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260화 (260/862)

10화. 성장 (10)

-신을 능멸한 그 플레이어에게, 신벌을 내릴 것이다.

오늘 아침, 갑자기 포세이돈이 휘하 신들에게 내렸다는 명령.

그 소식은 올림포스 곳곳에 눈과 귀를 붙여 뒀던 아테나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포세이돈이 말한 신벌의 대상이 누군지는 불에 보듯 뻔했다.

차연우. 최근 아테나가 예의 주시하면서 지켜보고 있는 존재였다. 그런 아이에게 해코지를 한다고 하니, 그녀가 잔뜩 심통이 난 얼굴로 헤르메스를 찾아오는 것도 당연했다.

피식.

헤르메스는 그런 누이를 보면서 자기도 모르게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모습에 심기가 거슬렸던 것일까.

아테나는 한쪽 눈썹 끝을 찡그리면서 헤르메스를 노려봤다.

“무엇이 웃긴 거지?”

“아니. 여태 살아오면서 누이가 그렇게 감정적으로 동요하는 건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서.”

아테나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입을 꾹 다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헤르메스는 그런 모습이 너무 웃기기만 했다.

사실 연우와 접점이 많은 그와 다르게, 아테나는 공물로 바쳤던 아이기스를 제외하면 접점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도 아테나는 연우를 각별하게 아꼈다. 마치 자신이 낳은 아이처럼. 아니, 자신이 품은 사도처럼.

물론, 그러는 이유를 잘 알고 있어서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전장의 여신으로서 악마들을 공포에 떨게 만든다는 아테나가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게 참 신기했다.

다른 형제들이 보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아니, 그렇게 멀리 갈 것도 없이 아버지가 이런 표정을 보시면? 물론, 아버지는 깊은 잠에 빠져 전혀 바깥 상황을 모르고 계시겠지만.

‘그리고 덕분에 우리가 이렇게 활개를 칠 수도 있는 거고.’

헤르메스는 생각을 정리하면서 말했다.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 누이. 우린 누구보다 그 아이를 잘 알고 있잖아?”

헤르메스는 살짝 눈웃음을 폈다.

“아가레스를 걸레짝으로 만든 아이라고. 머릿속에 내가 키우는 보아뱀 같은 능구렁이를 몇 마리는 키우는 녀석이지. 우리는 그냥 가만히 앉아 팝콘이나 뜯으면서 숙부가 된통 당하는 것만 구경하면 되는 거야. 손길이 필요하다 싶으면 그때 도와줘도 되고.”

“……넌 참 속 편해서 좋겠구나.”

아테나는 코웃음을 치면서 몸을 돌려 헤르메스의 거처를 떠났다. 헤르메스는 쓰게 웃으면서 누이가 사라진 자리를 바라봤다.

“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누이. 우리가 여기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그건 사실 숙부도 크게 다르진 않을 테고.”

빌어먹을 시스템. 그리고 죽여도 시원찮을 올포원.

헤르메스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고개를 돌려 눈을 감았다. 그러자 의식이 화신체를 떠나 저 위로 연결된 본체의 거대 의식으로 잠기면서, 새로운 시선이 열렸다.

그 속에. 천천히 어디론가 이동하고 있는 연우가 보였다.

헤르메스는 지금 이 시각, 이렇게 자신처럼 ‘시선’을 이용해 연우를 관찰하고 있을 신과 악마가 몇이나 될까, 순간 궁금해졌다.

* * *

“이것이면 되려나.”

대장로는 세필을 휘적거리다가 조용히 벼루에 내려놓았다. 너무 오랫동안 책자를 뚫어져라 봐서 그런지 눈가가 피로했다. 엄지와 검지로 눈덩이를 문질렀지만 피로가 쉽게 사라지질 않았다.

사실 이 피로는 육체적 피로는 아니었다. 그쯤 되면 내공을 한 바퀴 돌리기만 해도 활력이 돋아나는 법이니까. 하지만 정신적 피로만큼은 내공으로도 어떻게 감당할 수가 없었다.

이게 다 생각에도 없던 무공서를 집필하느라 생긴 결과였다.

〈혈뢰무서〉. 대장로가 말년에 터득한 뇌정권의 비기, 혈뢰를 구결로 풀어낸 비급.

