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격동하는 세계 (6)
브라함은 연우가 양보하자 고개를 끄덕이면서 앞으로 나섰다.
싸늘한 두 눈은 방금 전 소일거리를 받고 좋아하던 노인이 아닌, 신이었다가 영락해 버린 추방자 브라함이 되어 있었다.
그만큼 비에라 듄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세샤와 아난타. 그의 소중한 가족들은 그녀 때문에 오랫동안 모진 고생을 해야만 했으니까.
연우도 그것을 알기 때문에 선뜻 양보를 해 준 것이었다.
브라함은 무미건조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비에라.”
「죽…… 고 싶……!」
“비에라. 대답해라, 비에라.”
「이걸 놓……!」
브라함은 비에라 듄에게 계속 말을 걸었지만, 녀석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질 못했다. 그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스스로 정신을 차리기 힘들다면 내가 번뜩 들게 해 주지. 너와 나눌 이야기는 아주 많아서 말이야.”
브라함은 허공에다 손을 휘저어 아공간에서 뭔가를 꺼냈다. 이상한 용액이 담긴 플라스크. 마개로 단단히 밀봉되어 있었다.
“이건 용산영액이란 것이야. 일정한 형체가 없는 유령 형태의 몬스터에게 해를 입힐 방법이 없을까 궁금해서 만든 것인데. 너에게도 통할지는 모르겠군.”
브라함은 힘을 주어 마개를 열었다. 공기가 들어가는 소리와 함께 새하얀 증기가 솔솔 흘러나왔다.
그는 비에라 듄의 머리 위에다 플라스크를 기울였다.
「아아아아악!」
비에라 듄은 허리를 쭈뼛 세우면서 비명을 질렀다. 영체가 녹아 내리고 있었다. 용액이 몸에 끈끈하게 달라붙어 안쪽에서부터 파괴를 시도했다.
“흠. 생각보다 효과가 강하군. 아직 실험을 안 해 봐서 어느 정도 효과가 있는지 몰랐었는데. 농도를 조금 희석시켜도 되겠어. 그리고 이건 재생혈수인데, 복구에 도움이 될 거야. 이것도 한 번 실험해 보세나.”
「끄윽, 끄으윽!」
재생혈수는 끔찍하게 녹아 가던 영체를 복구시키긴 했다. 하지만 용산영액과 뒤섞이면서 점액이 되어 더 큰 고통을 선사했으니.
비에라 듄은 몸을 이리저리 뒤틀었다. 하지만 꿈쩍도 할 수 없었다.
“흐음. 이렇게 약해서야 쓰나? 내 딸아이도 자네에게 이렇게 모진 고문을 당했을 텐데. 실험 몇 번 한 것 가지고 이렇게 힘들어 하면 내가 진이 다 빠지지 않나. 자, 조금 더 힘을 내게. 다시 시작해 보세.”
브라함의 실험은 계속 이어졌다. 아공간이 열릴 때마다 새로운 실험 도구가 계속 쏟아졌다.
구하기 힘든 유령이 아닌가. 이참에 정말 여태 미뤄 뒀던 실험들을 다 해 보겠다는 듯, 이리저리 관찰하면서 꼼꼼히 기록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제발! 제발 다 말할 테니까, 이젠 그만……!」
이쯤 되자 비에라 듄도 정신을 차릴 수밖에 없었다. 아니, 억지로라도 차려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 고통이 끝없이 이어질 테니까. 조금이라도 덜 고통스럽기 위해서 무의식적으로 정신이 깬 것이다.
“아니야, 아니야. 아직 안 끝났다네.”
하지만 브라함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비에라 듄의 소원을 가볍게 묵살시켰다.
「위대한 어머니! 아난타와 세샤를 납치하려던 건, 우리 어머니를 깨우기 위해서였어!」
비에라 듄은 결국 묻지 않은 사실들을 일일이 토설하기 시작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이 끔찍한 고통이 조금이라도 덜어질 테니까.
「내가 했던 실험은! 그릇 완성이었어. 완성을 위해서 이것저것을 하다 보니까. 미안해. 미안하니까. 제발. 아, 아! 아난타는 지금 나으려면 그렇게 해야 해!」
이것저것을 다 털어놓느라 앞뒤 문맥이 전혀 맞지 않는 것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래도 연우는 뒤에 앉아 그동안 마녀들의 영혼을 쥐어짜며 얻어 낸 정보와 합쳐서, 발푸르기스의 밤이 그동안 꾸몄던 일의 진상을 대충이나마 윤곽을 그릴 수 있었다.
‘역시. 마녀들을 잉태했다던 대지모신(大地母神)을 부르려고 했던 건가?’
마녀들이 위대한 어머니라고 부르는 존재는 사실 고정된 신격이라기보다, ‘개념’적인 존재를 의인화시킨 대상이라고 보는 게 더 옳았다.
‘바빌론의 탕녀’라는 수식어로 더 유명했고, 이외에도 티아메트, 유미르, 이슈타르, 이안나, 키벨레, 프리티비, 혹은 마고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유명한 이름은 따로 있었다.
