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243화 (243/862)

18화. 여름여왕 (8)

[플레이어 ‘치미’가 사망하였습니다.]

[퀘스트를 일부 수행하였습니다. ‘치미’를 사냥하는 데 큰 공헌을 하였으므로, 다량의 공적치를 획득합니다.]

치미의 죽음은 레드 드래곤 측에 경악으로 다가왔다.

『둘째야!』

『이문!』

용생구자는 여름여왕을 대신해서 탑을 지배하는 최정점. 하나하나가 사도이면서도, 군주나 초인의 자격을 획득한 자들이기도 했다.

그런 자가 죽었다고? 81개의 눈은 큰 충격을 받고 말았다.

문제는 그것이 시작에 불과하다는 점이었다.

쐐애애액!

쐐액- 쐐애액-

『빌어먹을! 저 저주받을 창이 또!』

『피해라!』

드래곤 킬러가 빗발쳤다. 어마어마한 거력이 실린 드래곤 킬러가 번쩍일 때마다, 용생구자는 재빨리 제자리를 이탈하기 바빴다.

창에 실린 파괴력도 파괴력이었지만. 창끝에 담긴 마왕독과 뒤이어 떨어지는 벼락은 그들에게 너무 큰 충격으로 와 닿았다.

저기에 휩쓸리면 몸이 성치 못 하리란 것을 깨달은 것이다. 용의 피를 물려받은 만큼, 그들도 마왕독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저 건방진, 인간 따위가!』

그때, 넷째 폐한 트라이거가 지면을 세게 두들기면서 연우에게로 쏜살같이 달려왔다. 4미터 크기의 드레이크. 마치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지축이 위아래로 크게 흔들렸다.

그런 녀석 앞으로 샤논과 한령, 레베카가 나섰다.

『비켜라, 이것들!』

트라이거는 단숨에 그들을 짓밟기 위해 머리를 바짝 세웠다. 모래 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나고, 코코에 박힌 뿔이 그들을 꿰뚫으려는데.

차아앙!

샤논은 흑기와 마기를 잔뜩 머금은 칼을 바짝 세워서 불길을 터뜨렸다.

〈볼케이노〉와 〈데스 핸드〉. 화권 바할로부터 빼앗았던 화염 스킬이 트라이거의 돌파력을 상쇄시키고, 땅 밑에서부터 올라온 검은 손길이 녀석의 네 발을 단단히 붙잡았다.

한령은 두 자루의 칼을 교차시켰고, 레베카는 하늘에서부터 빠르게 떨어지면서 녀석의 머리를 세게 내리찍었다.

쾅!

쿠쿠쿠-

트라이거는 두 언데드와 정령을 모두 짊어지고도 한참이나 전진하는 괴력을 선보였다. 하지만 그들을 완전히 떨쳐 내지 못해 결국 연우에게 다다르기 한참 전에 발이 묶여야만 했다.

그때, 레베카가 갑자기 녀석의 머리 위에서 폴짝 뛰어올랐다. 그리고 그 자리로 드래곤 킬러가 작렬했다.

〈중갑 무장〉. 치미에게 산독의 숨결이 있었다면, 트라이거는 어떤 공격에도 타격을 입지 않는 무쇠같이 단단한 외피를 자랑했다.

드래곤 킬러가 작렬하고, 그 위로 불의 파도까지 떨어졌지만 외피는 금만 조금 간 게 전부였을 뿐. 마왕독은 안으로 스며들지 못했다.

『죽여 주마아!』

트라이거는 연우의 공격이 자신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더 자신만만해진 상태로 네 다리에 완력을 가득 실었다.

쿠쿠쿠-

녀석을 가로막은 샤논과 한령이 다시 뒤로 떠밀리기 시작했다.

트라이거는 커다란 두 눈을 부라리면서 연우를 노려봤다. 세로로 쭉 찢어진 두 동공이 뱀의 눈처럼 차갑게 번들거렸다.

콰앙!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연우는 무심한 눈길 그대로 드래곤 킬러를 녀석에게 다시 던졌다.

『흥! 백 날 천 날을 해 보아라!』

그럴수록 트라이거는 코웃음만 쳤을 뿐이었지만.

『그딴 것이…….』

쾅! 콰앙!

콰앙!

『통할…… 것 같……!』

콰아아앙!

『……은……!』

콰쾅! 콰콰쾅!

『이게 무…… 슨』

쾅! 쾅! 쾅! 쾅!

