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252화 (252/862)

2화. 성장 (2)

“날개?”

판트는 그게 무슨 생뚱맞은 말이냐는 얼굴로 연우를 쳐다봤다. 하지만 은근히 오글거리는 것을 좋아하는 녀석의 두 눈에는 숨길 수 없는 기대가 엿보였다.

연우는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그래. 날개. 말했지만, 내가 앞으로 하고자 하는 건 무모한 짓이나 다름없다. 탑, 그 자체와 싸우는 것이니까. 그러니 너희에게 도와달라는 말을 하기가 어려워. 게다가 너희는 일족도…….”

“형님.”

판트는 듣기 지겹다는 듯이 새끼손가락으로 귓구멍을 후벼 파더니 도중에 연우의 말허리를 잘랐다.

“왜?”

후우! 판트는 손가락에 묻은 이물질을 입김으로 불면서 씩 웃었다.

“그럴 때는 말이우. 쓸데없는 말 이것저것 붙이지 말고, 딱 한 마디만 하면 되는 거유.”

“……?”

“도와줘, 라고.”

“……!”

“난 또 무슨 진지한 말을 이렇게 길게 늘어놓는가 했네. 평소에는 툭하면 말이 짧아서 사람 심기 상하게 하더니. 이제 보니 형님도 말이 많은 양반이었수? 으흐흐.”

판트는 어깨가 들썩이도록 웃었다. 에도라는 연우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전 오라버니의 멍에를 나누고 싶어요. 다시 한 번 더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것 같았다.

연우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이 두 사람에게 해 줄 말은 하나밖에 없었다.

“고맙다.”

예전부터 줄곧 느꼈던 것이지만. 자신이 탑에 오고 나서 가장 잘한 일은 역시나 이 두 남매를 만난 것이었다.

판트는 검지로 붉어진 콧잔등을 긁었다. 부끄러워서 그런지, 취기가 올라서 그런 건지. 그러다 녀석은 잔에 있던 술을 날름 들이켰다.

“크! 그리고 다른 걱정은 할 필요 없수. 일족이야 우리 없어도 아버지가 어련히 알아서 잘 굴리실 테고, 다른 놈팡이가 후계자 자리를 가로채도, 뭐. 그까짓 거 줘 패서 빼앗아 버리면 그만이잖수?”

참 판트다운 말이었다. 판트는 익살맞게 웃었다.

“그리고 남아로 태어났으면, 어? 세상과도 맞서 싸워 보는 그런 패기를 지녀야지. 호연지기! 크으! 내가 들어도 멋진데!”

“난 여잔데?”

에도라가 장난스레 물었지만.

“응? 네가 왜 여자야?”

“죽을래?”

“네 소중한 오라버니가 보고 계신다.”

“……이따 보자.”

“으하핫! 지금 많이 보려무나. 동생아.”

판트는 에도라가 도끼눈으로 자신을 째려보거나 말거나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에도라는 이를 바득 갈면서 술이 깨고 난 뒤에 응징을 하겠다고 속으로 다짐하고, 차분한 표정으로 되돌아와 연우를 돌아봤다.

“그런데 오라버니,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이런 말씀을 꺼내신 건 어떤 계획이 있기 때문 아닌가요?”

연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클랜을 만들 계획이다.”

두 남매의 눈이 살짝 커졌다.

“클랜?”

“조직부터 구축하려고 하시는 거군요.”

“일단은 그게 가장 중요하니까. 기반부터 마련을 해 둬야 위를 쌓을 수 있겠지.”

“으흐흐. 여기 있는 우리가 그 창립 멤버고?”

판트는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이 피식피식 바람 새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아직 인원수도 그렇고, 준비가 덜 끝났으니 당장 창설은 힘들 테고. 그 전까지 우리는 뭘 하면 되는 거요?”

“강해져라.”

“흠.”

판트는 입을 꾹 다물었다.

“강해져. 아무리 눌러도 눌리지 않고, 아무리 부딪쳐도 절대 깨지지 않을 정도로.”

“형님의 옆에 서기에 부끄럽지 않게 되라는 거구만. 이건 좀 자존심이 상하는데.”

판트는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불을 지핀 것처럼 두 눈이 활활 타올랐다.

“차라리 잘 되었수. 나도 짐짝 되는 건 딱 질색이니까. 날개가 되라고 했지? 날개가 아니라 아예 이빨이 되어 줄 테니까, 제대로 해야 합니다. 못했다가는 도리어 형님이 씹어 먹히게 될 테니.”

술은 다 마셨다. 판트는 몸을 홱 돌리면서 자리를 떴다. 에도라도 연우에게 고개를 숙이고, 똑같이 판트의 뒤를 따랐다.

홀로 남은 자리.

연우는 마지막 남아 있던 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탁. 잔을 탁상에 내려놓는 소리가 유달리 크게 느껴졌다.

* * *

그 날부터.