가이아.
혹은 야마.
‘하지만 대자대비하다고 알려진 것과는 성격이 많이 다르지.’
대지모신은 초기 우주의 시초부터 시작되었다고 알려진 몇 안 되는 대신격(大神格)이었고, 세상에 모습을 비출 때마다 여러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속내를 짐작하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그런 대지모신이 유일하게 관심을 뒀던 존재가 비에라 듄이었다.
이유는 몰랐다.
재능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뭔가를 갖고 있었던 건지. 확실한 건, 비에라 듄은 대지모신의 총애를 바탕으로 이만큼 강해져 발푸르기스의 밤을 휘어잡을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대지모신이 갑자기 어느 날부터 모든 곳에부터 연락이 끊어졌다고? 발푸르기스의 밤은 잠을 깨우려 했던 거다?’
대지모신은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따금 지상에 자신의 존재감을 퍼뜨리던 존재였다.
비에라 듄과의 연결을 끊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사라졌다면, 비에라 듄으로서는 속이 탈 수밖에 없겠지.
그래서 비에라 듄은 도박을 하기로 했다. 대지모신을 이 땅에 부르기로.
그녀가 하계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고, 예전부터 비슷한 뉘앙스를 풍겼기 때문에 나쁘지 않은 방법이라고 여겼다.
‘그래도 도중에 계시를 내리기도 했으니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닐 텐데. 무슨 일이지?’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찝찝한 구석이 많았다.
하지만.
‘짐작 가지 않는 게 전혀 없는 건 아니야.’
연우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동생이 갖고 있었지만, 갑자기 사라지고 말았던 루시엘의 영혼석. 여름여왕마저도 행방을 알 수 없다고 한다면. 어쩌면 그것은 혼란 중에 가장 가까이 있던 사람이 훔치지 않았을까?
이를테면, 연인이라든가. 그리고 그 연인이 자신의 신을 위해 뭔 가를 저질렀다면.
‘…….’
연우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이유가 무엇이 되었든 간에, 비에라 듄이 그릇으로 세샤와 아난타를 점찍었던 것은 변하지 않는 진실이었다.
그 뒤로도 비에라 듄은 대지모신에 대한 비밀을 쭉 늘어놓다가 자신이 어제 무엇을 먹었는지, 마녀들은 어떻게 생겨나는지, 별 중요치 않은 것까지 다 떠벌렸다. 다행히 그 속에는 아난타의 치료 방법이 섞여 있었다.
그래도 브라함은 실험을 멈추지 않았다. 비에라 눈은 몸이 수시로 녹고 수복되기를 반복하는 끔찍한 굴레 속에서 결국 악만 남았다.
「다 말했잖아, 전부 다! 그런데도 왜 날 죽여 주지 않는 건데!」
그러다 고개를 휙 하고 뒤쪽으로 돌렸다. 그녀는 표독스러운 눈으로 연우를 노려보다가, 어색하게 웃었다.
「정우! 정우! 나야! 나라고! 비에라! 당신이 사랑했던! 나 보고 싶지 않았어, 자기? 마지막까지 날 그리워했잖아?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그러니까, 응? 이제 용서해 줘. 아, 아니다. 나랑 다시 시작하자. 이제 하라는 거 다 할게. 마녀를 버리라면 버리고, 어머니도 버리라면 버릴게. 대신에 이제는 당신과 세샤에게 충실할……!」
비에라 듄은 말을 길게 잇지 못했다. 무슨 말을 떠벌려대도, 연우의 눈빛이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표정도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떨리는 건 그녀의 눈동자였다. 입꼬리도 파르르 떨렸다.
「자, 자기? 자기 좋아했지? 내 가슴! 무, 무릎베개? 누, 눕고 싶지 않아? 조금 다치긴 했지만. 그래도 괜찮아. 누, 눕지 않을래?」
“…….”
「무슨 말이라도 해! 하라고! 욕을 퍼부을 거면 퍼붓고! 죽일 거면 죽이라고! 이 정도면 그때의 복수로 충분하잖아! 끝났잖아! 살았으면 됐지, 뭘 더 바라! 내가 여기서 뭘 더 할 수 있……!」
“정말.”
연우는 악다구니를 지르는 비에라 듄의 말허리를 잘랐다. 뒤이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끝났다고 생각하나?”
「……너, 정우가 아니구나. 형제? 그래. 혀, 형제가 있다고 했었어. 먼 고향에 두고 온……! 그럼 넌!」
“정우는 끝까지 널 그리며 눈을 감았다. 녀석은 멍청했어. 그렇게 되고도 널 원망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제 확실히 알겠다. 녀석은 정말 멍청했어.”
연우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뚜벅뚜벅 비에라 듄에게 다가갔다. 브라함이 옆으로 물러섰다.
“이것밖에 안 되는 년에게 당하기나 하고. 하!”
