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성장 (5)
갈리어드는 하늘을 슬쩍 올려다 봤다. 어느덧 해가 지고, 달이 뜨고 있었다. 그의 두 눈동자 위로 언뜻 노란색 광망이 스쳤다가 사라졌다.
밤은 다크 엘프에게 있어 고향과 같다. 남들은 시리게 느낄지 몰라도, 그들에게는 따뜻하고 포근한 어머니의 품 같았다. 갈리어드도 몸에 부쩍 힘이 실리는 것 같았다.
게다가 오늘따라 유달리 달이 밝아서 뭔가를 보여 주기에도 제 격이었다.
사실 어두워도 그들쯤 되면 밤 낮에 크게 구애를 받지 않을 테지만. 그래도 달님이 연우를 위해 힘을 내어 주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정우가 나더러 첫 번째 스승이라 말했다고 했었지?”
“예.”
“두 번째는 브라함일 테고. 세 번째는?”
연우는 말없이 희미하게 웃었다.
갈리어드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누군지 알겠군. 하긴. 쉽게 입에 담을 수 있는 사람은 아니니.”
갈리어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연우를 돌아봤다.
“사실 말이야. 난 그 말이 참 어려웠어. 무겁기도 했고. 누군가의 스승이라니. 자네로 치면 무왕이 아닌가.”
“정우에게 갈리어드가 그런 존재였던 겁니다.”
“그러니까 그게 어려웠대도. 하지만. 그래도 날 그렇게 생각해 줬다니, 참.”
갈리어드는 추억에 잠긴 얼굴이 되었다. 그 속에서 차정우가 웃고 있었다. 언제나 웃음기와 장난기가 많던 녀석. 그 얼굴이 연우와 겹쳐졌다. 표정도 인상도 다르지만. 뭔가 풍기는 기질은 비슷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그 스승 노릇 한번 동생에 이어서 형에게도 해 보세나. 괜찮겠지?”
“부탁드리겠습니다.”
연우는 고개를 숙였다.
갈리어드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뒷짐을 졌다. 마치 산보라도 나온 것 같이 여유에 찬 태도.
하지만 그를 따라 흐르는 기질은 이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이 달라졌다.
화아악…….
순간, 연우는 여태 갈리어드에 대해 가졌던 생각을 바꿔야 했다. 튜토리얼 이후에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그는 확실하게 달라져 있었다.
육체적 능력이 달라진 게 아니었다. 기도(氣度). 그를 따라 흐르는 마력의 농도가 달랐고, 느껴지는 위압감도 차원이 달랐다. 그동안 심적으로 큰 변화를 겪으면서 몇 단계 이상 경지를 뛰어넘었단 뜻이었다.
아마 가진 실력만 따진다면 하이 랭커와도 비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대체 무엇이 그를 이렇게 변화시킨 걸까.
갈리어드는 깊어진 눈으로 연우에게 말했다.
“자네도 순보를 어느 정도 익혔으니 기초는 알고 있겠지. 그래도 보통 순보에 대해서는 오해하고 있는 것이 많아. 순(舜), 단순히 빠르다고만 생각하지. 하지만.”
팟-
갈리어드는 얕은 잔상을 남기면서 빠르게 질주했다. 거센 바람이 연우의 주변을 한 바퀴 휘감다가 사라졌다. 풀잎이 흔들리고, 낙엽이 떠올랐다.
“빠르기만 한 건 아니야.”
휘리릭!
갈리어드는 연우의 눈앞에 나타났다. 그러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에 실려 두둥실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러다 깃털처럼 너무나 부드럽게 나뭇가지에 올라섰다.
“이처럼 가볍기도 하며.”
갈리어드는 나뭇가지에서 폴짝 뛰어내려 바닥에 착지했다. 쿵! 그러자 거짓말처럼 지반이 깊게 내려앉으면서 크게 들썩였다. 누군가가 바위라도 던진 것 같았다.
“무겁기도 하고.”
