기회를 빌려, 여태 눈치만 보고 있던 다른 랭커들도 일제히 뛰어들면서 저마다 갖고 있던 최고의 스킬들을 풀어냈다.

사도는 권능을, 초인은 시그니처 스킬을, 군주는 주문을.

갖가지 이펙트들이 화려하게 터졌고, 여름여왕은 거대한 덩치만큼이나 커다란 과녁이 되어 그 많은 피해를 고스란히 감당했다.

콰콰쾅!

『아아아!』

그러다 화가 단단히 난 채로 브레스를 뿜으려 할 때.

무왕은 주먹을 아래로 내리치면서 여태껏 응축시켰던 두 비기를 한꺼번에 발출시켰다.

사일과 궤월. 해를 가르고, 달을 뚫는다는 거창한 이름을 가진 두 강기는 여름여왕의 날갯죽지를 자르고, 어깨에서부터 사타구니까지 몸뚱이에 깊은 궤적을 남겼다.

콰드드득!

엄청난 양의 피가 솟구치다가 비가 되어 지상으로 쏟아졌다. 갈라진 비늘이 우수수 떨어졌다.

『카아아!』

갈 길을 잃은 브레스는 여러 곳으로 흩어지면서 애꿎은 랭커들을 지워 버렸다.

그리고.

쾅!

무왕은 천근추의 수법을 발휘, 일직선으로 수직 낙하하면서 여름여왕의 뒷덜미에 몸을 내리꽂았다. 여름여왕은 ‘V’자로 크게 접히면서 그대로 추락했다.

콰드득.

경추에 실린 어마어마한 압박에 여름여왕은 척추와 늑골이 차례대로 으스러지는 고통을 맛봐야 했다.

무왕은 그것으로도 모자라, 녀석의 잘린 날갯죽지와 팔 근육을 뒤로 잡아당겼다. 콰드드득. 비늘이 으스러지고, 살갗이 거북이 등껍질처럼 갈라졌다.

용의 비늘과 가죽, 근육, 힘줄, 뼈. 강도나 탄력만 따진다면 아다만티움과도 견줄 만하다는 육체였지만.

무왕의 무지막지한 힘 앞에서는 쉽게 바스러지고 말았다.

그런 끔찍한 고통 속에서도. 여름여왕은 허공에서 억지로 몸을 비틀었다.

쩍 벌린 아가리에서 쏟아진 브레스가 무왕을 덮쳤다. 콰콰쾅. 팔괘들이 팽이처럼 회전하면서 호신강기를 수십 겹이나 만들어 냈지만 연달아 파괴되었다.

용암을 내뱉은 것이나 다름없는 위력이었지만. 무왕은 살갗이 지글지글 끓고, 얼굴이 내려앉는 고통 속에서도.

“하하하!”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이 크게 웃으면서 쥐고 있던 날갯죽지를 통째로 뽑아 버렸다.

쿠우-웅!

여름여왕은 그렇게 지면에 깊숙하게 처박혔다. 깊은 구덩이가 파이면서 동시에 생겨난 봉우리의 옆구리가 깊게 쓸려 나갔고.

콰르르르-

곧 거친 산사태와 함께 한쪽으로 기울어지다가 여름여왕과 무왕을 통째로 생매장했다.

그러다 다시 그 위로 용암이 분 출되듯이 불길이 높게 치솟으면서, 위로 여름여왕과 무왕이 튀어 올라왔다.

여름여왕은 날개가 뽑히고 팔다리가 부러지는 등 몸이 크고 작은 상처로 도배되어 있었다. 피가 뚝뚝 떨어지면서 땅바닥을 흥건하게 적셨다. 홍수가 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출혈량이었다.

그런데도 여름여왕은 끝까지 무왕을 갈아 마시겠다는 듯. 피로 덮여 잘 보이지 않는 눈을 잔뜩 찡그리면서 다시 한 번 더 브레스를 뿜었다.

무왕 역시 추락의 충격으로 적잖게 데미지를 입었는지 비틀거리는 발걸음이었지만. 다시 몸 위로 팔괘를 떠올리면서 주먹을 앞으로 내질렀다.

수십 개의 강기가 잇달아 터졌다. 다른 속성을 가진 빛의 칼날이 되어 브레스를 난도질 했다.

콰콰쾅!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폭발과 후폭풍이. 다시 한 번 더 외우주의 겉 부분을 따라 휘몰아쳤다.

* * *

“괴…… 물.”

아트란은 격전지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곳에서 무왕과 여름여왕의 싸움을 넋을 잃고 쳐다봐야만 했다.

그리고 혼잣말로 작게 중얼거렸다.

“저딴 괴물의 낯짝을 갈긴다고? 미친 새끼.”

