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242화 (242/862)

17화. 여름여왕 (7)

아트란의 얼굴이 금세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지금 그딴 걸 말이라고 하시는 겁니까!”

“못할 건 또 뭐지?”

“장난할……!”

“설마 내가 정말 떼먹기라도 할까 봐?”

연우가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아트란은 다시 한 소리를 하려다가, 문득 다른 생각에 미쳤다.

“……관리국의 퀘스트.”

“깨달았으면, 뭐해? 빨리 서두르지 않고?”

아직 퀘스트는 하나가 더 남아 있었다. 레드 드래곤 현상 수배 퀘스트. 레드 드래곤의 시설을 많이 부술수록, 소속원을 많이 사살할수록 보상은 더 크게 주어진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연우는 여기서도 1등 자리를 놓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래도 마나의 맹세라도 해야 하지 않겠……!”

“지금 이럴 때가 아닐 텐데. 뭐, 싫다면 다른 상인을 찾아가고.”

“제기랄!”

아트란은 애꿎은 땅을 발로 걷어찼다.

“상인의 등이나 쳐먹고! 고객님은 죽어서도 분명 지옥에 떨어지실 겁니다!”

“잘 알고 있으니까, 빨리.”

“으으!”

아트란은 분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연우를 노려보다가, 금세 시스템을 조작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퀘스트는 머지않아 끝날 테니 대금을 하루 정도 늦게 지불하는 형태로, 물건을 빠르게 사 들였다. 아트란의 신용이 조합들 사이에서 높게 평가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드래곤 킬러’ × 14를 추가로 구매하였습니다.]

[‘파비오 숲 사냥꾼의 활용수’ × 21을 구매하였습니다.]

[‘거대 원숭이의 꼬리 가시’ x 6을 구매하였습니다.]

……

연우는 차곡차곡 쌓이는 물건들을 보면서 눈을 빛냈다. 품목을 말할 때는 이렇게 많을 줄 몰랐는데. 모아 놓고 보니 양이 제법이었다.

모든 구매를 마친 아트란은 다시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마지막 남은 ‘알비노 트롤의 생혈’을 넘겼다. 얼마나 갈아 대는지 저래서 이가 남아나겠나 싶을 정도였다.

“여기…… 있습니다.”

“고맙게 잘 쓰도록 하지. 고마워, 투자자.”

졸지에 상인에서 마음씨 좋은 투자자로 전락해 버린 아트란은 다시 울컥하고 말았다. 정말이지 하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사람의 복장을 뒤집어 놓는 녀석이었다.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 녀석, 이걸 전부 어디에다 쓰려고? 아니, 제대로 쓸 수나 있나?’

드래곤 킬러는 웬만한 랭커들도 들기 버거워할 만큼 무겁다. 자유롭게 사용하기는 그보다 더 까다롭단 뜻이었다.

하지만 독식자는 아직 저층 구간의 플레이어. 어떻게 이걸 다루려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다른 물건들도 마찬가지. 드래곤 킬러보다 사용법이 까다로우면 까다롭지, 절대 쉬운 게 없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다 보니 불안한 마음을 도저히 지울 수가 없었다. 기세에 내몰려 일단 구매부터 하고 보긴 했는데. 잘못되면 정말 자신은 끝장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아트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연우는 여유롭게 그림자로 물건들을 허공에다 띄운 다음, 블링크를 전개해 다시 자취를 감췄다.

사냥 준비를 하기 용이할 장소를 찾아서.

* * *

“주변에 아무도 접근할 수 없도록 철저하게 경계해.”

「…….」

「예.」

『알았어. 조심해.』

“그러지.”

연우는 자리를 잡은 뒤, 곳곳에 흩어졌던 샤논 등을 자신이 있는 곳으로 불렀다.

한령과 레베카는 좌우로 흩어지고, 브라함은 부와 함께 일대에 걸쳐서 임시 결계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다만, 샤논은 아무 말이 없었다. 연우는 유독 발걸음이 무거운 그를 불렀다.

“샤논.”

「따로 시킬 일이라도 있나, 주인?」

투구 아래에는 분명 아무 얼굴도 없었지만. 언뜻 비치는 인페르노 사이트는 평소보다 잠잠했다. 연우는 그 눈을 보면서 말했다.

“이제 너의 주인은 나다. 명심해.”

