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254화 (254/862)

4화. 성장 (4)

연우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다시 자세를 고쳐 잡으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방금 전 공격은 대체 어떻게 된 건지. 도무지 짐작 가는 바가 없었다. 분명 자신이 본 것은 나뭇가지였다. 하지만 나뭇가지가 아니기도 했다. 형태만 그렇게 띠고 있을 뿐, 아주 잠깐 동안 성질이 확 변한 느낌이었다.

[용마안]

연우는 또다시 정체를 알 수 없는 방금 전의 공격이 날아올 거라는 생각에, 세로 동공을 활짝 열었다.

세상을 따라 결이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혔다가 풀리고 있었다. 최근에 용의 인자를 대폭 얻으면서 볼 수 있는 결의 개수도 대폭 늘어나 있었다.

휙!

그런 결 사이로 나뭇가지가 다시 날아들었다. 여전히 느릿하고 낭창낭창한 움직임. 평범한 나뭇가지 그대로였다.

연우는 나뭇가지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땅을 박차면서 빠르게 이동했다. 목표는 회피와 돌파. 나뭇가지를 피해서 정면에서 일대일로 상대하겠다는 생각이었다.

나뭇가지의 변화를 읽는 것. 그게 가장 중요한 목표였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너무 느릿한 나뭇가지를 피해서 측면으로 파고들어 갈리어드를 노리려 할 때, 갑자기 나뭇가지가 빳빳해 지면서 쏜살같이 옆구리를 때리려 했다.

방금 전과 똑같은 변화. 아니. 변화만 따지자면 전혀 달랐다. 방금 전에는 마치 몽둥이처럼 단단해졌다면, 지금은 벼락이 떨어지는 것처럼 아주 빨랐다.

연우는 달리던 도중에 몸을 비틀면서 공격을 피했다. 아니, 피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엔 갑자기 나뭇가지의 끝이 시린 빛을 토해 내면서 그대로 앞으로 찔러 들어왔다.

펑!

너무 빠르게 일어난 변화. 분명 용마안으로 쫓고 있었어도 ‘뭔가 있었다’는 것만 알아챌 수 있었을 뿐.

연우는 마장대검을 아래로 내릴 겨를도 없이, 그대로 명치를 때리는 둔탁한 타격감과 함께 그대로 튕겨 나고 말았다.

연우는 저만치 붕 떠올랐다가 바닥을 데구르르 굴렀다. 컥, 컥! 사례가 들렸다. 그는 한참 동안 헛구역질을 했다.

“어떤가?”

“다시…… 해 보겠습니다.”

연우는 어기적대면서 일어났다. 똑같이 속절없이 당했지만. 그래도 처음에는 못 봤던 것이, 이번에는 보였다. 다음 차례에는 피할 수 있지 않을까. 대체 나뭇가지에 어떤 마술을 부렸는지도 알고 싶었다.

갈리어드는 희미하게 웃었다. 호승심에 찬 연우의 눈이 어느 때보다 불타오르고 있었다. 최근에 계속 벽을 마주 보면서 잠겼던 실의는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다를 건 없을 텐데?”

“다를 겁니다.”

“납득할 때까지 하겠다면…… 굳이 말리지는 않지.”

갈리어드는 다시 나뭇가지를 까닥거리며 연우를 도발했다. 연우는 이번에는 다른 작전을 가지고 다시 움직였고, 그 결과는.

빠악!

역시나 다르지 않았다.

‘어…… 째서?’

연우는 그 뒤에도 계속 다른 방식으로 덤볐다. 팔극검의 8대 비기를 다른 방식으로 풀어내며 갈리어드를 압박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연우는 ‘빡’이나 ‘퍽’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뒹굴어야만 했다.

금세 온몸이 먼지투성이가 되고 말았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연우는 멍한 시선으로 갈리어드를 바라봤다.