콰아앙!

트라이거는 끝까지 앞으로 밀고 나가려 했다. 하지만 공세가 계속 이어질수록. 한 발이 두 발이 되고, 두 발이 세 발로, 그러다 여러 발이 되었을 때. 비로소 뭔가 섬뜩한 느낌을 받고 말았다.

아무리 단단한 다이아몬드라고 해도 같은 지점을 망치로 계속 두들겨 대면 결국 깨지고 마는 것처럼.

연우도 같은 자리에 드래곤 킬러를 계속 던졌다.

처음에는 살짝 일그러졌을 뿐인 외피는 계속 안쪽으로 함몰되다가, 끝내 균열이 이마 전체로 퍼지고 말았다.

이대로 있다가는 외피가 부서지고 만다. 트라이거의 본능에 경고 등이 켜졌다.

녀석은 불안감에 방향을 틀려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몸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치 무언가에 단단히 결박된 것처럼.

「우리 트라이거 님, 어딜 가시려고?」

샤논은 방금 전까지 머뭇거리던 태도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사악하게 웃으면서 트라이거의 귓가에다 속삭였다.

트라이거에게는 그것이 저승사자의 속삭임처럼 오싹하게 들렸다.

발치에 드리운 그림자가 올라와 그의 몸을 꽁꽁 묶어 대고 있었다. 수십 마리의 괴이들이 하나가 되어 그를 달아날 수 없게 속박한 것이다.

『젠장! 놓아라! 이거 놓으란 말이다아!』

트라이거는 이대로면 정말 위험하다는 생각에 크게 울부짖었지만.

쐐애애액-

드래곤 킬러는 여지없이 바람 가르는 소리를 내면서 날아들었고.

콰아앙!

이전보다 훨씬 강렬한 파괴력을 선사하면서 트라이거의 미간에 그대로 꽂혔다. 부서진 외피 조각들이 위로 튀었다.

수십 갈래로 갈라진 드래곤 킬러의 조각들이 단단히 박히면서 체내로 마왕독을 주입시켰고.

우르르, 콰콰쾅!

하늘에서부터 불의 파도가 벼락 이 되어 떨어지면서 트라이거의 뿔과 이마 부분을 통째로 날려 버렸다.

새카맣게 타 버린 외피 조각들이 아래로 우수수 쏟아졌다. 뜨겁게 달아오른 머리에서 새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입과 귀를 따라 매연이 피어났다.

트라이거의 앞쪽 다리가 힘없이 아래로 구부러졌다.

쿵!

엄청난 무게만큼이나 땅이 거세게 요동쳤다.

연우는 마무리를 할 생각으로, 다시 드래곤 킬러를 들었다. 그리고 바로 던지려던 찰나, 갑자기 트라이거의 옆쪽 지면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오더니 트라이거를 물고 냅다 줄행랑을 쳤다.

두 발로 땅을 짚으며 머리에서부터 꼬리까지 길쭉한 뿔을 갖고 있는 조각류(鳥脚類) 형태의 아룡. 용생구자의 막내, 탐이었다.

「이런!」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미처 샤논과 한령이 따라잡기도 전에 녀석은 이미 트라이거를 문 채로 저만치 멀리 달아나고 있었다.

두 언데드가 뒤쫓으려 했지만.

『쫓지 마!』

연우는 재빨리 두 사람을 붙잡았다. 샤논과 한령의 발이 도중에 멈췄다.

『녀석을 놓친 건 아쉽지만, 되도록 자리를 이탈하지 마. 지금부터가 가장 중요하니까.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막아.』

연우는 명령을 내리면서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 어느덧 지상에서 여전히 무왕과 격전을 벌이고 있는 여름여왕이 보였다. 녀석은 여전히 큰 덩치를 한 채로, 날갯죽지와 한쪽 다리가 뽑힌 상태로도 스테이지를 부서뜨리는 괴력을 선보이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무왕과 여름여왕만 휑하니 남아 있을 뿐.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여름여왕을 도와주러 주변으로 모이던 용생구자나 81개의 눈이 보이지 않았다.

드래곤 킬러 때문에 자리를 비운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연우가 노리던 바였다. 여름여왕이 휑하니 남는 것. 아무 방해 없이 녀석을 잡는 데 집중할 수 있는 환경.

연우는 바닥에 꽂힌 드래곤 킬러 쪽으로 손을 뻗었다. 남은 드래곤 킬러는 여덟 자루.

