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권
1화. 성장 (1)
시간은 쏜살같이 흘렀다.
어쩌면 탑이 생성된 이래 가장 혼란스러웠다고 할 수 있을 시간. 너무 정신없었기에 모두가 ‘벌써 그만큼이나 흘렀어?’라고 반문을 할 정도였다.
그동안 벌어졌던 일들은 거대 클랜의 소속원들이며 저층 구간에 있는 일반 플레이어들, 심지어 은거를 택한 자들도 피부로 느낄 수 있을 만큼 거칠었다.
여름여왕이 무너지면서 레드 드래곤은 존폐의 기로에 섰다.
수많은 승냥이들이 그들을 위협했다. 혈국이 가장 열성적으로 물어뜯었고, 마군은 81개의 눈을 사냥하기 시작했다. 엘로힘은 시의 바다와 손을 잡고 76층으로의 진입을 시도했다.
그 외에도 크고 작은 클랜들이 서로 연합을 해서 각 층에 있는 레드 드래곤의 영역을 침범해 약탈하는 등, 레드 드래곤은 대내외적으로 큰 위기에 부딪쳤다.
하지만 레드 드래곤은 레드 드래곤. 아무리 여름여왕이 없어졌다고 해도, 오랜 역사만큼이나 내실도 단단히 다져져 있는 곳이었다.
특히 여름여왕을 대신해 레드 드래곤을 이끌게 된 비희 왈츠가 가장 눈에 띄었으니.
여태껏 베일에 가려져만 있던 그녀는 외뿔부족과의 전쟁에서 뛰어난 모습을 보이더니, 곳곳에서 벌어진 전투에서도 맹활약을 했다.
무공이면 무공. 마법이면 마법. 어느 것 하나 부족한 면이 없었고, 그녀가 나타난 전투에서는 언제나 커다란 승리가 남았다.
비록 여름여왕에 비하면 모자란 구석이 있을 것이나, 다른 아홉 왕에 비해도 절대 뒤처지지 않는 실력을 발휘했으니.
특히 76층에서 대대적인 침공을 벌인 엘로힘을 상대로, 세 집정관의 합공에서 무승부를 이뤄 낸 순간. 레드 드래곤은 더 이상 이빨 빠진 종이호랑이가 아닌, 다시 발톱을 날카롭게 간 들짐승으로 돌아와 있었다.
때문에 레드 드래곤은 많은 피해를 입고도, 여전히 명실상부한 최고 집단으로 남아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바로 그 뒤에 벌어졌다.
비희 왈츠가 겨우겨우 침공을 막아 내고 난 뒤에 76층을 사수했다며 안심을 한 순간.
그동안 몸을 바짝 낮추면서 기회를 엿보고 있던 용생구자의 다른 형제들이 동시에 왈츠를 공격한 것이다.
이미 지칠 대로 지쳤던 왈츠는 무참히 패배하고 말았고, 자신을 따르는 소수의 무리만 데리고 겨우 76층을 탈출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텅 비어 버린 왕좌를 향해, 용생구자들이 다시 격돌했다.
내란이었다. 그들은 오로지 새로운 왕이 되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다.
81개의 눈과 여러 무력 부대는 서로 다른 주인을 섬기면서 여러 갈래로 쪼개졌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장에서 함께 어깨를 맞대고 싸우던 동료의 심장을 칼로 찔렀다.
그러다 다시 하루가 지났을 때.
레드 드래곤은 크게 세 곳으로 갈라지고 말았다.
‘봄의 여왕’이라는 별칭을 갖게 된 왈츠의 화이트 드래곤.
막내였지만 형제들을 차례로 삼키면서 갑자기 급부상하게 된 ‘가을군주’ 탐의 블랙 드래곤.
이 둘보다 상대적으로 약세이지만, 연합을 이루면서 비등하게 덩치를 키운 햘, 이수, 바하라탄의 그린 드래곤.
겨우 진정된 것 같았던 76층은 이제 다시 삼파전으로 갈려, 서로 먹고 먹히는 긴 전쟁에 들어서고 말았다.
그리고 여기에 발맞춰서 다른 거대 클랜들도 새로운 변화를 시도했으니.
청화도가 무너졌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혼란의 소용돌이는. 점차 그 아래에 있던 플레이어와 중소 클랜까지 집어삼켰다.
클랜들이 서로 잡아먹고 먹히기를 반복하면서 8대 클랜의 아성을 위협할 만한 새로운 클랜들이 우후죽순으로 나타나고, 신예 플레이어들이 하루에도 수십 명씩 랭커의 자리를 차지하면서 새롭게 떠올랐다.
이제 탑의 세계는. 칼이 진리였고, 법칙이 되었다.
격동(激動).
한 단어로 축약해서 설명하라면. 그렇게 말할 수 있으리라.
