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성장 (8)
무왕이 팔극권을 극한까지 쥐어짜 완성시켰던 힘, 팔괘. 그리고 그 너머에 있는 무극. 그때의 기질을 연상하면서 검강 속에 그대로 체현해 보고자 했다.
마장대검이 뿜어내는 사념 속에 의념을 한껏 담아서. 머릿속에 그려 두었던 공상을 그대로 옮겨 담았다.
그리고.
팟!
오러가 강렬하고 시린 빛을 토해 내는가 싶더니.
파스스-
화려했던 외관과 다르게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빛을 끝으로 오러가 잘게 부서지기 시작했다. 마치 파도에 허물어지는 모래성처럼. 고운 입자가 되어 흩어졌다.
연우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조용해진 마장대검을 내려다보면서 작게 중얼거렸다.
“역시 안 되는구나.”
무왕이 했던 말이 있었다.
-네 길이 아니라서 그런다.
그때는 그게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방식이 잘못된 건가 싶어서 다른 방법을 찾고자 했고, 갈리어드의 도움을 받아 순보를 단련해서 바람길을 열었다.
하지만 의념을 깊게 다룰수록. 육체를 완전하게 통제할 수 있게 되면서. 연우는 아주 조금씩 무왕이 했던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팔괘와 무극은 내 길이 아니었던 거야.’
팔괘와 무극은 의념을 기반으로 한 의념기(意念技)였다. 무왕의 생각, 사고, 심득이 어우러지면서 만들어진 그만의 기예. 무왕이 살아왔던 경험을 바탕으로, 팔극권을 해석하면서 끌어올린 새로운 무공이란 뜻이었다.
그런데 무왕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던 연우가 팔괘와 무극을 모방한다?
불가능할 수밖에 없었다.
판트가 대장로의 혈뢰를 좇는 것과는 달랐다. 두 사람이 익힌 무공은 대개 상이했고, 판트는 혈뢰를 배우기 위해서 자신이 단련한 모든 것을 버릴 각오까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연우는 달랐다.
그는 그동안 쌓은 것들이 너무 많았다. 그것을 버리면서까지 팔괘와 무극을 좇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리고 무왕도 절대 그것을 언급하지 않았다. 애당초 연우가 그렇게 마음을 먹었어도 거절했을 게 틀림없었다.
‘검에 대한 나의 재능은 여기까지니까.’
그리고 육체를 완벽하게 파악하게 되면서. 연우는 자신이 지닌 재능의 깊이도 냉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연우가 늘 자각하고 있듯, 그의 재능은 절대 뛰어난 편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여기까지 빠른 성장이 가능했던 것은 각종 편법을 사용해 마룡체를 이루면서 육체의 잠재 능력을 한껏 끌어올렸고, 부족한 부분은 시차 괴리를 이용해서 한껏 느려진 의식 세계에서 수십 배로 더 많은 노력을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이제 진짜 한계에 부딪쳤다.
3차 각성이 이룰 수 있는 최대의 한계를 달성했니 마니 하는 그런 한계가 아니었다. 정말 연우가 가진 정신적 재능으로 이룰 수 있는 선은 여기까지였다.
아마 이 이상 검을 부단히 휘둘러 대도 더 이상 아무 발전도 없을 것이다.
그를 마주한 건 벽이 아니었다. 길이 없는 낭떠러지였다.
네 길이 아니라는 말은. 검이 네 길이 아니라는 말이기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연우는 또한 그 말이 무왕의 힌트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아챘다.
‘굳이 검에만 몰두해서는 안 된다는 말뜻이셨어. 앞으로 성장하려면…… 지금처럼 중구난방으로 이것저것을 익히는 게 아니라, 내가 가진 모든 것들과 함께 엮어서 하나로 통합할 필요가 있어.’
눈앞에 낭떠러지가 있다면 날개를 달아야만 한다.
그렇다면 그 날개란 무엇일까.
이건 답하기 쉽다.
의념기.
무왕이 팔괘와 무극을 만들어 냈듯이. 연우도 그와 비슷한 자신만의 무도(武道)를 개척하면 된다.
‘하지만…… 대체 또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도무지 짐작이 가질 않는데.’
차라리 판트처럼 면벽동에 들어가서, 답을 볼 때까지 72선술과 미후왕의 유산, 음검과 태극혜 반고검을 탐구해 볼까 하는 마음도 들었다.
그런다면 정말 새로운 길이 보일지도 몰랐으니.
어쩌면 그 와중에 여태 이룬 마법 체계도 재정립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짧게 고민해 봤지만.
‘아니. 그건 천천히 해답을 강구해 보자.’
연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면벽동에 들어가는 것은 정말 최후의 수단이다. 아직 아무런 힌트도 얻지 못했는데 무작정 들어가서는 괜히 쓸데없이 시간만 허비할 뿐이었다.
