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247화 (247/862)

22화. 격동하는 세계 (4)

연우는 포탈 안쪽으로 발을 들였다. 그러자 시커먼 어둠이 시야를 가득 물들였다.

화르륵!

곳곳에 성화를 띄우자 어둠이 물러나면서 넓은 공간을 드러냈다.

벽은 공간을 따라 길게 쭉 이어졌고, 천장은 아주 높았다.

그리고.

떨그럭, 떨그럭!

딱딱딱!

곳곳에 언데드들이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천장과 벽에는 스켈레톤들이 매달려 석공처럼 마법진을 새겨 넣고 있었고, 바닥에는 좀비와 구울들이 뭔가 하나씩 짊어지고서 바쁘게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마법진에 사용될 여러 재료들이었다.

하늘을 날 수 있는 밴시나 스펙터는 손길이 닿지 않는 부분들을 건드렸다. 혼선이 빚어지는 곳이 있으면 즉각 나타나 관리 감독도 겸했다.

쿵. 쿵. 쿵.

그러는 와중에 연우 앞으로 스톤 골렘 한 마리가 등에 철제 재료를 한가득 짊어지고 지나갔다.

‘던전이 따로 없군.’

연우는 그런 광경을 보면서 헛웃음을 흘렸다.

수많은 언데드와 유령형 몬스터, 여차하면 가디언으로도 쓸 수 있을 골렘까지. 분위기만 조금 더 우울하게 만들면 딱 RPG게임에 나올 던전으로 제격이었다.

사실 이곳은 인트레니안이었다.

연우가 관리국으로부터 보상으로 받은 3개 중, 무기 창고였던 곳.

지금은 내용물들을 보물 창고로 싹 옮기고, 부에게 할양해서 작업 장겸 실험실로 개조하라고 지시해 둔 상태였다.

발푸르기스의 밤을 털면서 얻은 갖가지 실험 재료나 결과물들, 서적, 자료 등이 워낙에 방대했던 데다가, 여름여왕의 마법 서고까지 추가되었다.

당연히 이 많은 것들을, 여태껏 그랬던 것처럼 마냥 방치만 할 수는 없는 일. 따로 정리를 해 둘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부도 이제 슬슬 자신의 ‘실험실’을 마련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현자의 돌과 마녀의 영혼들을 다량으로 흡수하면서 빠른 성장을 이뤘고, 격이 높아져 흐릿했던 이성도 거의 돌아왔다.

곳곳에 마법 재료와 서적도 많은 데다가, 그동안 브라함의 실험장이나 발푸르기스의 밤, 여름여왕의 서고를 보면서 심정에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 같았다.

아니, 그런 것을 떠나서라도, 마법사는 죽을 때까지 진리를 탐구하는 존재. 특히 리치는 죽음을 거스르면서까지 그런 욕망을 좇는 자들이었다.

당연히 자신만의 마법 분야를 개척하길 바랄 테고, 그러기 위해 서는 자신만의 공간이 반드시 필요했다.

하지만 부는 충성심만 따지자면 권속들 중에 둘째가라면 서러워하는 녀석.

게다가 원래 말도 없는 성격이 어서 여태껏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연우가 죽으라고 하면 죽는 시늉이 아니라, 정말 자폭이라도 할 녀석이었다.

그래서 연우도 너무 고마운 마음에, 어떻게 조금이라도 보상이 되지 않을까 하는 요량으로 인트레니안을 하나 뚝 떼어 줬던 것인데.

‘안 줬으면 큰일 날 뻔했군.’

부는 대체 어디서 이렇게 많은 시신을 조달한 건지, 대충 훑어도 수백 마리가 넘을 것 같은 언데드들을 대량으로 소환해서 개조 작업에 몰두하는 중이었다.

벽과 천장에 필요한 마법진을 빽빽하게 새기고, 구획을 여러 개로 나누어서 갖가지 장치들을 설치했다.

연우는 그것들이 현자의 돌을 연구하면서 파생되거나, 마녀에게서 나온 기술들이라는 것을 언뜻 알아볼 수 있었을 뿐. 그 이상은 알 수가 없었다.

인트레니안은 여름여왕이 직접 제작한 곳이다 보니 수용 면적도 아주 넓어서, 이렇게 많은 언데드들이 돌아다니는데도 아직까지 손대지 못한 곳이 꽤 많이 남아 있었다.

그래도 이 정도 속도라면 머지 않아 완전한 던전화를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다 연우는 문득 다른 부분에 생각이 미쳤다.

