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성장 (6)
‘아직 멀었어.’
연우는 손자국이 남은 진흙 덩어리를 보면서 작게 중얼거렸다. 이번에는 모양을 온전히 남기려 했었는데. 형태는 남았다지만, 그래도 아직 좀처럼 성에 차질 않았다.
의념을 더 잘 이용해서 힘을 통제할 수 있었다면. 관성도 더 부드럽게 다스릴 수 있었을 텐데.
‘그래도…… 이제는 의념이 무의식적으로 따라오기 시작했어.’
연우는 아쉬워하면서도 내심 뿌듯한 마음에 자기도 모르게 가볍게 웃음을 실실 흘렸다.
여태껏 하체를 혹사시키기만 하다가 간만에 이리저리 움직이니, 육체가 확연하게 달라진 것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땅에서 허공으로 몸을 띄워, 허공에서 뒤틀 때. 의념이 자연스럽게 따라 붙으면서 순식간에 많은 변화를 일으켰었다.
육체가 탄력적으로 변했다는 증거였다.
그동안 연우는 꾸준한 단련만 고수해 왔기 때문에 근육이 바위처럼 딱딱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근육이 고무처럼 탄력적으로 변했다. 현자의 돌과 마력회로는 더 활력 찬 마력을 제공했다.
내재화시킨 초감각도 보다 선명해졌으니. 덕분에 연우는 손끝 하나하나, 근육 하나하나, 세포 하나하나가 꿈틀거리고, 맥박 치고, 서로 부딪쳐 작용하는 것을 확실 하게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연우는 수련을 더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의념의 내재화는 이뤘어도, 아직까지 동일화 수준은 아니었으니까. 오러를 다루듯이, 육체도 완벽하게 의념으로 통제를 할 수 있어야만 했다.
“이제 슬슬 기본기는 다 익힌 것 같군.”
그때, 연우 앞으로 갈리어드가 만족스런 미소를 띠면서 착지했다.
연우는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기본기. 분명 시스템은 스킬 숙련도가 80퍼센트가 넘었다고 말해 줬는데. 갈리어드는 이제야 막 걸음마를 뗐다고 말하고 있었다. 아직도 배울 게 많다는 뜻이었다.
“걷는 법을 어느 정도 알았으면, 이제 뛰는 법을 배워 보지.”
연우는 순간 엘로힘들이 23층을 공격했을 때, 갈리어드가 펼쳤던 기예들이 떠올랐다. 이형환위, 궁신탄영, 금리도천파, 어기충소, 일위도강. 순보의 응용기들.
그것들을 펼쳐 낼 때마다 적들은 도저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갈리어드는 표홀했고, 귀신같았다.
도저히 방향을 종잡을 수가 없어서 그를 도와주려 했던 연우도 깊게 관여하지 못할 정도였다.
아마 당시의 모습이 의념을 극대화했을 때일 것이다.
연우는 눈을 빛냈다. 의념의 활용법은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런 것들이 ‘걷는 법’이라면. ‘나는 법’은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그래서 기대를 품고 물었고.
“그야 간단하지. 응용기는 기본기를 얼마나 잘 다루느냐에 달린 것 아닌가?”
“……?”
갈리어드가 입꼬리를 씩 말아 올렸다.
“이럴 때는 실전이 제일이지.”
그 말이 끝난 순간.
파앙!
갈리어드가 뒷짐을 풀면서 손에 쥐고 있던 나뭇가지를 깊게 찔렀다. 얼마나 많은 의념을 담았던 건지, 공기가 압축되었다가 터지는 소리가 날 정도였다.
연우는 본능적으로 상체를 뒤로 뺐다. 아슬아슬하게 나뭇가지가 관자놀이를 스쳐 지나가고, 연우는 몸을 뒤틀면서 허리춤에서 마장대검을 뽑아 그대로 대각선으로 그어 올렸다.
쾅!
나뭇가지와 마장대검이 부딪치면서 폭발 소리가 났다.
두 개의 그림자가 물러났다가 다시 허공에서 격돌했다.
