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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 사는 랭커-250화 (250/862)

25화. 격동하는 세계 (6)

-난 언젠가 탑의 꼭대기에 가 보고 싶어. 신과 악마들도 닿지 못한 곳. 거기에 뭐가 놓였는지, 궁금하지 않아?

-그러니까 정우야…….

-만약 네가 방해가 된다면 난 널 버릴지도 몰라. 알지, 내 성격? 부디 마지막까지 나와 함께 해 줘.

언젠가 비에라 듄이 농담처럼 툭툭 던졌던 저 말처럼.

어느 때부턴가 동생은 그녀에게 방해가 되었고, 그로 인해 등을 돌리게 되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만큼 위로 올라가고자 하는 비에라 듄의 욕망은 집착에 가까웠다.

동생은 몇 번이나 물었다.

왜 그렇게 위로 올라가는 데 집착을 하는 것이냐고. 77층과 76층을 차지한 올포원과 여름여왕에 대한 그녀의 저주와 원한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물음에도 언제나 비에라 듄은 웃기만 할 뿐, 이렇다 할 대답을 해 주지 않았다.

비에라 듄은 언제나 그랬다.

뭔가 일이 있으면 웃음으로 무마했고, 속은 알 수 없었다. 동생은 그런 그녀가 때론 두려웠지만, 사랑만큼은 진짜라고 생각했다. 용마안도 진실이라고 늘 말해 줬다. 그러다 칼에 맞아야 했지만.

어쨌거나 꼭대기 층을 향한 그녀의 집착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리고.

연우는 바토리의 흡혈검으로 비에라 듄을 흡수한 순간. 그녀가 그토록 바라던 소망을 이뤘단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분명 그가 흡수한 녀석은 비에라 듄이 맞았다. 하지만 그건 속이 텅 빈 쭉정이에 불과했다. 어디론가 사라진 그녀가 남긴 허물. 잔재. 혹은 흔적이었다.

이미 ‘진짜’ 비에라 듄은 하계를 떠나고 없었던 것이다.

꽤 오랜 시간 동안.

비에라 듄은 대지모신과 직렬로 연결된 채널을 통해 자신의 에고 데이터를 하나둘씩 위로 올리고 있었다.

체부 환승과 심상 침탈. 두 권능을 적절히 이용한다면, 에고 데이터를 마구 복제할 수 있다. 비에라 듄은 이를 바탕으로 대지모신을 천천히 집어삼키고자 했다. 컴퓨터에 몰래 스며든 바이러스가 몸집을 부풀리면서 하드웨어를 잡아먹는 것처럼.

물론, 대지모신이라는 거대한 존재 앞에 비에라 듄은 아주 작은 존재일 뿐이다. 아무리 증식한다고 해도 거대한 파도 앞에 모래성은 쉽게 허물어질 뿐이다.

하지만.

그런 모래성이 무한대로 늘어난다면? 그리고 단단하게 다져진다면? 대지모신을 침략한 비에라 듄의 에고 데이터가 계속 복제되어 계속해서 침식을 거듭한다면? 그러다 중추 신경계를 장악해 버린다면? 그때도 이것을 모두 쓸어 낼 수 있을까?

마인드 컨트롤은 상대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었다. 신에게도 적용이 되었고, 스스로에게도 적용되었다.

무한대로 늘어난 비에라 듄은 군집체(群集體)를 이뤄 거대한 하나의 의식으로 통일되었고, 끝내 대지모신을 집어삼키는 데 성공했다.

물론, 이것이 가능했던 배경에는 다른 도움도 있었을 것이다.

‘현자의 돌과 드래곤 하트. 영혼석도 가져갔겠지.’

비에라 듄은 발푸르기스의 밤에다 초보적인 현자의 돌만을 남겼을 뿐, 이미 자체적으로 큰 완성을 이뤘다. 그리고 여기에 한 가지를 더 추가했다.

드래곤 하트. 동생의 가슴을 갈라 빼앗은 심장의 절반도 같이 사용한 게 분명했다.

‘결국 정우의 심장에다 칼을 꽂은 건. 이것 때문이었어.’

동생이 갖고 있던 드래곤 하트는 사실 고룡 칼라투스에게서 기인한 것. 때문에 칼라투스가 의도했던 대로 완전한 개화만 이뤄냈다면. 새로운 용종의 부활을 볼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하계로 떨어진 뒤, 신과 악마에 잔뜩 뒤처진 용종의 새로운 초월을 노렸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비에라 듄은 이런 잠재력을 눈치채고, 도중에 가로챘다.

처음에는 단순히 마력 기관을 얻기 위함이었나 싶었지만. 이제 보니 이미 그때부터 대지모신을 잡아먹을 궁리를 했던 것이다.

