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245화 (245/862)

20화. 격동하는 세계 (2)

원수들은 면면이 다양했다.

동기도 달랐고, 해코지를 한 정도도 달랐다. 바할이나 리언트처럼 직접 심장에다 칼을 박은 자도 있었고, 발데비히처럼 말없이 종적을 감춘 자도 있었다.

식탐황제나 마군의 대주교 같은 경우에는 자신들의 뒤를 바짝 추격하는 새로운 라이벌의 등장을 달가워하지 않아, 손을 잡고 아르티야를 몰아붙였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여름여왕의 포지션은 조금 애매했다.

평소 아래 층계에는 시선도 주지 않는다던 그녀는 아르티야에도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

바할이 이탈해서 레드 드래곤에 합류를 했었어도, 그렇구나 하고 여기는 게 전부였다.

아르티야와 동생을 적대하는 건 아랫사람들이었지, 그녀의 뜻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 전까지만 해도 여름여왕은 동생과 간간히 안부를 주고받기도 했다.

고룡 칼라투스의 후인을 배척할 이유가 전혀 없었으니까.

하지만.

‘결국 여름여왕은 정우로부터 등을 돌렸지. 아니, 마지막에는 오히려 직접 죽이려고 나서기까지 했어.’

그리고 그 과정에서 여름여왕과 동생 간의 싸움이 벌어졌고.

여름여왕은 겨우 동생을 내쫓을 수 있었지만, 드래곤 하트가 망가지는 후유증을 안아야만 했다.

그리고 그 뒤부터는 연우가 알고 있는 그대로였다. 드래곤 하트의 손실은 힘의 쇠락으로 이어졌고, 결국 자멸에 다다랐다.

그리고 그 결과.

「넌…… 누구냐……!」

여름여왕의 망령은 연우의 손아귀에 붙잡힌 채로 으르렁거렸다. 도저히 거스를 수 없는 엄청난 속박에 그녀는 의념을 억지로 쥐어짰다.

칠흑왕의 절망은 위대한 용종의 영혼도 벗어나지 못하게 할 정도로 대단한 물건이었던 것이다.

그녀에게서 풍기는 사념은 당장이라도 연우를 찢어 죽이고 싶다는 마음으로 가득했다.

이딴 말도 안 되는 짓을 꾸민 흑막. 죽고 나서도 무(無)로 되돌아가지 못하게 하고 자신을 이딴 비참한 꼴로 만든 것을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넌……! 넌!」

연우는 그런 녀석을 보면서 가면을 살짝 들어 얼굴을 보였다.

“이거면 대답이 됐나?”

「어, 어떻게!」

여름여왕의 망령은 순간 패닉 상태에 잠겨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잿빛 덩어리가 파르르 떨렸다.

죽은 사람이 돌아온다는 말은 도무지 들어 보지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런 것을 떠나서 그녀는 용마안을 지니고 있는 용종. 만약 헤븐윙이 돌아온 것이었다면, 가면을 써도 모를 수가 없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건지. 사념이 뒤 죽박죽 섞였다.

원래의 그녀였다면 바로 앞뒤 정황을 눈치챘겠지만. 망령으로 격이 추락하면서 얻은 충격으로 사고가 온전하지 못했다.

그래서 망령의 사념을 가득 물들인 건, 헤븐윙이 남긴 저주였다.

-그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너는 모를 거다. 영원히. 아마 마지막까지 외로움에 몸부림치다, 그렇게 눈을 감고 말겠지.

헤븐윙이 말했던 망령. 그것은 올포원을 쓰러뜨리고, 최후에는 98층까지 올라 신과 악마를 모두 집어삼키겠다는 여름여왕의 오랜 다짐을 의미했다.

지난 세월 동안. 동족들이 하나둘씩 사라져가면서 유일하게 그녀 혼자만이 남았을 때.

