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259화 (259/862)

9화. 성장 (9)

순간, 프레지아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무탈로 가려져 있어도, 강렬한 눈빛이 아트란을 직시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아트란은 그 속에 담긴 속내를 읽을 수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마라.

아트란은 입을 꾹 다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꾹 눌렀다. 프레지아는 연우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는 게 틀림없었다.

그녀의 의도와는 별개로, 한편으로는 자꾸 의구심이 들었다. 마스터가 직접 모습을 드러낸 이유가 무엇일까? 그녀는 외부에 직접 나서는 것을 꺼려했다. 그래서 바이 더 테이블보다도 더 비밀리에 가려져 있는 게 바로 그녀였다.

아트란은 일단 상황을 지켜볼 생각으로 가만히 두 사람을 바라봤다. 그래도 여전히 크게 뛰는 심장은 좀처럼 쉽게 가라앉질 않았다. 그래도 겨우겨우 다스리는가 싶었는데.

이번엔 연우가 다시 가슴을 철렁이게 만들었다.

“바이 더 테이블의 마스터가 직접 모습을 드러내실 줄은 몰랐습니다만.”

순간, 아트란의 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연우가 프레지아의 정체를 눈치챌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프레지아도 아주 잠깐 말이 없었다. 눈을 가느다랗게 좁히면서 연우를 가만히 응시했다. 분명히 홀로그램으로 띄운 것인데도 불구하고. 연우는 프레지아가 자신을 낱낱이 파헤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오래전, 무왕과 영매가 자신을 보던 때와 비슷한 시선. 적을 분해하는 시선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프레지아는 백랑의 머리 위에서 훌쩍 뛰어내려 바닥에 착지했다. 푹신한 풀 덕분에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잠시 물러나 있으렴.』

쿠우우-

백랑은 프레지아의 품에 머리를 비비적대며 잔뜩 애교를 부리다가, 천천히 뒷걸음질을 했다. 그리고 적당한 자리에 앉아 이쪽을 주시했다. 연우가 주인에게 해코지를 할까 싶어 잔뜩 경계 어린 표정을 한 채로.

『반가워요. 저희를 뵙고 싶었다고요?』

프레지아는 자세를 바로 갖추면서 입을 열었다. 연우가 자신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에 대해서 궁금할 법도 하건만. 그런 질문은 일절 입에 담지 않았다. 마치 자신은 여기에 온 용무만 해결하면 된다는 듯.

‘이유 정도야 금방 밝혀 낼 자신이 있다는 거겠지. 역시 마스터. 속을 알기가 어려워.’

연우와 똑같이 프레지아도 탈을 쓰고 있어서 표정을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바이 더 테이블에서 이뤄지는 거래는 대개 익명으로 진행될 때가 많았다. 직접적인 만남이 필요할 때에는 서로 가면을 쓰며 철저하게 신원을 숨겼다. 멤버들의 정체를 아는 건, 총수인 프레지아 밖에 없었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프레지아에 대한 정체도 전부 비밀이었다. 알려진 건, 심상 세계에서 벗어나는 일이 크게 없으며, 영수와 마수를 아낀다는 것.

어쩌면 프레지아라는 이름도 가명일지 몰랐다. 그토록 사람들이 궁금해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웬만해서는 모습을 내비치지 않는다는 바이 더 테이블의 총수.

나도 나중에야 그녀의 정체를 알게 되었지만. 처음 만났을 때부터 참 친해지기가 어려운 사람이 다 싶었다. 무슨 농담을 던져도 쌀쌀맞게 대꾸할 뿐이니, 원.

이 얼음공주 같은 아줌마를 녹이려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동생이 바이 더 테이블과 처음 접촉하게 된 것은 한창 아르티야의 이름을 알리고, 슬슬 랭커가 되기 위해서 50층에 도전할 준비를 한창 하고 있던 중이었다.

바이 더 테이블은 아르티야를 후원하고 싶다는 의향을 내비쳤다.

동생은 이것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신비 상인 조합 중에는 유명 클랜을 스폰해서 이름을 알리고, 공략 결과물의 일부를 떼어 가는 경우가 많았다.

아르티야도 당시에 몇 개의 조합으로부터 후원을 받고 있던 중이었기에, 바이 더 테이블도 그런 여러 일반 조합 중 하나라고 여겼었다.

하지만 후원 금액이 다른 조합 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막대한 액수가 되는 순간에서야, 그들은 바이 더 테이블은 절대 그저 그런 곳이 아니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사실 아르티야가 본격적으로 날개를 펼칠 수 있었던 시기도 그 때부터였다.

바이 더 테이블의 후원을 바탕으로, 그동안 가난해서 구하지 못했던 아티팩트를 대량으로 사들 이고 전열을 재정비할 수 있었으니.