* * *
탑의 세계가 그렇게 혼란스럽게 굴러가는 와중에도, 모든 곳이 그런 건 아니었다.
외뿔부족은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여전히 고요한 일상을 보냈다. 그나마 그들을 바쁘게 했던 궁무신도 언제부턴가 증발한 것처럼 아예 종적을 감추면서 잠잠해졌다.
그리고.
그건 연우와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연우와 브라함은 비에라 듄의 허물이 토설했던 정보를 바탕으로, 아난타의 치료약을 개발했다.
그동안 발푸르기스의 밤이 ‘그릇’을 마련하기 위해 아난타에게 각종 약물을 너무 많이 투여한 탓에, 이것을 모두 씻어 내고 몸을 낫게 하는 데에는 상당한 수고가 필요했다.
그래도 다행히 브라함은 연단술로 이름을 알린 만큼, 개발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연우도 용의 지식 창고, 호크마를 수시로 열어 옆에서 도와주고, 대장로는 일족 내 약서를 개방해 주었다.
그리고. 몇 달이 흐른 뒤에 브라함은 드디어 치료약 개발을 마칠 수 있었다.
연우가 동석한 가운데. 브라함은 천천히 회복 캡슐에서 아난타를 꺼내었다.
그는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는 딸의 모습을 보면서 갖가지 생각에 잠겼다.
딸이 눈을 뜨면 가장 먼저 무슨 말을 하는 게 좋을까? 그동안 고생했다고 해 줘야 하나? 아니면 말없이 머리를 쓰다듬어 줘야 할까? 세샤가 얼마나 건강하게 자랐는지 먼저 보여 주는 게 좋지 않을까? 아니, 혹시 딸이 여전히 자신을 미워하고 있으면 어떡하지?
하지만 그런 생각들은, 아난타의 눈이 떠진 순간 모두 사라졌다.
“아난다.”
브라함은 아난타의 손을 꽉 쥐었다. 호흡기에 의존해 겨우 숨을 쉬고 있는 딸이 너무 안타깝게 보였다. 가슴 한쪽이 울컥했다. 이럴 때는 육체가 호문클루스라는 점이 원망스러웠다. 눈물이라도 흘리고 싶은데. 같이 온기를 나누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런데.
금방 잡힐 줄 알았던 아난타의 초점이 오래도록 잡히질 않았다. 두 눈은 빈 허공만을 응시했다. 분명 의식은 돌아왔을 텐데. 순간,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브라함의 등골을 스쳐 지나갔다.
뒤에 있던 연우의 표정도 딱딱하게 굳었다.
* * *
브라함의 불안감은 현실이 되고 말았다.
아난타를 회복 캡슐에서 꺼낸 뒤. 브라함은 아난타를 회복시키는 데 집중했다. 다행히 차도는 있었다. 몇 주 사이에 확연히 차이가 날 만큼.
하지만.
아난타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옆에서 도와주면 식사도 하고, 걸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하루 종일 그저 멍하니 앉아만 있을 뿐. 말을 하지 못했고,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다. 심지어 세샤까지도.
이유는 도저히 알 수 없었다.
트라우마 때문에 실어증이나 자폐에 빠진 게 아닌가 짐작하는 게 전부일 뿐. 이런저런 정신적 치료를 병행해도 도저히 차도가 보이질 않았다.
그래서. 브라함은 그런 딸의 곁에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이게 하늘이 내린 벌이 아닐까 싶었다.
그동안 딸을 챙기지 못하고 제 욕심만 채우다 이제야 받게 된 벌. 하지만 벌이 내릴 것이면 자신에게나 내릴 것이지, 어째서 딸에게 떨어진 걸까. 이게 전부 자신 때문인 것만 같아, 가슴이 미어졌다.
그리고 그런 모습은.
연우에게도 너무 큰 공허함으로 다가왔다.
‘내가 조금만 더 일찍 알았더라면.’
연우는 손끝을 까닥거렸다. 지구였다면 담배라도 물었을 텐데. 탑에 들어오고 나서 담배 생각이 이렇게 간절한 적이 없었다. 그만큼 답답했다.
그래서 연우는 처음으로 대장로에게 부탁해 술을 한 병 가져왔다. 쨍. 술병과 술잔이 요란하게 부딪치면서 맑은 소리를 냈다. 간만에 마시는 술은 썼다.
그리고 두 번째 잔을 기울이려는데. 갑자기 손 하나가 불쑥 튀어나와 잔을 가로막았다. 고개를 들었다. 판트가 에도라와 함께 입술을 삐죽 내밀면서 투덜거리고 있었다.
“청승맞게 혼자서 뭐 하는 거유? 이런 건 같이 마셔야 재미있지.”