그건 스스로에 대한 욕설이었다. 여름여왕에 의해 경매가 파투 났을 때. 레드 드래곤에게 엿을 먹이겠다는 일념 하나만으로 전 재산을 털어 이곳으로 넘어왔다.

처음에는 의기양양했다. 빙왕, 트와이스, 블랙 스컬. 모두 손꼽히는 S급 용병들이었고, 철사자단이나 달그림자 같은 집단도 뒤를 받쳤다. ‘장’이나 ‘턴’ 같은 생각지 못한 인재를 만나기도 했다.

그래서.

겉으로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이만한 전력이라면 레드 드래곤의 팔 하나쯤은 뽑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도 했었다.

아무리 탑의 세계에서는 무력이 최고라지만. 금력도 만만치 않노라고, 나 역시 너희들에 못지않도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을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된 순간. 아트란은 자신이 얼마나 멍청한 생각을 했는지를 절실히 깨닫고 말았다.

팔 하나? 미친 헛소리였다. 손가락 하나 뽑기 힘들었다. 여름여왕의 옆에도 다가가지 못하는데 무슨.

방금 전, 브레스에 쓸려 나간 랭커들 중에는 블랙 스컬도 있었다. 여름여왕의 발톱이라도 잘라서 퀘스트 공적치를 얻어 보겠다고 설치면서 나섰다가, 시체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다.

일반 플레이어들에게는 S급 용병이니, 랭커이니, 불리던 자였지만. 여름여왕에게는 그냥 평상시 아무렇지 않게 짓밟고 지나가는 미물에 불과하지 않지 않았을까?

“저 괴물은 더 큰 괴물이 되었군. 하핫. 하여간 대단해. 나도 부단히 노력한다고 했었는데 말이지.”

그때. 아트란의 옆에 있던 빙왕이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시리도록 투명한 머리칼과 눈썹을 지녔지만, 그는 이곳으로 오는 내내 혼잣말을 쉬지 않고 내뱉던 말 많은 영감이었다.

이미 무왕과 여름여왕이 두려워 달아난 다른 용병들과 다르게. 빙왕은 트와이스, ‘턴’과 함께 마지막까지 임무를 지켜 주고 있었다.

날아오는 파편들을 옆으로 쳐내고, 적의 공격에 휘말리지 않는 영역까지 아트란을 무사히 피신시켰다.

마음 같아서는 게이트를 타고 이런 지랄맞은 외우주를 빠져 나가고 싶었지만. 그쪽으로 가는 길목은 무왕과 여름여왕이 가로막고 있어서 여기서 발이 묶이고 말았다.

아트란은 빙왕을 슬쩍 돌아봤다. 그러고 보니 빙왕은 한창 현역이던 시절, 아직 저층 구간 플레이어였던 무왕에게 꺾인 이후로 내리막길을 타야만 했던 과거를 갖고 있었다.

반대로 무왕은 빙왕과의 대결로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리며 화려하게 데뷔할 수 있었지만.

‘이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나?’

보통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거기에 대해 꿍한 마음을 갖고 있기 마련일 텐데도.

빙왕은 오히려 싸움을 보는 내내 원하던 장난감을 만난 사람처럼 너무 좋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건, 트와이스와 ‘턴’도 마찬가지였다.

빙왕처럼 나사 빠진 사람인 양 해맑게 웃는 건 아니었지만. 무왕과 여름여왕의 격전을 보면서 놀라기도, 흉내 내기도 하고, 고심에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세 사람의 눈에 담긴 감정은 모두 똑같았다.

열의.

선망.

동경.

혹은 경외.

‘미쳤어. 이놈들, 전부……!’

아트란은 뇌가 전부 근육으로 가득 찬 것 같은 이들 때문에 학이 떼일 지경이었다. 여태껏 동전 한 닢에 모든 것을 걸고 살아온 그에게, 이들은 전부 이해가 불가능한 또라이들이었다.

그렇기에. 아트란은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또라이들이 많은 곳에 있으면 같이 휘말려 죽기 십상이었다.

이들은 즐겁게 싸우다 죽으면 그것도 낙이 아니겠냐며 실실대지만, 아트란은 자신의 목숨이 가장 중요했다.

재기를 할 때 하더라도, 일단 살아남아야 그것도 가능했으니.

그러다 일행들 중에서 유일하게 자신과 같은 정상인이던 자를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장’. 말은 거의 없었지만, 상황을 보는 눈은 냉철하던 사람이었다.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바로 옆에 있었는데. 갑자기 보이질 않았다.

‘어디로 갔지?’

* * *

팟-

‘장’이라는 가명을 썼던 장웨이는 이미 폐허가 되어 휑하기만 한 전장을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목표는 무왕과 여름여왕이 뒤엉켜 있는 곳. 저 지랄맞은 외뿔부족들이 천지 분간 못 하고 마구잡이로 날뛰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지금이야말로 기회다.’