영혼석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이용한 것이겠지. 루시엘은 신과 악마들도 두려워했던 자였다. 그런 존재의 파편이 담긴 영혼석이라면 격을 상승하는 데 큰 도움이 됐을 테니까.

그렇게 드래곤 하트에 현자의 돌, 루시엘의 영혼석까지. 비에라 듄은 무한한 마력을 바탕으로 거대 의식을 유지할 수 있었다.

결국엔 사도인 주제에 자신의 주인을 잡아먹은 괴물이 된 것이다. 어느 누구도 해내지 못한 미친 발상이었다.

대지모신이 이렇다 할 자아를 가지지 않은 ‘개념’ 형태이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최근에 대지모신과의 채널이 끊어졌던 이유?

간단하다.

비에라 듄이 대지모신을 침식하면서 다른 곳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연우는 이런 사실을 유추하고도 크게 믿지는 않았다. 플레이어가 신좌를 강탈한 경우는 탑이 있고 난 후에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심지어 신격을 터득한 사람도 없었다. 올포원이 이루거나 근처까지 가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만 있을 뿐.

아마 비에라 듄도 아직까지 대지모신과의 완전한 동화를 이루지는 못했을 것이다.

장악했다고 해도 격이 모자란 이상,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마저도 소화하려면 아주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겠지.

사실 이렇게 모습을 내비친 것도, 녀석으로서는 큰 손해를 감수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나타난 이유는 하나.

이런 일을 저지른 연우를 한번 보고 싶어서일 것이다.

“위쪽 공기는, 원하던 대로 좋나?”

『좋다마다. 한낱 필멸자는 절대 알 수 없는 공기지.』

수많은 에고 데이터가 겹쳐져 만들어진 군집체라 그런 걸까? 녀석의 목소리는 마치 수천만 개의 입이 동시에 말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시끄럽고, 자꾸 울렸다.

“그래. 좋아야겠지. 자신을 따르던 사람들까지 전부 내버리고 손에 넣은 거니까.”

발푸르기스의 밤의 멸망은 사실상 자신들이 모시던 신과 수장의 배반으로 이뤄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두 눈동자는 별다른 감흥이 없어 보였다. 사실 연우도 기대는 하지 않았다. 녀석은 자신의 꿈을 위해서라면 수만 명을 희생시켜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내가 이렇게 온 것은 경고를 위해서다.』

연우는 공간을 타고 울리는 파장을 느꼈다. 오한이 들었다. 용의 비늘이 빳빳하게 섰지만, 녀석을 보는 눈빛은 고요했다.

“경고?”

『그래. 경고. 나는 이제 더 이상 너희 형제와 얽매이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하계에서의 삶 따위에는, 이제 아무런 미련도 없으니까.』

“…….”

『그러니 너도 이 이상 나에 대해 관심을 두지 마라. 어차피 원하던 대로 하계에 있는 ‘비에라 듄’은 죽이지 않았나? 복수는 끝났을 테니. 귀찮게 굴지 마라.』

권태로운 목소리. 날파리나 다름 없는 존재가 자신을 귀찮게 하는 게 영 짜증 난다는 투였다.

연우는 어이가 없었다. 혼자서 북 치고 장구까지 치는 태도가 기막히기만 했다.

그리고 이렇게까지 사람 보는 눈이 없었던 동생에게 조금 짜증이 나기까지 했다.

비에라 듄에게 이제 차정우란 존재는 한낱 추억거리도 안 된다는 뜻이었으니까. 그저 위로 올라가기 위해 사용한 발판이었을 뿐이었다. 녀석은 신이 되기 위해 조금이나마 남아 있던 감정이나 미련도 가차 없이 버렸다.

몸 주고, 마음 주고. 추억까지 줘 버렸다. 동생의 삶은 여기서 한낱 농락거리로만 남아 버렸다.

으드득-

연우는 이를 갈면서 비에라 듄을 노려봤다.

“그럼 나도 경고하지.”

『네가? 필멸자 따위에 불과한 주제에?』

녀석이 비웃음을 던졌다. 지금 연우와 비에라 듄의 존재감은 격차가 너무 심했다. 녀석은 어쩌면 헤르메스나 미후왕의 허물보다도 더 클지도 몰랐다. 너무 까마득해서 닿을 수 있을지조차 모를 정도였지만.

그래도 연우는 싸늘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으르렁거렸다.

“거기서 목 씻고 기다려. 얼마 안 걸릴 테니까.”

『지금 네가 한 말, 무슨 뜻인지 알고 있나?』

“알다마다.”

『아니. 넌 모른다. 넌 지금 신살(神殺)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신‘들’에게 그게 어떤 의미인지 전혀 모르고 있군.』

“아니. 아니까 하는 소리다.”

순간, 연우의 눈앞으로 수많은 메시지가 떠올랐다.

