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246화 (246/862)

21화. 격동하는 세계 (3)

장웨이가 ‘그’를 만난 건 아프리카에서였다.

당시 UN에서는 반군의 수뇌부를 노릴 다국적 특별 부대 창설을 비밀리에 재결했고, 각 주요 파병 부대에서는 실력이 괜찮은 인물들을 차출했다.

‘그’는 그런 부대의 대장으로 참여했다.

당시 부대원들은 그를 처음 보자마자 비웃음을 던졌다.

그들 모두 각 부대와 국가에서는 내로라하던 특전사들. 한낱 동양계가 끼어 있는 것도 불쾌한데, 나이도 30이 되지 못한 햇병아리가 그들의 머리 위에 앉는다고 하니 단단히 뿔따구가 난 것이다.

장웨이는 과연 ‘대장’이 어떻게 이 일을 해결할까 궁금했다. 이대로 삐거덕거릴지. 제 주제도 모르는 보통의 지휘관들처럼 억지로 주도권을 잡으려다가 망가질지. 아니면 정말 역량을 제대로 발휘해서 모두의 입을 닥치게 만들지.

장웨이는 프랑스 외인부대에서 차출된 프랑스 시민권자이긴 했어도, 태생이 동양계이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차별과 무시를 많이 받아 왔던 터였다.

지금에야 동료들이 그만 지나가면 시선을 돌렸지만, 그렇게 되기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지나야 했다.

하지만 대장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밑에서 뭐라고 떠들어 대건, 주변에서 어떻게 손가락질을 해 대건 간에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저 책잡히지 않을 정도로만. 정해진 일과 시간에 맞춰서 훈련을 명령하는 게 전부였다. 별다를 게 없는 특징이 있다면, 지휘관이면서도 자신 역시 훈련에 적극 참여했다는 정도? 하지만 그렇게 눈에 띄거나 하는 성적을 보이는 건 아니었다.

대원들은 무능할 것 같은 대장에게 마음을 주지 않았다. 오히려 대놓고 고깝게 보거나 시비를 걸기도 했지만. 대장은 전혀 그런 걸 신경 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자, 장웨이도 대장에 대한 관심이 거의 꺼져 가고 있었다.

그때, 양키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겠다고 미국으로 건너간 이후, 몇 년째 연락이 끊겼던 누이가 갑작스럽게 부대를 방문했다.

한 손에 다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의 손을 꼭 붙잡은 채로.

* * *

아주 잠깐 옛 생각에 잠겼던 장웨이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지금은 향수에 젖을 때가 아니었다. 미친 외뿔부족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이때, 최대한 멀리 달아나서 다음 계획을 마련해야만 했다.

이제 그의 목표는 무왕이 아니었다.

단 한 명.

더 이상 만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대장, 대장, 대장!’

장웨이는 처음 레드 드래곤과의 계약에 따라 청화도의 궁무신이 되었을 때를 떠올렸다.

당시 그는 필요한 만큼만 움직이고, 필요한 만큼만 실력을 내비쳤다. 언젠가 레드 드래곤이 청화도를 삼킬 때를 대비해 기다리는 것. 그것이 장웨이가 할 일이었다. 심심하고, 따분한 생활이었다.

그러던 중에 유일하게 장웨이를 자극하던 사건이 있었다.

아르티야와의 전쟁.

무슨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평소 서로 으르렁거리기 바쁘던 8대 클랜은 손을 잡고 아르티야에게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 어차피 청화도가 뭘 하든 관심이 없던 장웨이는 전쟁에 크게 개입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래도 무신이라는 직위가 가진 의무가 있어 참전했을 때.

그는 헛바람을 들이키고 말았다.

절대 탑에 있을 수 없는 얼굴이 있었던 것이다. 대장과 똑같이 생긴 얼굴이었다.

이내 성격이나 행동에서 대장과 확연히 다른 타인이란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그래도 흥미가 도진 건 어쩔 수 없었다.

헤븐윙 차정우.

지구 출신이며, 심지어 대장과 이름도 비슷했다.