일행은 바깥세상만큼이나 바쁜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부는 던전을 만드는 데 전력을 다했고, 브라함은 갈리어드와 함께 아난타의 치료에 힘쓰며 외우주를 복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샤논과 한령은 미후왕의 유산을 해석하는 것에, 레베카는 신력을 회복하는 것에 몰두했다.

다들 연우의 의견에 깊게 공감한 데다가, 지난 레드 드래곤과의 전쟁에서 깨달은 점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여전히 힘이 부족하다.’

그들은 모두 전쟁에서 맹활약을 펼치긴 했었다.

하지만 그건 혼란스러운 상황을 이용한 것일 뿐. 사실상 자신들의 힘으로 이룬 것은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다.

특히 외뿔부족과 레드 드래곤의 전쟁에서. 무왕과 여름여왕의 전투에서 그들은 강한 뭔가로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듯한 느낌을 받아야만 했다.

여태껏 자신들이 알고 지내던 세계가 아주 좁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심지어 그것은 도무신이었던 한령도 마찬가지였다. 무왕이 펼친 무의 경지를 본 순간, 자신이 디뎠던 경지가 너무 초라하게만 느껴질 정도였다.

더구나 이번 전쟁을 통해 연우는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확실하게 보였다. 이제 그는 주목할 루키가 아닌, 경계해야 할 대상이 된 것이다.

때문에 더 이상 지금처럼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일을 꾸미기가 힘들게 되었다. 견제도 많이 들어올 것이고, 방해나 음모도 많을 것이다.

그런 위협으로부터 연우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그들부터가 강해져야만 했다.

그래서 일행은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개인 수련에 집중했다. 층계를 오르자는 말을 꺼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층계를 오르는 건 언제든지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뭔가를 궁구할 수 있는 시간은 자유롭게 주어지는 게 아니었다.

그리고.

연우도 자기 단련에 집중했다.

갖고 있던 스킬과 권능들을 재점검하고, 용의 인자와 마의 인자로 한껏 달라진 3차 각성을 완벽하게 다루기 위해 노력했다.

특히 검에 대한 욕심이 부쩍 커졌다.

20층에서 오러를 깨달은 뒤로 꾸준히 훈련을 했다지만, 마법과 달리 검에는 이렇다 할 진척이 크게 없었다.

여기에는 샤논과 한령의 충고가 있었다.

「보통 사람들은 오러만 피워 내면 무의 종착점에 도착했다고 생각하지. 우스운 말일 뿐이지만.」

「오러는 종착점이 아닙니다. 오히려 시작점입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칼이 무엇인지 의미를 깨닫게 되는 것이니까요. 어렴풋이 의미를 알았다고 해서 기고만장한다면 거기서 그칠 뿐입니다.」

서로 상반된 길을 걸어왔던 두 사람이었지만.

어느 지점에 이르자 하는 말이 똑같았다.

이제부터 시작일 뿐이다.

검의 의미를 알아 나가는 것. 그리고 그것을 몸에 새겨 넣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의미를 알 수 있을까?”

「의념을 검에 실어.」

「단순히 싣는 게 아니라, 검이 의념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다면 육체와 검이 하나가 될 테니, 그때서야 주인께서 원하시는 육체의 완전화도 달성하실 수 있을 겁니다.」

연우는 어렴풋이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것 같았다.

검과 하나가 되어라. 외뿔부족에서는 이것을 두고 이렇게 불렀다.

검신일체(劍身一體).

세간에서는 달인 급을 넘어선 명인 급의 경지라고 이야기되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연우는 다시 본격적으로 검을 쥐기 시작했다.

우웅, 웅-

비그리드는 언제나 반갑다면서 몸을 떨었다.

연우는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칼끝에 의념을 집중했다.

그렇게. 그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몇 달의 시간이 훌쩍 흘렀다.

* * *

[시차 괴리]

[초감각]

한없이 느려진 세상 속에서.

연우는 얼마나 휘둘렀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을 만큼 휘둘렀던 검을 다시 휘둘렀다. 외부 세계에 비해 수십 배나 빨라지는 의식 세계이기 때문에. 이제는 물릴 만큼 익숙한 동작이었다.

모든 의념이 검 끝으로 빨려 들어갔다.

오러가 화려하게 피어올랐다. 그러다 오러는 공간을 가르는 마찰열에 부딪쳐 더 크게 튀어 오르다가, 속박을 강요하는 의념에 묶여 단단히 압축되면서 검의 형태를 뗬다.

강기(罡氣).

보통 세간에 알려진 ‘오러’는 다양한 형태를 띠지만 뭉뚱그려서 오러 블레이드라고 표현한다.

사실 그것을 이뤄 낸 것만으로도 이미 달인의 경지에 오른 것이기에, 무술가들은 오러를 다듬는 데에만 집중하지, 그 이상을 넘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외뿔부족에서는 이것을 경지에 따라 크게 3가지로 분류했다.

검기, 강기, 무형강기. 무형강기는 보통 의념강기라고도 불리기 때문에 진인 급의 고수들만 닿을 수 있어 아직 연우가 노리기엔 요원했다.