판트에게 그렇게 야멸찬 소리를 해 댔었지만. 결국 대장로는 녀석을 위해서 혈뢰를 비급으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다만, 정리가 그렇게 손쉬운 작업은 아니었다. 대장로도 어렴풋이 개념으로만 잡아 풀어내는 무형강기이기 때문에,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하는지 난감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반대로 혹하는 작업이기도 했다.

대장로는 젊었을 땐 무공에 빠져서, 나이를 먹었을 땐 공부에 미쳐서 혼인을 할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제자도 귀찮다면서 두지 않아 이렇다 할 후인이 없었다.

나이를 먹으면 누구나 죽기 전에 자신의 흔적을 세상에 남겨 두고 싶어 하는 법이라, 대장로도 슬슬 후인 양성을 생각하고 있던 차였다.

그런데 때마침 판트가 가르쳐 달라며 징징거렸다. 그래도 손쉽게 내어 줄 수는 없는 노릇이라 이래저래 자존심을 건드렸었는데. 녀석은 그것이 오히려 자극이 되었던지 폐관 수련에 들어가 여태 나오질 않고 있었다.

자질에 끈기까지 더해졌단 뜻이었다. 정확한 건 면벽동에서 나와 봐야 알겠지만. 이만하면 합격점이었다.

그래서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이게 구결로 풀어내려고 하니 생각보다 잘 풀리지 않았다. 머릿속에 어렴풋하게 잡혀 있는 개념을 구체적으로 서술하는 작업이 아주 어렵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그래도 몇 번 생각을 정리하면서 풀어내다 보니 오히려 머릿속이 선명해지는 느낌이었고, 집필이 마무리될 즈음에는 혈뢰의 성취도도 훨씬 깊어져 있었다.

이제는 이것을 어떻게 판트에게 건네줄 것이냐가 문젠데.

‘어떤 반응을 보일지 눈에 빤히 보여서 그 꼴이 참 보기 싫단 말이지.’

일족이라면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지만, 무왕의 젊은 시절을 가장 빼다 박은 사람이 판트였다.

아마 이것을 받으면 좋아서 이리저리 난리를 칠 테지. 대장로는 무왕 때문에 가장 많이 고생했던 사람이기도 했다.

그래서 어떻게 조용히 넘겨줄 방법이 없는가 싶어 잠깐 고민에 잠기는데.

“판트가 보면 좋아하겠군요.”

대장로는 갑작스런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눈앞에 연우가 서 있었다.

아무리 생각에 잠겨 있었다고 해도 누가 오는 걸 느끼지 못했다고? 대장로는 눈을 살짝 크게 뜨면서 말했다.

“음? 언제 왔나?”

“밖에서 몇 번 대장로 님을 불렀습니다만. 기척은 있어도 아무런 답변도 없으셔서요. 혹시나 하는 생각에 들어왔습니다. 무례였다면 죄송합니다.”

“아닐세. 다 같은 식구끼리 무슨. 그래도 참 지척에 있는데도 오랜만에 보는 것 같군.”

대장로는 묘한 눈길로 연우를 위아래로 훑었다.

사실 연우는 갈리어드와의 수련이 끝난 뒤에, 거의 밖으로 나오질 않고 있었다.

하지만 무왕도, 대장로도, 다른 일족들도 그런 연우를 말린다거나, 굳이 찾아가 안부를 묻는다거나 하지 않았다.

뭔가에 매달려 몇 년이 지나도록 자신의 집에서 나오지 않는 경우가 허다한 이들이 외뿔부족이다 보니, 연우도 뭔가 얻은 게 있어 그것을 가다듬느라고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구나 하고 생각할 뿐이었다.

오히려 이렇게 나온 것이 빠르다 싶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동안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던지, 연우는 이전과 많은 점이 달라져 있었다.

탄탄하고, 묵직했다.

이전에는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사나운 기세가 잔뜩 풍겼다면. 지금은 딱 자리가 잡혀 있어 오히려 고요하다 싶을 정도였다.

심·기·체. 무공에 있어 가장 중요하다는 3박자가 딱 알맞은 균형점을 찾은 것이다.

‘삼화취정. 성취도 참 빠르군. 이제 자신의 길을 확실하게 잡은 모양이야. 더 이상 다른 것을 추가해도 흐트러질 일은 없겠어.’

다만, 그런 생각도 들었다. 영육의 조화가 너무 잘 이뤄진 까닭에 이 이상 올라가려면 상당히 힘들겠다고.