그와 부딪치는 내내 연우는 2합을 넘겨 보지 못했다. 기술이나 기예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분명한 건, 연우 자신은 절대 갈리어드에 비해 하수가 아니라는 것. 하지만 합을 나누기도 전에 이상한 마술과 함께 넘어지기 일쑤였으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계속 보다 보니 뭔가 읽히긴 읽혔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었다. 그 이상을 읽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갈리어드가 마력을 쓰거나 다른 스킬을 쓰는 것 같지도 않았다. 용마안은 확실히 말했다. 갈리어드는 자신의 약속을 어기지 않았다.

결국.

“하.”

연우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 쉬었다. 사실상 항복 표시였다. 샤논이나 한령이 있으면 조언이라도 구하겠건만. 역시나 둘은 대답이 없었다.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갈리어드는 연우와 반대로 먼지 하나 묻지 않은 모습으로 씩 웃었다.

“의념이다.”

“의념?”

연우의 눈빛에 그게 무슨 생뚱 맞은 말이냐는 의문이 떠올랐다. 의념은 자신도 잘 알고 있는 분야였다. 20층 고행의 산에서 반 년 넘게 구르면서 터득하고, 초감각이라는 넘버링 스킬까지 얻었었으니까.

하지만 분명 갈리어드가 의념을 부리는 듯한 모습은 볼 수가 없었다.

“너, 여태까지 육체를 성장의 최고 한계까지 내모는 데 집중했다고 했었지?”

“예.”

“확실히 그런 게 좋을지는 모른다. 용체라는 특성을 생각해 본다면, 그 끝은 아주 깊을 테니까. 거기까지 개척하는 것만 해도 사실상 절대 쉬운 일은 아닐 테지.”

연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번에 부딪친 벽이 너무 커서 그렇지, 그전까지 했던 수련들이 절대 쉬웠던 건 아니었다.

육체를 극한까지 쥐어짠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걸레짝처럼 너덜너덜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뒤야.”

“그 뒤라시면……?”

“터득한 힘을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관건이 되지.”

연우는 인정 못 한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잘난 척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전 제 기량이 달린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성장한다는 것은 사실 기량의 발전도 따를 수밖에 없다. 연우는 이미 팔극검의 8대 비기를 전부 개척해서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삼았고, 마법도 가능한 한도까지는 단련 중이었다.

“뭔가 착각하고 있나 보군. 내가 말하는 건 기량과는 또 달라.”

“……?”

“음. 어떻게 설명해야 하려나.”

갈리어드는 턱을 짚으며 한참 동안 생각을 정리하더니 가볍게 손가락을 부딪치면서 말했다.

“상상력. 자네는 상상력이 부족한 거야.”

“……?”

이건 또 무슨 뜬구름을 잡는 소리일까.

갈리어드는 자신이 말하고도 웃겼던지 가볍게 피식 웃으면서 다시 나뭇가지를 들었다.

“천천히 보여 줌세.”

겉보기엔 그냥 가볍게 나뭇가지를 갖고 노는 것처럼 보였다. 그 때, 갈리어드를 따라 주변 공간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연우의 눈이 살짝 커졌다. 너무 순간적으로 벌어진 변화라 갈리어드가 천천히 보여 주려고 마음 먹지 않았다면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의념을…… 전신으로 표출하고 있어.’

연우가 의념을 보지 못했던 이유. 그건 갈리어드가 의념을 방출하지 않고, 내부에서 순환시켰기 때문이었다.

보통 의념은 발출하는 것으로만 생각했다. 의념은 곧 자아 세계를 외부로 확장시키는 것.

멀리는 상대와 주변 환경의 변화를 파악하고, 좁게는 검에 실어서 보다 더 단단하고 날카롭게 만드는 용도로만 여기고 있었다. 전자가 초감각, 후자가 오러였다.

그런데 내면에 가둬서 순환시킨다는 발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밖으로 끄집어내지 않는다면 굳이 사용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어차피 자아 세계는 그냥 놔둬도 내면에 자리했다.

