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248화 (248/862)

23화. 격동하는 세계 (5)

비록 영혼이었지만.

여름여왕의 눈가에는 갖가지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연우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역시.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어.’

동생은 일기장에 자신이 겪은 일들에 대해 세세하게 적었다. 갖가지 정보며 기술은 대체 어떻게 알아냈나 싶을 정도로 대단한 것도 많았다. 하지만 그중에는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도 더러 있었다.

특히 배신을 당해야 했던 이유가 그랬다.

처음에는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말처럼, 몇 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아홉 왕에 육박할 만큼 강해진 동생을 경계한 자들의 견제라고만 여겼었다.

동생도 그런 식으로 사건만 쭉 나열했을 뿐. 더 깊은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들어 그런 생각에 의문이 들었다.

‘정우는 용마안을 갖고 있었어. 타인의 속생각을 완전히 읽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자신에게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는 알 수 있었을 텐데.’

아홉 왕이 안팎으로 견제를 했긴 했지만, 아르티야는 분명 초반까지만 해도 탄탄한 결속력을 자랑했다.

그렇게 쉽게 무너질 곳이 아니었단 뜻이었다.

리언트와 바할은 그저 동생에게 질투를 하고 있다가 아홉 왕이 손을 뻗으니 좋다고 날름 잡아챈 잔챙이들밖에 되지 않았고.

“정우가 갖고 있던 용마안이야, 비에라 듄이 옆에서 오랫동안 마인드 컨트롤로 가렸다고 하면 말이 돼. 그년의 정신 조작은 신물이 날 정도니까. 하지만 툭하면 으르렁거리기 바쁘던 아홉 왕이 손을 잡은 건 아직도 납득이 가질 않아. 어떻게 된 거지?”

여름여왕의 눈이 깊어졌다.

「말하면. 죽여 줄 테냐?」

“들어 보고.”

여름여왕은 연우의 눈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영혼석…… 때문이다.」

“영혼석?”

이건 또 무슨 소리지? 연우는 뜻을 알 수 없는 말에 인상을 찡그렸다.

「헤븐윙은 루시엘의 영혼석을 갖고 있었다.」

“……!”

루시엘. 달리 ‘빛을 가져오는 자’라는 뜻의 루시퍼(Lucifer)로 더 잘 알려진 존재. 초월성을 획득했음에도 불구하고, 신도 악마도, 빛도 어둠도,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니기로 유명했다.

그러다 천 년 전에 신과 악마들의 공격에 결국 모든 날개가 꺾이고, 추락하고 말았다. 자세한 이유와 경과는 전해지는 것이 없었다. 알려진 건, 날개가 꺾여 어디론가 떨어졌다는 짤막한 설명만 신화 한 귀퉁이에 적혀 있을 뿐.

영혼석은 거대한 존재가 형체를 잃고 변해 버린 파편을 뜻한다. 이것을 동생이 가지고 있었다면.

“욕심을 부렸군. 너희들.”

연우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흘렸다. 여름여왕은 입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이들의 노림수를 모르는 건 아니었다.

루시엘의 영혼석이라면. 이용하기에 따라서 여태껏 플레이어 중 누구도 이루지 못했던 초월성을 획득했을지도 모르니까. 그렇지 않더라도 막강한 힘은 손에 넣었을 것이다.

결국.

욕심 때문인 것이다. 전부 다.

‘그럼 정우는 왜 그걸 내게 말하지 않은 거지? 대체 무엇 때문에?’

루시엘의 영혼석. 그게 어떤 비밀을 품고 있기에. 동생은 여기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을까. 자신을 비참한 꼴로 만든 원인이라면, 어딘가 하소연하고 싶을 법도 할 텐데. 그리고 녀석은 그것을 갖고 뭘 하려 했던 걸까.

‘신과 악마들도…… 이 사실을 모를 리가 없을 테고.’

98층에서 언제나 고요한 눈길로 하계를 내려다보는 자들의 생각도 알기 힘든 건 마찬가지였다. 그들로서는 어렵게 날개를 꺾은 루시엘이 되살아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을 테니.

그렇게 여러 의문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지만.

연우는 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대신에 여름여왕에게 물었다.

“그럼 영혼석은? 어디로 갔지?”

「모른다. 나도.」

“뭐?”

여름여왕이 비웃었다.