「……내가 못 볼 꼴을 보였군. 용서를.」

샤논은 한쪽 무릎을 꿇으면서 고개를 숙였다. 그래도 한때 레드 드래곤에 몸담았던 자신이, 옛 주인을 공격하는 데 앞장선다는 게 마음 한편에 켕겼던 것이다.

연우는 그런 그의 혼란을 지적했고, 샤논은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잘못을 시인했다. 아무리 허물 없게 지내는 사이라고 하더라도, 이럴 때 주종 관계는 확실히 해 둬야 했다.

“넘어가는 건. 이번 한 번뿐이야. 명심해.”

「감사합니다.」

고개를 숙인 샤논의 인페르노 사이트가 다시 활활 타올랐다. 방금 전 지적으로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마음 정리가 끝났다. 전생은 전생일 뿐. 지금은 현생에 충실해야 했다.

샤논도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 뒤.

브라함이 연우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겠나? 저대로 둬도?”

“괜찮을 겁니다. 저 정도로 흔들릴 만큼 약한 친구는 아니니까요.”

“하긴. 그런 자였다면 데스 노블까지 되지도 못했겠지.”

브라함은 고개를 끄덕이다. 연우의 주변에 어지럽게 놓인 물건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이 많은 물건들은 다 뭔가? 저 무식한 창은 참 오랜만에 보는군.”

“혹시 메르크리라는 것을 아십니까?”

“메르크리라면…… 거인족의 무술을 말하는 것인가?”

“예.”

메르크리는 거인족의 사멸과 함께 사라진 옛 무술이었다. 체고가 7미터가 넘는 독특한 신체 조건을 가진 거인족에게 특화된 무술.

거인족 외의 종족이 익히기엔 적합하지 않다는 게 흠이었지만 기술과 동작이 가진 완성도가 뛰어나서, 그렇지 않아도 강한 발데비히는 싸움에 있어서는 최고로 군림할 수 있었다.

메르크리는 발데비히가 사용하던 무술이었다. 오늘날의 검야차를 있게 한 무술.

그리고 드래곤 킬러에 가장 알 맞은 무술이기도 했다.

발데비히는 검야차라는 별칭처럼 주로 검을 썼다. 하지만 타고난 전사인 거인족의 피를 물려받은 만큼 다양한 병장기에 능통했고, 드래곤 킬러는 활이나 화살보다 투창을 선호하는 녀석에게 더할 나위 없이 알맞은 도구였다.

비록 저층에 있을 때에는 값이 터무니없이 비싸서 제대로 쓰지 못했고, 고층으로 올라갔을 때에는 더 이상 투창이 필요 없어서 손을 대지 않았었지만.

동생은 발데비히가 드래곤 킬러를 사용했을 때에 받았던 충격을 잊지 않고 일기장에 고스란히 적었다.

산자락을 떨친다.

아마 그 말이 가장 어울릴 것이다. 드래곤 킬러를 들었을 때에 보았던 발데비히의 기세는.

그리고 그 기세만큼이나 막강한 위력으로. 드래곤 킬러가 드라고니안에 적중했을 때, 드라고니안의 사체는 물론이고, 주변에 있던 다른 몬스터들은 전부 쓸려 나가고 말았다.

그리고.

발데비히는 튜토리얼에 있을 적, 몸이 약했던 동생을 위해 메르크리를 인간 체형에 맞게 뜯어고쳐 강제로 익히게 했다.

그 뒤로도 갖가지 기술들을 다양하게 가르쳐 줬으니. 그런 세세한 동작들 하나하나가 일기장에 모두 남아 있었다.

“영역 선포.”

화아악!

권능을 개방하는 것과 동시에 현자의 돌과 백여 개의 코어가 일제히 회전하면서 용의 비늘이 빳빳하게 일어났다. 몸에 막대한 힘이 실리고, 견갑골을 따라 용의 날개가 솟으면서 불의 날개와 뒤섞였다.

끝없는 밤의 세계에 들어오고 나서 처음으로 사용하는 힘. 현자의 돌은 시간이 갈수록 연우의 육체를 조금씩 개선해 나가면서 최상의 상태로 만들어 주고 있었다.

연우는 여기에 다른 권능들도 추가로 전개했다.