가족일까? 아니면 형제? 대장은 자신의 사생활에 대해서 거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기에 가족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장웨이는 그때 ‘세상은 좁다’는 말을 절실히 실감했다.

그때부터 장웨이는 보다 즐거운 마음으로 ‘사냥’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가 여태 수수방관하기만 했던 전장이 어느새 그의 사냥터가 된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대장 본인이 찾아왔다.

‘형제의 복수……. 그래. 그런 거라면 이해가 가지.’

물론, 아직 가면을 벗겨 본 건 아니었으니 확실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장웨이는 자신의 눈이 틀릴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 특유의 눈빛, 자세, 기품, 버릇. 그런 건 절대 버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카인.

독식자의 이름. 그 단어를 들었을 때, 왜 처음부터 떠올리지 못했을까. 대장을 상징하는 코드 네임이었을 텐데. 아군에게도, 적군에게도, 두렵기만 하던 이름.

그랬던 그가 먼 타향에서 형제의 죽음을 어떤 경위로든지 알게 되었다면. 당연히 움직일 수밖에 없었겠지.

‘마음 같아서는 당장 그쪽으로 가고 싶지만.’

아쉽게도, 그럴 수는 없겠지.

장웨이는 아쉬운 마음에 혀를 찼다. 지금은 외뿔부족에게서 달아나는 것에 집중해야 했다. 싸워서도 안 되었다. 피를 보고 나서 잔뜩 흥분한 맹수들은 잘못 건드리면 위험했다.

‘우선은. 완전히 숨는다.’

외뿔부족의 추격이 모두 중단될 때까지. 한동안 죽은 사람처럼 지낼 생각이었다. 1년? 아니면 2년? 그 정도면 충분하겠지. 숨는 데에는 이미 이골이 나 있었다.

저 인간 같지 않은 대장에게서도 몸을 숨겼었고, 끝내 도망치다시피 왔던 곳이 바로 탑이었으니까.

그리고 본격적인 사냥은 그때부터 해도 충분했다. 모두가 전부 끝났다며 안심하고 있을 때. 그때 움직여야 했다.

‘대장. 지구에서 못다 했던 것. 여기서 끝냅시다.’

만약 누이가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장웨이는 생각 정리를 끝내면서.

스륵-

어느새 어둠 속에 녹아 사라졌다.

* * *

[마지막 보상으로 ‘끝없는 밤의 세계’를 획득하셨습니다.]

연우는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메시지를 보면서 피식 웃음을 흘렸다.

‘참 많이도 주는군.’

레드 드래곤 때문에 관리국이 화가 나도 참 단단히 났던 모양이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아직 퀘스트는 전부 끝난 게 아니었다. 주어진 기한은 3일이었고, 레드 드래곤은 여름여왕만 죽었을 뿐 클랜은 아직 멀쩡하게 남아 있었다.

‘그 멀쩡한 부분들이 과연 남은 기간 동안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다는 건, 여전히 레드 드래곤은 물어뜯길 구석이 많고, 공적치를 더 많이 올릴 수도 있단 뜻이었다.

그런데도 관리국은 기다렸다는 듯이 보상을 몰아주고 있었다.

그것도 하나같이 대단한 것들.

너무 많아서 다 떠올리기도 힘들 정도였다.

‘아니. 관리국에서는 그냥 레드 드래곤의 재산을 강탈해서 주면 그만이니. 딱히 손해 볼 것도 없나?’

여하튼 보상으로 주어진 것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두 가지였다.

인트레니안과 외우주.

레드 드래곤의 재산이라 할 수 있는 아공간 창고, 인트레니안. 이미 연우도 바할에게서 강탈해 요긴하게 써먹었던 것을 3개나 추가로 얻을 수 있었다.

보관하고 있는 것도 다 달랐다.

갖가지 금은보화가 담긴 보물 창고. 귀중한 아티팩트가 보관된 무기 창고. 여름여왕이 직접 수집하거나 기술한 것 같은 마법서가 가득한 서고. 아마 관리국의 안배인 것 같았다.

『하핫! 여기 정말 기가 막히는군. 방금 전에 뭘 찾아냈는지 아는가?』

당연히 마법 서고는 브라함과 부에게 개방해 둔 상태였다. 브라함은 그답지 않게 눈을 맞은 강아지처럼 잔뜩 들뜬 기색이었다.