그리고 검이 한계에 부딪쳤다고 해서, 육체가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한다고 해서, 모든 방법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당장은 막막해 보여도 어디에나 길이 있는 법이었으니까. 그리고 당장 해야 할 일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불의 파도. 일단 그것부터 완성해야겠어.’
의념을 다루는 법을 완벽히 터득했으니, 이제 불의 파도를 완성시키는 것도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여태껏 조절에 실패할 때마다 시전자도 곤혹스럽게 만들었던 스킬이니만큼 빨리 제대로 통제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연우가 바라는 불의 파도의 최종형도 있었다.
‘그런 무지막지한 힘이 오러 속에 담긴다면. 꽤 볼만하겠지.’
단언컨대, 연우는 자신이 곧 지니게 될 오러를 상대할 수 있을 자가 그리 많지 않을 거라고 자부할 수 있었다.
여름여왕에게 선보이고 난 뒤. 무왕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으니까. 파괴력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시험해 보고 싶었지만.
오늘은 여기서 끝내고, 쉬어야 할 것 같았다. 너무 육체를 이리 저리 굴린 데다 뇌도 혹사시켰다보니 전신이 비명을 질러 댔다.
털썩-
결국 연우는 바닥에 주저앉아 한숨을 돌렸다.
갈리어드가 그것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역시 좀처럼 쉽지는 않나 보군.”
“예. 스승님의 길은 제 길이 아니란 뜻이겠죠. 흉내 내는 것만으로도 힘이 쭉 빨리는 것 같습니다.”
“너무 조급하게 생각지는 말게. 지금까지도 사실 충분히 빠른 성장이야. 오히려 너무 빠르면 가다듬을 시간이 없어 어디서부턴가 무너지기 십상이지.”
연우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제는 슬슬 손님도 맞아야 하지 않겠나? 무작정 계속 기다리라고 하는 것도 예의는 아니야.”
갈리어드의 말에 연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며칠 전부터 마을에 그를 찾아온 손님이 있다는 전갈을 받은 상태였다.
다만, 의념에 대해 뭔가 갈피가 잡힐 듯 말 듯해서 잠시 기다려 달라는 전언을 남겼었는데. 이제 갈피를 확실하게 잡았으니 만나러 가 봐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전에 우선 씻어야겠지. 연우는 며칠째 씻지 않아 몸에서 나는 퀴퀴한 악취를 맡고 한숨을 내쉬었다.
* * *
“오, 이건 좀 신기한데?”
“처음 보는 물건이군. 확실히 마법사 놈들, 참 머리통 하나는 비상하단 말이야. 이런 걸 어떻게 생각해 내는 거지?”
“골방 샌님들 머릿속을 어떻게 알아? 낄낄낄. 야, 이건 어떠냐? 나한테 어울리지?”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구만.”
“뭐, 이 새까?”
외뿔부족의 마을 공터는 오늘따라 유달리 떠들썩했다. 가판대를 둘러싸고 몰려든 이들 탓이었다.
간만에 마을을 찾은 외부 상인이 가져온 물건들 때문에 신이 난 것이다. 하나같이 눈을 반짝반짝 빛내면서 이것을 가지느니 저것을 가지느니 서로 입씨름을 하기도 했다.
보통 상인이라면 횡재했다면서 입이 쭉 찢어질 법도 하건만. 도리어 아트란은 속이 조마조마했다. 이대로는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었다.
“이야. 이 물건은 어떻게 작동시키는 거지? 너무 사용법이 복잡해. 이런 걸 어따 써?”
“멍청아! 누가 그런 걸 그렇게 쓰냐?”
“그럼?”
“대가리를 때려. 자고로 복잡한 기계는 때리면 알아서 말을 잘 듣는 법이라고.”
“오. 그렇군!”
퍽, 퍽!
‘이 뇌에 우동사리만 가득한 것들 같으니라고! 그걸 그렇게 건드리면 어떡해!’
아트란의 얼굴은 시시각각 다른 색으로 변했다. 외뿔부족의 전사들이 마법이 내장된 비싼 아티팩트를 만질 때마다 그는 미칠 지경이었다. 워낙에 함부로 다뤄 대니 저대로 부서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렇다고 함부로 제지하기도 어려웠다.
아트란의 눈에는 레드 드래곤을 상대로 주눅 들기는커녕 압도하던 전사들의 모습이 아직도 선명했다.
아티팩트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모르겠다며 멍청한 얼굴을 하고 있는 놈. 저놈은 81개의 눈의 머리통을 한 손에 하나씩 쥐고 터뜨려서 주변을 피바다로 만들던 놈이었다. 피를 흠뻑 뒤집어쓰고 하늘을 보며 웃어 대던 모습은 아직도 악몽을 꾸게 만들었다.