쿵!
* * *
판트는 생각했다.
-너희들이 내 날개가 되어 줬으면 한다.
그 말을 들었을 때는 기뻤고.
-강해져라.
이 말을 들었을 때에는 가슴이 꾹 눌리는가 싶더니.
-강해져. 아무리 눌러도 눌리지 않고, 아무리 부딪쳐도 절대 깨지지 않을 정도로.
결국 마지막 말을 들었을 때는 욕지거리를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연우에 대한 욕이 아니었다. 스스로에 대한 욕이었다.
강해지란 말을 들었을 때. 판트는 날개가 아닌 이빨이 되어 주겠다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마구 물어뜯어 줄 테니 제대로 해야 할 거라면서 으름장을 놓았다.
하지만 그건 속내를 보여 주지 않으려고 내뱉은 말이었을 뿐. 사실 그동안 판트는 머릿속이 너무 복잡한 상태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연우와의 격차가 자꾸 벌어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기에, 완전히 뒤처지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이 들었었다.
그래서 그 뒤로 계속 무공을 단련해 봤지만. 아직 이렇다 할 진척을 이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이 너무 뒤처진다는 생각에서 쉽게 벗어날 수가 없었다. 자신은 약해도 너무 약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왜 이렇게 집중이 되질 않는지, 무엇이 자신을 이렇게 괴롭히는 건지, 끊임없이 의문이 들었다.
그러다 연우가 이리저리 구르는 것을 봤을 때. 판트는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여태 자신을 괴롭혀 온 감정이 무엇인지 단번에 깨닫고 만 것이다.
‘열등감.’
판트에게 있어 연우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처음에는 라이벌로 여겼다가, 호기심에 그를 따라다니기 시작했고, 같이 지내면서 서서히 그의 인간적인 모습에 감화되어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자꾸 격차가 벌어진다는 사실에, 연우가 가진 재능을 질투하면서도, 자칫 나태해질 수 있는 자신을 채찍질하는 원동력으로 삼았다.
하지만 그때는 언젠가 따라잡을 수 있을 거라고만 여겼지, 다른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왜 난 저 근처에도 가질 못하는 걸까.’
연우에게 동경심을 갖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열등감도 같이 품고 있었다.
저 사람은 되는데 왜 난 되지 않을까. 나도 그만큼 노력하는데. 왜. 어째서?
판트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이 꼭 우두머리를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또래 친구들과의 전쟁놀이에서도 대장을 맡아야 했고, 단체 훈련이 있으면 성적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좋아야만 했다.
누군가가 자신의 앞에 있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왕좌. 어렸을 때부터 판트가 원하던 건 딱 하나밖에 없었기에, 왕이 되기 위해서 절대 뒤처져서는 안 된다는 강박 관념에 갇혀 살았다.
타인이 자신을 우러러보는 것을 즐기기만 했지, 자신이 타인을 그런 시선으로 보는 것은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생각해 볼 수도 없었다. 주변에서 오만하다고 해도 코웃음만 칠뿐이었다.
그러다 연우를 만났다.
그와의 조우에서. 판트는 여태껏 자신을 둘러싼 세계관이 모두 박살 나는 것을 느꼈다.
여태껏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던 건 착각이었을 뿐이었다. 자신보다 앞서 있는 사람은 숱하게 많았다.
그래도 어떻게든 악착같이 따라 잡으려 노력했고, 그러다 보니 어느새 연우를 우러러보게 되었다. 어렸을 때의 그라면 절대 생각도 할 수 없었을 포지션에 놓인 것이다.
하지만 연우는 잡히기는커녕 계속 멀어져만 갔다.
그리고 그럴수록, 판트는 언제부턴가 ‘납득’을 하기 시작했다. ‘에휴, 또 저러네.’라고 한숨을 내쉬면서, 언제부턴가 격차가 벌어지는 것을 내심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느덧 체념을 한 것이다.
분명히.
거기서부터 잘못된 것 같다.