[‘헤르메스’가 당신의 발언에 무릎을 치며 크게 웃음을 터뜨립니다!]

[‘아테나’가 따스한 눈빛으로 당신을 바라봅니다.]

[‘우르드’가 코웃음을 칩니다.]

[‘포세이돈’이 당신의 오만한 발언에 크게 역정을 부립니다. 여러 신들이 ‘포세이돈’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포세이돈’이 강한 적의를 드러냅니다.]

[‘아가레스’가 사악하게 웃습니다.]

[‘아가레스’가 자신의 권한으로 당신에게 건넨 권능, ‘흉신악살’을 강화시켰습니다. 앞으로 더 많은 이적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스킬 ‘악마술’이 권능 ‘흉신악살’에 통합됩니다.]

[‘아가레스’가 다른 악마들을 돌아보며 크게 소리를 지릅니다.]

[악마들이 ‘아가레스’를 의도적으로 무시합니다.]

[대다수 악마의 사회가 신중한 눈으로 당신을 지켜봅니다.]

……

여름여왕을 잡았을 때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던 신과 악마였지만.

신살을 언급한 순간, 격한 반응이 터져 나왔다.

신은 위대한 존재다. 당연히 자신들의 체면과 명예를 가장 중요시한다. 그것이 신앙을 유지하는 근거이며, 신위를 지탱할 수 있는 기반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들에게 신살을 언급한다는 건, 신의 체면과 명예를 바닥에 추락시키는 것과 같았다.

당연히 연우와 얽히지 않은 이들이라고 해도 불쾌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특히 예전부터 연우를 못마땅하게 보기 시작하던 포세이돈은 이제 아예 대놓고 적의를 드러낼 정도였다.

이미 브라함을 권속으로 삼은 전적도 있기에. 반응은 더 요란할 수밖에 없었다.

『미친놈이로군.』

비에라 듄도 그것을 잘 알기 때문에 어이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흘렸지만.

그러다 곧 눈꼬리를 살짝 위로 치켜 올렸다. 명백한 비웃음. 어디 해볼 테면 해보란 눈빛을 보냈다.

『그래. 헛된 망상이야말로 필멸자가 유일하게 가질 수 있는 자유지. 맘대로 하여라. 난 계속 이곳에 있을 테니.』

츠츠츠-

비에라 듄은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안개가 되어 흩어졌다. 공간을 가득 물들이던 존재감도 거짓말처럼 홀연히 사라졌다.

“……신이라. 누구는 영락을 하였는데, 누구는 승화를 이뤘어. 참 신기한 노릇이야. 하핫!”

여태 연우와 비에라 듄의 대화를 지켜보던 브라함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연우를 바라봤다.

“이보게, 주인.”

“예.”

“언젠가 내게 말한 적 있지? 다시 원래의 자리에 앉을 수 있게 도와주겠노라고.”

원래의 자리. 신좌.

다시 ‘브라흐마’로 돌아갈 수 있게 해 주겠다던 약속.

“그 말, 꼭 지키게. 대지모신은…… 꼭 내 손으로 찢어 죽여야겠어.”

브라함은 자신의 딸을 그런 꼴로 만든 비에라 듄이 아직도 멀쩡하게 있다는 것이 못마땅했다.

아니, 오히려 더 위로 올라갔다는 사실이 불쾌했다. 그래서 그렇게 말한 것이지만.

“안 됩니다.”

연우는 고개를 흔들었다.

브라함이 미간을 찌푸렸다.

“뭐?”

“찢어 죽이는 건 접니다. 그건 양보 못 해요.”

연우가 진지한 얼굴로 대답하자, 브라함은 자기도 모르게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

“어쩌지? 나도 양보 못 하겠는데 말일세.”

“그럼 누가 해낼지, 내기라도 하시죠.”

“그거 좋지.”

[여러 신의 사회가 불쾌한 눈으로 내려다봅니다.]

브라함은 메시지를 보고도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제가 놈들이 불쾌해하면 뭣할까.

아무리 대단한 격과 권능을 지니고 있어도 98층에 억류되어 꼼짝도 못 하는 주제에. 자신들에게 어떻게 해코지를 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브라함은 해낼 수 있을 거란 굳은 믿음이 있었다. 연우와 함께라면. 못할 것이 없었다.

그가 머릿속으로 그리는 미래. 지금은 신격이 박탈당하면서 거의 사라지고 없었지만, 그래도 어렴풋하게 남은 신성으로 이따금씩 엿보는 예지 속에는. 모두가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마치 한 장의 가족사진처럼.

자신도. 갈리어드도. 세샤도. 아난타도.

그리고 그 속에는 연우도 다정한 표정을 지으면서 있었다. 언뜻 보면 정우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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