「알았다면 내가 가졌겠지. 그리고 이딴 꼴도 되지 않았을 테고. 안 그런가?」

결국 모든 건 원점. 제자리였다.

연우의 눈빛도 싸늘하게 식었다.

“아니. 알아야 할 거야.”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사소한 것이라도 어떻게든 쥐어짜서 생각해 내. 그래야 너도 원하던 대로 편하게 소멸할 수 있을 테니.”

여름여왕은 연우의 생각을 읽고 발버둥 쳤다. 쇠사슬이 다시 팽팽해졌다.

「약속이 다르지 않으냐! 말하면! 말하면 죽여 준다 하지 않았느냐!」

“그러니까 제대로 떠올려.”

「네놈은! 네놈으으은!」

연우는 여름여왕의 절규를 귓등으로 듣고, 부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부가 천천히 여름여왕에게 다가갔다. 짙은 그림자가 그녀의 머리 위를 덮쳤다.

* * *

아아아악!

연우가 나온 자리에서 찢어질 듯한 귀곡성이 울려 퍼졌다. 연우는 슬쩍 그곳을 돌아봤다가, 곧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98층이 아예 난리가 나겠군.”

브라함이 어느새 나타나 묘한 눈빛을 띠고 있었다.

여름여왕의 죽음. 마지막 용의 사멸은 신과 악마들에게도 화젯거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신, 악마, 용, 거인. 한때 탑을 지배하다시피 했던 절대 종족 중 이제 두 종족이 멸종의 길을 걷고 말았다.

특히 용종과 대립각을 세웠던 악마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가 궁금했다.

연우는 여태 아무런 메시지가 떠오르지 않은 것이, 아마도 98층이 신중한 분위기에 잠겼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그 영혼석인지 뭔지 하는 것 때문이거나.’

연우는 브라함을 보면서 물었다.

“정리는 다 끝나셨습니까?”

“정리라 할 게 있는가. 어차피 전부 세세하게 구분되어 있던 것을 더 보기 좋게 만들었을 뿐인데. 그래도. 노다지도 그런 노다지가 따로 없더군. 그래서 말이네만…….”

브라함은 즐겁게 말하다 말고 슬쩍 말꼬리를 흐렸다. 그러면서 부가 있을 곳을 곁눈질했다.

“말씀하십시오.”

“험험! 나도 던전이나 실험실을 따로 만들어 주면 안 되겠나? 시샘이 나서 그런 것은 절대 아니고. 그게, 이번에 얻은 것들이 참 많지 않은가. 해서 새로운 실험도 필요하고, 세샤와 곧 깨어날 아난타를 위해서도 좋을 것 같아서 말일세. 절대, 절대 부럽거나 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형평성이나…….”

브라함은 막상 말을 꺼내니 조금 무안했던지 헛기침을 하면서 자꾸 횡설수설해 댔다. 그답지 않은 태도였다.

부가 던전을 가졌던 것이 부러웠던 모양이었다.

연우는 자기도 모르게 크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처음에는 그렇게 딱딱하기만 하던 브라함의 새로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신기했다.

“아니. 그렇다고 웃을 일은 아니잖은가. 이것은 절대 날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라, 앞으로 자네가 일굴 세력에 도움이 되고자 하는 방향으로……!”

[외우주 ‘끝없는 밤의 세계’의 설정 권한을 호문클루스(브라함)에게 부여하였습니다.]

[새로운 설정이 가능합니다.]

[현재 외우주 ‘끝없는 밤의 세계’의 붕괴율은 96.3%입니다.]

[복구 작업을 서두르세요. 방치 시간이 길어질수록 붕괴 속도가 빨라집니다.]

“……하고자 한…… 응?”

브라함은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눈앞에 떠오르는 메시지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연우는 살며시 웃으면서 말했다.

“인트레니안보다, 이것을 정리하는 데 도움을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상태가 많이 좋질 않아, 사실 저로서는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깜깜합니다.”

사실 끝없는 밤의 세계는 여러 모로 연우에게 애물단지일 수밖에 없었다.

이미 레드 드래곤과 외뿔부족이 쑥대밭으로 만들어 붕괴가 가속화된 마당에, 당장 사용하기는 힘든 상태다.

그렇다고 헐값에 내놓기에도 그랬다.