하지만 갈리어드는 이런 생각을 뒤집었다. 자아 세계를 확장시키되, 육체에 고정시키면서 정신과 육체의 동화(同化)를 이끌어 냈다. 의념을 육체의 세밀한 곳까지 밀어 넣은 것이다.

이렇게 해 두면 육체를 완전한 통제하에 두면서, 동시에 상상한 대로 다양한 변화를 끌어낼 수 있다.

쉬, 쉬시시식!

갈리어드는 천천히 앞으로 움직이면서 나뭇가지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가속도가 조금씩 붙다가 어느새 나뭇가지는 공간을 마구잡이로 유린하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갈리어드의 육체도 조금씩 변화를 보였다.

많은 것들이 연우의 눈에 아로 새겨졌다. 근육의 변화, 의념의 형상화, 공간의 굴절, 힘의 이동. 하나하나가 튀어 올랐다가 서로 유기체처럼 연결되며 꿈틀거렸다.

그리고 그 속에는 아주 많은 것들이 있었다.

짧은 순간마다 갈리어드는 여러 가지가 되었다. 폭풍이 되어 강렬해지기도 하고, 번개가 되어 빨라지기도 했다. 바위가 되어 단단해지고, 대나무가 되면서 부드럽게 휘어졌다.

필요한 순간순간마다 서로 다른 것들이 튀어나오면서 힘은 보다 더 큰 탄력을 받았다.

‘변한 건 나뭇가지가 아니었어. 갈리어드, 그 자체였지.’

연우는 그제야 자신의 착각을 깨달았다. 여태 나뭇가지가 어떻게 변화하는지만 주시했었는데. 사실은 갈리어드의 변화를 읽었어야 했던 것이다. 나뭇가지는 그저 변하는 갈리어드를 따라온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의념과 의념의 변화. 여러 개의 의념이 톱니바퀴처럼 서로 맞물리면서 갈리어드가 되었다.

그가 말했던 상상력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스스로 폭풍이 되고, 벼락이 되어라. 그런 뜻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를 둘러싼 공간도 그때마다 의념에 영향을 받으며 이리저리 변했다.

탁!

갈리어드는 나뭇가지를 아래로 내리면서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 간만에 땀을 뺐더니 온몸이 다 쑤시는군.”

으드득, 으득…….

갈리어드는 잔뜩 경직된 근육을 풀어 주면서 연우를 돌아봤다.

“뭔가 보이던가?”

“의념으로 육체를 움직인다는 발상은 해 본 적이 없습니다.”

“보통은 발출하거나, 무기에 담거나 그러니까. 그렇지?”

“예.”

“의념을 무기나 도구로 생각하는 것이지. 하지만 달라.”

갈리어드는 힘을 주면서 말했다.

“의념은 윤활유야.”

연우가 살짝 눈을 크게 떴다.

갈리어드의 설명이 계속 이어졌다.

“의념은 ‘나’라는 존재를 더 강하게 만들어 주는 보조제 역할이란 말이지. 감각을 외부로 확장시키는 보조제. 검을 더 단단하고 날카롭게 만들어 줄 보조제. 육체의 힘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게 할 보조제.”

“아.”

연우는 처음 갈리어드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터득한 힘을 어떻게 활용할 것이냐.

연우는 이미 육체를 극한까지 단련하면서 터득한 힘이 많았다. 그리고 그것을 다룰 수 있는 스킬이나 기예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는 크게 관심을 둬 본 적이 없었다.

같은 힘이라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천지 차이이기 마련. 의념은 이런 힘을 더 잘 통제할 수 있게 하고, 원활하게 만들며, 효과를 증폭시킨다.

“육체를 제대로 다룬다는 것은 힘을 제대로 통제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지.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착각을 해. 자신이 힘을 제대로 제어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하지만 틀렸어.”

갈리어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의념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어야 해. 육체를 검처럼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단 뜻일세. 하지만 자네는 어떤가?”