「그래! 네 동생은! 이것밖에 안 되는 년에게 당했지. 그런데 말이야. 그런 생각해 본 적 없어? 왜 나나 동료들이 등을 졌는지? 왜 도망쳤는지, 등에다 칼을 꽂았는지, 한 번 생각해 본 적이나 있어?」
연우의 걸음이 뚝 멈췄다.
비에라 듄의 한쪽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자신의 말이 먹혔다고 생각한 것이다. 어차피 이러나 저러나 실컷 능욕이나 당하다 사라질 마지막. 그 전에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고 싶었다.
「상식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의구심을 가지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 주변 사람들이 전부 떠났어. 그럼 그렇게 만든 사람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게 상식 아냐? 호호호! 멍청하기는. 너, 네 동생이 착하고 순진한 줄로만 알지?」
“…….”
「천만에! 우리도 욕심이 많았지만. 차정우는 더 했어! 전부 자신이 가져야 직성이 풀렸고, 자신이 나서야 했지. 처음부터 끝까지 제멋대로였어! 독식하고, 독재하고! 우리도 그것 때문에 질린 거야! 알아?」
비웃음이 더 커졌다. 실소가 터져 나왔다.
비에라 듄은 자신의 장기인 정신 조작 마법을 맘껏 풀어냈다. 연우의 정신을 조금이라도 더 흔들어 놓기 위해서. 그가 굳게 믿고 있던 신뢰를 깨고, 세계관을 부숴서 자신이 개입할 여지를 만들기 위한 작업이었다.
〈심상 침탈〉. 기존에 마련된 육체로 갈아타기를 하는 체부 환승과 다르게, 상대의 정신에 침투해서 그의 에고 데이터를 점차 자신의 에고 데이터로 물들이는 권능.
이를테면, 바이러스였다. 상대를 허물어서 자신의 권속으로 만들어 버리는.
그리고. 실제로 연우는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어쩌면 살 수 있을지 모른다.
비에라 듄은 그런 희망을 가졌다. 연우의 정신을 장악할 수 있다면. 이 지옥 같은 곳을 빠져나가, 새롭게 재생을 꿈꿀 수도 있을 테니까.
「녀석 때문에 희생당한 사람도 많았지. 자기밖에 모르는 최악의 인간이었다고! 이대로 있다간 우리도 위험하겠다 싶었으니까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
“다 지껄였지?”
하지만 그녀가 겨우 잡았다고 생각한 희망의 끈은 허깨비일 뿐이었다.
「뭐?」
연우는 차갑게 내뱉으면서 손을 뻗어 비에라 듄의 머리통을 꽉 쥐었다.
우드득-
육체가 없는데도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영혼이 뒤틀리는 소리. 비에라 듄은 다시 끔찍한 고통에 잠겼다.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녀석의 눈에 핏대가 잔뜩 섰다.
“그래서 어쩌라고? 그딴 말을 한다고 해서 내가 흔들리기라도 할 줄 알고?”
연우는 비에라 듄의 머리통을 그대로 안쪽으로 구겨 넣었다. 머리가 짜부라지고, 어깨가 눌리다가, 바닥까지 찌그러졌다.
「아파! 아프다고! 놔! 놓으란 말이야! 아아아악!」
“인간관계에 불만이 아예 없을 수는 없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년처럼, 너희들처럼, 등에다 칼을 꽂지는 않아. 대화로 풀지.”
「아아악!」
비에라 듄은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연우의 압박은 계속 이어져 영체 곳곳이 터져 나갔다. 흑기가 핏물처럼 치솟으면서 알 수 없는 형태로 변했다.
“그러니까 그딴 헛소리 지껄이려면.”
콰드드득-
“네가 모시는 위대한 어머니인지 뭔지 하는 놈에게 가서 지껄여.”
연우는 주먹을 강하게 쥐었다. 퍼억 하는 소리와 함께 영체가 풍선처럼 터졌다. 흑기가 퍼졌다. 마지막 남은 비에라 듄의 사념이 복잡하게 어지러워졌다.
그것을 보면서.
연우는 용마안을 활짝 뜬 채, 차가운 목소리로 일갈했다.
“그러니 이딴 같잖은 허물 따윈 집어치우고. 진짜로 나타나라, 비에라.”
그 순간.
휘휘휘!
곳곳에 흩어졌던 사념과 흑기가 뒤섞이면서 세상을 까맣게 물들였다.
그리고 거대한 존재감이 확 하고 다가왔다. 연우를 한낱 반딧불이로 만드는 존재감.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존재감이었다.
저 하늘 위로.
한 쌍의 눈이 활짝 열렸다. 비에라 듄이 가진 것과 똑같은 백색 눈동자.
동공이 없었지만, 연우는 그 눈이 자신을 내려다본다는 느낌을 받았다.
대지모신. 정확하게는 신이 내려준 권능과 영혼석을 역이용해서 되레 자신이 모시는 신마저 집어 삼킨 괴물이, 그곳에 있었다.
『너희 형제들은 언제나 쓸데없이 귀찮게만 구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