그래도 강기를 쓸 수 있는 명인급에 한 발을 들였다는 것이 기특했다.

“한데, 여긴 웬일로 온 건가? 족장을 찾으려는 거면 아마 집무실에 있을 텐데.”

“스승님은 이미 뵙고 인사드렸습니다.”

“그럼?”

“혹시 에도라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폐관 수련에 매달리는 판트와 다르게 에도라는 한창 층계를 오르고 있는 중이었다.

몇 달 전에 30층을 넘었다는 이야기만 어렴풋이 들었을 뿐, 그 뒤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고 있었다.

그동안 통신 아티팩트의 내구도가 다해 버린 탓이었다. 새롭게 마련하려고 해도 수련에 집중하느라 필요를 느끼지 못해서 미뤄 뒀었다.

“며칠 전에 잠깐 들렸었는데. 아마 지금쯤 36층에 있을 걸세.”

연우의 눈이 살짝 빛났다.

“꽤 많이 올라갔군요.”

“실력도 꽤 많이 달라졌어. 양도가 자리를 잡고 있었지.”

연우는 희미하게 웃었다. 양도의 다른 반쪽, 음검. 이것은 언제쯤 열 수 있을까.

“그런데 갑자기 에도라는 왜? 원한다면 연락을 넣을 수도 있긴 하네만.”

연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서두를 건 없고, 만나는 거야 올라가서 만나도 충분하니까요.”

“오. 그럼 혹시, 자네……?”

대장로는 어렴풋이 연우가 뭘 하려는지 깨닫고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연우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제 다시 본격적으로 달리려고 합니다.”

* * *

연우는 대장로를 끝으로 외뿔부족과의 인사를 모두 끝냈다. 바이 더 테이블과의 후원 계약이 맺어진 뒤, 준비는 빠른 속도로 진행되어 클랜 창설을 위해 필요한 건 모두 끝난 상태였다.

이젠 마지막만 남아 있었다.

‘여름여왕.’

연우는 대장로의 거처를 나와 부의 던전으로 향했다.

그동안 던전도 많은 점이 달라져, 입구부터 처음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처척!

단단한 중갑옷으로 무장한 스켈레톤 워리어가 한쪽 무릎을 꿇으면서 고개를 숙였다. 주인의 주인. 지고한 존재에게 바치는 예의였다.

그 뒤로 통로를 따라 바쁘게 움직이던 여러 언데드들이 각자 하던 일을 멈추고, 벽으로 물러나서 고개를 숙였다. 마치 왕을 영접하는 백성들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따그닥, 따그닥-

곧 부가 이상한 유령마에 올라탄 스켈레톤 나이트를 잔뜩 대동한 채로 나타났다.

처음에 만들어졌을 때만 해도, 그저 그런 언데드만 가득했던 것을 떠올려 본다면 대단한 변화였다. 연우가 속으로 적잖게 놀랄 정도였다. 그동안 던전은 부에게만 일임하고, 여태 관심도 두지 않고 있었으니.

스켈레톤 나이트들이 착용하고 있는 무장도 하나같이 번쩍번쩍 했다. 여름여왕에게서 빼앗은 무기 창고에서 꺼낸 것들이었다.

「오셨. 습니까?」

부가 멈춰 서서 연우 앞에 고개를 숙이자, 스켈레톤 나이트들도 일제히 유령마에서 내려서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자세히 보니 스켈레톤 나이트 뒤에는 메이지나 샤먼, 랜서, 솔저 같은 다른 병사들도 길게 쭉 늘어서 있었다.

거기다 골렘이며 좀비, 구울, 밴시, 스펙터까지. 던전 곳곳에 흩어졌던 언데드들을 전부 끌고 나오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시야가 닿는 저 끝까지, 온통 언데드들로 꽉 차 장관을 이뤘다.

하지만 연우에게는 장관이 아니라 가관이었다.

“……이게 다 뭐지?”

「주인. 님께서. 오시는 길에. 당 연. 한. 일입니. 다.」

“치워. 부담스러우니까. 평소대로 해.”

「분부를. 받듭. 니다.」

부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허공에다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언데드들은 전부 고정된 자세를 풀고 각자의 위치로 흩어졌다.