그리고 직접 후원을 제안하러 왔던 사람이 총수란 사실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이때, 멤버들은 궁금해했다. 왜 자신들을 왜 이렇게 지원해 주는 걸까? 조합들은 후원하는 만큼 클랜에 요구하는 것도 많아서 이따금 충돌이 벌어질 때가 많았다. 하지만 바이 더 테이블은 전혀 그런 것이 없었다. 오로지 층계 공략에만 집중하라는 듯, 별다른 요구 사항도 없었다.

‘아르티야가 무너질 때까지.’

동생이 허울만 남은 아르티야에 남아 있을 때에도, 바이 더 테이블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들이 후원을 멈춘 건, 동생이 마지막 일전을 벌이기 위해 깊게 고심을 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어쩌면 가장 큰 도움이 필요했던 최후의 순간에 빠진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동생은 이들에게 아주 고마워했다. 연인도 동료도 모두 떠난 마당에, 그래도 마지막까지 곁을 지켜 준 곳이었으니까.

바이 더 테이블의 목적은 마지막까지도 알 수 없었다. 다만, 프레지아가 이따금 나타나는 데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 하나는 확실했다.

왕.

탑을 통치한다는 지배자나, 그에 도전할 만한 그릇이라 판단되는 자들이 그 대상이었다.

프레지아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아홉 왕과 그에 준하는 소수 몇 명뿐.

결국 이곳에 프레지아가 나타났다는 뜻은 단 하나.

‘정우에게 그랬듯이, 나도 높게 평가한다는 뜻이겠지.’

연우는 자신이 이렇게 접근을 하지 않았어도, 언젠가 바이 더 테이블이 먼저 접촉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는 아르티 야처럼 50층쯤에 다다를 무렵일 것이다.

그때까지 여전히 솔로 플레이를 추구한다면 모를까. 클랜을 창설하기로 마음을 먹은 이상, 그들의 손길이 절실히 필요했다.

한편으로는. 동생을 도와준 은인을 이렇게 직접 볼 수 있게 된 것이 고맙기도 했다.

여하튼.

결국 연우가 바이 더 테이블을 이곳으로 부른 이유는 간단했다.

후원.

“그렇습니다.”

『용건을, 물어봐도 될까요?』

“이번에 클랜을 창설할 생각입니다. 들어 보니 바이 더 테이블에서 몇몇 클랜에 후원을 하신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만.”

『그 후원 대상에, 새롭게 만들어질 독식자의 클랜도 포함시켜 달라는 건가요?』

“가능하시다면.”

『저희가 어떤 방식으로 후원 대상을 결정하는지는 알고 계시나요?』

“직접 물색한다고만 들었습니다.”

『맞아요. 당신처럼 우연히 저희를 알고 접촉해 오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대부분…….』

“거절을 하겠죠.”

프레지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이번 제안에 대한 저희 대답도 잘 아시겠군요.』

“그렇습니까? 어쩔 수 없군요. 만나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연우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프레지아의 눈매가 살짝 일그러졌다.

『이게 무슨 행동이죠?』

이번엔 오히려 연우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안을 드렸고, 거절하셨잖습니까? 그렇다면 이야기도 전부 끝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만.”

『…….』

프레지아는 고요한 눈길로 연우를 응시했다. 그녀는 연우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들에게 부탁을 하는 마당에 거절을 당했다면 설득을 하려 하거나, 제안서라도 검토해 달라고 말하는 것이 옳을 텐데. 이런 식으로 튕기는 척한다면 없던 관심이 새삼 생길지 모른다는 조악한 생각을 하는 걸까?

하지만 프레지아가 조사했던 연우란 사람은 절대 그런 단순한 사람이 아니었다.

세간에 알려진 독식자의 이미지는 포악하고 악랄해서, 모든 플레이어들을 짓누르며 자신의 이득을 취하는 데에만 혈안이 된 승냥이로 묘사된다.

하지만 프레지아는 그것을 전혀 다르게 받아들였다.

나쁘게 말하면 음흉했고, 좋게 말하면 때를 기다릴 줄 알았다. 적절한 타이밍이 찾아오면 눈 깜짝할 새에 먹어 치우는 결단력이 있었다. 치고 빠지는 시기를 정확하게 알며, 판단력이 깊었다.

또 그러면서도 무서운 성장세와 외뿔부족이라는 배경까지 가지고 있으니.

절대 이런 어린애 같은 발상을 지니지 않았을 거란 게, 그녀의 판단이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확인하기 위해 직접 온 이유도 있기에, 결국 프레지아는 한 발 물러서기로 마음먹었다.

『그래도 짧게 이야기는 나눌 수 있겠죠. 그렇지 않나요?』

프레지아가 질문을 던졌고, 연우는 돌아서는 척하다가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여전히 가면 너머의 눈빛은 그녀의 포커페이스만큼이나 짐작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속내는 간단했다.