여름여왕은 세상에 오로지 자신만이 유일하며, 고독만이 자신의 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것을 정면에서 반박하고 나선 이가 헤븐윙이었다.

한낱 미물 주제에. 이제는 죽고 없는 칼라투스의 찌꺼기에 불과한 주제에. 제 처지도 모르고 자신의 삶을 모독한 것이다. 여름여왕은 그것을 참을 수 없었고, 결국 녀석과 충돌했다.

하지만 헤븐윙은 하늘 날개가 부서지면서 아래로 떨어지는 와중에도, 브레스가 남긴 불길에 휩싸여 사라지는 와중에도, 연민에 찬 눈빛을 지우지 않았다.

-불쌍하고 가련한 이스메니오스. 마지막 용이여…….

「헤븐윙! 헤븐위이잉!」

언제나 마음 한구석에 묻어 두고 억지로 눌러놨던 악몽이 봇물 터지듯 치솟았다. 사념이 온통 검은색으로 물들었다.

여름여왕의 망령은 요란하게 들썩였다. 놓으라며. 꺼지라며. 오지 말라며.

‘이거, 계속 두면 위험하겠는데.’

연우는 발버둥 치는 여름여왕의 망령을 억지로 붙잡아 두면서 인상을 찡그렸다.

검은 팔찌의 속박이 흔들릴 정도로 격동이 심했다. 결국, 제3천의 영을 발동시킨 뒤에야 겨우 진정시킬 수 있었다.

‘소화하려면 힘들겠는데.’

역시 용은 용이란 걸까. 제대로 다루려면 시간이 걸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연우는 뭔가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여름여왕의 망령을 컬렉션으로 도로 밀어넣었다.

이렇게 해 두면 녀석이 아무리 발버둥을 친다 해도 별 소용이 없었다.

“하하! 상태는 괜찮아 보이는군. 저런 요란한 짓을 벌인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야.”

연우 앞으로 나타난 사람들은 아트란 일행이었다. 빙왕은 사람 좋은 얼굴로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여름여왕 위로 떨어진 폭격. 그것은 오랫동안 전장에서 뒹굴었던 빙왕에게도 새로운 시야를 트이게 해 준 인상적인 광경이었다.

연우는 그런 빙왕이 조금 꺼려졌다. 나쁜 사람이 아니란 건 알겠는데, 이유 없는 호의가 부담스러웠다.

오늘 처음 대면한 사이였고, 무왕이 아니면 별다른 접점도 없는데 말이다. 인사이더의 사교성이 조금 부담스러운 아웃사이더의 마음이랄까.

그래서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까 싶었는데.

쐐애액-

이번에는 다른 쪽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지운다고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짙은 피 냄새. 무왕과 외뿔부족이었다.

그런데 가장 선두에 선 무왕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평소 유들유들하던 모습과 다르게 딱딱하게 굳은 얼굴. 시선이 고정된 곳도, 날아오는 방향도, 모두 연우가 있는 쪽이었다.

당장 주먹이라도 휘두를 것 같은 흉흉한 분위기.

빙왕과 트와이스, 녹턴은 아트란을 데리고 몇 발자국 멀찍이 떨어졌다.

그리고. 예상대로 무왕은 달리던 속도 그대로 연우에게 주먹을 내질렀다. 매서운 돌풍까지 휘몰아쳐서 저대로 연우의 머리통이 날아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섬뜩했다.

하지만 연우는 막을 생각도 하지 않고 꼿꼿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결국 주먹은 연우의 이마 바로 앞에서 거짓말처럼 멈췄다.

쾅!

대신에 연우 뒤에 있던 야트막한 협곡 하나가 그대로 폭발해서 날아가 버렸다. 가뜩이나 무왕과 여름여왕의 격전으로 부서질 대로 부서진 협곡이었지만, 이제는 그나마 남아 있던 형체도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자칫 죽을 수도 있는 위기 상황이었지만.