연우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부가 이성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할 수 있는 일의 범위도 넓어져서 여러모로 편리하긴 했지만. 반면에 충성심도 더 심해져서 보는 연우가 다 부끄러워질 정도로 오버액션을 취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렇다고 이것을 나쁘다고 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알게 모르게 은근히 떠받쳐지는 재미도 있어서 뭐라고 말하기가 난감했다. 연우는 그저 적당한 선까지만 해 줬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

“작업은?”

“중간 단계에 다다랐습니다.”

“가지.”

작업. 본 드래곤을 만드는 일을 말하는 것이다.

연우는 부와 함께 던전의 가장 깊은 내심부로 들어갔다.

인트레니안을 3개 직렬로 이어서 만들어진 던전은 입구에서부터 크게 외심부, 중심부, 내심부의, 총 3개 구획으로 나뉘어 있었다.

깊게 들어갈수록 언데드의 계급도 같이 올라갔고, 간간이 소환수로 보이는 마수(魔獸)나 요수(妖獸)가 돌아다니는 것도 볼 수 있었다.

던전은 전체적으로 복잡한 미로의 형태를 뗬다.

통로가 거미줄처럼 얽혀 있어서 자칫 길을 잘못 들면 한곳을 뱅글뱅글 돌 가능성이 컸고, 곳곳에 마법진이나 트랩이 설치되어 있어서 외부로부터의 방비에 특화가 되어 있었다.

얼마나 부가 던전을 만드는 데 심혈을 기울였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러다 내심부에 도착했을 때.

여태껏 지나온 좁고 긴 통로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거대한 공동이 모습을 드러냈다.

기존에 주어진 아공간 너비를 마법으로 더 넓히기라도 했는지, 천장은 수십 미터나 될 정도로 높고 벽은 끝이 종 잡히지 않을 정도로 넓었다.

그리고 그곳.

시린 빛을 토해 내는 거대 마법진 위에 여름여왕의 사체가 누워 있었다. 다만, 사체는 처음과 다르게 색이 많이 탁하게 변해 있었다. 원래는 루비를 깎은 것처럼 붉었지만, 지금은 온통 칠흑색으로 빛났다.

그동안 사체를 숙성시키기 위해 마왕독을 비롯한 각종 강화 용액을 투여하면서 생긴 변화였다.

덜그럭, 덜그럭!

딱딱-

그 옆에는 여러 스켈레톤들이 턱을 부딪치면서 날이 잔뜩 굽어 예리한 칼을 든 채로 사체를 천천히 해체하고 있었다.

워낙에 비늘이 단단한 경도를 자랑하는 탓에, 가죽과 살점, 뼈를 가르는 작업은 아주 조심스럽게 이뤄졌다.

다행이라면 스켈레톤들은 따로 자아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명령을 받은 대로만 행동해서 실수란 있을 수 없었고, 이것을 위에서 진두지휘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점이었다.

『발골(發骨)에 조심해. 조금이라도 생채기가 나면 안 되니까. 분리한 것들은 따로 분류시키고.』

레베카는 사체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면서 간만에 활기찬 모습을 보였다. 사냥꾼 출신답게, 이런 귀한 경험을 허투루 날리지 않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스켈레톤이 처리하지 못하는 부분에서는 샤논과 한령이 옆에서 나섰다.

한쪽에서는 연우의 부탁을 받아 던전을 자주 출입하던 헤노바가 스켈레톤 군단을 이끌고 뭔가를 작업하고 있었다.

해체 작업이 가시화되면서 그의 손길이 가장 필요했던 것이다. 그의 옆에는 브라함이 자리를 잡고 앉아 도와주고 있었다. 여전히 아난타의 병증이 완치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조금씩 차도가 보여서 그도 조금씩 외부 일을 보고 있는 중이었다.

연우는 그들을 지나쳐 내심부에서도 가장 깊숙한 장소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여름여왕이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녀는 오랫동안 신진철에 단단히 묶여서 자신의 육체가 낱낱이 해체되는 광경을 멍하니 지켜봐야만 했다.

얼굴은 초췌해져 있었고, 영력도 많이 쇠해진 상태였다.

절망에 단단히 절여진 것이다.

언제나 높은 곳에서 꼿꼿한 태도를 고수하며 세상을 오시할 것 같던 그녀였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그녀는 더 철저하게 망가져 있었다. 높은 곳에서 떨어진 만큼 추락하는 깊이도 깊었던 것이다.

“이스메니오스.”