여전히 연우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어려운 길을 묵묵히 걷는 그가 대단하고, 존경스럽다는 생각은 그대로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뛰어넘지 못할 거라 지레 포기하고 체념해야 할 대상은 아니었다.
‘이건 아냐.’
판트의 마음 한편에서 뭔가가 대가리를 치켜들었다. 그건 승부욕이었다. 경쟁심이었다. 언제부턴가 납득과 체념을 하면서 사라져 버렸던, 그런 감정들.
‘따라잡는다고? 아니. 좇는 것으로는 안 돼.’
판트는 이를 악물었다. 열등감을 눌렀다. 대신에 승부욕을 활활 불태웠다.
연우를, 꺾고 싶었다.
“오빠. 난 층계를 오르겠어.”
그때, 에도라가 묵묵히 연우를 지켜보고 있다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판트는 상념에서 천천히 깨어나면서 여동생을 돌아봤다.
에도라는 연우를 보고 무슨 생각을 가진 걸까. 자신처럼, 그녀의 속마음에서도 어떤 변화가 있었던 게 분명했다.
혜안이 열린 두 눈동자가 너무 깊었다. 아주 잠깐이지만, 어머니 영매를 만난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분명한 건. 자신과 비슷한 마음은 아니리라는 것.
판트가 연우에 대해 가진 마음이 열등감에서 비롯된 경쟁심과 승부욕이라면, 에도라는 연심에서 비롯되었을 테니까.
하지만 판트는 에도라의 생각을 묻지 않았다.
자신이 품은 마음은 자신만이 갖고 있듯이, 그녀가 품은 마음은 그녀만 간직하면 된다.
자신이 해 줄 일은 가족으로서 묵묵히 응원해 주는 것. 그래서 그는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에도라는 ‘고맙다’고 말하면서 뒤로 돌아섰다.
우웅, 웅-
에도라의 품에 안겨 있던 신마도가 길게 울음을 토했다. 금방이라도 꿈틀거릴 것처럼. 뜨거운 열풍이 여기까지 전해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에도라가 훌쩍 떠나고 난 후.
판트는 몇 시간을 더 가만히 서서 연우와 갈리어드를 지켜보다가, 휙 하고 몸을 반대로 돌려 어디론가 움직였다.
* * *
대장로는 안경을 고쳐 쓰면서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뭐?”
“혈뢰, 주십쇼.”
마치 전당포에 맡겨 놓은 물건을 찾으러 온 것처럼 당당한 태도.
대장로는 판트를 빤히 쳐다보다가 보고 있던 책을 탁상 위에 덮어 놓았다. 간만에 무왕이 해괴한 짓을 저지르지 않아서 마음 편하게 쉴 수 있는가 싶었더니. 누가 그 핏줄 아니랄까 봐. 별 쓸데없는 소리를 해 댄다.
마음 같아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낯짝을 쏙 빼닮은 저 굵은 머리통을 후려치고 싶지만. 그래도 충동을 꾹 누르면서 눈에 잔뜩 힘을 주고 물었다.
“너, 혈뢰가 뭔지는 알고나 하는 소리냐?”
“압니다.”
판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혈뢰. 핏빛 현자의 상징. 청람가의 비기, 뇌정권에서 비롯된 무형강기. 연우에 대한 호승심에서 격발된 감정은 더 강한 힘에 대한 갈망으로 치달았다. 그리고 수많은 고민 끝에 판트가 내린 결론이 바로 이것이었다.
하지만 대장로는 가당치도 않다는 듯이 콧방귀를 꼈다.
“아니. 모른다.”
“아뇨. 압니다.”
“아니. 모른다.”
판트는 다시 무슨 말을 하려 했지만, 이내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대장로의 한쪽 입꼬리가 말려 올라가 있었다. 명백한 비웃음. 조롱에 가까운 미소였다.
“솔직히 말해 줄까?”
판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넌 약하다.”
“……!”
판트의 눈이 부릅떠졌다. 몸이 빳빳해졌다. 주먹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거기다 대고 대장로는 조롱을 던졌다.