장웨이는 무왕과 외뿔부족의 손을 어지럽게 만들 목적으로 퀘스트를 수락했다. 그리고 상황은 노렸던 것보다 훨씬 순조롭게 풀리고 있는 중이었다.

자신이 있는 건 생각도 않는 것일까. 아니. 할 겨를조차 없다는 게 맞겠지. 여름여왕을 상대하는 내내, 무왕은 주변에는 눈길도 돌리지 못했으니까.

지금 저 모습만 봐도 딱 알기 쉬웠다.

웬만한 랭커도 가볍게 녹이는 브레스를 홀라당 뒤집어쓰고도,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며 날개를 뜯어 버리는 힘이라니.

정말이지.

‘대단해!’

장웨이는 사납게 웃었다. 두 눈이 희열에 잠겨 번들거렸다. 남들은 절대 잡지 못할 거라며 피하는 사냥감을 노리는 사냥꾼의 눈.

그동안 무왕에게 쫓기면서 그가 강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수준인지는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여름여왕과 싸우는 모습을 보면서 비로소 그의 ‘정도’를 알게 된 지금. 심장이 마구 뛰었다.

게다가 지금은 방해를 받을 염려도 없다. 사냥감은 다른 사냥감과 부딪치는 중이다.

제 등이 훤히 노출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노릴 거라고는 생각도 않고 있었다. 아니, 못 한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그것이 맹수들만이 가지는 맹점이다. 자신이 얼마나 강한지 스스로 잘 알기 때문에. 아무도 덤비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고, 자신이 최고라는 오만에 빠진다.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생각인지 알지도 못하고.

그런데 저기 그런 사냥감이 있었다.

저 거대한 사냥감의 등에다 화살을 꽂아 넣을 수 있다면. 이 칼로 목을 자를 수 있다면. 그때의 희열은 또 얼마나 클 것인가.

지금의 심정은.

‘마치.’

아주 오래 전. 지구에 두고 왔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마치 대장 같아.’

장웨이는 손끝을 타고 흐르는 찌릿한 감각을 느끼면서.

탁!

도중에 걸음을 멈췄다. 〈은신 잠행〉. 기척을 철저하게 숨기며 적의 뒤를 밟을 수 있게 하는 이예 신의 권능을 빌려 도착한 곳은 낙석 더미로 그늘이 잔뜩 진 곳.

외부에 전혀 노출되지 않으면서, 시야를 확보하기 이만한 곳이 없었다. 장웨이는 사일동궁을 왼손에 쥐고, 소증을 시위에다 걸며 천천히 뒤로 잡아당겼다.

저 멀리.

표적이 다시 한 번 폭발 소리와 함께 하늘로 높이 치솟고 있었다. 너무 멀어서 까마득한 점으로 보였지만. 동공이 아주 좁아지면서 안력이 잔뜩 돋워진 두 눈은 확실하게 무왕을 노렸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무왕이 이쪽에서 반대로 몸을 돌리고 있었다.

이대로 시위를 놓는다면.

소증은 빛의 화살로 변하며 무왕의 등판에 작렬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곧 손끝에서 느껴질 짜릿한 손맛을 기대하면서 혀로 입술을 축였다.

그런데.

‘……뭐지?’

장웨이는 시위를 놓으려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멈칫거리고 말았다. 쿵. 쿵. 쿵. 심장이 세게 뛰었다. 호흡이 가빠졌다.

무왕을 노리려 할 때에도 심장은 빠르게 뛰었다. 하지만 그건 잔뜩 부풀어 오른 기대감과 흥분 때문이었다.

지금은 그것과 달랐다.

등골이 서늘했다. 오한이 들었다. 마치 누군가가 몸 안쪽에다 손을 깊숙하게 집어넣어 폐부를 강하게 쥐어짜는 것 같았다. 불안감. 혹은 초조함.

탑에 들어선 이후로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했던 감정. 이건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감각이었다.

장웨이는 지구에 있을 때부터 천성적으로 위기를 빠르게 포착할 수 있는 재능이 있었다. 정확하게는 자신의 목숨이 위험해질 때 나타나는 ‘느낌’을 알아챌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장웨이는 지옥 같았던 아프리카에서도 용케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재능은 탑에 넘어오면서 궁무신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줬다.

강자가 되면서 사라졌던 감정이 바로 지금 되살아났다. 주변에.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그는 옆으로 고개를 홱 하고 돌렸다. 잔뜩 좁혀진 시야 저 너머로. 언덕에 한 남자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검은 가면과 옷을 입은 사내가 있었다. 카인. 원래 그가 찾으려던 목표, 독식자였다.

그러니 분명 처음 보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녀석을 보고 있노라니 심장이 멈추질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가쁘게 뛰었다. 쿵. 쿵. 쿵.