[여신의 성흔]

[제3천의 영 - 강화(强化)]

[흉신악살]

아테나 신으로부터 가호를 받으면서 근육에 바짝 힘이 실렸다. 여기에 개방된 망령들을 체내로 돌리면서 마력을 타고 흐르게끔 만들었다.

끼아아!

최근에 개발한 망령의 사용법이었다. 망령들을 마력 속에 녹이면, 그들이 뿜어내는 마이너스 에너지를 활용해 강화 효과를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아이디어에 착안해서 시도해 본 것이었다.

그리고 결과는.

콰드득-

정답이었다.

백 마리에서 이백 마리, 이백 마리에서 삼백 마리…… 순차적으로 망령들이 유입되었고, 끝내 천여 마리가 모두 마력에 녹아 몸을 가득 채웠을 때.

망령들이 마력회로를 따라 회전하면서 일제히 귀곡성을 내질렀다.

근육이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 머리가 순간 현기증으로 아찔했다. 현자의 돌이 마력을 감당하기 위해서 더 맹렬하게 회전했다.

여기에 흉신악살이 전개되면서, 마성까지 튀어나와 육체를 지배했다. 용마안이 맺힌 두 눈이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비늘이 검게 변했다. 입술을 따라 송곳니가 잔뜩 자라났다.

휘휘휘!

연우를 따라 갖가지 종류의 기운이 거세게 휘몰아쳤다. 귀기, 투기, 마기, 흑기, 살기까지. 기운들은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히면서 영역을 따라 구축된 용의 권능과 맞물리고, 육체는 용의 인자와 마의 인자가 서로 날뛰면서 마룡체의 특성을 극단까지 내보였다.

지금 이것만으로도 연우는 정신과 육체에 전부 과부하가 걸리는 느낌을 받았다. 당장이라도 날뛰고 싶은 충동이 마구 들었지만. 꾹 억눌렀다.

그때, 대기하고 있던 브라함과 부가 나섰다. 브라함은 화성의 서를, 부는 무면목 법서를 들었다.

“그럼…… 시작하지.”

브라함은 조금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연우를 봤지만, 그가 했던 당부가 있으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연금술사와 리치의 마법 주문이 시작되자, 연우의 발아래에 마법진이 수도 없이 겹쳐졌다.

그리고 이펙트가 맺히면서 다시 더 많은 버프를 실었다.

근육 강화, 마력 강화, 위력 증가, 폭발 생성…… 마법 무장보다 더 수준 높은 마법들이 대거 실리면서 연우는 육체가 더 이상 버텨 낼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한 힘을 감당해야만 했다.

마치 수십 곱절로 늘어난 중력을 맞은 것처럼. 몸이 가라앉았다. 근육이 눌리고, 뼈가 뭉개졌다.

우드드득, 드드득!

어깨뼈는 탈골되었다. 갈비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모세혈관이 잇달아 터지면서 모공 사이사이로 피가 쏟아졌다.

대단한 강도를 자랑한다는 마룡체가 무너질 정도로 엄청난 힘이 실린 것이다. 그런데도 연우는 가벼운 신음 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

두 눈도 끝내 충혈로 빨개지면서 이대로 몸이 터지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위험해 보였다. 반대로, 연우를 타고 흐르는 기세는 이내 폭풍처럼 거세게 휘몰아쳤다.

외뿔부족과 레드 드래곤 모두 오싹한 기세에 고개를 주변으로 돌렸다. 하지만 전쟁에 집중해야 하는 터라, 어딘지 확인할 겨를이 없었다.

그러다 용의 인자와 마의 인자 모두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무너 지려던 그때.

[육체가 엄청난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경고! 이미 육체의 한계점을 넘어섰습니다. 이 이상의 계속된 행위는 신체를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망가뜨릴 우려가 있습니다.]

[스킬 ‘재생’이 발동됩니다.]

[세포와 인자 속에 저장된 데이터대로 복구되기 시작합니다.]

[‘재생’의 스킬 숙련도가 대폭 상승하였습니다. 12.1%]

[‘재생’의 스킬 숙련도가 대폭 상승하였습니다. 21.9%]

……

비에라 듄에게서 강탈했던 재생이 발동되면서 무너진 만큼 빠른 속도로 신체를 수복시켰다.