연우는 잠시 입을 꾹 다물면서 생각했다. 여태껏 자신이 전투에 임할 때 어떤 자세였던가. 힘이었다. 오로지 더 강한 힘만을 바랐다. 육체를 쥐어짠 이유도 힘을 얻기 위해서였다.

힘.

그것은 곧 연우에게 파괴력이었다. 팔극검, 불의 파도, 드래곤 킬러. 전부 파괴력을 증대시키는 데에만 몰두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갈리어드는 힘에만 집중하지 말라고 조언하고 있었다. 힘은 힘일 뿐이다. 그것에 휘둘리지 말고, 휘둘러야 한다. 통제를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게 의념이었다.

연우는 자신이 생각하고 정립하던 세계관이 부서지는 것을 느꼈다. 뭔가가 뻥 뚫리는 느낌이었다.

아주 조금이지만. 벽에 구멍이 났다. 아주 작아서 티도 나지 않았지만, 그 너머에 뭐가 있는지 어렴풋이 보일 정도는 되었다.

‘내가 느끼고 있던 벽은. 사실 한계가 아니라 날 가두고 있던 세계관이었어. 여태 내가 얻었던 것들이 잘못 해석하거나 이해한 결과물일 수도 있다는 걸 왜 생각해 보지 않았던 건지.’

여태껏 답답했던 속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쉽지 않겠다는 생각에 다시 막막함이 밀려왔다.

의념. 말이 쉬워서 의념을 활용하라는 것이지, 어떻게 육체에 적용시킬지는 또 한참 연구를 해 봐야 했다.

그래도 고마운 건 사실. 길을 알았으니 이제 찾기만 하면 된다. 벽에 난 구멍은 당장 작을지라도, 곧 전체를 삼킬 균열로 이어질 수 있었다.

연우는 갈리어드에게 고개를 숙였다.

“정우가 갈리어드에 대해 했던 말이 있습니다.”

갈리어드는 묘한 눈빛을 뗬다. 그리웠던 녀석이니만큼 자신을 어떻게 평가했는지 궁금했다.

“자신의 첫 번째 스승이셨다고 하더군요.”

갈리어드는 겸연쩍은 얼굴이 되어 볼을 긁적였다. 콧잔등이 살짝 붉었다. 그런 말 좀 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었는데. 그래도 끝까지 낯간지러운 말을 하고 다녔던 모양이었다.

“왜 그렇게 말했었는지 이제 알 것 같습니다.”

“쓸데없는 말은 그만하고.”

갈리어드는 못내 부끄러운지 손을 가볍게 휘저으면서 말했다.

“하여간 이제부터 의념 활성화가 중요하긴 한데. 당장 그냥 하라고 하면 뜬구름 잡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겠지?”

“예.”

“그럴 때는 의념보다는 육체를 통제한다는 생각에 집중해. 말했지만 의념은 윤활유일 뿐이니, 방향만 잡히면 어떻게든 저절로 따라오게 되어 있어.”

“육체를 통제한다…….”

연우는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리고 육체를 통제하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은 보신경(步身輕)만 한 게 없을 거야.”

연우의 눈이 크게 빛났다. 보신경. 보법, 신법, 경공의 준말. 보법은 발을 놀리는 법, 신법은 몸을 움직이는 법, 경공은 신체를 가볍게 만드는 법을 뜻했다.

“몸을 놀리는 것. 이것이 결국 모든 무예의 기본이 아니겠나. 그런 뜻에서 몸을 놀리는 방법,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보신경은 육체를 통제하는 데 가장 기본이라 할 수 있어. 그리고. 그런 보신경에 있어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순보.”

연우의 혼잣말에 갈리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연우의 눈이 빛났다.

올포원의 3대 스킬, 축지를 열 수 있는 단초라던 순보의 비밀을 일부 엿본 느낌이었다.

드디어 길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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