옆에서 대가리를 두들겨 보라는 놈은 칼 한 자루를 들고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어떤 용생구자의 한쪽 다리를 잘라 내고, 입에다 물면서 고기가 참 맛있다면서 질겅질겅 씹어 대던 미친놈이었고.
뒤에서 조용히 물건을 만지는 여자 전사는 겉보기엔 비교적 멀쩡해 보이지만, 사실 여기서 제일 미쳤었다.
수십 명도 넘는 레드 드래곤의 플레이어들의 시체를 산처럼 쌓아 두고, 그 위에 올라서서 ‘내가 제일 높이 탑을 쌓았다!’고 외쳐 대던. 그런 정신 나간 년이었다.
그때부터 외뿔부족의 전사들이 자극을 받아 너도나도 탑 쌓기 놀이(?)를 한답시고 시체들을 마구 양산시키던 건, 딱히 비밀도 아니었다.
그 외에도 누가 더 많이 머리통을 부술지 내기를 하질 않나, 기술 한 방으로 가장 멀리 적을 날려 버리기 시합을 하질 않나, 하나같이 정상인의 사고로는 도저히 이해도 상상도 할 수 없는 짓들을 숱하게 벌이던 자들이었다.
특히. 산만큼 크던 여름여왕을 두들겨 패던 무왕이 저 안쪽에서 이를 씩 드러내면서 웃어 보일 때면.
아트란은 자기도 모르게 몸이 움찔움찔 떨릴 정도였다.
“어? 부서졌다?”
“야! 폭발하잖아!”
그때, 한쪽에서 결국 사달이 나고 말았다.
‘아아악!’
다행히 폭발이 일어나기 전에 다른 전사가 나서서 제지해 다른 피해는 없었다. 그리고 보상을 해 주겠다고 약속까지 받았지만, 아트란은 이제 정말 혼이 달아나는 것 같았다.
벌써 이렇게 묶여 있는 것도 나흘째다. 왜 이렇게 연우 녀석이 나타나지 않는지 욕지거리가 나왔다.
근육! 근육! 근육! 어딜 돌아봐도 나는 것은 땀 냄새요, 보이는 것은 우락부락한 근육뿐이니. 이대로 있다가는 근육 지옥에 갇혀서 압사당할 것 같았다. 아니면 그 전에 스트레스로 비명횡사하거나.
“좋은 물건들 가져와 줘서 고마워. 덕분에 간만에 분위기 환기시키는 데 좋았다고.”
무왕은 그런 아트란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껄껄 웃으면서 어깨를 두들겼다.
아트란은 순간 날갯죽지와 한쪽 팔이 뜯겨 나가던 여름여왕의 모습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여기서 무왕이 조금이라도 힘 조절을 잘못하면 자신은 어떻게 되려나. 이제는 오금이 저렸다.
“프레지아에게는 고맙게 잘 쓰겠다고 전해 줘.”
“……!”
아트란은 그렇게 반쯤 혼이 나가 있다가, 갑자기 무왕이 던진 한마디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절대 여기서 나와서는 안 되는 이름이 나왔다. 프레지아.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지만.
무왕은 이상한 장갑 하나를 이리저리 돌려 대면서 자리를 빠져 나가고 있었다.
저만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알 수밖에 없는 것인가. 하지만 ‘그 분’을 아는 사람들도 마스터라고 부르지, 절대 이름을 입에 담지 않았다.
아니, 아는 사람도 없었다. 아트란도 어린 시절 아주 우연한 기회에 알았을 뿐이니까. 그리고 주변인들로부터 머릿속에서 지우라는 경고까지 받았다.
그런데 무왕은 너무 편하게 이름을 불렀다. 마치 오래전의 친구에게 안부를 전해 달라는 것처럼.
둘은 어떤 사이인 걸까. 궁금증이 불쑥 솟아올랐지만 아트란은 차마 무왕을 찾아가 묻지 못했다. 상인으로서의 직감이 그랬다. 괜한 것을 물었다가는 피곤해질 거라는. 그리고 감당 못 할 괜한 호기심은 명줄을 짧게 할 뿐이란 걸, 그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우두커니 서 있는데. 낯익은 얼굴이 시야에 잡혔다. 아니, 정확하게는 낯익은 가면이었다. 악마처럼 시커먼 가면. 아트란에게는 진짜 악마 같은 녀석이었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지만. 그래도 어쩌겠나.
아트란은 돈을 위해서라면 불길 속인 줄 알면서도 섬을 지고 뛰어드는 속물이었다.
“부탁했던 건?”
연우는 별다른 인사도 없이 다짜고짜 용건부터 물었다. 아트란은 며칠 동안 자신을 묶어 둔 녀석에게 욕이라도 한 사발 퍼부으려다가 꾹 참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저쪽에서도 승낙했다.”
연우도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일단 자리부터 옮기지.”