‘이 안에.’

그중 하나가 손끝에 잡혔다.

‘놈을 잡는다.’

콰드드득-

브라함과 부가 옆에서 실어 주는 버프가 다시 중첩되면서 몸이 뒤틀렸다가, 재생으로 복구되었다.

드래곤 킬러를 잡는 손길에 힘이 바짝 실렸다.

* * *

『허억, 헉……!』

쿵. 쿵. 쿵. 트라이거는 몸을 울리는 발소리를 들으면서 거칠게 숨을 내뱉었다.

입에서 쉴 새 없이 검은 연기가 쏟아졌다. 머리가 절반이나 부서지면서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래도 한 가지 사실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죽다가 겨우 살아났다는 것. 모두 막내 덕분이었다.

『고…… 맙다. 덕분에…… 살았어.』

트라이거는 정말 탐이 고마웠다. 여태껏 막내라며 무시하고, 일도 제대로 못한다고 구박을 해 댔던 녀석이었는데.

그리고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어머니의 눈 밖에 났다면서 낄낄댔었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구명을 받고 말았다.

그 사실에 자존심이 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너무 감사했다.

만약 자신이 탐의 입장이었다면? 한낱 인간 따위에게 당했다면서, 멍청하다며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그들은 원래 그런 관계였다.

형제란 틀로 묶여 있어도, 그들은 언제나 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해서 싸우는 경쟁자였다.

탐도 그런 줄로 알았지만, 그래도 사실 속으로는 자신을 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고맙긴. 오히려 고마운 건 나지.』

『무슨 말이냐?』

탐은 전장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곳에 다다라서야, 트라이거를 바닥에다 조용히 내려놓았다.

트라이거는 이제 겨우 조금씩 복구되기 시작하는 머리를 억지로 들어 탐을 바라봤다. 시력이 완전히 돌아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탐의 커다란 형체를 알아볼 정도는 되었다.

그런데.

『그걸 아는지 모르겠어. 형제.』

트라이거는 이상하게 탐이 웃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웃는다고? 전세가 저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는 이때?

『어머니는 아마 오늘부로 죽을 거야.』

그리고 이어지는 탐의 말에. 트라이거는 인상을 찡그렸다. 파충류의 얼굴이라 표정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지만, 눈살을 따라 주름이 잔뜩 졌다.

『무슨 말을, 하는 거냐?』

어머니가 죽는다고? 레드 드래곤에게 여름여왕은 신이나 다름 없는 존재였다. 그리고 용생구자에게 그녀의 존재는 신보다도 더 한 것이었다.

피를 나누어 준 어머니. 그런 분이 죽는다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생각은 해서도 안 되고, 절대 입에 담아서도 안 된다.

하지만 탐은 뭐 어떻냐는 듯이 냉소를 흘렸다.

『이미 다 끝났다고. 무왕에게 날개까지 뜯긴 마당에 어떻게 이기겠어? 게다가 어떻게 이기신다고 해도 마독이 골수를 침범했지. 영력도 어마어마하게 소비하셨으니, 아마 길어 봐야 하루? 이틀? 그 정도 남으셨을까?』

『닥쳐라! 어머니는 절대 죽지 않으신다!』

『용은 이것으로 완전히 사멸할 거야. 거인족이 그랬던 것처럼. 그렇다면 남은 건? 아룡이지. 특히 어머니의 피를 이어 받은 우리 용아병들. 우리들이 사라진 용종의 자리를 이어받아 새로운 용종으로 거듭나는 거지.』

『……!』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뭐가 필요할까?』

『오지 마라. 오지 마!』

트라이거는 그제야 탐이 뭘 원하는지 깨닫고 뒤로 물러서려 했다. 하지만 여전히 머리가 어지러웠다. 네 발에 힘이 실리지 않았다. 마왕독이 어느새 골수를 침범했다. 몸이 내부에서부터 썩어 가고 있었다.

『나의 이름은 ‘탐(貪)’. 탐할 탐 자지. 탐욕, 식탐. 어느 말이라도 좋아. 막내가 원래 욕심 많다는 말도 있잖아? 그러니까.』

쿵-

쿵!

탐의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졌다. 트라이거의 귀에는 그것이 저승사자가 다가오는 소리로 느껴졌다. 발버둥을 쳤지만, 그는 여전히 힘이 없었다. 권능도 불발되었다.

그리고. 어느덧 탐의 거대한 그림자가 트라이거의 눈가를 덮었다.