“반발할 생각 마라. 솔직히 맞는 말이지 않느냐? 너희 형제들? 맞다. 대개 너보단 약하지. 하지만 너보다 강한 사람도 많지. 솔직히 말해, 네가 차기 왕 후보군에서 수위권인 것은 네 어머니와 동생의 위치가 크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될 거다.”
“…….”
“청람가의 남매니 뭐니 하면서 띄워 줬어도. 세상에는 괴물들이 많아. 마을만 봐도 너보다 뛰어난 전사들은 숱하고, 탑에 나가면 모래알처럼 많지.”
판트는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대장로는 힐난을 그치지 않았다.
“그리고 하나 더. 넌 똑똑하지도 못해.”
“…….”
벌겋게 변했던 판트의 눈이 이 번엔 파르르 떨렸다. 우직하고, 저돌적이다. 평소 그가 받던 평가였다.
하지만 그건 좋게 평가했을 때일 뿐. 나쁘게 말하면 이렇다. 생각이 짧고, 멍청하다.
“반면에 나는 어떤 것 같으냐?”
대장로는 자신을 가리켰다. 판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평소 묵묵히 집무실에서 일만 하기로 유명한 대장로이지만. 사실 그만큼 오만한 사람은 없었다. 무왕도 한 수 접어야 할 정도로. 그리고. 대장로는 그래도 되는 사람이었다.
“강하지. 똑똑하고. 지금은 비록 죽고 없지만, 그래도 한때 탑을 위협했던 마군의 검은 새벽도 나에겐 별다른 소리를 하지 않을 정도였다. 지금의 무고서, 그걸 정리한 건 누굴까? 오늘날 일족을 부흥시킨다는 네 아버지를 키운 사람은 또 누굴까?”
분명히 아무런 기세도 흘리지 않고 있건만.
판트는 보이지 않는 공기가 양 어깨를 짓누르고, 아니, 짓밟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손으로 폐부를 쥐어짜는 느낌이었다. 숨을 쉬기가 버거웠다. 심장이 방망이질을 치면서 등골을 따라 오싹한 오한이 들고, 옷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다.
핏빛 현자. 무왕에 가려졌어도, 그는 여전히 일족의 기둥이었다. 그리고 세간에도 여전히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엘로힘의 세 집정관과 맞수를 이뤘던 왈츠 마저도 그에게는 몇 수를 접어야 하지 않았던가.
판트는 이를 악물며, 씹어 삼키듯이 말했다.
“……대장로 님이십니다.”
“그렇다.”
대장로는 오만하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 혈뢰는 그런 나를 상징하는 것이다. 내가 평생을 두고 싸우고, 구르고, 생각하고, 터득하고, 때로는 굴욕적이게 머리를 조아리고, 패배를 겪으면서도 계속 덤비고, 도전하고, 참오하고, 또 참오하면서 겨우 얻어 낸 과실이다. 혈뢰가 곧 나다.”
대장로가 인상을 찡그리기 시작했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이 분노를 드러냈다.
“한데. 뭐?”
맹수의 분노는 공기마저 떨리게 만든다. 판트는 떨리는 것이 공기인지, 아니면 자신인지 알 수 없었다.
“너처럼 강하지도 똑똑하지도 못한 녀석이 내 것을 탐한다고? 돌아가라.”
일갈만 내지르지 않았을 뿐. 명백한 축객령이었다. 너는 자격이 되질 않으니 보물을 탐할 수 없다는 면박이기도 했다.
판트의 어깨가 부르르 떨렸다. 그는 절벽에서 떨어져 한없이 아래로 추락하는 느낌을 받았다. 연우를 만났을 때처럼. 다시 한 번 더 자신을 이루고 있던 모든 세계관과 가치관이 산산이 부서지고 있었다.
마지막 남아 있던 자긍심마저 부서졌다.
빨갛게 달아오른 눈으로 대장로를 노려봤다. 원래의 그였다면 집어치우라며 분탕이라도 치던가, 씩씩대면서 제 발로 박차고 나갔을 테지만.
“……기회를, 주십시오.”
판트는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