‘괜찮은 것이라도 찾으셨습니까?’

『찾다마다. 여기 혈계(血系) 계통의 마법서가 있군. 이런 건 초능에 가까운 것이라, 이론으로 정립하기 힘들었을 텐데. 역시 용종은 용종이란 건가.』

‘브라함이 놀랄 정도라면 대단하겠군요.’

『대단하지. 대단하고말고! 게다가 지금 이 혈계 마법이 왜 중요한지 아는가? 혈계 계통은 피에 담긴 유전 인자를 바탕으로 발휘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별다른 주문이나 수식이 필요 없단 거야. 즉.』

브라함이 씩 웃는 모습이 여기에서도 보이는 것 같았다.

『자네도 쉽게 익힐 수 있을 거란 뜻이지. 요즘 들어 각인 주문에 한계를 느끼고 있지 않나?』

각인 주문. 연우가 부를 시켜서 늑골에다 새긴 룬 마법, 마법 무장을 뜻했다.

연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브라함의 말마따나 권능을 주로 사용하고 있는 요즘은 룬 마법에 어느 정도 한계를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나중에 시간이나 내게나. 처음 익히는 것만 어렵지, 익히고 나면 아주 손쉬울 테니까. 용과 마의 인자를 활용한다면, 효과야 불에 보듯 뻔하지.』

그러다 브라함이 짓궂게 웃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첨언하자면. 혈계 마법을 확실하게 익혀 둬야, 나중에 용언 마법으로도 넘어가기 쉬울 게야. 속성상, 혈계는 언령의 하위 단계거든.』

‘……!’

연우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용언. 6차 각성은 열어야 겨우 열 수 있고, 7차 각성은 이뤄야 본격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지고의 마법. 그것으로 가는 길이 열린다고?

『그 외에도 세피로트의 나무나 아카식 레코드를 기술한 서책도 보이고. 단순한 마법 서적뿐만 아니라, 갖가지 지식들이 가득해. 진리를 탐구한 것들로. 대장로도 아주 좋아하겠군. 세샤를 가르치기에도 좋을 듯하고.』

하여간. 모든 걸 세샤와 연관 지어서 생각하는 것도 병이라면 병이었다.

『어쩌면 이곳…… 용종들이 최후까지 보호하려던, 그런 지식 창고인지도 모르겠어.』

그 말에서 연우는 한 가지 장소를 떠올렸다.

‘호크마.’

용종의 모든 지식이 보관되어 있다고 알려진 곳. 여름여왕이 갖고 있던 서고는 필요에 따라 가져온 호크마의 일부가 아닐까? 정말 그렇다면 연우에게는 큰 도움이 될 터였다.

『아무튼 더 확인해 보고 다시 말해 주지. 아직 특별한 게 많이 남아 있는 것 같거든.』

그것을 끝으로 브라함의 통신은 두절되었다.

연우는 헛웃음을 흘렸다.

2위인 자신이 이 정도인데, 1위인 스승님은 얼마나 받으셨으려나? 연우는 문득 그런 호기심이 들었다. 하지만 무왕이 뭘 받았는지 간에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

‘대장로 님에게 죄다 뺏기겠지.’

마을을 운영하는 데 예산이 턱없이 부족하니 내놓으라고 하겠지. 억울한 얼굴이 될 무왕을 떠올리니 속이 다 시원했다. 머리에 난 혹이 여전히 얼얼해서 그런 생각을 가진 건 절대 아니었다.

이외에 외우주, 끝없는 밤의 세계도 이제 소유주가 연우로 바뀌었다. 발푸르기스의 밤이 망하다시피 하면서 더 이상 자격 요건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외우주라. 이걸 어떻게 쓰는 게 좋을까.’

레드 드래곤과 외뿔부족의 전쟁으로 완전히 쑥대밭이 되어 버린 곳. 활용을 하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다시 쌓아 올려야 했다. 그리고 외우주의 사용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클랜 하우스.’