아직 찾지 못한 발푸르기스의 밤의 흔적이 있을지 모르는 데다가, 이렇게 구한 외우주를 포기한다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외우주는 여러 방면으로 쓸모가 많았으니까. 클랜 하우스. 그 단어가 자꾸만 연우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래서 결국 연우는 생각을 바꿔서 끝없는 밤의 세계를 브라함에게 넘기기로 결심했다.

브라함은 스테이지 한가운데에다가 자신의 심상 결계까지 구축했을 정도로 실력이 뛰어나다. 그는 연금술뿐 아니라, 기하학이나 건축술에도 해박하니 외우주를 복구하는 데 큰 도움이 될 터였다.

‘외우주를 아예 심상 결계로 구축시킬 수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좋지. 기존 좌표야 바꾸면 그만이고. 세샤와 아난타가 머물기에도 좋을 테고.’

부가 자신의 병력을 양산하고 강화시키는 외무 담당이라면. 브라함에게는 내실을 다지는 내무를 맡기려는 것이다.

브라함도 연우의 생각을 읽고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이만하면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중책이었다. 부가 가진 것보다 더 큰 실험장을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흑마, 강령, 부두술, 룬 등 조용한 마법을 주로 다루는 부와 다르게, 브라함은 소환, 원소, 연금, 백마, 신술 같은 대규모 실험을 필요로 하는 마법이 많았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험험. 자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어쩔 수 없지. 알겠네. 이 외우주는 책임지고 내가 복구해 보지. 갈리어드도 마침 할 일이 없으니 같이하면 될 테고.”

“감사합니다.”

“무엇을. 다 돕고 살자고 하는 일들 아닌가.”

브라함은 자신의 기분을 맞춰 준 연우의 장단을 맞추다가 슬쩍 물었다.

“한데, 자네도 겪었다시피 마녀들의 세계여서 그런지, 크기가 장난이 아니야. 물자가 꽤 많이 들어갈 텐데, 괜찮겠나?”

“제가 왜 바이 더 테이블과 다리를 놓아 달라고 했겠습니까?”

“흠. 역시 자네, 생각이 확고하군.”

“예.”

브라함의 두 눈이 깊어졌다.

“그 길, 쉽지 않을 거야. 이미 자네는 외부에 완전히 드러난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끝없는 밤의 세계에서의 맹활약으로 이미 연우가 강하다는 건 탑에 고스란히 전해진 상태.

앞으로 어떤 일을 하더라도 이목을 집중시킬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연우는 단호한 말투로 딱 잘라 말했다.

“덤빈다면 부수면 그만일 뿐이니까요.”

“그렇게 자신 있게 말하니 마음이 놓이는군. 자네가 가려는 길. 나도 옆에서 적극적으로 도와줌세.”

* * *

“하면 이제 얼추 이야기도 끝났고. 메인 디쉬를 꺼내야 하지 않겠나?”

브라함은 외우주 제어창을 한참 살펴보다가 조용히 닫으면서 연우를 봤다.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연우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허공에 망령이 둥실 떠오르고, 여름여왕 때처럼 흑기가 몰리면서 단숨에 사귀로 변했다. 희뿌연 형체를 가진 비에라 듄이 나타났다.

하지만 비에라 듄은 여름여왕처럼 격이 높질 못해 잠시 망령 상태일 때의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멍하니 있었다.

연우는 그녀 앞에서 가면을 벗었다. 그러자 흐리멍덩하던 비에라 듄의 두 눈에 이지가 어렸다.

「너……!」

비에라 듄이 뭐라고 소리쳤지만, 바닥에 드리운 그림자가 늘어나면서 영체에 강하게 박혔다.

퍼퍼퍽-

비에라 듄은 끔찍한 비명 소리를 지르면서 바닥에 엎어졌다.

괴이의 기운이 비에라 듄의 영체를 통과했다가 나오길 반복했다. 아마 그녀가 겪는 고통은 육체로 겪을 수 있는 것과 비교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몸이 수시로 난도질당하고 찢겨졌다가 복구되길 반복하는 느낌. 불길이 신체를 타고 다니는 느낌은 차라리 죽고 싶을 만큼 괴로울 것이다.

「끄르륵. 끄륵!」

연우는 바닥에 고꾸라져 고통을 호소하는 비에라 듄을 싸늘한 눈빛으로 내려다봤다. 녀석과는 이야기를 나누더라도 그냥 나누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먼저 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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