버프가 계속 중첩되어도, 스킬 숙련도가 상승하면서 수복 속도도 더 빨라졌다.

그리고 이것은 곧.

[육체가 강화되었습니다.]

[육체가 강화되었습니다.]

육체의 변화로 이어졌으니.

[육체가 한계치에 다다랐습니다. 용의 인자가 한계만큼 단단해졌습니다. 마의 인자가 한계만큼 강화되었습니다.]

‘일단 여기까진가.’

비록 아쉽게도 아가레스를 상대했을 때와 비교하면 턱없이 모자랐지만.

그래도 연우는 3차 각성에서 한계까지 빠른 속도로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사실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다르기도 많이 달랐다.

당시에는 아테나의 직접적인 가호가 있어서 하이 랭커들도 발아래로 둘 만큼 강한 힘을 손에 넣었던 것이지만, 지금은 자력으로 이만큼 힘을 짜낸 것이니까. 명백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당시에 얻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연우는 어렵지 않게 부쩍 성장한 힘을 능숙하게 다룰 수 있었으니.

연우는 바닥에 널브러진 드래곤 킬러 쪽으로 손을 뻗었다. 드래곤 킬러가 두둥실 허공에 떠올라 손에 잡히고, 뒤따라 다른 재료들이 딸려 오면서 잘게 부서져 창대 위에 내려앉았다.

발데비히는 비싼 주제에 내구성은 약한 드래곤 킬러를 오랫동안 다루기 위해서 갖가지 방법을 시도했다. 이것이 바로 그 방법. 드래곤 킬러의 내구성을 비약적으로 상승시키고, 자체 위력도 끌어 올리는 효과가 있었다.

쩌어엉-

드래곤 킬러가 기분 좋다는 듯이 길게 몸을 떨었다.

연우는 그것을 역수로 쥐어 어깨에 이었다. 무게가 제법 무거웠지만, 거인족에 못지않게 강해진 완력으로 어렵지 않게 드래곤 킬러를 들었다. 완벽한 투창 자세를 갖추면서 표적을 살폈다.

용마안과 초감각이 겹쳐졌다. 저 멀리, 표적이 노출되었다. 연우는 모든 의념과 기운을 갈무리하여 창끝에 집중시키고, 여기에 한 가지 스킬을 더했다.

[악마술- 마왕독]

용종에게는 치명적인 마독, 그것을 넘어선 마왕독이 묻히자 창날이 검게 물들었다.

그리고.

파아앗-

연우는 도약과 함께 있는 힘껏 드래곤 킬러를 던졌다. 랜스는 빛살이 되어 공간을 꿰뚫었다.

쿠르릉-

소닉붐과 함께, 랜스가 날아간 자리로 하얀 구름 두 개가 꽈배기처럼 뱅글뱅글 감긴 채로 남아 있었다.

‘우선 밖에 있는 겉절이들부터.’

* * *

용생구자, 둘째인 이문 치미는 귀찮게 자신에게 달라붙는 외뿔부족이 신경 거슬리기만 했다.

『이 하루살이 같은 것들이! 감히!』

얼마나 날파리 같은지. 몸을 흔들어서 강제로 떼어 놓으면 다시 달라붙고, 독 안개를 뿌려서 쫓아 냈다 싶으면 사각지대를 교묘하게 노려 오길 반복했다.

싸움에 있어서는 천재적인 자질을 가진 종족이라더니. 정말이었다. 왜 어머니께서 이토록 이들을 상대하는 데 주의를 기울이라고 하셨는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치미는 그런 사실이 영 못마땅했다. 자신은 위대한 용의 피를 물려받은 자. 이깟 하위 종족 따위에게 당할 몸이 아니었다.

결국 이런 것들은 강제로 박멸을 시켜야만 했다. 주둥이를 크게 부풀어 올렸다. 턱밑에 놓인 독샘이 맹독을 마구 분비하면서 독기가 입가에 잔뜩 번졌다.

“확장 브레스다! 전원 해산!”

“독에 대비하라!”

치미를 노리던 외뿔부족은 재빨리 거리를 벌리기 시작했다. 여태 브레스는 자주 쏘아 댔지만, 이번에 지금까지 상대했던 것보다 훨씬 양이 많을 것 같았다.