판트는 허락도 받지 않고 술잔을 빼앗아 날름 자신이 마셔 버리고, 맞은편에 털썩 앉았다.
에도라는 연우의 옆에 앉아 조용히 빈 잔을 채워 주었다. 또르르. 연우는 채워지는 술을 가만히 바라봤다. 맑은 술 위에 비친 자신은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그 안에서 쓰게 웃고 있다는 게 선명하게 느껴졌다.
자신에게도 이렇게 잘 보이는데. 판트와 에도라라고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연우에게 왜 그러는지 묻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옆자리만 지켰다. 같이 술병을 기울이고, 술잔을 부딪쳤다.
그러면서 연우도 복잡했던 머릿속을 조금씩 정리할 수 있었다.
그는 탑에 들어오고 나서도 세샤의 존재를 몰랐다. 브라함과 아난타가 어떤 고난을 겪는지 짐작도 못 했다. 비에라 듄이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 생각지도 않았다.
「그걸 주인이 어떻게 알아? 주인이 무슨 올포원처럼 천리안을 부리는 것도 아니고, 앉은뱅이 세 여신처럼 예지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렇습니다. 너무 깊게 마음 쓰지 마십시오.」
샤논과 한령이 어떻게든 그런 연우를 달래려 했지만, 연우는 그런 생각에서 좀처럼 벗어날 수가 없었다.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 조금만 더 서둘러서 아난타를 구해 냈더라면. 비에라 듄을 처단했다면. 그때는 세샤에게 아픈 엄마를 보여 주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좌절감과 후회는 다른 생각에 다다랐다.
‘힘이 있었다면.’
이 모든 것들이 약하기 때문에 벌어진 일들이었다.
자신이 조금만 더 강했다면 아래층에서 시간을 더 끌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세샤와 아난타를 좀 더 빨리 구출할 수 있었겠지.
물론, 예전에도 이런 생각을 몇 번씩 가진 적이 있었다.
힘만 있다면 금방이라도 복수를 끝낼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원하던 대로 탑을 부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이유가 달랐다.
‘지붕이 되어야 해. 내가.’
홀몸이었던 처음과 다르게. 이제 연우의 주변에는 ‘자신의 사람’이 가득했다.
브라함, 아난타, 세샤. 충실한 권속이 되어 준 샤논, 한령, 레베카, 부. 그 외에도 판트와 에도라, 갈리어드가 있다. 무왕은 이제 소중한 스승이었고, 외뿔부족은 가족이었다.
복수도 복수지만, 이젠 주변 사람들도 지켜야만 했다. 울타리. 혹은 지붕. 그런 존재가 되고 싶었다.
무왕이 그랬다. 그는 여름여왕을 상대하면서도, 일족을 지킬 수 있을 만큼 강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일족들도 그런 무왕을 따르면서 무왕이 싸움이 전념할 수 있게끔 단단히 등을 받쳐 주었다.
서로가 서로를 굳게 신뢰하고, 거리낌 없이 등을 맞댄 것이다.
연우는 그 광경을 본 뒤로 줄곧 생각했다. 자신도 그러고 싶다고. 때로는 자신이 울타리가 되어 주변인들을 지켜 주고, 또 다른 때에는 그들이 자신의 등을 지켜주는. 그런 광경을 꿈꿨다.
비록 가슴 한편에는 동생과 아르티야 간의 관계처럼 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도 있었지만.
동생이 일기장에서 했던 말마따나, 부끄럽지 않은 형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친구와 연인에 대한 믿음이 절대 헛된 게 아니었다고 생각했던. 동생의 그런 마음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 싶었다.
나와 내 사람을 지키고 싶다. 그것이 연우의 뇌리에 강하게 박힌 생각이었다.
그래서 연우는 그런 생각들을 모두에게 털어놓았다.
「……뭐야, 오글거리게. 갑자기 그런 말하면 내가 소름 돋잖아. 으어어어!」
「저희는 주인께 종속된 존재입니다. 주인이 걷고자 하는 길을 걸으십시오. 샤논이 말은 저렇게 해도, 속은 그렇지 않습니다. 저희는 묵묵히 주인의 뒤를 따라 걸을 뿐입니다.」
샤논과 한령은 그들답게 대답을 하고.
“험험! 난 또 이 양반이 야밤중에 무슨 헛짓거리를 해 대려 하나 싶었더니. 그런 거였수? 나 참.”
“오라버니. 혹시 제가 예전에 했던 말 기억하세요? 멍에를 나누고 싶다던 말.”
판트는 고작 그런 것으로 고민했냐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에도라는 조심스럽게 연우의 눈을 마주쳤다.
연우는 또렷하게 빛나는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어떤 목소리를 떠올릴 수 있었다.
-오라버니가 어떤 멍에를 지고 있는지 보고 싶었어요. 그것을 같이 나누고 싶다고 하면 잘못된 걸까요?