연우는 여전히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무왕의 주먹을 빤히 쳐다봤다.

무왕은 그게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인상을 와락 찡그리면서 주먹을 풀고 딱밤을 때렸다.

따악!

“크윽!”

연우는 두개골이 빠개지는 고통에 머리를 쥐어 싸맸다. 버프 중첩으로 육체가 망가지는 와중에도 신음 소리를 내지 않았던 그였지만. 이 딱밤은 아파도 너무 아팠다.

무왕의 고개가 외로 꺾였다.

“크윽? 크으으윽? 이 스승님이 다 차려 놓은 밥상을 날름 훔쳐 먹어 놓고서는 크윽? 네가 진짜 스틱스 강에다 발 한쪽을 담그고 건너편에 있는 여름여왕의 면상을 한번 봐야 정신을 차리겠구나?”

연우는 차마 여름여왕의 영혼은 지금 자신의 컬렉션에 있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딴 농담을 던졌다가는 정말 죽기 직전까지 얻어터질 것 같았다.

하지만 이것도 병이면 병일까. 연우는 자기도 모르게 말꼬리를 툭 걸고 말았다.

“그야 스승님의 수고를 덜어 드리기 위해서…….”

따악!

“아아악!”

“어디서 말대꾸야, 말대꾸는?”

무왕은 제자리에 쭈그려 앉아 머리를 쥐어 싸매면서 끙끙 앓는 제자를 한참이나 노려보다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진지해진 얼굴로 말했다.

“저 아줌마도 그중 하나인 거냐?”

연우는 아직까지 무왕에게 자신의 정체와 목적을 제대로 밝힌 적이 없었다.

하지만 무왕은 막내 제자가 말 못 할 깊은 한을 품고 있고, 그것을 풀기 위해 탑을 오른다는 것 쯤은 알고 있었다.

이것도 그 한풀이 중 하나였냐고 묻는 것이다.

연우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고, 무왕은 못 말린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놈의 한풀이가 참 스케일도 대단하다 싶었다.

외우주 하나가 박살 나고, 관리국, 조합, 거대 클랜 등 날고 긴다는 여러 세력들이 통째로 휘말리는 한풀이라니. 마지막엔 혈국까지 참여하지 않았는가. 난장판도 이런 난장판이 없었다.

무왕, 자신도 젊은 시절에 참 사고를 많이 치고 다녔다지만. 그래도 막내 제자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겉보기엔 진중한 선비에 더 가까워 보이는데. 하는 짓은 망나니가 따로 없었다.

‘뭐, 그래서 마음에 들지만.’

그리고 그걸 재미있다고 여기는 자신도 제정신은 아닌 것 같다고, 무왕은 속으로 생각하면서 혼자서 낄낄거렸다.

“하여간 이 일, 네가 저지른 짓이니까 뒷마무리까지 깔끔하게 하고 와.”

무왕은 연우의 등을 두어 번 두들기면서 다시 장로와 부족원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우리 족장, 참 솔직하지도 못하시구만.”

“그냥 고생 많다고 응원 한마디나 해 주시지. 그 말이 그렇게 어렵수? 아니면 낯이 간지러워서?”

“시끄러, 이것들아! 그보다 그 새끼는 어디로 갔어?”

“어딨긴. 그새 튀었지.”

“우선 그놈부터 잡으러 가자.”

무왕은 부족원들과 몇 마디를 주고받다가, 아트란 등이 있는 곳으로 고개를 슬쩍 돌렸다.

빙왕이 반갑게 인사했다.

“오랜만일세.”

“언제 나오셨습니까? 아무 말도 못 들었는데.”

“얼마 되지 않았다네. 자네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구만. 제자랬지? 딱 자네 판박이야.”

“칭찬입니까, 아니면 욕입니까?”

“알아서 받아들이시게.”

무왕은 피식 웃으면서 빙왕을 위아래로 빠르게 훑었다.