『난 그 용종이라는 자리를 가져야겠어. 여태 날 비웃었던 너희들의 힘을 빼앗아서.』

여름여왕은 용의 권능을 여러 개로 쪼개어 자식들에게 나눠 주었다. 권능은 언제든 회수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자식들은 언제나 어머니의 눈치를 보고 살아야만 했다.

하지만 그런 어머니가 죽을 게 분명한 이때. 회수자가 사라진다면 권능은 어디로 갈까? 그리고 여태 주입된 용의 피는?

정답은 하나. 먼저 먹는 사람이 임자였다.

콰드드득!

탐은 아가리를 쩍 벌리면서 트라이거의 부서진 머리통에다 이빨을 쑤셔 넣었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단단한 턱뼈가 트라이거의 머리를 부쉈다. 살점과 뇌수가 입 안으로 빨려 들어왔다.

마왕독은 마왕독대로 걸러 내면서. 탐은 한참 동안이나 형제를 먹고 또 먹었다.

* * *

『크아아아!』

꾸우우-

여름여왕은 둘째에 이어서 넷째와 연결된 끈이 끊어지는 고통에 고개를 들고 비명을 질렀다.

81개의 눈은 단순한 영적 연결에 불과하다지만, 용생구자는 그녀의 권능을 나눈 분신들이었다. 그런 연결이 강제로 끊어졌으니 당연히 반발력이 클 수밖에 없었다.

나눠 준 권능이라도 돌아온다면 모를까. 그마저 돌아오지 않았으니 고통은 배가 되었다. 자식이, 또 다른 자식을 잡아먹은 것이다.

“지랄 염병을 하네.”

무왕은 욕지거리를 내뱉으면서 여름여왕의 등 위에서 손바닥을 활짝 펼쳐 세게 내리쳤다.

내가중수법에 입각한 면장(綿掌). 겉보기엔 별다른 변화가 없었지만, 강기는 여름여왕의 체내로 스며들어 회오리쳤다.

콰드드득.

근육과 살점, 혈관과 마력회로, 심지어 저 깊숙한 곳에 있는 내장들이 통째로 갈려 나갔다.

쿠우웅-

여름여왕의 오른쪽 뒷다리가 무너졌다. 거대한 몸체가 바닥에 처박혔다. 몸뚱이가 위아래로 크게 들썩이면서 입가를 따라 썩은 단내가 쏟아졌다.

이미 녀석은 더 이상 싸울 기력이 없어 보였다. 마독은 이제 골수의 뿌리까지 스며든 상태였고, 억지로 뽑아내던 영력도 거의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그래도 어찌어찌 마법을 난사하여 무왕을 잡아 보려 했지만. 무왕은 재빠른 움직임으로 마법을 모두 부수거나 피해 내면서 연거푸 반격을 가했다.

결국 척추와 경추가 모조리 부서지고 난 뒤부터, 둘의 싸움은 일방적인 무왕의 승세로 기울어졌다.

무왕은 ‘퉷’하고 피가 섞인 가래침을 바닥에다 내뱉었다.

들끓던 피가 여전히 제대로 해소되질 않았다. 잔뜩 달아올랐던 흥이 잔잔하게 남아 몸을 괴롭게 만들었다.

어떻게든 이 열기를 발산하고 싶은데. 처음 기대했던 것과 다르게 여름여왕은 도저히 그런 상대가 되어 주질 못하고 있었다. 애당초 여름여왕은 그와 제대로 겨룰 만한 몸 상태가 아니었다.

그런 사실이, 조금 짜증이 났다. 이 탑에서 자신을 상대할 수 있는 자는 올포원을 제외하면 여름여왕밖엔 없었다.

다른 아홉 왕? 그동안 내색하질 않아서 그렇지, 사실 무왕은 그딴 허섭스레기들 따위와 한 뭉텅이로 묶이는 것이 불쾌했다. 그놈들은 자신의 옷깃조차 붙잡을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그를 감당할 수 있을 녀석이 죽어 가고 있었다.

자신과 실컷 싸우다 죽는 거면 또 모를까, 처음부터 빌빌대다가 죽어 가는 중이었다. 자신이 한 건 얼마 없었다. 그저 몇 대 쥐어 박은 것밖에는.

이래서는 주먹을 안 든 것만도 못하지 않은가.

“마음에 안 들어.”