되면 좋고, 안 되면 어쩔 수 없고. 연우가 바란 건, 바이 더 테이블과의 동등한 계약이었다. 아무리 후원을 바란다고 해도, 거기에 휘둘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도 받은 만큼 나중에 얼마든지 갚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바이 더 테이블의 총수라면. 자신이 여태 걸어온 길이나, 걸어갈 길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왕을 찾는 사람이라면. 자신을 놓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예상은 들어맞았다.

‘왕 급의 인사들에게서 뭔가를 찾는 것 같다고 했었지. 정우의 예상이 맞았었어.’

연우는 프레지아의 눈을 응시했다.

『몇 가지만 질문하죠.』

“그러십시오.”

『여름여왕의 창고가 넘어갔다고 알고 있는데. 그 많은 돈들을 두고 왜 굳이 저희의 후원을 바라는 건가요?』

연우는 속으로 가볍게 혀를 찼다. 인트레니안을 보상으로 받았다는 사실은 판트 남매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괜히 새어 나가서 좋을 게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여름여왕의 유산. 보물을 사랑한다는 용종이 남긴 창고라면 분명히 천문학적인 액수의 돈이 있을 테니, 사람들의 이목도 끌기 쉬웠다.

하지만 프레지아는 그것을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묻고 있었다. 그만큼 바이 더 테이블의 정보력이 대단하단 뜻이겠지.

연우도 굳이 숨길 생각이 없었기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없습니다.”

전혀 뜻밖의 말. 프레지아의 눈동자가 살짝 경직되었다.

『……무슨.』

“이미 전부 다 쓰고 없습니다.”

『……!』

살짝 크게 떴던 눈이 이번에는 조금 더 커졌다. 프레지아가 처음으로 보인 감정 변화였다. 그만큼 연우가 던진 말은 충격적이었다. 여름여왕이 남긴 유산을 벌써 다 썼다고? 1년도 안 된 사이에?

“보물 외에도, 다른 인트레니안에 있던 장비들도 필요한 것만 제외하고서 전부 내다 팔았고, 그 돈까지 모두 썼습니다.”

뒤에서 헛바람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프레지아가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트란이 ‘미친놈!’이라고 작게 중얼거리면서 몸을 파르르 떨고 있었다.

여태 장비들을 몰래 암시장에다 대신 팔아 줬던 게 그였기에, 연우가 얼마나 거액의 돈을 지니고 있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그 돈만 따져도 웬만한 거대 클랜의 몇 년 운영 예산을 훨씬 능가하는 수준이었을 것이다. 그런 것을 어디다 썼는지. 도무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하지만 남들에게는 많을 돈이, 연우에게는 턱없이 부족했다.

던전을 만들고, 외우주를 복구시키고, 대규모 실험실을 정비하고, 개인 공방을 차리려면. 아무리 돈을 쓰고 또 써도 계속 모자랐다.

『호호. 호!』

프레지아는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트란은 다시 한 번 더 놀랐다. 총수가 웃는 모습은 그도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그러다 웃음은 뚝 멈췄다. 눈빛이 뱀처럼 간교해졌다. 비틀린 입술이 벌어졌다.

『삼키는 욕심만큼이나, 삼키려는 욕심도 아주 크군요.』

프레지아는 바이 더 테이블로서도 쉽게 보기 힘든 금액을 아무렇게나 써 버린 연우를 보면서 어이가 없으면서도 감탄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연우가 뭘 노리는지 보았다. 탑. 연우는 이 세계를 삼키려 하고 있었다. 욕심이 아주 많았다. 소모할 줄 모르는 욕심은 탐욕에서 그치지만, 소모를 할 줄 아는 욕심은 야망이 되는 법이었다. 그리고 프레지아는 그런 욕심이 너무 좋았다.

아직 한낱 애송이인 주제에. 불나방이 될지, 아니면 거미가 될지는 몰랐지만. 무엇이 되었든 간에 뭔가 하나는 확실하게 될 것 같았다.

『필요한 액수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어차피 곧 마를 테니.”

『우물물 쓰듯이 하겠다는 거로군요.』

프레지아는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비웃음으로도, 평범한 웃음으로도 보일 수 있는 애매한 웃음이었다.

『뭘 하려는 건지는 안 물어봐도 뻔하고. 클랜원은? 뽑았나요?』

“생각해 둔 사람이 몇 있습니다.”

『얕은 자들은 아닐 테지요?』

“그런 이들을 뽑을 생각이었다면, 여름여왕의 유산으로도 충분했을 겁니다.”

『좋아요. 그런 자세라면. 후원하죠.』

프레지아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한 건 아트란과 상의토록 하시고요.』

갑작스레 지목된 아트란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프레지아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왜 그런가요? 부담스러우신가요? 그렇다면 딱히 말리지는 않겠지만요.』

아트란은 재빨리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아, 아닙니다!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프레지아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에게 있어 안 되는 건 어디에도 없었다. 안 된다면 되게 만드는 게 그녀였다.