“뭔가 얻은 것도 많으신 것 같고. 어떻습니까? 나중에 한판?”

“으흐흐. 농담도 그딴 농담은 하지 말게. 10년 전이었으면 대환영이었겠지만, 지금은 하루가 다르게 삭신이 다 쑤셔. 다쳐도 안 낫는단 말일세.”

“아직 숟가락 들 힘은 있어 보이시는 양반이 무슨. 아무튼 나중에 기회가 되면 봅시다.”

무왕은 빙왕과 인사를 나누다가, 아주 잠깐 녹턴과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무왕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녹턴을 스쳐 지나갔다. 마치 모르는 사람처럼.

아니, 아예 없는 사람 취급을 했다. 아무리 관계가 단절되었어도, 한때 사승 관계였건만. 그러나 녹턴은 무안할 법한데도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무왕과 외뿔부족은 나타났을 때처럼 빠르게 자취를 감췄다. 놓친 표적을 다시 찾기 위해서였다.

연우는 가면을 고쳐 쓰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든 전쟁이 끝났다. 단 며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지만, 정말 많은 일들을 한꺼번에 겪은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비에라 듄과 여름여왕까지 잡았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큰 격변이 일어났어도, 원수들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었고, 탑의 규모로 봐서는 크게 티도 나지 않는 것 같다고.

“저, 오라버니.”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즈음, 에도라가 조심스레 다가와 그를 불렀다.

“왜 그러지?”

“머리 위에 혹이 좀 크게 나셨…… 는데. 괜찮으세요?”

“…….”

연우는 이마를 만져 보고 쓰게 웃었다. 혹이 얼마나 크게 났는지. 머리가 여전히 얼얼했다.

* * *

“하하! 하하하!”

장웨이는 외뿔부족이 다시 추격을 시작했단 사실을 깨닫고, 끝없는 밤의 세계를 빠져나와 탑 외 지역으로 빠르게 움직이는 중이었다.

그런데.

분명히 쫓기는 사람인데도, 그의 입가에서는 도무지 웃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기뻐서 웃는 소리는 아니었다. 처절하고, 슬픔에 가득 찬. 환멸과 경멸, 그리고 원한과 증오로 가득 찬 웃음소리였다. 광소. 그야말로 미친 사람의 웃음소리였다.

“왔단 말이지? 여기에? 여기에! 설마설마했었지만……!”

장웨이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었다.

무왕에게 시위를 겨누려 할 때, 보았던 독식자의 모습을. 여태 소문으로만 접했을 뿐, 직접 본 건 처음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녀석을 봤을 때 느낀 감정은 두 가지였다.

낯이 익다.

그리고.

‘위험하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아무리 독식자가 저층 구간에 어울리지 않은 무력을 지니고, 랭커들과도 견줄 만한 실력을 가졌다지만.

그래도 하이 랭커 중에서도 탑 티어에 해당하는 장웨이에게 위기감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장웨이는 도저히 끝나지 않는 본능의 ‘경고’가 마음에 거슬렸다.

가면을 쓰고 있어서 모르는 얼굴일 텐데.

왜 낯이 익은 건지. 아니, 정확하게는 ‘분위기’가 낯설지 않았다는 표현이 옳았다.

그래서 장웨이는 멀찍이 떨어져서 연우의 뒤를 밟았다. 경고의 이유가 뭔지를 알고 싶었다. 감각이 예민한지 들킬 뻔도 했지만, 그래도 발달된 시력으로 그를 계속 감시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가면 너머에 있는 눈을 마주친 순간, 장웨이는 그가 누군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 눈. 다른 뭔가로 가린다고 해도, 절대 잊을 수가 없는 눈이었다. 무심한 듯하면서도, 세상을 씹어 먹을 것 같고 태워 버릴 것만 같던 눈.

‘누이. 대장이 탑에 들어왔어. 탑에 들어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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