‘이왕에 만들 던전이라면 더 확실하게 규모를 다져 두는 게 좋지 않을까? 그럴수록 더 요긴하게 쓰일 수 있을 것 같고.’

던전의 활용 방안에 대해 아주 잠깐 고민에 잠겨 있을 무렵.

「으으. 왔어, 주인?」

「용이 만든 아공간은…… 확실히 규모가 만만치 않습니다.」

『두 번 다시는 이런 거 시키지 마. 그리고 저 리치…… 겉보기엔 어수룩해 보이는 주제에 왜 이렇게 깐깐한 거야?』

그때, 안쪽에서 지친 기색이 역력한 샤논과 한령, 레베카가 나타나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뒤따라오던 괴이들도 터덜터덜 걷다가 연우에게 인사를 하고, 그림자 속으로 빠르게 스며들었다. 정확하게는 도망친 것 같았다.

연우는 자기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부를 도와주라고 권속들을 보내 놨었는데. 여태 쉬지 않고 들들 볶인 모양이었다.

「웃을 때가 아니라고. 주인은 지금 속고 있어. 저 녀석이 겉으로만 저러지, 속은 얼마나 음흉한 놈인지 알아야 할……!」

샤논이 발끈한 나머지 뭐라고 항의를 하려는데.

「오셨. 습니까. 주인님.」

샤논 옆으로 부가 그림자를 뚫고 불쑥 튀어나왔다. 부는 머리를 떨그럭거리면서 연우에게 공손히 인사를 하고, 샤논을 슬쩍 노려봤다. 인페르노 사이트가 활활 타올랐다. 그새를 못 참고 일러바쳤냐는 힐난이었다.

샤논은 뭐 잘못됐냐는 투로 부를 노려보다 슬쩍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분명 데스 노블인 자신보다 격이 낮은 녀석인데도 불구하고, 언제부턴가 이상하게 부에게는 뭐라고 큰소리를 치는 게 어려웠다.

본능적인 거부감이랄까, 아니면 위압감이랄까. 부는 격이 성장하면서 다른 권속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어떤 오라를 풍기기 시작했다. 절대 거스를 수 없을 것 같은.

그러면서도 연우 앞에만 가면 이런 기세는 완전히 사라지고, 맹목적인 충성심만 내비치니. 다른 권속들이 봤을 때는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부를 보면서 공통된 생각을 가졌다.

‘대체 부의 전생은 무엇이었을까?’

분명 기억이 어느 정도 돌아왔을 텐데도 불구하고. 부는 생전의 일에 대해서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었다.

‘서열이 이런 식으로 잡힐지는 몰랐는데.’

연우도 권속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언젠가 그들 사이에 서열 정리가 있을 거라고 예상은 했었다.

그렇게 되면 주도권은 데스 노블인 샤논이나, 생전에 뛰어난 경지를 개척했던 한령이 잡지 않을까 점치고 있었는데.

지금 상황을 보니 예상치 못하게 부에게로 기우는 모양새였다.

사실 이런 상황은 연우로서도 나쁘지 않았다.

부는 말이 없는 대신 생각이 깊다.

다양한 마법으로 필요할 때마다 큰 도움이 되었고, 권역을 선포했을 때 전장을 지휘하고 괴이들을 통솔하는 역할도 잘 해냈다. 충실하고 유능한 ‘부관’이 되어 주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충성심이 가장 뛰어났다. 광기마저 느껴질 정도로 맹목적인 충성심. 권속이라면 절대적으로 가져야 할 조건이었다.

이런 녀석이라면 이따금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샤논이나,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 어려운 한령을 제어하기 좋을 것이다.

‘무엇보다 나의 첫 번째 권속이기도 하고.’

연우는 미소를 잃지 않은 채, 손가락에 끼고 있던 반지 두 개를 더 꺼내 부에게 던졌다.

“받아라.”

「주인. 님. 이것은……?」

부는 조심스럽게 반지를 받으면서 연우의 얼굴을 바라봤다. 이미 그의 한쪽 손에는 똑같은 반지가 하나 더 끼워져 있었다. 인트레니안을 여는 반지였다.

“이곳과 방금 준 다른 두 곳. 하나로 연결해서 합칠 수 있겠지?”

「조작. 하면. 가능. 은. 합니다만.」

“앞으로 층계를 계속 오를수록 우린 더 크게 성장할 거고, 더 많은 걸 얻을 거다. 그러니 그 전에 던전을 확실하게 다져 놔. 언제든 요긴하게 쓰일 수 있도록.”

부는 단숨에 연우가 하는 말뜻을 알아차렸다.