츠팟-
거기서 갈리어드가 한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그러자 주변으로 또 다른 갈리어드가 무수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홉 개나 되는 환영이 연우의 주변을 맴돌았다.
“화려하기도 하고.”
이번에는 환영이 하나둘씩 흩어져 사라졌다. 그러다 마지막 하나까지 사라졌을 때. 갈리어드의 기척은 어디에서도 느껴지지 않았다. 무(無). 존재감이 지워진 것이다.
연우는 용마안으로도 잡히지 않는 갈리어드를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조용하기도 하지.”
하늘을 따라 갈리어드의 목소리만 쩌렁쩌렁하게 울릴 뿐. 그러다 갑자기 수십 개의 천둥이 동시에 내리치는 것처럼 찢어지는 굉음이 연우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연우는 흠칫 놀라 뒤로 크게 물러났다.
콰앙!
그 자리로 갈리어드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돌아와 서서 씩 웃었다.
“시끄럽기도 하고. 순보란, 참 다양한 얼굴을 가진 친구라네.”
연우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여태 자신이 순보를 잘못 부리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동안 연우는 속도에만 치중했다. 파괴력과 가속도. 이 두 가지가 그에게 절대 명제였고, 그동안 그 이점을 톡톡하게 봤다.
하지만 더 위로 올라가기 위해 속도를 조절하기로 마음먹은 지금. 여태껏 그게 얼마나 단편적인 사고였는지를 알 수 있었다.
갈리어드가 펼치는 순보는 그냥 갈리어드 그 자체였다.
빠르고, 가볍고, 무겁고, 화려하고, 조용하다, 시끄럽기도 한. 그런 갈리어드. 곳곳에 의념이 배어 나왔다.
“그리고 앞으로 자네는 그런 친구와 대면하게 될 거야. 변화무쌍한 친구이니 사귀는 데 조금 어려움을 겪더라도 이해하고 잘 보듬어 주게.”
연우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 친구를 만나기 전에 준비부터 해야겠지. 우선. 시작하기에 앞서 묻지. 자넨 몸을 놀리는 것에 가장 중요한 부위가 어디라 생각하는가?”
“하체가 아닙니까?”
“맞아. 하체는 신체의 가장 중심이지.”
갈리어드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체가 튼튼해야 몸이 건강하다. 그리고 하체가 단단해야 힘을 낼 수 있는 법이었다. 하체는 무예와 무공, 가릴 것 없이 모든 무술에 있어 기본 중 기본이었다.
“그럼 일단 하체부터 제대로 다스려야겠지?”
갈리어드가 씩 웃었다. 그런데 연우는 왠지 모르게 그 웃음이 장난기가 가득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우선 오리걸음으로 마을 천 바퀴부터.”
“……!”
* * *
그날부터 연우의 무지막지한 수련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수련 내용들이 하나같이 우스꽝스러운 것투성이였다.
오리걸음, 뜀뛰기, 마보, 휴식 없는 달리기…….
하나같이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 알 수 없는 것들이었다. 단순히 하체를 단련하려는 건가 싶어도, 이런 운동은 유아기 때 졸업하는 외뿔부족으로서는 도저히 저 훈련의 목표가 무엇인지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카인이 또 다른 거 시작했다며?”
“어. 무슨 이상한 점프라던데. 근데 꼭 개구리 같다더라. 키킥.”
“대체 뭘 하는 거지?”
“글쎄. 뱀 사냥꾼이 시키는 거면 분명히 뭔가 이유가 있을 텐데. 뭘까?”
“뭔지는 모르지만 죽어 나가겠던데?”
부족원들은 연우가 하는 훈련들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서로 추측하기 시작했다.
깔보거나 무시하는 태도는 없었다. 아니, 오히려 두 눈에 불을 켜고 연우의 훈련을 지켜보는 이들이 더 많았다.
매번 오리걸음으로 지쳐서 나가 떨어지는 연우가 웃겨서 낄낄거리기는 해도, 훈련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갈리어드는 부족에도 제법 이름이 알려진 튜토리얼의 명물이었고, 그의 실력 역시 모두가 인정하는 바였다. 아니, 오히려 관심이 많다는 표현이 옳았다.