장웨이는 인상을 잔뜩 일그러뜨리면서 녀석을 노려봤다.

‘누구냐, 너는?’

* * *

“90퍼센트? 미친 헛소리였어.”

연우는 아주 잠깐 무왕이 ‘도와준다면’ 충분히 여름여왕을 잡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던 스스로에게 비웃음을 던져야 했다. 도와준다고? 누가? 무왕이?

반대였다.

오히려 자신이 방해가 안 된다면 다행이었다.

아무리 중상을 입어도. 아무리 이성이 마성에 잡아먹혀도. 여름여왕은 여름여왕이었다.

최후의 용이자, 지난 수천 년 동안 탑을 지배하던 절대자.

그런 자를 잡는다니. 헛소리였다.

무왕과 여름여왕이 싸우는 자리에 난입한다고 해도, 고래 싸움에 등 터질 꼴밖에는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연우는 시샘이 났다.

‘저 싸움은…… 원래 내 싸움이야.’

무왕은 제자를 도와주기 위해서 나선 거였다. 제자가 얼마나 무모한 짓을 저지르려는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랬기에 연우를 대신해 나섰고, 지금 죽을지도 모르는 위험천만한 살얼음판 위를 걷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지금 연우가 하는 생각은 스승의 도움을 무시하고, 자기 승부욕만 불태우는 못난 짓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연우는 그런 못난 생각을 숨길 생각이 없었다.

자신도 저기에 어우러지고 싶었다. 10퍼센트는커녕 1퍼센트도 안될 아주 적은 확률이었지만. 그는 여름여왕을 끝장낼 자신이 있었다.

아무리 여름여왕이 포효하고, 권능을 발산한다고 하더라도. 스테이지 전체를 어둠에 잠기게 했던 아가레스나, 악마를 잡아먹던 헤르메스에 비할 바가 될까.

더구나. 여름여왕은 동생의 한쪽 팔을 뜯어먹었던 놈이었다.

그렇다면 죽기 전에 똑같이 되갚아 주지 않는다면 안 된다. 마독 중독? 그걸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그래. 그거야. 그런 생각. 아주 좋아.』

우웅, 웅-

모든 권능을 각성한 용종은 신과도 어깨를 나란히 한다지만. 사실 신이나 악마에 견주는 것 자체가 미친 짓이었다. 그래도 연우는 아가레스에게 한 방 먹인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이라고 또 못할까?

『……서둘러. 어서. 네 먹이가 저기에 있잖아. 안 그래?』

그때. 현자의 돌이 부르르 떨렸다. 심연 한쪽에서부터 빌어먹을 마성이 어느덧 나타나 귓가에 달콤하게 속삭여 댔다.

평소에는 아무리 건드려도 꿈쩍도 않던 녀석이건만. 이럴 때만큼은 참 귀신같이 나타났다. 딱 보아도 그를 위기로 내몰기 위한 개수작이었지만.

‘이놈과 의견이 맞을 때도 있군.’

연우는 피식 웃었다. 어차피 마성은 아가레스가 남긴 잔재이기 이전에, 자신의 본성에 기반한 다른 인격이었다.

당연히 녀석이 하는 말은 자신이 하는 말과 크게 다를 게 없었다.

이성도 본성도. 결국 똑같은 결정을 내렸으니 뒤를 돌아볼 건 없었다.

연우는 손을 뻗어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짚었다.

[보상 ‘인트레니안 개방’을 선택하셨습니다. 목록에 있는 물건 중 총 5개를 얻으실 수 있습니다.]

[어떤 것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보상 목록]

1. 봉황의 알

2. 프로메테우스의 횃불

3. 왕의 제전

……

여름여왕이 준 퀘스트로 얻은 보상.

아무리 중요한 보물을 제외했다고 해도, 목록에 적힌 것들은 하나하나 전부 대단한 것들밖에는 없었다.

다행히 그중에 연우가 원하던 것이 있었다.

그것을 선택하면서 생각했다.

‘여름여왕이 준 보상으로 여름여왕의 머리통을 부순다? 과연 마지막에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한데?’

방해를 했다면서 길길이 날뛸 스승의 모습이 떠오르긴 했지만.

‘뭐. 제자의 애교 정도로 받아 주시겠지. 원래 제자 인성은 스승을 닮은 법이니까.’

혼자서 말도 안 되는 자기 납득을 하면서.

띠링-

‘원래 막타는.’

연우는 거침없이 손에 닿은 물건을 잡아 뽑았다.

‘먹는 사람이 임자지.’

[보상으로 ‘얄타바오 금괴’를 선택하셨습니다.]

『……금괴?』

순간, 황당함에 젖은 마성의 목소리가 삑사리처럼 새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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