던전의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수용할 수 있는 것도 많아진다. 현재 일꾼으로 쓰고 있는 스켈레톤, 좀비, 구울 등의 수를 훨씬 더 많이 늘리고, 꾸준히 강화시킬 수도 있었다.

스켈레톤은 스켈레톤 워리어나 메이지로, 좀비는 자이언트 좀비로, 스펙터와 밴시는 팬텀으로.

여태껏 연우가 영역을 선포하고 부렸던 언데드들은 대개 전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시체들을 매개체 삼아 소환한 하급이었다.

그런데 미리 양산과 강화를 끝낸 녀석들을 대기시켜 두고 있다가, 갑작스레 대규모로 소환할 수 있다면.

‘위력은 몇 배가 되겠지. 필요할 때마다 소수 인원을 소환하는 것도 가능할 테고.’

때에 따라서는 적의 근거지를 공격할 때, 상공에서 던전을 열어 기습 강하를 하는 것도 가능했다.

다양한 전술 방식으로 활용할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넓은 던전의 이점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크기가 협소했을 때는 진행하지 못했을 대규모 실험도 가능해진다.

발푸르기스의 밤이 진행했던 인체 실험도 그만큼 규모와 자금이 되니 가능한 일이었다. 규모의 경제라는 말을 갖다 댈 필요도 없었다.

연우도 바로 이런 점을 지적한 것이다.

이왕에 던전을 만들 것이라면 처음부터 대규모로 만들어라. 그런다면 부의 성장도 더 빠르게 이뤄질 것이다.

자금도 문제가 없었다. 여름여왕이 갖고 있던 것들만 털어도 거대 클랜의 몇 년 치 총예산은 가뿐히 넘을 테니까.

「하. 지만. 주인님께서는.」

연우는 처음부터 즐겨 사용하던 인트레니안의 반지를 보였다.

“내가 필요한 물건은 여기다 넣어 두면 되니까. 신경 쓸 필요 없다. 다만, 기존에 있던 물건들은 미리 이쪽으로 옮겨 두고.”

「감사 합니다.」

부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어깨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자신에게 새 생명을 주고, 힘까지 쥐여 줬던 주인은. 또다시 은혜를 베풀어 주고 있었다. 이 깊은 은혜를 어떻게 갚아 드려야만 할까.

「주인, 나는? 뭐 없어?」

두 사람을 여태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샤논이 불쑥 연우에게 물었다.

연우는 슬쩍 샤논을 보다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던전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봐, 주인! 그 한숨은 뭐야? 무슨 뜻이냐고?」

샤논은 연우의 뒤를 쪼르르 따르면서 방방 뛰었다.

* * *

「이곳. 입니. 다.」

부가 안내한 곳은 던전 내 가장 안쪽에 위치한 곳이었다. 다만, 이 구획은 다른 구획과 철저하게 분리된 채로 막혀 있어 갑갑하다는 느낌이 강했다.

죽음의 냄새가 강하게 흘렀고, 천장과 벽 곳곳에 익숙한 마법진들이 대거 새겨져 있었다. 연성진과 봉인진이었다.

“이거면 충분하겠어.”

연우는 마법진이 모두 발동이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컬렉션에서 여름여왕의 망령을 꺼내 소환했다.

화아악!

망령에는 흑기가 다량으로 투입되어 순식간에 사귀로 격이 뛰어 올랐다.

망령으로서는 대화를 하는 데 한계가 있으니, 바할과 리언트 때처럼 어느 정도 격을 갖추게 한 것이다.

여름여왕이나 되는 존재인 만큼, 녀석은 사귀밖에 되지 않아도 위협이 되었다. 한낱 망령일 때도 의지만으로 검은 팔찌의 속박을 벗어날 뻔했으니까. 지금은 더 위험했다.

아니나 다를까.

「헤븐위이이잉!」

여름여왕은 이성을 되찾자마자 곧바로 연우에게 와락 달려들었다.

존재가 갖춰지지 않아서 인간 형태로 폴리모프를 했을 때의 모습이었다. 투명한 머리카락이 길게 늘어지고, 두 눈이 앙칼지게 변했다.

칠흑왕의 절망이 작동하면서 녀석에게 고통스러운 압박을 넣었지만, 그런 것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로지 자신을 이따위 꼴로 만든 연우를 죽이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하지만.

촤르륵, 촤르륵!

부가 기다렸다는 듯이 주문을 읊자, 일제히 봉인진이 가동되면서 신진철을 대량으로 쏟아 냈다.