다크 엘프는 탑에서도 보기 드문 종족이다. 하물며 ‘사냥꾼’의 호칭을 가진 자는 더 찾기 어려웠다. 외뿔부족으로 치면 전사 급에 해당하는 실력자였으니까.
당연히 그런 자의 가르침이라면 사냥꾼의 훈련 방식이 섞여 있을 터.
무술과 관련된 것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외뿔부족이 침을 질질 흘리고 노릴 만했다. 문제라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전혀 이해를 할 수 없다는 점이었지만.
그리고 그건 판트와 에도라도 마찬가지였다.
“……저건 대체 뭘까?”
에도라는 멍한 표정으로 연우를 바라봤다. 간만에 집중해서 양도를 수련하고 있던 중에 연우가 어떻게 지내고 있나 싶어 궁금해서 찾아왔더니.
연우는 정말 부족원의 말대로 개구리처럼 여기저기를 폴짝폴짝 뛰어다니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갈리어드가 아무렇게나 던진 돌멩이를 연우가 달려가서 잡는 방식이었다.
문제는 돌을 아무 방향으로 이리저리 던지다 보니 연우도 거기에 따라 정신없이 움직인다는 점이었다.
하늘 위로 폴짝 뛰어올랐다 싶으면, 다음에는 땅에 곤두박질치기도 하고, 그러다 다시 근처 연못에 빠지기도 하는 등. 덕분에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그러면서 돌을 잡고 나면 좋아하고, 실패한 뒤에는 살짝 어깨가 처져 시무룩해진 모습이.
‘……귀여워.’
콩깍지가 잔뜩 낀 에도라의 눈에는 강아지처럼 보였다.
반면에.
판트는 살짝 굳은 표정으로 연우를 관찰했다. 두 눈이 깊게 가라앉고 있었다. 꽉 쥔 주먹 위로 핏줄이 잔뜩 섰다.
* * *
‘머리 위!’
팟-
연우는 손에 쥐고 있던 돌을 바닥에 던지고, 각력에 힘을 주며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너무 거리가 먼 반대편이었지만, 최대한 몸을 가볍게 하면서 허공에서 방향을 꺾어 가까스로 날아오던 돌을 낚아챘다.
거의 곡예의 수준에 가까운 동작. 거기다 돌을 낚아챌 때에도 조심스러웠다. 겉보기엔 돌처럼 보였지만, 사실 그것은 진흙을 뭉쳐서 만든 진흙 덩어리였다.
원래대로라면 속도에 의한 반발력 때문에 진흙 덩어리가 뭉개졌을 테지만. 이곳으로 날아들 때만 해도 쏜살처럼 매서웠던 연우는 허공에서 몸을 트는 도중에 봄바람처럼 기질이 확 바뀌어 있었다.
의념이었다. 아직 많은 부분이 어설펐지만, 동작을 구현할 때마 다 어렴풋이 의념이 배어 나왔다.
사실 의념을 부여하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의념에 있어 가장 중요한 건 집중. 하지만 이미 연우는 오러를 만들어 낼 만큼 집중력이 높았기에, 순보에 적용시키는 것도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절대 쉬운 건 아니었다.
검에다 의념을 집중시키는 건 그래도 비교적 쉬운 편에 속했다. 검이란 물질은 단단하다. 단단한 형체가 있으면 의념을 고정할 수 있기에, 그것을 투영시키는 것도 비교적 수월했다. 아무리 매섭게 휘둘러도 검은 형체가 흐트러질 일이 없으니, 유지도 쉬웠다.
반면에 육체는 달랐다.
의념을 투영시킨다고 해도, 육체는 검과 달리 수시로 변했다.