연우는 그런 여름여왕의 옆으로 다가갔다.

여름여왕은 멍하니 자신의 사체를 바라보다, 천천히 연우를 올려다봤다.

곧 흐리멍덩하던 눈동자에 이지가 돌아왔다. 아무리 망가졌어도, 여름여왕은 여름여왕. 완전히 자아를 잃을 정도는 아니었다.

「이제 때가 되기라도 했나 보지?」

여름여왕은 한쪽 입술을 말아 올렸다. 비웃음이라기보다는 처연함에 가까운 웃음이었다. 이제 자신의 마지막이 어떻게 될 건지 눈치챈 것 같았다.

연우는 천천히 가면을 벗었다.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그래.”

「만족스러웠나?」

“당연하지.”

연우는 희미하게 웃었다. 가라앉은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세로 동공이 열리면서 먹이를 노리는 뱀처럼 요사하게 번들거렸다.

「하하! 하하하! 그래. 복수. 복수를 노린 것이라면. 정말 잘 해냈어. 해냈다마다. 나를 이런 꼴로 만든 자는…… 그래. 올포원. 그 작자밖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올포원은 원래 그런 놈이었고, 너는 한낱 미물 따위가 날 이렇게 만들었다는 점이 대단하지.」

여름여왕은 크게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지난 수천 년 동안. 그녀는 언제나 포식자였다. 그 위치가 바뀐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 연우 앞에서 그녀는 피식자가 되어 있었다.

그렇구나. 이런 기분이었구나. 여름여왕은 난생처음 맛보는 기분에 실실 웃음만 새어 나왔다. 등골이 찌릿했다. 가슴이 서늘했다. 낯선 기분이 영혼을 관통했다. 두렵다. 그녀는 처음으로 이런 감정을 느꼈다.

하지만 이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보통 자신 앞에 놓인 먹잇감들은 덜덜 떨거나, 얼어붙거나, 질질 짜거나. 그러던데. 나도 그래야 하나? 하지만 이상하게 아무런 표현도 되지 않았다. 세상의 진리를 추구하며 많은 것을 안다고 자부했는데.

마지막 순간에 모르는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말았다.

그만큼 두려움은 그녀에게 낯설었다.

올포원과 싸울 때에도 열등감만 느꼈을 뿐, 두려웠던 적은 없었다. 차정우가 계속 꿈에서 깨어나 방해를 해 댔어도 짜증만 났을 뿐이었다. 드래곤 하트가 망가지며 죽음이 눈앞에 닥쳤을 때에도 초조함만 들었다.

이처럼 낯선 감정 앞에서. 여름여왕은 실없는 웃음만 나왔다. 스스로에 대한 자조였고, 여기까지 닥친 냉소였다.

드는 생각은 단 하나였다.

아아, 정말 사라지는구나. 나라는 존재가. 여름여왕이. 이스메니오스가! 마지막 용이! 마지막의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그녀의 가슴에 강렬하게 와 닿았다.

여름여왕은 두 눈을 감았다. 이미 절망과 포기는 납득한 지 오래였다. 그렇다면 마지막이라도 의연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 두려움은.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녀석이 그런 사념을 읽었든 읽지 않았든 간에.

그리고 그 순간.

‘아.’

여름여왕은 차정우가 언제나 말하던 ‘망령’이 무엇인지 뒤늦게 깨닫고 말았다.

용종으로서 가져야 할 욕심. 언제나 최고가 되어야 한다는 부담감. 그래서 자신에게 호의를 보이면서도 자리를 위협하던 차정우를 쳤던 것인데…… 그것이 바로 망령이었다.

언제나 외로움에 몸부림쳐야 할 것이라던 저주는. 모든 압박에서 해방된 지금에야 겨우 풀리고 만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 네가 그런 속 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그때가 된다면 여태 보지 못했던 새로운 것들을 볼 수 있을 거야. 그땐 내가 옆에서 도와줄 테니까. 언제든 말만 해, 이스메니오스.

어쩌면.

차정우가 말해 주려던 새로운 것들은.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퍼석-

연우는 여름여왕의 머리 위에 손을 얹으면서 바토리의 흡혈검을 전개했다.

마치 파도에 모래성이 허물어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이제 약해질 대로 약해졌던 여름여왕의 영혼은 잘게 부서지면서 연우에게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화아악!

연우의 몸 위로 붉은빛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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