* * *
“말해 두지만. 네가 원하던 건 접선을 주선해 달라는 것이었지, 다른 건 절대 없었어. 그러니 이 이상 대화가 잘 풀리지 않는다고 해서 나에게 따지거나 하지 마.”
아트란은 자리를 옮기고 나서 가장 먼저 선을 그었다. 연우가 의뢰했던 바이 더 테이블과의 접선은 사실 그로서도 성공을 장담하기 어려운 난제였고, 대답을 듣는 데에도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실패했다고 반쯤 포기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대화를 해 보겠다며 긍정적인 답변이 돌아온 것이었다.
아트란은 속으로 적잖게 놀랐다. 바이 더 테이블은 모든 세계와 차원의 비밀적인 사교 모임이자, 거상과 대상인의 집단이었다. 랭커도 되지 못한 한낱 플레이어의 요청은 보통 거절되는 게 맞았다. 그런데 정말 그것이 이뤄졌으니.
아트란은 연우가 했던 말마따나 자신 역시도 기회를 잡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일반 상인으로서, 바이 더 테이블과의 접촉은 아주 큰 영광이자 기회였다.
어떤 방식이 되어도 소문은 퍼지기 마련이었고, 당연히 이를 주선한 상인의 이름값도 저절로 상승하게 되어 있었다.
다만, 걱정되는 게 있다면, 일이 잘 풀리지 않았을 경우에 연우가 어떻게 나오냐는 것인데. 레드 드래곤이 어떻게 몰락을 겪는지 봤던 아트란으로서는 능구렁이 수십 마리를 품고 있을 연우가 두렵기만 했다.
하지만 연우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어서 시작하라며 손사래만 쳤다.
아트란은 입술 사이로 삐져나오려는 한숨을 꾹 누르고, 아공간에서 수정 구슬을 꺼내 바닥에 놓았다.
화아악!
몇 걸음 뒤로 조용히 물러서자, 수정 구슬이 시린 빛을 토해 내면서 잘게 부서졌다. 단 한 번만 만나도 충분하다는 저쪽의 뜻이 담긴 아티팩트. 고운 입자들은 소용돌이를 그리면서 사방으로 확 하고 흩어졌다.
그러자 두 사람을 둘러싼 광경이 뒤바뀌었다.
녹음이 잔뜩 우거진 숲. 홀로그램처럼 현실 위에 덧칠된 환상은 정말 상쾌한 바람을 몰고 오는 것 같았다. 아트란은 멍하니 주변을 훑어봤다.
반면에 연우는 태연했다. 그에겐 제법 익숙했으니까.
‘심상 세계.’
브라함이 악마의 숲에다 사용했던 심상 세계와 비슷한 원리였다. 그래도 수정 구슬 하나로 이렇게 결계를 구축하다니. 역시 바이 더 테이블답다고 해야 할까.
연우가 앉아 있는 바위 주변으로 갖가지 동물들이 모여들었다. 머리 위로 여러 종류의 새들이 날아다니고, 땅에는 사슴과 여우 등이 돌아다녔다.
결코 평범한 짐승들은 아니었다. 전부 하나같이 영험한 기운을 품고 있거나, 비대한 덩치를 지니고 있었다. 영수나 마수들. 11층의 스테이지에서도 보기 힘들 녀석들이 가득했다.
그러다 곧 지반이 울리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나무가 갈라지면서 거대한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척 보기에도 체고가 5미터는 넘을 것 같은 거대한 늑대가 나무 사이로 얼굴을 내밀며 연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이 소복하게 쌓인 것 같은 하얀 털이 유독 인상적인 신수, 백랑(白狼). 그 머리 위에 한 여자가 가부좌를 튼 채로 앉아 있었다.
두근-
『우와. 예쁘게 생겼다.』
『백랑이라. 오랜만에 보는군.』
현자의 돌 속에 깊게 잠들어 있던 니케와 네메시스가 살짝 깨어나 중얼거렸다. 백랑은 4대 신수와도 견줄 수 있을 만한 개체. 환락가에서 만난 적이 있던 아나스타샤의 구미호와 비교해도 절대 뒤지지 않은 격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백랑도 니케와 네메시스의 눈빛을 읽었는지 작게 울음소리를 냈다.
여인은 그런 백랑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타오르는 듯한 적갈색의 단발머리. 하지만 얼굴에 나무를 깎아 만든 탈을 쓰고 있어 생김새를 짐작하기 힘들었다. 특히 깊은 두 눈이 인상적이었다.
뒤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아트란은 자기도 모르게 헛바람을 들이켜고 말았다. 기껏해야 ‘잡초’나, 높게 잡아도 ‘들꽃’ 이 나타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것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사람이 나타났다.
‘프, 프레지아!’
바이 더 테이블의 총수, 마스터가 직접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