하급 악마도 철저하게 묶었던 봉인진이었다. 지금의 여름여왕이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은 절대 아니었다.

「놔라! 이거 놔! 헤븐윙! 죽이고 말겠어어!」

여름여왕은 번데기처럼 신진철에 꽁꽁 묶인 채로 발악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도르래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신진철은 더 팽팽해졌다.

「아아아악!」

언제 그녀가 이런 수모를 겪어 보기나 했을까. 수천 년의 세월 동안 위대한 용종으로 살아왔고, 그것에 자부심을 느끼며 탑을 지배해 온 그녀였다.

하지만 한낱 미물 따위에게 농락을 당하다가 죽은 것으로도 모자라, 죽고 나서도 유령 따위로 쇠락하고, 이제는 꽁꽁 묶인 채 능멸을 당하고 있다는 현실은 그녀를 미치게 만들었다.

수치스럽고, 불쾌했다. 자결을 할 수 있다면 자결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이미 영혼은 칠흑왕의 절망에 단단히 구속되어 그럴 수도 없었다. 그녀의 주인은 그녀가 아니었다. 연우였다.

‘이래서 ‘절망’인 건지도 모르겠군.’

죽고 나서도 죽을 수 없는 상태. 미친 것처럼 팔짝팔짝 날뛰는 여름여왕을 보면서.

연우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렇게 속이 시원할 수 있을까.

영원히 탑을 거머쥘 것처럼 굴더니 이딴 비참한 꼴로 전락한 그녀가 우습기만 했다. 위대한 용종이라며 모두의 위에 군림하던 자의 마지막이 참 볼만하다 싶었다.

「놓으란 말이다아!」

여름여왕은 두 눈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채 악다구니를 질렀다. 자결을 못 한다면 차라리 미치기라도 하면 좋으련만. 용종의 뛰어난 이성은 그러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설사 광증이 도진다고 해도, 흑기를 불어 넣어 정신을 맑게 해 주면 그만이었다.

찰칵-

연우는 가면을 벗으면서 천천히 여름여왕에게 다가갔다.

그럴수록 여름여왕의 발악은 더 커졌다.

헤븐윙! 헤븐윙! 그 빌어먹을 저주로 죽고 나서도 자신을 계속 괴롭게 만들더니, 이제는 완전히 옭아매어 빠져나가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대체. 눈앞에 있는 건 무엇이란 말인가?

여름여왕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차정우는 분명히 죽었다. 그건 그녀가 직접 확인했던 사실이었다. 지금 그녀가 겪는 것처럼 구속되어 언데드가 된다면 또 모를까.

하지만 눈앞에 있는 자는 분명 살아 있는 인간이었다. 그녀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머릿속이 뒤죽박죽 혼란스러웠다.

그러다 연우가 자세를 낮추면서 여름여왕과 눈을 마주쳤을 때. 손으로 그녀의 턱을 잡으면서 비웃음을 던졌을 때.

여름여왕의 발악은 거짓말처럼 뚝 그쳤다. 대신에 고요해진 눈빛으로 연우를 노려보며 씹어 삼키듯이 중얼거렸다.

「너……! 헤븐윙이 아니구나.」

격이 쇠락하면서 권능을 전부 잃긴 했지만.

그래도 스킬 중 일부는 남아 있었다. 용마안으로 비쳐 본 녀석은 차정우와 닮았지만, 차정우가 아니었다. 비슷한 뭔가였다.

“차연우. 그게 내 이름이다.”

헤븐윙은 그제야 연우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헤븐윙에게, 형제가 있었던가?」

“있었지.”

「너를! 너를 처음 봤을 때 찢어 죽였어야 했는데……!」

“미안하지만. 그렇게 될 건 내가 아니라 너다. 이스메니오스.”

연우는 여름여왕의 눈을 닮은 세로 동공을 활짝 열면서 으르렁거렸다.

“난 널 찢어 죽이고, 집어삼킬 거야.”

짙은 분노로, 눈가를 따라 마성이 조금씩 삐져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쉽게 먹진 않아. 네가 스스로에게 좌절하고 절망에 빠졌을 때. 어디에도 아무런 구원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아무리 기다려도 희망 따윈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면서 자멸에 빠졌을 때. 그 때 먹어 주지.”

연우는 이미 여름여왕을 어떻게 처분할지 생각해 둔 상태였다.

억지로 권속으로 삼아 부려 먹을 수도 있겠지만. 원수를 계속 살려 두고 싶은 마음 따윈 없었다.