연우는 그런 그녀를 보면서 속으로 가볍게 혀를 찼다.

겉으로는 차분함을 가장하고 있지만. 프레지아는 상상 이상으로 통이 큰 장사꾼이었다. 화통함도 섞여 있었다.

자신이 뭘 필요로 하는지, 후원 규모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그냥 아트란에게 모든 것을 일임해 버렸다. 어떤 규모가 되었건 간에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기도 했다.

저만한 위치에 오른 사람들은 누구나 다 저런 걸까. 그릇을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저런 사람을 두고 떠오르는 단어가 딱 하나 있었다.

왕.

프레지아는 왕과 왕자(王者)의 자질을 가진 자만 상대한다. 어찌면 그것은 자신이 그런 존재이기에, 자신을 상대하려면 최소한 그만한 자격을 갖춰야 한다는 자신감의 발로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연우는 그녀로부터 인정받았다는 사실이 재미있었다. 최소한 동생에 밀리는 형은 아니게 된 셈이었으니.

쏴아아-

그때. 프레지아의 형상을 갖추고 있던 빛의 입자가 흩어지기 시작했다. 푸르렀던 녹음도 다시 엷어졌다.

『시간이 다 되었군요. 아, 떠나기 전에 한마디는 하고 가죠.』

프레지아는 이지적인 눈빛으로 담담하게 말했다.

『저는 전형적인 장사꾼이자 투자자예요. 절대 손해 보는 장사는 하지 않죠. 그리고 제 돈은 그만큼 비싸구요. 그러니 원금 상환은 커녕 이자도 제때 지불할 수 없을 거라고 판단이 든다면. 그땐.』

프레지아는 굳이 뒷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말을 하지 않아도 잘 알아서 판단하란 뜻이었다. 그녀가 가진 재력과 인맥을 알기 때문에, 연우도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백랑이 다시 일어섰다. 프레지아는 백랑의 머리 위로 훌쩍 뛰어 흔들리는 머리를 손으로 쓸었다. 그렇게 왔던 방향으로 백랑이 돌아서서 가려는데.

연우가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율은, 잘 지내고 있습니까?”

『율?』

백랑의 걸음이 살짝 멈췄다. 프레지아는 녹음 속으로 사라지기 직전,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다가 눈을 살짝 빛냈다.

『아. 수인족, 그 꼬마아이가 그런 아명을 지니고 있다고 했었지. 잘 지내고 있다마다요. 그럼 그 아이를 화원으로 보낸 것이?』

프레지아는 연우를 묘한 눈빛으로 봤다. 그러다 피식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후원을 결정하기도 전에, 후원자로서 자격이 되는지를 시험당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군요. 하지만 앞으로는 되도록 이런 짓을 하지 않으셨으면 해요. 괜히 오해를 쌓을 일이 없도록.』

프레지아는 그 말을 끝으로, 모든 통신을 끊었다.

아트란은 멍하게 서 있다가 황급히 연우를 돌아봤다. 가만히 있다가 바이 더 테이블의 ‘잡초’가 되고 말았다. 신비 상인으로서 감격할 일이었지만, 그는 아직도 어안이 벙벙했다. 궁금한 것도 산더미처럼 가득했다.

“율? 율은 또 누구야?”

녀석은 묻고 싶은 게 많은 눈치였지만.

연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에 가면 아래로 피식 웃음을 흘렸다.

튜토리얼 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하기만 하던 꼬마 아이. 잔뜩 겁먹은 주제에 가시만 잔뜩 세웠던 녀석. 그러면서도 마지막에는 고맙다고 형이라 부르던 모습이 아직도 선명했다.

어떻게 지내나 궁금했었는데. 이렇게라도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생각보다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 * *

98층.

여태껏 플레이어 중 아무도 접근하지 못한 신비의 대지. 하지만 그곳은 신과 악마들이 살아가는 터전이었다.

크게는 두 개의 진영으로 분리되어 있지만, 현미경으로 자세히 들여다보면 수많은 사회로 분리되어 있어 언제든 폭발할 수 있을 화약고와 같은 곳.

그중 제법 큰 규모를 자랑하는 올림포스에서.

헤르메스는 자신의 아름다운 배다른 누이, 아테나를 만나고 있었다. 하지만 서글서글한 표정을 한 그와 다르게 아테나는 살짝 경직된 표정으로 말했다.

“결국 우리의 못난 숙부가 결심을 내린 듯하다. 그 아이를 죽이기로.”

짜증이 가득 섞인 목소리. 그 속에는 짙은 환멸감이 섞여 있었다. 숙부이자 백부인 존재, 포세이돈이 저지르려는 짓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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