23층에서 아가레스와 격전을 벌이고 쓰러졌던 날. 에도라는 연우를 꼭 끌어안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자신들을 진심으로 동생으로 생각한다면, 속에 담은 멍에를 나눠 달라고.
여기에 연우는 언젠가 털어놓겠노라고 말했었다.
그리고. 그 언젠가가, 바로 오늘인 것 같았다.
연우는 두 사람 앞에서 가면을 벗었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어쩌면 술기운에 저지른 충동적인 선택이었는지 몰라도. 후회는 없었다. 그들에게 자력으로 맨 얼굴을 보여 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미 한 차례 본 적이 있던 에도라는 드디어 마음을 열기 시작한 연우를 보면서 담담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판트는 놀란 눈이 되어 연우를 바라봤다.
“헤븐윙……?”
연우는 밤새 그들과 술잔을 나누면서 자신의 사연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술자리는 담담했다. 여전히 그날의 일을 떠올리면 속에서 불이 나는 것처럼 감정이 들끓었지만. 연우는 절대 내색하지 않았다. 마치 타인의 일처럼 이야기를 했다.
도리어 역정을 낸 건 판트였다.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는 듯 주먹으로 가슴을 두들기기도 하고, 술잔으로 탁상을 세게 내려치기도 했다.
에도라는 자신이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한 사연에 눈썹을 파르르 떨었지만,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아버지는? 아버지는 이 사실을 아시우?”
연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말씀드린 적 없다.”
“하여간 자기 일에만 관심 많은 양반이지! 제자가 이런 일을 겪었다는 걸 여태 모른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판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안 되겠수.”
“뭘 하려고?”
“뭘 하긴 뭘! 형님은 이제 우리 일족의 사람이나 다름 없잖수. 일원의 일은 곧 일족의 일. 형님이 그런 고초를 겪었는데, 족장이라는 양반이 엉덩이를 깔고 앉아 있는 게 말이나 되냐 이겁니다!”
술기운에 당장이라도 튀어갈 것 같은 모습. 연우가 제지하기 전에 에도라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앉아, 이 등신아!”
“무, 뭐? 등신?”
여태껏 연우 앞에서는 조신한 태도를 보이려 했던 에도라도, 이번에는 감정을 쉽게 다스릴 수가 없었다. 오히려 판트가 당황할 정도였다.
하지만 에도라는 여전히 도끼눈을 뜬 채 소리를 질렀다.
“그래. 등신아. 설마 아버지가 오라버니의 사연을 정말 모르신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판트는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무왕은 세상사에 관심 없는 척하며 마을에 집중하지만, 언제나 주변에 눈과 귀를 거두지 않았다. 아무리 아버지라지만, 속이 시커멓다는 것만큼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의 곁에는 항상 어머니인 영매도 있었다.
“아직도 모르겠어? 아버지는 오라버니에게 기회를 주시는 거야. 제대로 자라서 날갯짓을 할 수 있도록. 다른 천적으로부터 보호해 주고 계시는 거라고.”
“……!”
판트는 순간 술이 확 깨는 기분이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자리에 털썩 앉아 다시 술잔을 기울였다. 동생은 언제나 이렇게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하는데. 왜 자신은 이렇게 성질머리만 앞서는 걸까.
“아버지는 알고 계신 거야. 오라버니가 언젠간 둥지를 떠날 거란 걸. 오라버니도, 자신의 손으로 모든 걸 마무리하길 원하시는 거고.”
판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보았던 연우는 절대 일족에 갇힐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연우가 무왕의 등을 보듯이, 판트는 연우의 등을 보고 있었기에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판트는 궁금했다.
여태껏 이런 일에는 전혀 아무런 언급도 않던 양반이. 왜 갑자기 자신들에게 이런 속내를 털어 놨을까 하고.
그래서 판트는 연우를 빤히 쳐다봤다. 금방이라도 연우를 잡아 먹을 것처럼.
그는 아무런 질문도 던지지 않았다. 대신에 그 속에 담긴 진심을 더 내놓으라는 듯, 강렬한 눈 빛만 보냈다.
때로는 백 마디의 말보다 한 번의 눈빛이 더 진실된 법이었다.
그리고 연우는 그 눈빛에 담긴 판트의 질문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외뿔부족에서도 깨나 귀하다는 술이 담긴 잔을 꺾었다. 뜨거운 뭔가가 목젖을 타고 위까지 내려가는 게 느껴졌다. 도수가 높은 술인데도. 이상하게 정신이 번쩍 깼다.
탁!
연우는 그렇게 술잔을 탁상에 내려놓으면서.
“난.”
여태 눌러 뒀던 진심을 꺼냈다.
“너희들이 내 날개가 되어 줬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