꿈틀대는 근육, 관절과 골격의 움직임, 혈관 내에 흐르는 피, 맥박 치는 세포, 저마다 움직이는 장기…… 인체는 너무 많은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있어서 절대 한 가지 형태로 딱 고정되어 있지가 않았다. 의념을 부여해도, 삽시간에 잘게 부스러지기 쉬웠던 것이다.
거기다 순보는 그런 변화를 더 많이 내포하고 있었으니. 발걸음 하나하나에, 근육의 동작 하나하나에, 주먹을 내지르는 동작 하나하나에 의념을 담기란 불가능했다.
대체 갈리어드는 어떤 방식을 썼는지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그래서 그 방식에 대해서 물었지만, 갈리어드는 난감하게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의념을 넘어선 집념. 그거면 될 거다.
집념.
의념뿐 아니라, 모든 의식을 육체에다 집중하란 뜻인 것이다. 물론, 말이 그렇다뿐이지, 도저히 쉽게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갈리어드는 연우를 혹독하게 굴렸다.
이리저리 정신없이 움직이다 보면, 어긋났던 정신과 육체가 딱 일치하는 순간이 온다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그렇게 갈리어드의 의도대로 계속 구르던 중, 연우는 아주 짧지만 의식 속으로 육체의 특정한 부위가 확 끌려온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인식이 되었다. 육체의 변화가. 무의식중에. 자기도 모르게. 관조(觀照)가 이뤄졌던 것이다.
그 순간, 연우는 자기도 모르게 기함을 터뜨렸다.
관조. 왜 이것을 진즉에 생각지 못했을까.
무공에 있어 관조는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내적인 변화를 수시로 체크해서 변화를 확인하고, 내공의 운행을 보다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것이 계속 이어지다 보면 자연스레 명상이나 참오로 넘어가 정신적 발전을 함께 이루는 것이다.
즉, 육체와 정신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이란 것인데. 중요한 것은 갈리어드가 가르쳐 준 ‘의념으로 육체를 통제한다’는 개념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연우에게는 이것이 다른 무엇보다 훨씬 쉬웠다.
[초감각]
의념을 밖으로 투영시켜서 외부 세계의 변화를 읽어 내던 방식을, 방향을 바꿔 내부 세계로 돌리면 그게 곧 관조였다.
연우는 이런 방식으로 20층에서 자아를 확립시킬 수 있었고, 나아가서는 무의식 세계에서 마성과도 조우할 수 있었다.
초감각의 내재화(內在化).
전체적인 틀에서 육체를 관찰하면서 필요에 따라 의념을 불어 넣는다. 감각을 더 세밀하게 파고 들어가 통제를 시도하기 시작했다.
[의념의 새로운 사용법을 터득했습니다.]
[의념은 영력이 흐르는 통로입니다. 더 많은 연습을 통해 다양한 응용 방법을 터득하세요. 의념이 강화될수록 영격(靈格)이 자유로워집니다.]
[‘초감각’의 스킬 숙련도가 대폭 상승했습니다. 40.5%]
[의념의 영향이 육체에 강한 영향을 미칩니다. 육체에 대한 이해도가 대폭 상승했습니다.]
[의념과 육체의 일체화에 대한 개념을 깨달았습니다.]
[‘순보’의 스킬 숙련도가 대폭 상승했습니다. 82.9%]
해결책을 마련한 뒤부터는 모든 수련이 일사천리로 이뤄졌다.
방법을 알았다고 해도 완전한 체득화에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테지만.
연습은 오히려 연우에게 가장 쉬운 것 중 하나였다. 한계까지 혹독하게 자신을 몰아붙이는 것. 그것이야말로 아프리카 때부터 지금까지, 연우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결이었으니까.
게다가.
[시차 괴리]
한없이 느려진 의식 세계 속에서.
연우는 일일이 육체와 초감각을 동일화시키면서 의념을 조금씩 부여해 빠른 습득을 이뤄 나가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무한한 연습이 가능했다.
탁!
연우는 가볍게 지면에 착지했다. 손에는 살짝 뭉개졌지만, 형체는 그대로 남은 진흙 덩어리가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