치미의 근방에 있던 레드 드래곤 측 플레이어들도 달아났다. 치미의 독은 적아를 구분하지 않았다. 이미 상당수의 동료들이 뭣도 모르고 당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들의 예상대로, 치미가 이번에 준비한 브레스는 평소와는 달랐다.

〈산독(酸毒)의 숨결〉. 독성분뿐만 아니라, 산 성질까지 담겨 닿는 모든 것을 녹이고 태우는 브레스였다. 그에게 허락된 권능이기도 했다.

원래대로라면 어머니의 허락을 받지 않은 곳에서 개방해서는 절대 안 될 터였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겨를이 없었다.

그렇게 브레스를 내뱉으려던 그때.

쐐애애액-

콰아앙!

별안간 귀청이 찢어질 정도로 엄청난 소닉붐과 함께 날아온 무언가가 턱 아래를 강타했다.

충격파는 대단했다. 엄청난 격통과 함께 목과 턱을 포함한 머리 절반이 삽시간에 부서졌다.

그래도 용이 가진 엄청난 재생력 덕분에 목숨은 겨우 부지할 수 있었지만.

문제는 바로 그 뒤부터였다.

입에 잔뜩 머금고 있던 산독의 숨결이 갈 길을 잃고 길쭉한 육체에 홀라당 쏟아졌다.

치이익!

육체 곳곳이 새하얀 증기를 내면서 녹아내렸다. 거기다 독샘이 부서지면서 안에 담겨 있던 맹독까지 머리를 타고 흘렀으니.

『크아아악!』

꾸우우-

치미는 엄청난 고통에 비명을 지르면서 몸부림을 쳤다. 권능으로 분류되는 만큼, 산독은 사실 그도 감당하기 힘들 만큼 지독했다.

수 미터에 달하는 길쭉한 몸체가 발버둥을 치자 사방이 어지러워졌다.

그래도 어떻게든 정신을 붙잡으면서 독을 흡수하고 재생을 시도해 보려 했지만.

『마, 마왕독……? 이게 어, 어떻게?』

육체 복구는 이뤄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더 빠른 속도로 망가졌다. 어느덧 산 독 속에 숨은 마왕독이 빠르게 육체를 잠식하고 있었다.

공격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드래곤 킬러가 두 번, 세 번씩 이어져 날아올 때마다, 치미의 몸뚱이에는 커다란 구멍이 숭숭 뚫렸다.

드래곤 킬러는 대상에 적중할 때 부서지면서 수십 갈래로 쪼개지는 특징이 있다.

당연히 치미의 체내에도 드래곤 킬러의 조각들이 가시처럼 곳곳에 박혔으니. 상처와 중독은 더 빠른 속도로 이어졌다.

결국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몸이 비틀거릴 때.

우르르, 콰쾅!

이번에는 드높은 상공에서부터 뭔가가 내리꽂혔다.

[불의 파도]

[72선술- 뇌(雷), 벽(霹)]

불의 파도가 72선술을 빌려, 벼락의 형태로 화해 그대로 내리꽂힌 것이다.

치미의 몸뚱이에 박혀 있던 백여 개의 드래곤 킬러 조각들은 피뢰침 역할을 하면서 벼락을 고스란히 빨아들였다.

체내로 흘러들어간 불의 벼락은 연쇄 폭발을 일으키면서 겉과 속을 송두리째 태워 버렸다.

순식간에.

『안, 돼……!』

치미는 숯 덩어리가 되어 버린 채, 칠공으로 검은 매연을 끊임없이 토해 냈다. 이미 녀석의 몸은 대부분의 기능이 상실된 상태였다.

치명상이었지만, 용의 피는 이 시간에도 녀석을 살리려는 끈질긴 의지를 보였다. 아마 조금만 더 시간이 주어졌더라면 어떻게든 살아남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뭐가 뭔진 모르겠지만!”

“잡아! 맛있게 잘 익었으니까, 오늘 저녁은 용 고기다!”

“으하하! 간만에 포식하겠는데!”

외뿔부족은 신나게 웃으면서 치미에게 달려들었다. 무기를 휘둘러 댈 때마다 단단하던 외피와 살점이 뭉텅뭉텅 썰려 나갔다.

더 이상 치미에게 저항할 힘은 남아 있지 않았다.

쿵!

결국 숨통이 끊어진 치미의 거대한 머리통이 지면에 박히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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