연우는 깊은 고민에 잠겼다. 클랜이라. 예전 같았으면 필요 없다고 생각했겠지만. 이번 전쟁을 치르면서 연우는 ‘조직’에 대해서 다시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레드 드래곤도, 외뿔부족도 조직이었다. 반면에 자신은 혼자. 지금까지는 용케 버텨 왔지만, 이제 전면에 나선 이상 자신을 보호해 주고 도와줄 울타리가 필요했다.

그렇다면 이 외우주가 좋은 기반이 되어 주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 무렵.

“뭐 세상을 다 짊어진 것 같은 모습이야? 자냐? 자? 외상은? 안 갚아? 돈을 그렇게 쓰고도 넌 잠이 오냐?”

맞은편에 앉아 있던 아트란이 잔뜩 뿔이 난 얼굴로 연우를 노려봤다.

연우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현재 그들은 외우주에서 나와 탑 외 지역을 이동하는 중이었다.

드래곤 킬러의 남용으로 마력과 체력이 방전되어 주저앉기 직전, 아트란은 마차를 호출해서 일행들을 모두 태웠다.

그도 하루 새 10년은 더 늙은 기분이었기에 이동할 때만큼은 편하게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마차에 연우를 태운 데에는 퀘스트가 끝나면 바로 외상부터 갚으라며 독촉하려는 이유도 있었다.

생각보다 외상값의 이자율이 높아서 지불해야 하는 금액이 실시간으로 눈덩이처럼 자꾸 불어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속이 타는 아트란과 다르게. 연우는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몇 시간 전에는 고객님이라더니 이제는 아예 대놓고 반말까지 해 댄다. 돈에 따라 참 얼굴이 다양하다 싶었다.

‘저러니 호구처럼 휘둘리지.’

아트란이 연우의 속을 알았다면 목덜미를 잡고 뒤로 넘어갔을 터였다.

원래 그는 뛰어난 상인답게 포커페이스에 일가견이 있었지만. 연우에게만큼은 이미 몇 차례나 이리저리 휘둘렸다 보니 이제 어떻게 표정을 간수하기가 어려웠다.

“뭐가 좋다고 웃……!”

아트란이 발끈해서 벌떡 일어나려는데, 갑자기 연우가 아공간을 열더니 뭔가를 꺼내 턱 하고 앞에다 내밀었다.

“이거면 되나?”

얄타바오 금괴 5개.

아트란은 재빨리 머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허리를 꾸벅 숙였다. 이거면 원금과 이자 상환을 전부 하고도 잔돈이 두둑하게 남을 정도였다.

그 모습에 연우는 다시 한 번 피식했다. 참 속이 훤히 잘 보이는 친구였다.

“사랑합니다, 고객님!”

“아직 준다고는 안 했는데?”

“썅! 장난……!”

“아직 말 안 끝났어.”

연우는 다시 버럭 소리를 치는 아트란 앞에다 얄타바오 금괴를 5개 더 얹었다. 이로써 금괴는 전부 10개.

아트란의 눈이 휘둥그레지다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연우가 추가 거래를 원한다는 것을 알아챈 것이다.

“이걸로 외상값 전부 정리하고, 남은 돈 네가 가져. 그럼 다시 재기하는 데 필요한 밑천은 충분히 될 테지?”

충분하다 못해 넘쳤다. 하지만 아트란은 섣불리 대답할 수가 없었다. 왠지 모르게 연우라는 뱀이 자기 목을 칭칭 감고 혓바닥을 날름거리는 것만 같았다.

“……순전한 호의는 아닐 것 같고. 원하는 건?”

“‘바이 더 테이블’과 다리를 놓아 줬으면 하는데.”

아트란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여태까지도 충분히 놀랐지만. 지금은 소리까지 지르고 싶었다.

바이 더 테이블. 그들은 조합 속의 조합이었다. 소속을 막론하고, 신비 상인 중에서도 가장 정점에 놓인 ‘거상’ 혹은 ‘대상단주’ 급들 만이 속할 수 있다는 곳.

당연한 말이지만, 여기서 상대하는 대상들도 하나같이 손꼽히는 자들이었다. 여러 차원과 우주의 지배자, 세력가, 탑에서도 일부만이 그들의 정체를 알았다.