그보다는 바토리의 흡혈검으로 녀석의 영혼을 그대로 삼켜, 용의 인자를 각성시켜서 더 큰 성장을 노리는 쪽이 훨씬 좋았다.

「무슨 짓이라도 해 보아라. 그런다고 한들 내가 눈썹 하나 까딱할 것 같으냐?」

광증에 휘둘리긴 했었지만. 그래도 여름여왕은 여름여왕이었다. 자멸이나 굴복 따윈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해볼 테면 해보란 듯이, 연우를 보고 비웃기까지 했다.

하지만 연우도 똑같이 비웃음을 던졌다.

“그거야 보면 알겠지.”

「뭐?」

“네가 보는 앞에서, 네가 그토록 아끼던 몸뚱이가 이리저리 찢기는데도 괜찮을지. 궁금하긴 해.”

「무슨……!」

그때, 부가 허공으로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그러자 여태 주변에 내려앉았던 어둠이 사라지면서 엄청난 크기의 유리관이 나타났다.

그 속에는 여름여왕의 본체가 보랏빛 수용액에 잠겨 있었다.

무왕과의 격전과 마독의 후유증으로 여전히 육체 곳곳에 상처가 남아 있었지만. 찢겼던 팔과 날개가 다시 붙어 있었고, 큰 상처들은 거의 아문 상태였다.

두 눈도 지그시 감고 있어서 누가 본다면 깊은 잠에 빠져 있는 것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서, 설마?」

여름여왕은 뒤늦게 연우의 생각을 눈치채고 말았다. 유리관에는 수많은 펌프와 호스가 연결되어 있었다.

한쪽에서는 붉은 핏물이 빠져나가고, 다른 쪽에서는 검은 독극물이 투입되고 있었다.

“용의 사체는 머리부터 발톱까지 버릴 게 하나도 없지. 눈은 마력 기관으로도 쓸 수 있고, 비늘과 가죽은 갑옷으로, 뼈는 부러지지 않는 무기로 쓸 수 있으니까. 마력 전도율도 좋아서 이만한 재료가 없어.”

「그만둬!」

“난 지금부터 네가 보는 앞에서 천천히 네 육체를 해체할 거다. 단단하고 질긴 만큼 시간도 꽤 많이 소요되겠지. 약에 담가서 천천히 벗겨야 할 테니까.”

「그만두라고오오!」

“그리고 너의 조각들로 뭘 만드는지도 보여 줄 생각이야. 아, 그렇다고 해도 너무 크게 걱정하지는 마. 전부 해체하지는 않을 거니까.”

「그냥 죽여! 그냥 죽이라고!」

연우는 다시 악을 질러 대는 여름여왕을 보면서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뼈는 남겨서 본 드래곤으로 만들어야 하지 않겠어?”

「죽여! 제바아알!」

여름여왕은 어떻게든 이 치욕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아무리 원수로 만났어도, 죽은 사람은 더 이상 건드리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자 망자에 대한 마지막 배려다.

하지만 연우는 그럴 마음이 전혀 없어 보였다. 육체를 이리저리 뜯는 것으로도 모자라, 본 드래곤이라니!

죽어서도 육체를 끝까지 부려 먹겠다는 속셈이지 않은가.

스스로 자결을 할 수 있다면 당장이라도 골백번은 더 죽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몸은 이미 단단히 속박되어 아무런 자유도 주어지지 않았다.

이래서는 안 되었다. 위대한 용이라면. 지고한 용종의 후예라면. 이런 수치를 당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너도! 너도 용의 후예잖아! 용인이 되어서 어떻게……!」

여름여왕은 소리를 지르다 말고 갑자기 턱 하니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너는 모를 거다. 영원히. 아마 마지막까지 외로움에 몸부림치다, 그렇게 눈을 감고 말겠지.

어째서 이때 차정우가 했던 말이 다시 떠오르는 걸까. 망령. 망령! 차정우는 말했다. 용의 그늘에서 벗어나라고. 네 삶을 살라고. 그렇지 않으면 언젠가 파국을 맞게 될 거라고.

그 말이 이것이었나? 지금 그녀를 괴롭히는 것은 그 망령이 아니었다. 차정우라는 망령이었다.

-불쌍하고 가련한 이스메니오스. 마지막 용이여…….

「놔, 이거!」

여름여왕이 발버둥 치면 칠수록.

연우는 싸늘한 조소만 던질 뿐이었다.

그러다.

뚝-

여름여왕은 발악을 멈추고,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연우를 노려봤다.

「원하는 게, 뭐야?」

그 모습을 보면서.

연우는 싸늘하게 말했다.

“정우가 죽어야 했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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