무왕은 한쪽 눈살을 찌푸렸다. 정말 오랜만에 느낀 호승심이었다. 젊은 시절로 돌아간 느낌에 기분이 참 좋았었는데. 볼일을 보다가 뒤를 닦지 않은 것처럼 느낌이 못내 찝찝했다.

마음 같아서는 여름여왕을 치료해서 나중에 다시 싸우고 싶었다.

하지만 딱 봐도 녀석은 더 이상 돌이킬 수가 없는 상태였다.

『내놓…… 아라! 헤븐윙……!』

“헤븐윙이라. 죽기 전에 보이는 게 내가 아니라 그런 애송이란 거냐? 이건 또 이것대로 짜증나네.”

헤븐윙 차정우가 여름여왕과의 싸움에서 뭔가 했단 사실은 알고 있었다.

다만, 그게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다. 아마 몸을 이렇게까지 망가지도록 만든 원인이 아닐까 하고 짐작하는 게 전부일 뿐.

그래서 여름여왕은 죽음의 그림자가 목을 옥죄는 이때, 무왕이 아닌 차정우를 떠올리고 있었다. 멀어 버린 두 눈은 이미 초점이 풀려 무왕을 보고 있지 않았다.

결국 여름여왕을 죽이는 건, 무왕이 아닌 차정우란 뜻이었다.

무왕은 ‘하!’ 하고 헛웃음을 흘렸다.

여기서 화를 내 봤자 뭐가 달라질까. 이미 죽은 사람에게 화풀이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는 차정우와 이렇다 할 접점은 없었어도, 평소 녀석이 괜찮은 녀석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맛난 음식을 눈앞에서 빼앗겼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더 이상 짜증을 부려 봤자 나아지는 건 없었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다른 일이 있다면. 여름여왕의 고통을 빨리 끊어 주는 것 정도?

그것이 여름여왕과 한때 라이벌 관계를 이루던 무왕이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경의였다.

『어머니!』

『여왕이시여! 피하십시오!』

그런 무왕의 태도를 읽기라도 한 걸까. 아니면 곧 끊어질 것 같은 여름여왕의 기식을 느낀 걸까.

사방으로 흩어졌던 81개의 눈과 용생구자들이 여름여왕을 애타게 부르면서 무왕에게 달려들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멀리 떨어진 녀석들보다, 무왕의 손이 더 가까웠다. 팔괘가 빠르게 회전하면서 하나로 합쳐졌다. 손끝에 아주 작은 강기 구슬이 맺혔다. 손톱 크기만 한.

겉보기엔 아주 약해 보였지만. 그 속에는 팔괘의 서로 다른 여덟 종류의 힘이 극한으로 압축되어 있었다.

〈무극(無極)〉. 태극혜 반고검을 해석하기 위해서 팔괘를 몇 단계 이상 끌어올린 깨달음이었다.

원래는 올포원에게나 보여 주려던 것이었지만. 무왕은 녀석의 마지막쯤은 이것으로 보내 줘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경의면 경의고, 연민이면 연민이었다.

그렇게 천천히 무극을 여름여왕에게 심으려던 그때.

『스승님, 죄송하지만, 그 녀석은 제가 가져가야겠습니다.』

“뭐?”

무왕은 갑작스런 막내 제자의 어기전성에 고개를 위로 번쩍 들었다.

그곳에는.

수십 갈래로 갈라진 드래곤 킬러가 소낙비처럼 아래로 쏟아지고 있었다. 뒤로는 어마어마하게 압축된 불의 파도를 잔뜩 끌어당겨 오면서.

콰콰쾅!

드래곤 킬러는 고스란히 여름여왕의 전신에 꽂혔다. 불의 파도는 곧바로 뒤따라와 여름여왕을 쉴 새 없이 두들겼다.

그렇게 연우가 떨어뜨린 드래곤 킬러는 모두 여덟 자루.

불의 파도는 마력회로가 완전히 바닥날 정도로 떨어지면서 여름여왕의 육체를 때리고 또 때렸다. 태우고 또 태웠다.

부수고 또 부쉈다.

콰콰쾅! 콰쾅!

콰르르르-

우르르!

세상이 이대로 무너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영원히 이어질 것 같던 연속 폭격이 모두 끝난 뒤.

거짓말처럼 싸늘하게 내려앉은 적막 속에서.

『헤…… 븐윙……!』

여름여왕은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철저하게 망가졌고.

그 말 한 마디를 끝으로.

끈질겼던 마지막 숨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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