거기선 갖가지 물품들이 거래되기도 하고, 주선되기도 한다. 또는 담합을 이루거나, 향후 정세를 논하기도 했다. 비밀스러운 사교 클럽이기도 한 것이다.

결코 저층 구간의 플레이어가 거론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지만.

연우는 너무나 담담했다.

“그들을…… 어떻게 알지?”

“그게 중요한가?”

“아니지. 실수했다. 사과하지. 상인은 거래에만 충실하면 되는 것인데.”

연우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내가 원하는 건, 단지 주선일 뿐이야. 그 뒤부터는 내가 알아서 하지.”

아트란은 침음했다.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야.”

“대답은 언제까지면 되지?”

“닷새. 아니, 사흘. 아니, 이틀. 이틀 안에 답변을 주지.”

조금씩 떨리던 아트란의 목소리가 어느새 단단해져 있었다. 그는 연우의 의뢰에서 새로운 길을 엿 보고 있었다.

이건 단순히 조합의 임원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거상’이 될 수 있는 기회인 것이다. 연우는 미끼를 던졌고, 그는 뭔지 알면서도 덥석 물었다.

겉으로 말은 하지 않았어도. 서로에게 좋은 거래였다.

* * *

연우 일행은 외뿔부족 마을 근처에서 아트란 일행과 헤어졌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만나세. 자네 덕분에 참 재미있었어.”

빙왕은 연우와 가볍게 악수를 나눴다. 녹턴은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연우와 마을을 번갈아 보다가, 조용히 몸을 돌렸다.

마을에는 부족원들 중 일부만이 돌아와 있었다. 전투에서 다치거나, 그들을 도와주러 온 사람들. 나머지는 전부 궁무신을 쫓으러 갔다고 했다.

‘궁무신, 대체 정체가 뭐지?’

연우는 문득 반년이 넘게 외뿔부족을 농락하고 있다는 궁무신이 누군지 의문이 들었다.

일기장을 통해 생김새는 남아 있었지만, 부족원들의 말을 들어 보면 얼굴은 수시로 자주 바뀌는 것 같았다.

녀석의 의도나 정체에 대한 그 무엇도 알려진 게 없었다. 청화도에서 궁무신으로 발탁된 것도, 검무신의 뒤통수를 친 것도, 외뿔부족과 척을 지게 된 것도. 정해진 수순이나 방향성은 전혀 보이지 않고, 대개 충동적으로 여겨지는 것들뿐이었다.

그러면서도 무왕과 어느 정도 접전을 벌일 정도라고 하니. 실력도 아홉 왕 급이란 의미였다.

아무리 탑의 세계가 수많은 실력자들을 품고 있고,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사람도 많다지만.

이 정도로 충동적인 사람이 여태 조용히 살았다는 것은 참 드문 일이었다.

하지만 연우는 궁무신에게서 신경을 거뒀다. 아무리 도망에 일가견이 있다고 해도, 몸이 잔뜩 달아오른 무왕에게서 벗어나 봤자 얼마나 벗어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뒤로 한 채, 연우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방. 탑에 들어오고 나서 처음으로 생긴 자신만의 공간. 연우는 안쪽을 쓱 훑어보다가, 흔들의자에 앉아 등을 기대고 누웠다. 이제야 겨우 전투로 달아올랐던 긴장감이 확 풀리는 것 같았다.

아주 잠깐이지만, 달콤한 휴식 시간이었다.

그때.

「주인. 님. 모든 준비. 끝났. 습니다.」

그림자 위로 부가 불쑥 올라와 고개를 숙였다. 마지막 현자의 돌까지 흡수하면서 격이 달라진 인페르노 사이트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갖가지 감정이 묻어났다. 호기심, 기대, 환희. 황홀. 이 뒤를 궁금해하는 것이다.

‘이런 휴식도 좋지만. 다른 휴식도 좋겠지.’

연우는 부와 똑같은 눈빛을 하면서 흔들의자에서 일어났다.

여름여왕과 비에라 듄. 두 원수의 영혼을 쥐어짤 시간이었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