하지만 강기는 달랐다.

연우는 철저한 노력 끝에 완숙한 달인의 경지에 다다랐고, 이제 검기를 다루는 데에도 큰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그래서 더 높은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었다.

마력을 고농도로 압축시키고, 의념으로 단단히 고정시켜 속성을 부여하는 힘, 강기.

연우는 이것을 이루고자 했고, 의식 세계에서 몇 번씩이나 리플레이를 하면서 누군가를 쫓고 또 쫓았다.

‘팔괘와 무극.’

여름여왕을 상대하면서 무왕이 펼쳐내던 힘. 얼마나 많이 떠올렸던지, 이미 그 두 가지는 눈만 감아도 곧바로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뇌리에 강렬하게 새겨져 있었다.

무(武)의 왕(王). 그는 그런 광오한 이름이 절대 부족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때의 힘에 발끝이라도 닿을 수 있다면. 지금 자신을 단단히 옭아매는 경지의 속박도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퍼어엉-

검 끝에 뭉쳤던 강기가 형체를 잃고 터지면서 느려졌던 시간도 같이 되돌아오고 말았다.

연우는 마치 다른 세상으로 튕겨 나가는 듯한 통증과 함께 검을 놓치며 한참이나 제자리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역시 안 되나.”

연우는 살갗이 찢어져 피투성이가 된 오른손을 보면서 혀를 찼다. 용의 피가 돌면서 상처가 빠른 속도로 아물었다. 재생 스킬이었다.

검을 휘두른 지난 몇 달의 시간은 연우에게 고역이나 마찬가지였다.

20층의 오행산에서도 피나는 노력을 했었다지만. 당시에는 고행이라는 굴레가 있어서 수련이 방향이 정해져 있었던 데에 반해, 이번에는 그렇질 못했다.

오히려 육체의 한계를 시험하고, 그것을 완전히 소화하는 데 집중해야 했기 때문에 지루함의 연속이라 할 수 있었다.

동작도 딱 하나. 검을 아래로 내리긋는 것뿐. 의념을 싣기는 한다지만, 그래도 그런 단순 동작이 수천수만 번 계속 되풀이되다 보면 신물이 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연우가 검에만 맹목적으로 매달린 건 아니었다.

사실 그동안 연우가 터득한 건 아주 많았다.

용의 인자와 마의 인자가 섞인 마룡체. 코어에 박힌 현자의 돌. 21층에서 억지로 깨운 3차 각성까지.

이렇듯 육체는 연속된 기연으로 빠르게 발전했다지만, 의식 수준은 거기까지 미치지 못했다. 어디가 한계인지, 힘의 총량은 어디인지, 스스로도 잠재 능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드래곤 킬러를 사용하기 위해 육체를 수없이 부수고 재생시킨 뒤에도. 연우는 아직까지 ‘끝’을 보지 못한 것 같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아야 했다.

그래서 시차 괴리로 느려진 세상 속에서, 초감각으로 의념을 최대로 키운 채로, 나날이 육체를 극한까지 내던졌다.

처음에는 분명 효과도 있었다.

필요할 때는 권능도 일일이 깨우고, 간간이 층계를 올라 힘을 시험해 보면서 한계를 깨고 또 깼다. 재생의 회복 속도를 믿고 저지른 짓이었다.

특히 브라함이 충고해 줬던 혈계 마법에서 가장 큰 소득을 볼 수 있었다. 마법의 시초라 할 수 있는 용종과 악마의 인자를 보유하고 있다 보니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즉각 발현이 되었던 것이다.

물론, 그런 건 대개 기초적인 마법이었고, 각인 마법과 합쳐져서 효과를 보이는 게 대부분이었다. 보다 심도 있는 마법은 부에게 전부 일임했기에 건드릴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연우는 이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괄목할 성장을 이뤘다. 그러다 언제 부턴가 커다란 벽에 가로막히게 되었다.

마법도 성장을 멈추고, 육체도 큰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남은 건 검밖에 없었다.

드디어 마지막 한계에 다다른 것이다.

문제는 바로 이때부터였다.

더 이상 성장이 이뤄지지 않았던 것이다.

조금의 진전이라도 있다면 좋을 텐데. 전혀 그런 게 없었다. 너무 높은 벽이었다. 지금처럼 몇 번씩 검을 휘둘러 봤지만, 번번이 실패만 했다. 모든 게 요원했다.

물론, 당장 연우가 팔괘와 무극을 노릴 수 있을 만큼 경지가 높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시작점. 단초를 열 정도는 되었다. 외뿔부족에서 말하는 강기였다.

그러나 이마저도 실패했으니.

마력은 충분했다. 육체도 충분했다. 경지도 충분했다. 의념도 충분히 실었다.

하지만 한 가지가 모자랐다.

문제는 그 부족한 한 가지가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따로 무왕을 찾아가 조언을 구하기도 해 봤지만, 애매모호한 대답만 돌아올 뿐이었다.

“네 길이 아니라서 그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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